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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도) 에 그려진 조선국(朝鮮國)의 위치
일본역사지도 (여진도)의 조선국
지도설명: 여진시대를 그린 여진도(女眞圖)입니다. 조감도 형식으로 그려진 지도인데 출처가 일본인듯
일어가 군데 군데 끼어있고, 특히 동,남 아시아의 섬들은 대부분 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을 갗춘 지도는 보기도 어렵지만 위치를 찾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닙니다.
지도를 소장 한지는 벌써 몇년이 되었는데 좀체로 해독할 수가 없어 덮어 두었다가 이제야 감이 잡혀
소개올립니다.
왜 조선국의 위치가 만주의 중부이남(개평)의 남쪽으로 정해졌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것입니다.
지도에서 먼저 북경을 중심으로 그 북쪽으로 대능하를 경계로 하여 그 동쪽으로 요동이라 표시하고 조선국
(朝鮮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는 부산해(釜山海)로 표시되어 있고 요동반도는 마치 볼링공처럼 생긴데다 왕안도(王安道)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산동반도의 끝에는 묘도군도가 네개의 섬으로 그려져 있네요.
이제 지도가 왜 그렇게 한국 고대사의 통설을 뒤엎는 그림으로 표시 되었는가를 사서들을 통하여 읽으시
겠습니다. 그것도 남의 나라의 사서가 아니고 우리의 <고려사>입니다.
高麗史 14卷 - 世家14 - 睿宗3 - 10-09-1115
고려사 14권 - 세가14 - 예종3 - 10년,1115년(AD)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이달에 생여진 완안 아골타, 황제를 칭하고 이름을 고쳐 민(旻)이라하고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그 풍속은 흉노와 같고, 여러 부락은 성곽이 없어 산과 들에 흩어져 살며 문자도 없으나 말로서 약속을
하여 지켰다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 勇.
땅은 풍요롭고,돼지,양,소,말을 길렀으며, 말은 특히 준마가 많았고 혹은 (준마를 타고) 하루에 1000리를
가는 자도 있었고, 사람들은 용맹스러워,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其地.
아이들도 활을 당겨 새와 쥐를 잡는 것이, 장정들도 힘든 말달리고, 치고, 던지며 활을 쏘는 전쟁연습에서,
각 부락마다 장(長)을 상웅(相雄 = 추대)함은 그 땅을 통일할만 하다
西直契丹南直我境故
서직(西直 = 서여진), 거란, 남직(南直 = 남여진)은 우리 경계에 인접했던 것이다
嘗事契丹及我朝每來朝以 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일찌기 거란과 우리나라(我朝 = 고려)는 매일 아침마다, 밀기울, 금, 족제비가죽, 좋은 말등으로 물물교환
했고, 우리나라(我朝 = 고려)는 역시,후하게 대하여 은으로 돈을 삼게 하였다.
或曰 :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혹은 "옛날에 我(아 = 우리나라, 고려) 평주에 스님들이 지키고 살은 곳이 지금의 여진인의 아지고촌
(阿之古村)인데, 이를 일컬어 금나라의 선조라 한다."
或曰 :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
里鉢季曰盈歌盈歌最雄傑得衆心. 盈歌死劾里鉢長子*烏雅 {烏雅束}嗣位*烏雅 {烏雅束}卒弟阿骨打立."
혹은"평주의 스님 김행의 아들,극수초(克守初)가 여진의 땅,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여진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아, 일�기를 고을태사(古乙太師), 고을생활라태사(古乙生活羅太師), 활라다(活羅多)라는 자(子)
이다.
