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들어 일요일 1월 5일 일요일 쉬는날이다. 어제 토요일 휴일근무를 하고 서울집에 올라가질 않고 오늘 근처의 용주사로 향하였다.
오산역에서 전철을 타고 병점역에 하차하여 3번출구로 나가서 용주사로 가는 버스를 보니 가는 편이 많다.
요즘은 어딜가나 버스안내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 편리함을 느낀다.
몇 정거장을 가니 용주사에 도착하였다.
정거장에 내리니 바로 옆이 용주사다. 통상 절은 산으로 올라 중턱 쯤에 위치하지만 이 곳은 바로 옆인데 지세를 보니 과거에는 이 곳이 그나마 높았던 둔덕 위지 않을까 싶다.
전부 개발이 되어 절 옆에 까지 아파트와 상가가 지어져 있으니 생활이야 편리하겠지만 산사가 주는 평화로움이 없어졌다.
용주사는 조계종 2교구 본사 사찰이다. 그만큼 비중이 있는 사찰이다. 이 곳 근처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이들의 아들인 정조가 묻힌 융건릉이 근처에 있다.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직접 세운 대표적인 왕실원찰이자 조포사였다.
본래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할 때 무덤을 돌보는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같이 창건하였다. 용주사에서는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해 근처에 있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창건은 정조 임금이 하였다. 조선 전기의 세조랑 비슷하다.
갈양사는 '갈양사사적기'란 기록으로 보건데 고려시대(10세기)에 확장된 듯하다. 문제는 이 기록이 이능화의 조선사찰전서에 남은 내용이라 원본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고승들이 지방의 사찰을 산소(山所)로 정하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낸 전통이 있었는데, 갈양사도 그러한 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고승인 혜소가 갈양사를 자신이 거처할 장소로 삼아 후대로 내려왔으나 언제인가 망해서 폐사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세기 조선시대에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정조가 명을 내려 용주사가 창건되었다. 정조가 재위 13년(1789)에 옛날 수원부 읍치(현재 화성태안3지구)를 현재의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도 절의 중요성을 인식한 듯 주지스님과 함께 1080배 수행을 하고 있었다.
용주사는 창건과 동시에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으며 용주사 주지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하였다.
절 참회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 할수가 없다. 천배, 삼천배, 일만배등 해본 사람만이 그 경지를 안다. 절 참회하는 그의 모습에 온갖 삼라만상이 묻어 나온다. 무슨생각이 들다가도 아이구 힘들다 하다가도 내가 뭘하고 있나? 하다가도 또 아이구 힘들다 하다가도 "지심귀명례 보광불"에 신심이 번쩍들어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다.
이 곳에서도 주지스님과의 천배를 하는가 보다
범종루 - 일반적인 사찰을 둘러보면 보통 범종과 법고, 운판과 목어, 사물은 범종루에 함께 위치하는데
이곳 용주사는 이렇게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 양편에 나뉘워져 범종루와 법고루가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용주사의 주불전은 대웅보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 정면 중앙의 후불탱화로는 석가·아미타·약사불, 즉 삼세불(三世佛)로 구성된 삼불회도(三佛會圖)가 걸려있다. 그 좌측(향 우측)에 삼장보살도와 감로도(甘露圖), 우측(향 좌측)에는 신중도(神衆圖)가 봉안되어 있다.
영가단의 탱회는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다. 이는 천장보살(天藏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지지보살(持地菩薩) 세분의 보살을 주존으로 한 독특한 구성의 불화로, 용도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륙재와 연관이 깊다. 특히 조선왕조시대에 적극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수량만 해도 60여 점에 이른다. 그중에서 한국 최초로 수륙재가 열렸던 곳인 용주사(龍珠寺) 삼장보살도 이다.
위쪽에는 가운데 천장보살(天藏菩薩), 그 좌우로 지지보살(持地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하나의 긴 대좌 위에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각각의 협시와 권속이 시립하고 있다. 삼장보살 중 천장보살은 상계교주(上界敎主), 지지보살은 음부교주(陰府敎主), 지장보살은 유명계교주(幽冥界敎主)로서, 천장과 지상, 그리고 지하의 3교주이다.
천장보살의 주변에는 좌보처 진주보살(眞珠菩薩)과 우보처 대진주(大眞珠菩薩)을 중심으로 천부중(天部衆), 지지보살은 좌협시 유동보살(儒童菩薩)과 우협시 용수보살(龍樹菩薩)을 중심으로 신중(神衆), 지장보살은 좌협시 도명존자(道明尊者) 및 우협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명부중(冥府衆)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구성과 존명은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 1661),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 1709, 줄여 ‘범음산보집’) 등의 수륙재 관련 의식집에 근거한 것이다.
