|
아비달마장현종론 제38권
9. 변정품(辯定品)①
9.1. 여러 형태의 선정(禪定)[2]
4) 정려지(支)에 관한 제 문제
① 4정려의 정려지28)
이상에서와 같이 논설한 8등지(等至) 중에서 정려(靜慮)는 지분[支, aṅga]을 포섭하지만, 온갖 무색정은 자분을 포섭하지 않으니, 모든 무색정은 지극히 적정(寂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가사(瑜伽師)가 즐거이 선품(善品)[의 선정]을 닦을 때, 만약 광대한 공덕취(聚) 중에서라면 지분을 별도로 설정하여 정근(精勤)하고 수습(修習)할 것이지만, 모든 무색정 중에서는 적정이 증가하기 때문에 심ㆍ심소법이 어둡고 저열하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지분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무색정의] 경지 중에서는 등지(等持, 삼마지 즉 심일경성)만이 수승한데, [선정과 지혜 중] 어느 한쪽만이 수승한 것에는 지분의 명칭을 설정할 수 없으니, 요컨대 다수의 법이 증가할 때 비로소 지분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로지 정려에만 지분을 설정할 수 있으니, 선정[定]과 지혜[慧]가 균등하게 작용하여 다수의 법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근분정에도 역시 지분을 설정하지 않으니, 색계의 근분정 중에는 오로지 지혜만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온갖 [선정의] 경지 중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심소가 남김없이 단멸(斷滅)되었다면, 바야흐로 이러한 [선정의] 경지에는 지분을 설정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지분을 설정하지 않는다.
즉 초정려 중에서는 우수(憂受)와 고수(苦受)가 단멸되었고,
제2정려 중에서는 심(尋)과 사(伺)가 남김없이 [끊어졌으며],
제3정려에서는 희수(喜受)를 멸하였고,
제4정려에서는 낙수(樂受)를 끊었지만,
무색정의 경지 중에서는 비록 그 모두가 점차적으로 감소할지라도 각각의 경지에 따라 남김없이 단멸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으로는 또 다른 의문을 해소[遣]할 수 없으니,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오로지 이러한 [정려]에만 바야흐로 지분을 설정하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해석이 보다 뛰어나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4정려에는 각기 몇 가지의 지분이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에는 다섯 가지의 지분이 있으니
심(尋)ㆍ사(伺)ㆍ희(喜)ㆍ낙(樂)ㆍ정(定)이 그것이며
제2정려에는 네 가지의 지분이 있으니
내등정과 희ㆍ낙ㆍ정이 그것이다.
제3정려에는 다섯 지분을 갖추고 있으니
사(捨)ㆍ염(念)ㆍ혜ㆍ낙ㆍ정이 바로 그것이며
제4정려에는 네 가지의 지분이 있으니
‘사’와 ‘염’과 중(中)의 수(受)와 ‘정’이 그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정(淨)과 무루(無漏)의 4정려 중에만 [정려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초정려는 다섯 가지 지분을 갖추고 있으니,
첫째는 심(尋)이며,
둘째는 사(伺)이며,
셋째는 희(喜)이며,
넷째는 낙(樂)이며,
다섯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여기서 심일경성이란 바로 ‘정(定)’의 이명(異名)으로, 정(samāpatti)과 등지(等持,samādhi)는 명칭은 달라도 체성은 동일하다.29)
따라서 ‘정’이라고 하면, 이는 바로 뛰어난 등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그것을 심일경성으로 설하였다.
제2정려에는 오로지 네 가지 지분만이 존재할 뿐이니,
첫째는 내등정(內等淨)이며,30)
둘째는 ‘희’이며,
셋째는 ‘낙’이며,
넷째는 심일경성이다.
제3정려에는 다섯 가지 지분을 갖추고 있으니,
첫째는 행사(行捨)이며,31)
둘째는 정념(正念)이며,
셋째는 정혜(正慧)이며,
넷째는 수락(受樂)이며,32)
다섯째는 심일경성이다.
제4정려에는 오로지 네 가지 지분만이 존재할 뿐이니,
첫째는 행사청정(行捨淸淨)이며,
둘째는 염청정(念淸淨)이며,
셋째는 비고락수(非苦樂受)이며,
넷째는 심일경성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초정려와 제3정려는 각기 다섯 가지 지분을 갖추고 있는데, 제2정려와 제4정려에는 오로지 네 가지 지분만이 존재할 뿐인가?
각각의 정려는 오로지 그러한 정도의 지분을 설정하는 것만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욕계에는 온갖 악법과 미묘한 5욕락(欲樂)이 많기 때문에 끊기 어렵고 버리기 어려우며,
제2정려에는 동지(動地)의 기쁨[喜]이 존재하는데,33) 그 상이 동요하고 용솟음치는 것[動涌]하는 것이어서 기쁨 중의 지극한 것일 뿐더러 5부(部)의 애탐을 인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버리기 어렵고 끊기 어렵다.