그 큰 아들이 해리발(劾里鉢)이고,그 끝 아들은 영가(盈歌)이다 이 영가(盈歌)는 세상에서 최고로 웅걸(雄傑)
하여 무리들의 마음을 얻고 죽었다. 그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그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 아골타(阿骨打)가 황제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서 금나라 시조의 족보를 정리해 보면,
첫째, 고려 평주(平州) 사람 김행(金幸)
둘째, 극수초(克守初)
셋째, 고을태사(古乙太師), 고을생활라태사(古乙生活羅太師), 활라다(活羅多)
넷째, 해리발(劾里鉢)
다섯째, 오아속(烏雅束) 이어 아골타(阿骨打)
금나라 시조 아골타는 고려사람 평주(平州) 김행(金幸)으로부터 4세손이기 때문에 금나라가 고려에
우호적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주는 어디인가를 찾아 보면, 중국고금지명사전 209쪽 기록대로
평주(平州) : 진분유주치(晉分幽州治) 금요녕열하조선지지(今遼寧熱河朝鮮之地)
진나라가 유주를 나누어 다스린 곳이며, 지금의 요령성 열하, 조선(朝鮮)의 땅이다.
金 史의 始祖에 관한 내용 번역(출처 : 2000. 4. 15 - KBS 역사스페셜 시 청평)
[女直、渤海本同一家] Saying: 女直, 渤海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가족이다"라고 했는데,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이것은 원래 다같이 勿 吉(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金 之 始祖 諱 函 普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函 普)였다.
初從高麗來,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 ,수년 후, 胡 十 門이라는 사람이 曷 蘇 館이라는 곳을 태조께 바 쳤 는 데,
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阿古, 函普, 保活里).
스스로 말하기를 그들은 시조 삼형제와 같은 곳에서 왔으며.
...하략
* 금(金)나라가 설치한 갈소관로(葛蘇館路)가 무엇일까요?
다음의 설명에 의하면 갈소관은 여진어로 울타리 즉 국경선을 뜻하는 말 이라는구뇨.
그들은 요양의 남쪽에 있던 개평으로 경계를 설정하였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고려와 국경을 접했
다는 뜻이 되겠지요.
[중국고금지명사전] 628쪽 에서 옮겨 봅니다.
曷蘇館(갈소관) : 亦作合思罕. 合蘇款. 女眞語離(원문은 죽 변이 위에 있음) 之義也.
갈 소관은 역시 합사한, 합 소관이라고도 한다. 여진말로 울타리라는 뜻이다.
금치갈소관로(金置曷蘇館路), 치 금 봉 천 개평 현(治今奉天蓋平縣). 통할 요동반도(統轄遼東半島)
금나라가 갈 소 관로를 설치했다. 지금의 봉천(심양) 개평 현으로 다스리는 곳이다.
요동반도(요녕성 반도를 가리킴 )를 거느려 다스린다.
안삼북조맹회편운(按三北朝盟會編云) 글란 아보기 여여진 위환사기부락(契丹阿保機廬女眞爲患徙其部落)
안(按 : 안 황 보밀 이라는 사람의 성씨)이 쓴 3북 조 맹회 편에 운하기를,
거란의 아보기가 염려하건대, 여진이 근심이라 그 부락을 이사시켰다.
강대자수천호요양지남. 사불득상교통. 기사 어 요양지남자.
(强大者數千戶遼陽之南. 使不得相交通. 其徙於遼陽之南者)
강대한 부락은 수천호가 요양 남쪽에 있다. 서로 왕래를 못하게 하고 요양 남쪽으로 이사 시켰다.
편입 글란 민적. 명 왈 합 소관. 즉 숙여진시야. (編入契丹民籍. 名曰合蘇款.卽熟女眞是也.)
거란 민적에 편입시키고 합 소관이라 이름 붙였다. 즉 숙여진이다.
다음은 고려사 지리지가 말하는 고려의 초기 강역입니다.
이것을 우리네 강단 사학계에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려사> 56권(券) 지(志)10 지리(地理) 1
고려의 강역
惟 我 海東 三面 阻 海 一隅 連 陸 輻과之 廣 其 於 萬里.高麗太祖興於高句麗之地降新羅滅百濟定都開京.
우리나라는 바다 동쪽으로 3면이 바다로 막혀있고 한쪽은 대륙과 이어져있어 이곳으로부터의 넓이가
만 리 나 된 다.