수륙재는 전쟁, 자연재해, 질병 등으로 인해 죽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달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대표적인 불교 천도의식이다. 중국에서 양무제(梁武帝, 502~549)에 의해 처음 개설되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설행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10세기에 중국 오월(吳越)과의 교류 속에서 고려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는 광종대로 보인다.
갈양사혜거국사비(葛陽寺惠居國師碑)에 따르면, 광종 22년인 971년에 갈양사에서 처음으로 수륙도량을 개설하여 왕이 태자에게 가 낙성하게 하였다고 한다. 갈양사가 바로 용주사의 전신이다. 즉 용주사는 한국 최초로 수륙재가 열렸던 사찰인 것이다. 용주사에서는 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매년 10월 수륙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 개국 후, 억불의 기조 속에서도 수륙재는 대표적인 천도재로 자리하면서 꾸준히 개설되었다. 왕과 왕비의 천도를 위한 국행(國行) 수륙재에서부터 일반 백성을 위한 수륙재까지 각종 성격과 규모의 수륙 의식이 빈번히 개최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종 의식문이 활발히 간행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㝠陽水陸齊儀纂要), 수륙의궤, 오종범음집, 범음산보집 등을 꼽을 수 있다.
용주사에서는 1790년 대웅전 건립에 맞춰 일련의 불화들을 제작 봉안하였다. 이때 함께 그려진 삼장보살도는 불화의 특성상 일차적으로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영가천도를 기원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왕실의 후원에 걸맞게 한눈에 보아도 화격이 매우 뛰어나다. 전체적인 구성과 구도에서부터 세부적인 표현과 기법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존상들은 모두 상당히 크게 그려져 있는데, 그 자세와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동자스님께서 홀로이 독경을 하고 계신다.
무심이 여여하니 유심이고 유심이랄것도 없으니 무심이니 그대로가 여여하다.
천불전을 지나 뒤편으로 올라서면 시방칠등각 이다.
칠성의 산신, 독성이 탱화로 모셔진 곳으로 시방칠등각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호성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전강대선사 사리탑이 위치한다. 1969년 전강스님이 중앙선원을 개설, 용주사는 제2교구 본사로서 위상과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전강스님은 만공법사의 법맥을 이어오신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셨다.
2005년 열반 30주기를 맞이하여 사부대중의 뜻을 모아 수행과 위덕을 기리는 사리탑이 조성되었다.
이 곳은 선원이다. 일반인 출입금지............................." 이 뭣꼬... 어째서 삼서근이라고 했는고.... .........."
산의 나무들이 금색, 황토색이다. 나는 왜 저런 류의 나무를 보면 편안해 지는가?
수각에도 일반인 뭇사람들의 정성과 기대가 깃들어 있다.
정령들은 그대를 알고 있는가? 있으면 마귀요, 없으면 거짓이니 그 무얼까?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그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대를 두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정성을 다할뿐이다.
용주사는 정조가 워낙 아꼈던 절인지라 이런 야사도 전해져 내려온다.
효심이 워낙 깊었던 정조는 현륭원을 곧잘 찾았는데, 당연히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줄 용주사도 자주 찾게 되었다. 무려 왕이 자주 오는 곳이다 보니 여러 가지 어드밴티지가 실리게 되고, 용주사의 권세가 커지자 스님들은 점차 오만한 마음을 품고 행패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어느날 한 용주사 스님이 탁발 온 척 아녀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수원 부사 조심태(趙心泰)는 스님들에게 함부로 손도 못 대고 있던 차에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자 엄벌에 처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그 스님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스님들은 일찌감치 위에다 로비를 넣어두었고, 이내 훈방으로 매조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조심태도 만만치 않아서 강력히 어필했고, 결국 조정에서는 조심태의 체면을 차려주자는 차원에서 곤장 1대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훈방보다 더 어이없는 처벌 내용에 분통을 터뜨리던 조심태, 그러나 한참 고민한 끝에 방법을 찾아낸다. 형틀에 묶어놓은 스님을 때리는 척하다가 안 때리기를 아주 오랫동안 반복하다가, 스님이 '이제 안 때리겠지'하고 방심할 때 전력으로 때리는 것. 과연 스님은 일격필살 곤장 어택을 맞고 이내 죽어버렸다. 그 이후로 용주사 스님들의 행패는 싹 사라졌다고 한다.
계속.............
도반님들 건강하세요 _()_ _()_ _()_
도반님들 행복하세요 _()_ _()_ _()_
도반님들 성불하세요 _()_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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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紀 2569年 (檀紀 4358年 , 西紀 2025年 ) 2月 12日 수曜日 (陰曆 1월 15일)
一 休 合掌 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