곧 그러한 법을 대치하기 위해 초정려와 제3정려는 각기 다섯 가지 지분을 갖추고 있는 것이며,
초정려와 제3정려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밖의 정려(제2정려와 제4정려)에는 각기 네 가지 지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혹은 초등지(超等至)의 법에 수순하기 위해서이다.34)
이를테면 최초로 초등지를 일으킬 때 이류(異類)로는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동류(同類)로는 들어가기가 쉽다.
그리하여 초등지를 처음으로 일으키는 단계에서는 혹 어떤 경우 초정려로부터 제3정려에 들어가며,
혹 어떤 경우 제2정려로부터 제4정려에 들어가기 때문에 제2정려와 제4정려에는 각기 오로지 네 가지 지분만이 존재할 뿐이며,
초정려와 제3정려는 각기 다섯 가지 지분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일어나는 것이 쉽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선정(무색정)에는 지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② 정려지의 실제적인 본질
②-1 총설
정려지(靜慮支)에는 명칭상으로 이미 열여덟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열여덟 가지] 가운데 실제적 본질[實事]은 모두 몇 가지 종류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의 실제적 본질은 열한 가지이니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경안의 ‘낙’이고
내등정은 바로 신근(信根)이며
‘희’는 바로 희수(喜受)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정려지(支)의 실제적 본질은 오로지 열 한가지이다.
이를테면 초정려의 다섯 지분은 바로 다섯 가지의 실제적 본질이며,
제2정려의 세 가지 지분(희ㆍ낙ㆍ심일경성)은 앞의 그것과 같으므로 앞의 [다섯 지분에] 내등정을 더하여 여섯 가지가 된다.
제3정려의 등지(즉 심일경성)도 앞의 그것과 같으므로 앞의 [여섯 지분에] 나머지 네 가지 지분을 더하여 열 가지가 되며,
제4정려의 세 가지 지분(행사청정ㆍ염청정ㆍ심일경성)은 앞의 그것과 같으므로 앞의 [열 가지 지분에] 비고락수를 더하여 열한 가지가 되는 것이다.35)
어떠한 연유에서 마음 등은 정려의 지분이 되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앞서 [논설한] 보리분법(菩提分法)에 준하여 분별해 보아야 한다.36)
여기서 그것(보리분법의 경우)과 다른 것에 대해서만 간략히 분별하면 [이와 같다].
수(受) 중의 세 가지(喜ㆍ樂ㆍ捨受 즉 非苦樂受)를 [정려지로] 설정하고, 우수(憂受)와 고수(苦受)를 설정하지 않은 것은, 우수와 고수는 오로지 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가지 ‘수’는 [선정의] 단계에 따라 이익이 되는 지분이며, 선정에 수순하는 작용이 강하기 때문에 모두 정려의 지분에 포섭되는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정진(精進)은 정려의 지분이 되지 않는 것인가?
정려의 온갖 지분은 자지(自地)의 수승함에 따른 것이지만, 정진은 상지(上地)에 수순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정려의 지분은 쾌적한 상태[適分]의 안락(安樂)한 법이지만,
정진은 [보다] 수승한 경지를 추구하여 책려(策勵)하는 법으로37) 피로하고 고달픈 것[疲苦]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과 ‘사’의 두 종류는 능히 등지(等持, 삼마지)를 도와 마음을 규제하고 책려[制策]하여 [욕계의] 거칠고 미세함에서 떠나게 하는 것일 뿐더러 욕계의 악[欲惡]을 대치하기 때문에 아울러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38)
어떠한 연유에서 무표(無表)는 정려의 지분이 되지 않는 것인가?
정려의 온갖 지분은 선정[定]이 경계대상에 머무는 것을 돕는 것이지만, 그것(무표업)은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정려지(靜慮支)에는 [선정의] 단계[地]의 차별에 따라 비록 열여덟 가지가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실제적 본질이 되는 종류만을 추구하는 경우 오로지 아홉 가지 종류라고 해야 하지만, 수(受)의 상이 다르기 때문에 열한 가지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39)
이에 따라 초정려의 지분이면서 제2정려의 지분이 아닌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에 대해]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제1구는 말하자면 심(尋)과 사(伺)이며,
제2구는 말하자면 내등정이며,
제3구는 말하자면 희ㆍ낙ㆍ등지이며,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이다.40)
나아가 그 밖의 다른 정려의 지분이 서로 대응하는 관계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41)
②-2 정려지의 명의(名義)
여기서 ‘지분[支]’이라는 말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는 것인가?
‘드러내어 성취한다[顯成]’는 뜻을 나타낸다.