고려 태조는 신라에게서 항복받고 백제를 멸한 고구려의 땅으로부터 일어나 도읍을 개경으로 하였다.
高麗太祖興於高勾麗之地降羅滅濟定都開京三韓之地歸于一統.
고려 태조가 고구려 옛 땅에서 일어나, 신라에게 항복 받고,백제를 멸하고 개경에 도읍을 정하여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였다
然東方初定未遑經理至二十三年始改諸州府郡縣名
동방의 처음, 황급히 경영하느라 정하지 못했던 여러 주부군현의 이름을 태조 23년에 처음으로 정했다
成宗又改州府郡縣及關驛江浦之號遂分境內爲十道就十二州各置節度使.
성종이 또 고치기를 주부군현과 역, 강, 포구의 이름을 따라서 경계를 짓고, 12주에 각 절도사를 두는
10도를 두었다
其十道一曰關內二曰中原三曰河南四曰江南五曰嶺南六曰嶺東七曰山南八曰海陽九曰朔方十曰浿西其所管州
郡共五百八十餘.
그 십도는 1.관내(關 內) 2.중원(中原) 3.하남(河 南) 4.강남(江南) 5.영남(嶺南) 6.영동(嶺東)7.산남(山南)
8.해양(海 陽) 9.삭방(朔方) 10.패서(浿 西)이며 그 소관 하는 주군(州郡)은 공(共)히 580여 곳이다
東國 地理 之 盛 極 於 此 矣
동국의 땅이 극성 시에 이와 같았는데,
顯宗初廢節度使置五都護七十五道安撫使尋罷安撫使置四都護八牧.
현종 초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 75도 안무사를 파기하고 4도호 8목을 두었다
당시의 5도호부(현종 3년~현종 9년)는 안남대도호부(全州), 안북도호부(寧 州), 안서도호부(海 州),
안동대도호부(尙州), 안변도호부(登 州)였다
自是以後定爲五道兩界曰楊廣曰慶尙曰全羅曰交州曰西海曰東界曰北界.
이로부터 5도 양계가 양광,경상,전라,교주,서해,동계,북계이다
總京四牧八府十五郡一百二十九縣三百三十五鎭二十九
모두4경,8목,15부,129군,335현,29진이다
其四履西北自唐以來以鴨綠爲限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그 4방은 당 이래 서북쪽이 압록강이 한계이고, 동북은 즉 선춘 령이 경계이다
盖 西北 所 至 不及 高 勾 麗 而 東北 過 之. 今 略 據 沿革 之 見 於 史策 者 作 地 理 志.
대체적으로 서북은 고구려의 영토에 못 미치고 동북쪽은 고구려보다 더 넓다,
이제 그 연혁을 보고 지리지를 만드는 것이다.
<접역전도 얘기>가자미와 가오리를 닮은 조선땅
명나라의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에 있는 <접역전도>는 동서로 천리가 부족하고 남북으로 삼천리가 기형
으로 얼켜있다.
영문(英文)으로 된 해설에는 접역이란 조선의 닉네임(별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접역이란 '가자미'의 모양을 닮은 형국을 말합니다
대명여지도(大明輿地圖)[출전:향고도]
윤몰되기 전의 등주와 사문도의 모습에서 사문도는 넙치에 가깝고, 등주는 가자미과와 유사함을 볼수
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고기의 입이 같이 닮아있습니다.
조선이 한반도로 상륙하기 전의 고조선이 시작된 삼신산이 있던 사문도입니다.
이곳이 고조선의 구평양성이 있던 지금의 장도입니다.
마한땅의 형세는 마치 우럭을 닮은 형국 동서:450리 남북:900여리 (장산군도의 장자도)
당토황여전도(唐土皇輿全圖) [출전:향고도]
만주대륙에서 가장 요지인 요동반도는 요령성 전체가 위치한 자리입니다.
산해관에서부터 책성이 2000여리를 동쪽으로 뻗어 봉황성에서 멈춥니다.
