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찾아보다
드라마를 좋아한다. 사랑스런 주인공의 로맨틱 코미디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지금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내용이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어렸을 적 기억에 남는 <아들과 딸> 속 ‘귀남이’라는 이름은 남자아이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강하게 보여줬던 드라마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최근에 기억나는 드라마는 <나의 해방일지>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무기력과 공허함을 술로 채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는 지금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드라마 속 가족은 어떤가? 지난 기억 가족 모습은 가족 안에서 고부갈등 이혼 재혼 가부장적인 가정 등의 문제를 주로 다룬 듯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결혼 혈연을 통한 가족 안 혹은 가족 간 갈등을 주로 다루었지, 그 외 가족 모습은 지나치게 비정상적으로 그려졌던 것 같다. 입양한 아이는 숨겨야 하고 한부모는 숨어 살아야 하며 엄마 아빠 없이 자란 아이는 손가락질 받는 모습이었다. 그런 드라마들을 보고 자라왔기에 나 역시 한때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바라보았던 거 같다. 엄마 아빠 아이들이 사는 가족 외에는 이상한 가족으로 여겼고 엄마 아빠와 함께 살지 못하는 아이들을 안타깝고 부족하게 생각했다.
얼마 전 정상가족(?)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보여주는 드라마를 보았다. 제목은 <진짜가 나타났다>. 드라마 속 주인공 연두와 태경의 가족을 소개하면, 우선 연두네 가족은 어머니가 홀로 연두와 동생을 키웠다. 한부모 가정이지만 남매를 잘 키웠고 가족끼리 서로 걱정하고 챙기며 살아간다. 연두의 동생은 스물다섯 살이지만 일곱 살 딸을 둔 미혼부다. 동생은 아직 취업 준비생이지만 딸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딸은 그런 아빠를 걱정하는 부녀지간이다. 이 집에 삼촌도 함께 살고 있다. 삼촌은 아픈 아들을 홀로 키우는 옛 여자친구와 만나고 있다. 옛날이었다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애를 숨기고 사귀는 걸 뜯어말릴 일이다.
이번에는 태경이네 가족이다. 태경이가 어려서 어머니가 재혼했고 새로운 할머니, 아버지, 형, 누나, 동생과 가족이 되었다. 부모님의 재혼 후 태경은 친양자입양으로 아버지 호적에 올랐다. 형네 부부는 아이를 갖기 어려워 정자 기증을 알아보고 있다. 누나네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임신해서 아이를 위해 이혼하지 않고 살기로 한다. 동생은 결혼도 출산도 생각 없었지만 일곱 살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미혼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마지막으로 연두와 태경. 연두는 혼전임신을 했고 남자친구가 변심해서 떠났다. 처음 태경과 함께 살기로 계약결혼하지만 지금은 생부가 따로 있는 아이라도 태경은 자기 아이로 키우겠다고 한다.
드라마의 전개가 어떻게 이어지고 결론이 어떻게 날지보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가족 모습을 거부감 없이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재혼가정도, 미혼가정도, 한부모가정도, 유전적으로 내 아이가 아니어도 모두 괜찮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면 그 모습이 어떻든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가족이다. 이게 이 드라마에서 그리고자 하는 ‘찐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다고, 부모-미혼자녀로 이루어진 완벽한(?) 모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이다.
이렇게 다양한 가족 모습을 드라마에 책에 우리 삶에서 자주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접하는 미디어에 가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다고, 그런 가족이 이상하고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는 모습으로 그려지길 바란다. 입양아동도 숨을 필요가 없고, 미혼부모든 한부모든 숨기는 것이 아니라 떳떳한 모습, 거기에 더해 친부모가 키울 수 없어 아이들을 대신 키우는 위탁가정도 자주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고정된 가족을 벗어나 자연스럽게 여러 형태의 가족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럼 아빠가 또는 엄마가 없다고 친구를 놀리는 일도 조금은 줄지 않을까?
어른들은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무엇이 달라질까? 위탁가정에서 할머니와 살고 있는 아이가 남의 손가락질 받을까 할머니를 엄마라고 숨기는 일이 없어도 될 것이다. 입양해서 또는 위탁해서 키우고 있는 아이를 친자녀라고 속이며 키워야 하는 애타는 현실도 없어질 것이다. (그럼 위탁가정도 입양가정도 더 많아지겠지.) 아이를 혼자 낳아 키워야 하는 미혼부모가 아이를 포기하는 일이 조금은 덜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것도, 강한 친권으로 아이들이 받는 어려움도 조금은 덜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 가족과 함께 일하는 사회복지사다. 미디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다양한 가족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가족과 관련한 책과 영화를 찾아보며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고 있다. 예를 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나 <브로커>는 남남이 함께 모여 살며 이들이 사는 모습이 가족이구나를 느끼게 하는 영화다. <아이>나 <아이를 위한 아이> 같은 영화는 보육원을 나온 자립준비청년에게 누가 가족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입양이나 가정위탁을 다룬 <인스턴트 패밀리>나 <블라인드 사이드>, 위탁아동의 시선으로 그린 <리무브드>도 아동과 그 가족을 이해하게 도와준다.
영화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린이에게」 「그렇게 가족이 된다」 「비혼이고 아이를 키웁니다」와 같은 책에서는 입양가족 입양아동의 삶을 이해하게 돕고 아이들이 입양 갈 수밖에 없는 미혼부모의 현실을 이해하게 한다. 그 외에도 위탁가정 이야기를 담은 책들, 결혼도 혈연도 아닌 사람들이 함께 사는 이야기 등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한 다양한 가족 모습을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문학과 영화를 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생득'을 벗어나기 어렵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 타고난 조건이 사고를 지배한다. 내 입장과 처지를 벗어나 다른 이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딛고 선 자리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것. 불완전하게나마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책과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타인의 존재를 감각할 수 있다.
「살리는 일」 (박소영, 무제, 2020)
여러 모습의 가족을 담은 책과 영화를 찾아보는 나는, 자연스레 가족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가족은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함께 살며 일상을 공유하고 어떤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저 함께 살고 있고 그게 가족이라고 말한다면, 그 모습이 어떠하다 한들 ‘가족’이다. 그렇게 가족을 인정하고 나니 위탁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진다. 친부모가 없어 불쌍한 아이들이 아니라 위탁부모와 아이들만으로도 충분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라고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워도 친척들이 아이를 키워도 남이 아이를 키워도 가족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