무엇을 드러내어 성취한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것은 바로 초정려이며, 내지는 이것은 바로 제4정려이다”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성취하는 것이다.42)
혹은 이러한 ‘지분’이라는 말은 ‘수순(隨順)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구연(枸櫞, 레몬) 등을 일컬어 음료의 지분[飮分, 음료의 한 종류]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테면 열여덟 가지의 지분은 각기 자지(自地)에 수순하는 것이다.43)
혹은 ‘지분’이라는 말은 자구(資具, 자재와 도구)의 뜻으로,
“제사의 지분[祠祀支, 요소]은 바로 소나 말 등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테면 심ㆍ사 등은 전전(展轉)하며 서로의 자구가 되는 것이다.44)
그런데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정려지(地)에서 등지(等持)가 가장 수승한 것임을 나타내고자 이같이 설하였다.
“삼마지(三摩地)는 바로 정려이면서 역시 정려의 지분[支]이지만,
심ㆍ사 등은 바로 정려의 지분일 뿐 정려가 아니다.”45)
정려지(地)에서 등지가 가장 수승한 것임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계경 중에서
“4정려에 대해 [그것이] 정근(定根)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려와 정려지(支)는] 서로를 성취하고 서로를 방호한다는 점에서 그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마치 사지군(四支軍)과 같다’고 말하여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왕과 백성[衆]은 비록 서로를 돕는 관계일지라도 그 중에서 왕이 가장 수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46)
②-3 초ㆍ제2정려의 낙(樂)과 제3정려의 수락(受樂)
어찌 세 선정(초ㆍ제2ㆍ제3정려)의 낙(樂)의 체성은 동일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럴 경우 정려지는 [실제적으로] 열한 가지가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47)
제3정려의 ‘낙’은 수(受)를 본질로 하는 것이며,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바로 경안(輕安)이기 때문에,
정려지는 실제적으로 열한 가지가 존재한다.
경안과 행사(行捨)는 네 정려에 두루 존재하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오로지 경안만을 설정하고,
뒤의 두 정려지(地) 중에서는 오로지 행사만을 설정한 것인가?
이러한 법(경안과 행사)은 그러한 [정려지]에 치우쳐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욕계 중에는 온갖 악(불선)법이 존재하고,
초정려지에는 심(尋)ㆍ사(伺)의 상(想)이 존재하여 능히 마음을 핍박하고 어지럽히는 것이 마치 독화살과도 같은데,
초정려와 제2정려는 바로 그러한 경지를 떠난 단계이기 때문에 경안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제2정려에서는 기쁨[喜]이 지극히 동요하고 용솟음[動涌]치며,
제3정려에서는 낙수(樂受)가 지극히 증가하므로 두 정려는 다 같이 능히 애[탐]의 뛰어난 생처(生處)가 된다.
제3정려와 제4정려는 바로 그러한 경지를 버린 단계이기 때문에 행사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혹은 욕계와 초정려의 유색근(有色根)은 식(識)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 거칠고 무겁기[麤重]가 다른 경지보다 심한데,
초정려와 제2정려는 바로 그러한 경지를 떠난 단계이기 때문에 경안이 증가한다.
또한 제3정려와 제4정려지 중에서는 [유색근의] 거칠고 무거움을 멀리 떠났으며, 적정(寂靜)이 더욱 수승하기 때문에 행사가 증가한다.
즉 [초정려와 제2정려의] 경안락(輕安樂)은 마치 [무거운] 짐을 처음으로 벗어버린 상태와 같지만,
만약 다시 [정려의] 경지를 바꾸게 되면 그러한 기분은 미세하고 옅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초정려와 제2정려에만 경안을 설정하였으며,
제3정려와 제4정려지 중에서는 [경안이] 저절로 일어날 뿐더러 적정(寂靜)함이 수승하기 때문에 행사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혹은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경안의 연(緣)이 존재한다.
즉 기쁨[喜]은 경안에 대해 뛰어난 연이 되기 때문으로,
예컨대 계경에서
“기쁨으로 말미암아 경쾌하고 안적[輕安]하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러나 제3정려와 제4정려 중에는 ‘기쁨’이라는 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경안이 [존재하더라도] 미미하고 저열하여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행사와 경안은 서로가 서로를 은폐시키는 것으로, 만약 어떤 처소에 그 중의 한 가지가 존재하면 두 번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경안은 [혼]침(惛沈)을 대치하는 것으로, 그 상은 나부끼며 움직이는 것[飄擧]이며, 행사는 도[거](掉擧)를 대치하는 것으로, 그 상은 고요히 머무는 것[寂止]이다.
따라서 경안과 행사는 서로가 서로를 은폐하는 것이다.48)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세 가지 낙지(樂支) 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바로 경안의 ‘낙’이며,
제3정려의 그것은 바로 ‘수(受)’로서의 낙(樂)임을 알게 된 것인가?
그러한 [정려지에] 치우쳐 수순하기 때문이라고 이미 논설하였다.