그 책성내의 전체가 가오리를 닮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고조선의 옥저를 비롯하여 한나라때
현도군과 요동군,낙랑군의 동부도위를 거쳐 동옥저와 후한의 낙랑,대방군,낙랑국.동부여등의 땅이었고,
고구려와 신라,백제.발해.거란.여진등의 나라들이 각축을 이루던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가 점유해 있던 영토를 통일하므로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발해와
요나라에게 일부를 빼앗기고 신라가 고려에 흡수됨으로 고려와 후대 조선땅이 되었습니다.
원나라때는 한때 동령로가 되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곳 고려를 중국인들은 가오리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가오리는 문자의 변음보다는 땅의 형국이 마치 가오리처럼 생겼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됩니다.
명나라때 조선이 한반도로 쫓겨난 후로 금,청의 과정을 거칩니다.
*실록에 나온 최초의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세조 5년 기묘(1459, 천순 3) 3월 17일(기해)
행 첨지중추원사 강순 등을 명나라에 보내 사은하는 표문·방물표·전문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강순(康純)·행 상호군(行上護軍) 이석형(李石亨)을 보내어 명(明)나라에
가서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그 표문(表文)에 이르기를....(중략)
황태자(皇太子)에게 사례(謝禮)하는 전문(箋文)에 이르기를,
“우러러 저이(儲貳)에 높이 계시면서 황제의 모유(謀猷)를 가까이에서 도우시며 회유(懷柔)하시는 데
어질고 돈독하게 하시고 황제의 은택을 인도하여 펴시니, 마음에 깊이 새긴들 어찌 그치겠으며,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갚기가 어렵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외람되게 잔약(孱弱)한 자질(資質)로써 멀리 먼 변방(邊方)에 처하여 다행히 성대
(盛大)를 만났으나, 오로지 집양(執壤)의 의례(儀禮)만을 알 뿐인데, 큰 은혜를 잘못 입어서 재사(在笥)의
내려주심을 받으니, 몸을 어루만지면서 스스로 기뻐하고 온 나라에서 크게 즐거워합니다.
이것은 대개 〈황태자께서〉 덕(德)이 갖추어져 온화하고 빛나며, 성품(性稟)이 훌륭하고 위대하여 공(功)
이 황제를 도와 정치하는 데 더욱 나타나며, 마음이 항상 황제를 순종하고 받들기에 간절한 때를 삼가
만나서, 드디어 폐봉(弊封)으로 하여금 남다른 은혜를 입게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마땅히 길이 접역(鰈域)의 번리(藩籬)가 되어 항상 용루(龍樓)에 거듭 축수(祝壽)를 드리겠습니다”
* 접역에 대해서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번역한 정조때의 기록의 풀이에는
정조 12년 무신(1788, 건륭 53) 11월 16일(갑술)
김덕령·김덕홍의 고향에 그들의 업적을 적은 비석을 세우게 하다
전교하였다.
“어제는 이제독사당기(李提督祠堂記)를 짓고 오늘은 임충민표려윤음(林忠愍表閭綸音)을 내렸는데, 김충장
(金忠壯)의 집에 사제(賜祭)하러 갔던 관원이 복명(復命)하면서 그 집에 간직되어 있던 유고(遺稿)와 수적
(手蹟)을 가져다가 올렸으니, 일이 우연이 아닌 듯하다. 그 글을 읽고 그 글씨를 보니 왕성하게 생기(生氣)
가 있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아 한 글자에 한 번씩 감탄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다 읽었다.
일찍이 듣건대 우리 나라는 접역(鰈域)에 위치해서 풍기(風氣)가 국한되었으므로 생각 또한 옹졸한데 거기
다 당사(黨私)를 현자(賢者)와 정인(正人)을 해치는 무기로 삼기 때문에 상대가 먼저 착수(着手)하느냐
내가 먼저 착수하느냐에 따라 연슬(淵膝)이 크게 달라진다고 하기에, 나도 즉시 이런 풍기에 이런 당사마저
있다면 비록 기(夔)·설(契)·관중(管仲)·제갈량(諸葛亮) 같은 인재가 다시 나오더라도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
울 것이라고 하였다.