즉 제3정려의 ‘낙’은 경안이 아니니, 경안이 그러한 [제3정려의] 지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바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또한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필시 낙수(樂受)가 아니니, 그것을 신수(身受)라고 하든, 심수(心受)라고 하든 다 같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필시 신수가 아니니, 선정 중에 있을 때에는 5식(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심수도 아니니, [그때 심수는] 바로 ‘기쁨’ 즉 희수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쁨에 대한 애탐[喜愛]를 떠나 그 밖의 다른 경지(즉 제3정려)에서 마음으로 열[락](悅樂)할 때 비로소 앞의 ‘수’(즉 희수)와는 다른 낙수(樂受)를 설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초정려와 제2정려에서의] 기쁨은 바로 희수(喜受)로서, 한 찰나의 마음[一心] 중에 두 가지의 수(희수와 낙수)가 함께 작용[俱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희수와 낙수는 서로를 현기(現起)시키기 때문에 그러한 과실이 없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초정려와 제2정려는] 5지(支)와 4지를 갖추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49)
만약 “[초정려와 제2정려의] 5지와 4지는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필시 함께 작용[俱行]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럴 경우] 마땅히 유심무사(有尋無伺)의 선정도 존재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에서는 다만
“세 가지 등지가 있으니, 유심유사(有尋有伺)……(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50)
만약 정려의 지분[支]은 필시 구기(俱起)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유심무사의 선정을 설하지 않은 것인가?
또한 욕계와 초정려 중에도 역시 [유심유사 등의] 세 가지 삼마지가 모두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계경에서 말한 바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51)
④ 그 밖의 정려지(靜慮支)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제3정려 중의 의지(意地)의 열수(悅受)는 이미 기쁨이라는 특성[喜相]을 획득한 것이어서 마땅히 희수(喜受)라고 말해야 함에도,
어떠한 까닭에서 낙수(樂受)라고 말한 것인가?
이를 ‘낙수’라고 말하게 된 데에는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모든 희근(喜根)은 적정(寂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쁨[喜]은 동요하고 용솟음치는 것[動涌]으로,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치 [바다]물에 파도가 솟구쳐 넘치며 출렁이는 것과 같다.
초정려와 제2정려의 의지(意地)의 열수(悅受)는 바로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희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제3정려 중에 존재하는 이러한 마음의 열수는 그 특성이 가라앉아 고요하게 일어나는 것[沈靜轉]이기 때문에 ‘낙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선정(제3정려) 중에서는 사(捨)의 작용이 두드러져 기쁨 즉 희수를 버리기 때문에 행사(行捨)의 지분을 설정하게 되었다.52)
그리고 제4정려 중에서는 다시 낙수마저 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를 ‘청정한 것’(즉 行捨淸淨)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염(念)과 혜(慧)는 모든 경지[地]에 다 존재하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염’은 오로지 뒤의 두 정려에만 존재하고,
‘혜’는 제3정려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획득된 것을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였으니, [그것들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각각의 정려에] 치우쳐 수순하기 때문이다.
즉 희수와 낙수는 3유(有,욕ㆍ색ㆍ무색유) 중의 모든 유정이 지극히 탐착하고 미착하는 것인데, 제3정려는 미착되는 것 중에서도 지극한 것이니, 생사(즉 유위세간) 중에서 가장 수승한 즐거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치상 마땅히 ‘혜’를 설정하여 그것의 염사(厭捨)를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제3정려에] ‘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지의 선근도 능히 성취할 수 없거늘, 하물며 승진하여 보다 뛰어난 선근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와 같은 자지의 과실을 대치하기 위하여 제3정려에 ‘혜’를 [정려]지(支)로 설정하였던 것이지만, 그 밖의 다른 정려의 경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혜’를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제2정려에는 가장 수승한 희수가 존재하여 마치 나찰사(邏刹私, Rakṣasi, 나찰, 귀신의 일종)처럼 가벼이 움직이고[輕躁] 요란스러우며[嬈亂],
제3정려 중에는 가장 수승한 낙수가 존재하여 하늘의 미묘한 욕[탐]처럼 버리기가 지극히 어렵다.53)
그리고 제3정려와 제4정려에서는 행사(行捨)의 지분에 의해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그것을 이미 버렸을지라도, 퇴실(退失)하여 [다시] 일으키게 될까 염려하여 ‘염’을 설정하여 [그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은 것이지만,
다른 정려지(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염’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제3정려의 ‘염’은 세력 작용이 견고하고 강력하여 오로지 ‘사(捨)’를 도울 뿐만 아니라 역시 또한 ‘혜’도 능히 돕는데, [그것들은] 모두 다 같이 자지와 타지의 과실을 능히 방비(防備)한다.
그러나 제4정려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자지의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제4정려에는 ‘혜’의 지분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심(尋)과 희(喜)가 나부끼며 동요[飄動]하기 때문에 비록 ‘염’과 ‘혜’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방지하고 관조[防照]하는 작용이 미약하며,
제4정려 중에서는 두 가지 사(捨, 行捨와 非苦樂의 捨受)에 의해 은폐되어 무명에 수순하기 때문에54) ‘혜’의 작용이 두드러지지 않다.
그래서 ‘혜’는 오로지 제3정려에만 존재하며, ‘염’은 위의 두 정려와 통하는 것이다.
혹은 제3정려의 즐거움[樂]은 허물이 매우 미미하여(거의 없어) ‘혜’의 지분을 설정하지 않을 경우 능히 비추어 살필 수가 없으며, 만약 능히 비추어 살피지 않으면, 자지의 허물을 싫어하고 상지의 공덕을 추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지(초ㆍ제2정려)의 심(尋)과 희(喜), 상지의 색(色)은 허물이 거칠어서 비록 [‘혜’로써] 비추어 [하지를] 싫어하고 [상지를] 추구하더라도 기특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밖의 세 정려지(地)에서는 ‘혜’를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제3정려 중의 낙수는 그 허물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성자라면 마땅히 [낙수의 허물에 대해] 설해야 한다”고 설하였던 것으로,
이러한 선정 중의 ‘혜’는 그 작용이 가장 뛰어나 미세한 허물도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록 제4정려 가장자리[邊, 즉 近分地]의 ‘혜’로도 역시 능히 알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총체적인 상[總相]만을 알기 때문에 기특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것(제4정려 근분지의 ‘혜’)은 낙수와 계지(繫地)가 동일하지 않을 뿐더러 하지의 허물을 총체적으로 관찰하는 이염(離染)의 도(道)이기 때문에 동일한 지(地, 즉 제3정려지)의 계박을 [관찰하는] 자지의 ‘혜’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즉 [낙수의] 허물을 능히 개별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혜’에] 대해서만 바야흐로 희유하고도 기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지(自地, 즉 제3정려지)의 지분으로 설정하였지만, 상지(제4정려의 근분지)의 ‘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미 제3정려를 획득한 모든 이가 다 제4정려의 가장자리(근분지)에서 자재(自在)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장차 낙수의 염오를 떠나려고 할 때에도 그러한 [제4정려 가장자리의] ‘혜’를 정려지(支)로 설정할 수 없다.
그래서 오로지 [제]3정려에만 ‘혜’를 [정려]지(支)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낙수의 허물을] 지금 바로 알게 되는 때[正了時,
즉 제3정려지]와 처음으로 이미 떠난 때(즉 제4정려지)에는 다 [그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고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염’의 지분을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경안(輕安, 즉 초정려와 제2정려의 ‘樂’)을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
초정려와 제2정려는 경안의 작용이 두드러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수승한 것(즉 경쾌 안적한 바람)을 감촉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세력과 작용으로 말미암아 정근(精勤)하고 [그러한 선정의 경지를] 버리지도 않으며, 상속(相續)으로 하여금 [선법을] 감당할만한 공능을 갖게 하는 것으로, 능히 등지(等持)를 도와 뛰어난 공덕을 이끌어 내게 하는 등의 수승한 작용을 갖기 때문에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내등정(內等淨)이라는 말은 어떠한 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심(尋)ㆍ사(伺)가 종식된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55) 그것의 본질은 바로 신근(信根)이다.
이를테면 만약 제2정려를 증득하면 정지(定地, 즉 초정려지)의 [염오함도] 역시 떠날 수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 깊은 믿음이 생겨나는 경우, 이를 ‘내등정’이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이다.56)
비록 모든 경지에는 다 신근이 존재할지라도 [정려]지(支)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제2정려뿐이니, 이제야 비로소 온갖 정지(定地)의 법과 산지(散地)의 법을 다 같이 떠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초정려의 심ㆍ사와 식신(識身)은 마치 뜨거운 진흙탕[熟淤泥]과 같아서 믿음이 밝고 맑지[明淨] 못하며,
뒤의 두 정려(제3ㆍ제4정려)는 행사(行捨)의 작용이 두드러져 신근(信根)을 가리고 탈취[映奪]하기 때문에 내적인 청정함[內淨]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력(信力)은 바야흐로 경각(警覺)에 의해 증대되는 것으로, 사(捨)는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가리고 탈취하는 것이다.57)
[이러한] 신(信)은 바로 청정한 것[淨相]이기 때문에 ‘정(淨)’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으니, 물을 맑게 하는 구슬[淸水珠]처럼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적인 마음[內心]의 평등함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으로,58) 이에 따라 신근을 ‘내등정’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제2정려에 존재하는 공덕인 평등함을 반연하여 이러한 청정(즉 ‘신)을 인기한 것으로, 이에 따라 [신근을] ‘내등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59)
그리고 오로지 심(尋)ㆍ사(伺)뿐만 아니라 [그것이] 고요하게 종식된 상태를 본질로 하는 이러한 [내등정] 등도 모두 다 심소법에 포섭되기 때문에 수(受)ㆍ상(想)ㆍ사(思)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다.60)
그런데 어떤 다른 부파[有餘部]에서는
“희(喜)는 희수(喜受)가 아니다.