충장공이 화를 당한 것만이 반대파 소인들에게서 연유한 것일 뿐 아니라 충무공(忠武公)과 충민공(忠愍公)
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몹시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주D-001]접역(鰈域) : 동해에서 가자미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별칭으로 쓰임.
《한서(漢書)》 권25 교사지(郊祀志). ***가자미가 동해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라의 별칭으로 삼았다는
주석은 참으로 엉뚱한 괴변입니다. 가자미가 동해에서만 나옵니까?
다시 위 주석에 나온 접역(鰈域)의 유래가 되는 문헌인 《한서(漢書)》 권25 교사지(郊祀志)를 찾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교본한서(新校本漢書) / 지(志) / 권(卷 )二十五 상上 교사지(郊祀志) 第 五上
[一 五] 師古曰: 「 爾雅云 『 東方有比目魚焉,不比不行,其名謂之鰈 』, 音土盍反.」
주석자 사고가 이르길, 「 이아(爾雅)에 말하기를,『동방(東方)에는 이와같은 비목어(比目魚)-전설상의
외눈박이 물고기-가 있는데 나란히 하지 않으면(짝을 이루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니 그것의 이름을
일러 접(鰈)이라 하였다. 』..... 」
<이아>에서 가자미를 일명 비목어(比目魚)라고 불렀다는것입니다. 비목어도 가자미과입니다.
가자미과에 딸린 바닷물고기는 종류(種類)가 여러 가지인 데, 비목어는 보통(普通)으로 몸이 위아래로
넓적하여 긴 타원형(楕圓形)에 가깝고, 가자미보다 크며, 두 눈이 다 왼쪽에 있고.
몸의 왼편은 어두운 갈색(褐色), 오른편은 흰빛으로, 근해(近海)의 모래밭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가자미같이 타원형을 닮은, 풍기가 국한되고 좁은 지형이 옛날 조선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지형을 찾으면 되는것이지요.상상하시겠습니까? 옛날 조선은 좁아터지고 막힌곳에 가자미
처럼 생긴 지형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렇게 가자미를 설명하는데 형이상학적인 용어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다음은 조선을 가오리라고 부르는 요동사람들의 말을 조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여 조선을 비하하는
말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연행기에 나오는 옥하선진록(玉河旋軫錄)을 봅니다.
○ 병진년(1856, 철종 7) 1월 15일(임신)
눈이 내렸다. 동이 트자 출발했다. 눈을 무릅쓰고 달려 십리하(十里河)에 이르니, 상사(上使)와 부사(副使)
가 막 도착하여 여기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 끝난 후 동행하여 곧바로 요동성(遼東城)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은 130리를 갔다. 눈이 그치고 달이 밝았다. 시가의 현등(懸燈)에 남녀 노소가 모여들어 구경하는데
심양성보다 오히려 나았다. 통구(通衢)에서는 채색 임시 집을 만들고 희극(戱劇)을 베풀었는데, 음악 소리
요란하고 무용 또한 아름다워 한번 볼만하다.
요동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가오리[嘉吾麗]’라 부르니, 그 업신여기고 능멸히 여기는
태도가 다른 데 비하여 심한 편이어서 대개 사행(使行)이 성안에서 유숙하는 예가 종전부터 드물다고 한다 .
‘가오리[嘉吾麗, 嘉吾離]’
화하의 발음{華音}에 고려(高麗)를 가우리[嘉吾麗]라 하니, 고(高)의 음은 가우(嘉吾)이고, 여(麗)의 음은
이(離)이다. 또는 조선(朝鮮)을 접역(鰈域)이라 칭하기 때문에 우리를 접(鰈)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B-001]병진년 : 조선 철종(哲宗) 7년(1856). 청(淸) 나라 문종(文宗) 함풍(咸豐) 6년이다.