‘희’는 바로 행온(行蘊)인 심소법에 포섭되며, 세 정려 중의 낙(樂)은 다 희수이기 때문에 ‘희’와 희수는 각기 그 본질이 다르다”고 설하였다.61)
세 선정 중의 ‘낙’을 희수라고 말할 수 없으니, 두 아급마(阿笈摩, Āgama, 즉 阿含)에서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변전도계경(辯顚倒契經)』 중에서 설하기를,
“점차로 남김없이 우(憂) 등의 5근을 멸하니, 제3정려 중에서는 희근을 남김없이 멸하며, 제4정려에서는 낙근을 남김없이 멸한다”고 하였으며,62)
또 다른 경에서도
“제4정려에서는 낙(樂)을 끊고 고(苦)를 끊는데, 희수와 우수는 이전에 [이미] 몰(沒)하였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63)
제3정려에는 필시 희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희수는 바로 ‘희’이지 ‘낙’이 아닌 것이다.64)
③ 염오정려(즉 味等至)와 정려지(支)의 관계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이 8등지(等至) 가운데 앞의 일곱 가지에는 각기 세 가지(味ㆍ淨ㆍ無漏)가 존재하며, 여덟 번째 등지(비상비비상처)에는 두 가지(味ㆍ淨)가 존재하는데,65) 염오한 온갖 선정[染汚定, 즉 미등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이에 대해 계경과 논(論)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정(淨)과 무루(無漏)의 선정에 대해 설하고 나서
“세존께서는 아직 일체의 선정에 대해 설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설하지 않은 그 밖의 염오한 선정(즉 味等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본론(本論)에서도 역시
“온갖 정려에는 자지에 존재하는 일체의 수면이 수증(隨增)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러한 등의 문구로 말미암아 염오한 선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려에는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해야 하는 것으로, 정(定)정려와 생(生)정려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정려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염오정려와 불염오정려가 바로 그것이다.
불염오정려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정(淨)정려와 무루(無漏)정려가 바로 그것이며,
무루정려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유학의 정려와 무학의 정려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정려의 차별에는 이치상 여러 가지 다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염오정려 중에도 정려지(支)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기는 있지만, 일체의 지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정려에, 어떠한 지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정려에는 초정려부터
차례대로 희(喜)ㆍ낙(樂)과 내등정과
정념과 혜(慧)와, 사(捨)와 염(念)이 존재하지 않으나
어떤 이는 경안과 행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어떤 부류에서는 상(相)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66)
첫 번째[初] 염오정려 중에는 이생(離生)의 희(喜)와 낙(樂)이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를 떠나 생겨난 정려가 아니기 때문이다.67)
비록 염오정려 역시 ‘희’와 상응할지라도, 그것은 이생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려]지(支)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즉 여기(미착의 대상이 되는 초정려)서는 오로지 욕계를 떠날 때 생겨나는 ‘희’만을 설한 것이 아니며,
역시 또한 자지의 염오를 떠남으로 인해 생겨나는 ‘희’도 설하였으니,
계경 중에서 먼저 “욕계의 온갖 악과 불선을 떠났다”고 설하고 나서,
다시 “이생(離生) 즉 생을 떠난 ‘희’와 ‘낙’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생’이라고 하는 말을 거듭하여 설한 것은, [하지(욕계)뿐만 아니라] 역시 또한 자지의 혹(惑)을 떠날 때 생겨나는 ‘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희’의 지분이 오로지 선성(善性)임을 나타내기 위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희’를] ‘낙’과 합하여 설한 것으로, 경안[락]과 상응하는 것은 반드시 선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염오정려에는 필시 ‘희’의 지분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첫 번째 염오정려에는 오로지 세 종류(심ㆍ사ㆍ등지)의 정려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제2 염오정려 중에는 내등정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은 번뇌로 인해 어지럽고 혼탁[擾濁, 澄淨의 반대]하게 된 정려이기 때문이다.
비록 온갖 세간에서
“염오한 믿음[染信]도 존재한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상] 불신(不信)에 포섭되기 때문에 [염오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낙’은 바로 경안으로, 오로지 선성에 포섭될 뿐더러 첫 번째 염오정려의 경우[例]와 동일하기 때문에 거듭하여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2] 염오정려에는 오로지 두 종류(희ㆍ등지)의 정려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제2염오정려에는 ‘희’의 지분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 첫 번째 염오정려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인가?
초정려의 ‘희’는 이생(離生)에 따라 설한 것이지만, 제2정려 중에서는 ‘이생’이라고 말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68)
제3염오정려 중에는 정념(正念)과 ‘혜’가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은 염오의 낙[染樂]으로 인해 미란(迷亂)된 정려이기 때문이다.
비록 염오한 선정 중에도 ‘염’과 ‘혜’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바로 실념(失念)과 부정혜(不正慧)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정려지(支)는 염오정려 중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행사(行捨)도 오로지 대선지법(大善地法)에 포섭될 뿐더러 제4 [염오정려의]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지 않았다.69)
따라서 이러한 [제3] 염오정려에는 오로지 두 종류(受樂ㆍ등지)의 정려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제4 염오정려 중에는 사(捨)와 염(念)의 청정한 정려지(支)가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은 번뇌로 인해 더럽혀진 정려이기 때문이다.70)
이에 따라 제4의 염오정려에는 오로지 두 종류(비고락수ㆍ등지)의 정려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앞의 두 가지 염오정려 중에는 다만 경안(輕安, 즉 樂)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며, 뒤의 두 가지 염오정려 중에는 다만 행사(行捨)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니, 그것은 모두 대선지법(大善地法)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즉 그는
“염오정려 중의 희(喜)와 신(信)과 염(念)과 혜(慧)도 다 [염오정려]지(支)에 포섭되니, 그것들은 모두 염오법과도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던 것이다.71)
④ 동(動)정려와 부동(不動)정려
계경 중에서는
“[앞의] 세 정려는 동요함을 갖는 것[有動]이지만, 제4정려는 동요하지 않는 것[不動]이다”라고 설하고 있다.72)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그같이 설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4정려를 부동(不動)이라고 함은
여덟 가지 재환(災患)을 떠났기 때문이니
여기서 여덟 가지란 심(尋)ㆍ사(伺)와
네 가지 수(受)와 입ㆍ출식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아래 세 정려를 일컬어 ‘동요함을 갖는 것’이라고 한 것은 재환(災患)이 있기 때문이며,
제4정려를 일컬어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은 재환이 없기 때문이니,
재환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그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심(尋)과 사(伺)와 네 가지 수(憂ㆍ苦ㆍ喜ㆍ樂受)와 입식(入息)과 출식(出息)이 바로 그것이니,
제4정려에는 이러한 여덟 가지 재환 중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세존께서는 그것을 설하여 부동(不動) 즉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경에서는 오로지
“제4정려는 심ㆍ사ㆍ희ㆍ낙으로 인해 동요되지 않는다”고 설하였을 뿐이다.
경에서는 밀의(密意)로서 설하였지만, 논(論)에서는 법상(法相)에 의거하여 설하였으니,73)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어떤 곳에서
“낙(樂)을 끊고 고(苦)를 끊으면, 이전에 [이미] 희수와 우수가 몰(沒)하였기에 제4정려에 완전[具足]하게 안주하게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74)
또한 “그러한 선정(즉 제4정려)에서는 신행(身行)이 모두 멸하였다”고도 설하였는데,
입식과 출식을 일컬어 ‘신행’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선정은 오로지 심ㆍ사ㆍ희ㆍ낙의 네 가지 동요의 재환만을 면(免)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제4정려는 마치 밀실에 등불이 비칠 때 동요함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부동(不動)이라 이름하였으니, 『비유경[喩經]』에서 [그같이] 설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심(尋)과 사(伺)에 무슨 허물이 있기에 그것이 고요하게 종식된 상태[靜息]를 추구하는 것인가?
이것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선정의 경계에 대해 항상 생각을 고정[繫念]시키게 하는 것일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적정(寂靜)하지 않게 한다.
마치 나무의 가지가 줄기에 의지하여 서 있을 때라도 바람을 만나면 움직이고 흔들려 [고요하게] 멈추지 않는 것처럼,
모든 유가사(瑜伽師)들이 비록 경계의 행상에서 마음이 빠르게 바뀌거나 벗어나는 것[易脫]을 원하지 않을지라도 ‘심’과 ‘사’의 힘이 그것(마음)으로 하여금 그렇게 치달아 흐르게 한다.
그래서 선정 중에 존재하는 ‘심’과 ‘사’에는 허물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희(喜)와 낙(樂)도 역시 선정을 능히 고동(鼓動)시키는데,
오로지 이 네 종류만이 선정과 상응하면서 능히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에 경(經)에서는 이에 치우쳐 설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실로 두 가지의 식(입식과 출식)과 우(憂)ㆍ고(苦)의 두 가지 수(受)도 역시 능히 [선정의 마음을] 고동(鼓動)시키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재환에] 여덟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심ㆍ사의 두 법에 이미 이 같은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정려지(靜慮支)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에서는 다만 ‘심ㆍ사의 적정’이 [정려지 중에 존재한다고] 말했어야 함에도, 어찌 또한 유심유사(有尋有伺)의 선정을 설할 수 있을 것인가?75)
심ㆍ사가 비록 선정과 상응하는 것일지라도 선정 중에서 능히 재환(災患)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를 설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설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것들은 선정에 대해 처음에는 자량이 되지만―욕계 악심(惡尋)의 원분대치(遠分對治)가 되기 때문이다―,
그 뒤에 수승한 선정에 대해 비로소 재환이 되기 때문에 심ㆍ사를 설하더라도 그 공(功)은 헛된 것이 아니다.
즉 어떤 법을 버릴 때에는 행의(行儀)와 방편(方便)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설혹 이것들이 버려야 할 법이라 할지라도 처음에는 필시 마땅히 의지해야 하니,
강을 건너가고자 하면 먼저 배나 뗏목에 의지해야 하지만, 그 후 피안에 이르고 나서는 이치상 그 모두를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색계에 의지하여 욕계에서 벗어나고, 무색계에 의지하여 색계에서 벗어나며, 성도(聖道)에 의지하여 무색계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만약 열반을 획득하면 성도에서도 역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법(심ㆍ사)은,
마치 세고[勝] 약한[劣] 바람이 나무의 한 가지와 부딪치는 것처럼,
한 찰나의 마음과 구기(俱起)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두 법의 업(業, 작용)이 능히 고동(鼓動)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것들이 선정과 상응하는 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거칠고 얕은 선정(즉 초정려)의 마음은 ‘심’과 ‘사’에 의해 책려(策勵)될 때 비로소 능히 욕계의 거친 염오로부터 출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들은 초정려[의 마음]과 상응하여 획득되지만, [초정려의 마음은] 이러한 상응에 의해 청정하게 되지 않는 것으로,
이는 마치 등불과 햇빛은 다 같이 색을 보는 인연이지만, 등불은 미세한 어두움까지 모두 비추더라도 명료하지 않으며,
햇빛은 어두움을 떠나서도(굳이 어두운 곳을 비추지 않더라도) 비추는 작용이 분명한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정려의 선정[定]이 비록 자신의 사업을 행할지라도 심ㆍ사가 다 같이 비추지 않으면 제4정려의 경우처럼 동요함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76)
그러나 만약 심(尋)이 선정에 존재하여 능히 마음을 움직이고 어지럽힌다면, 무루의 선정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재환이 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그것(유심유사의 등지)을] 하나의 도지(道支)로 설정한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논설하였으니, 그것은 능히 정견을 책려하기 때문이다.
즉 행자가 아직 선정에 익숙하지 않을 때에는 이것이 재환이 된다는 사실을 능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정려]지(地)에 대해 염사(厭捨)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미 익숙하게 되었다면, 능히 초정려 중에 이러한 재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된다.
마치 물이 맑고 깨끗하면[澄淨] 연못 속에 숨어있는 벌레나 물고기가 능히 물을 혼탁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행자가 이미 초정려 중에 존재하는 심ㆍ사의 두 법이 능히 그것을 동요시키고 어지럽히는 것을 관찰하였다면,
바로 하나의 정려지[一地]를 총체적으로 싫어하여 버리려고 하니,77) 이같이 거칠고 얕은 것(즉 초정려)은 이치상 마땅히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초정려에 존재하는 ‘심’과 ‘사’가 이미 그러하다면, 상지 중에 존재하는 희(喜) 등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⑤ 생(生)정려에서의 수(受)의 차별
정(定)정려에 존재하는 온갖 수(受)의 차별과 마찬가지로,78) 생(生)정려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생(生)정려에는 초정려부터
차례대로 희수ㆍ낙수ㆍ사수와
희수ㆍ사수와, 낙수ㆍ사수와
오로지 사수가 존재할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생(生)정려의 경우, 초정려에는 세 가지의 ‘수’가 존재하니,
첫째는 의식과 상응하는 희수이며,
둘째는 세 가지 식(안ㆍ이ㆍ신식)과 상응하는 낙수이며,79)
셋째는 네 가지 식(안ㆍ이ㆍ신ㆍ의식)과 상응하는 사수이다.
제2정려에는 두 가지의 ‘수’가 존재하니,
이를테면 의식과 상응하는 희수와 사수이다.
즉 여기에는 낙수가 결코 존재하지 않으니, 그(의식) 밖의 다른 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기쁨[心悅]이 거칠기 때문이다.80)
제3정려에는 두 가지의 ‘수’가 존재하니,
이를테면 의식과 상응하는 낙수와 사수이다.
제4정려에는 한 가지 ‘수’만이 존재할 뿐이니, 이를테면 의식과 상응하는 사수이다.
이상이 말하자면 정(定)정려와는 다른 생(生)정려의 수(受)의 차별이다.
⑥ 위의 세 생(生)정려에서의 안식 등의 근거
위의 세 정려에는 세 가지 식신(안ㆍ이ㆍ신식)도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심ㆍ사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곳에 태어난 이는 어떻게 능히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으며, 어떻게 표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
그러한 [정려]지에 태어나더라도 안식 등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만 거기에 계속(繫屬)된 것이 아닐 뿐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난 자의
세 가지 식과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은
모두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으로
오로지 무부무기일 따름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위의 세 정려지에 태어난 자의 경우, 세 가지 식신(識身)을 일으키고, 아울러 표업을 발동시키는 마음은 모두 초정려에 계속(繫屬)되는 것으로,81) 상지에 태어나 하지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변화심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나더라도] 능히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으며, 또한 표업을 발동시킬 수 있다.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오로지 무부무기로서, 하지의 염오를 일으키지 않으니, 이미 염오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하지의 선도 일으키지 않으니, 하지는 저열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