夢經堂日史編[五] 達城徐慶淳公善著
丙辰正月 十五日 壬申。
雪。開東發行。冒雪疾馳。至十里河。上副使方到此中火。飯後並行。直入遼東城內。是日行一百三十里。
雪止月明。街路市廛之懸燈。男女老幼之聚觀。反勝於瀋城。通衢上。結綵棚。設劇戲。歌管裊裊。舞袖僊僊。
誠一瓌觀也。遼人見我行。必呼曰嘉吾麗。 慢侮凌蔑。比他甚焉。蓋使行之留宿於城內。從前罕有云。
: 華音稱高麗曰嘉吾麗。高音嘉吾也。麗音離也。又曰。朝鮮稱鰈域。故謂我鰈也。
*이상의 글들을 통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구 조선과 고려의 지형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글을 해석하는데 있어 옳게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하고 있는 대목을 보셨을줄 압니다.
원래의 기록은 정확한 비유이고 설명이었지만 이러한 진실을 알지못하는 사람들이 오해한것입니다.
위의 지도를 통해서 설명드렸드시 동방이 등장하는 비목어 얘기는 장도를 말하는것입니다.
장도는 동방의 일번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록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마한의 형국은 우럭을 거의 100프로 닮은 형국입니다.
다음으로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오리'역시 고려가 점령헀던 요동이었습니다.
고조선은 동서의 폭은 천리가 모자라고, 남북의 폭은 3천리가 기형으로 되어있었다는 접역전도의 설명은
이렇게 풀어보았습니다.
이러한 사료들을 통하여 밝혀지는 고대 조선과 탁장군을 따라 개국한 중마한과 신라의 통일강역을 계승
하여 입국한 초기 고려의 지형들은 이제 기억하고 찾아보기가 훨씬 쉬어졌다고 봅니다.
아직도 고려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드라마들은 개성과 대동강 평양을 벗어나지 못하고 개성의 북쪽에 있는
평양을 서경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제 글을 모르는 문맹자들도 쉽게 찾을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가자미를 닮은 고조선, 가오리를 닮은 고려, 우럭을 닮은 마한등을 찾아 그들과 연계된 주변의 나라들을
찾아보면 고대국가들의 판도를 파악할수 있을것입니다.
오늘도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열심이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계시는 작가님들이나 또 봄철이 되어 열심이
학술쎄미나등을 개최하시는 전문 학자님들이나 가오리가 어떻게 생긴 생선인지나 먼저 공부하시고 지도를
펴놓고 가오리를 닮은 지형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등주성(登州城)은 고려가 1006년에 쌓은 성
2006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산동성 봉래시 등주수성에서 두척의 고려선박이 발굴되었다고 보도하였
습니다. 이 소식은 문화재청에서 정식으로 발표한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선박들은 무역을 하기위해서 들어갔다가 내항에서 좌초된 선박으로 추정된다고 발표 된 것입
니다. 내항은 파도가 일체 없는 인공항인데 거대한 선박 두척이 좌초될 이유가 없없었던것이기에
그 이유를 검토한 결과 전쟁으로 인하여 좌초된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하고 그 이유로 동일한 장소에서
중국측 원대 의 선박도 두척이나 잔해가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내세워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등주성의 축성의 주인이 고려라는 사실입니다.
< 고려도경>의 봉경편에는 고려의 건국이 등주에서 북쪽으로 바라다 보이는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기록과 <고려사>연표에는 등주성(登州城)과 등주 용진진성(登州龍津鎭城)이 1006~1008년 사이에 고려가
쌓았다고 하는 기록이 밝혀진것입니다.
당시의 기사를 통하여 상세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현재 이 봉래수성 즉 봉래각은 중국측 기록으로는 송나라때 건립되었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송나라이전에는 중국측에서 성을 쌓은 사실이 없었다는 진술이 되기도 합니다.
해상강국 고려’ 입증 배 찾았다… 무역선 2척 中서 발굴
고려가 해상 강국이었음을 입증하는 고려 선박 2척이 발굴돼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사료상에 나타난 고려는 중국 일본뿐 아니라 이슬람 국가와의 활발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국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개경에서 수은이나 몰약(방부제) 등을 판매하던 회회(回回·이슬람) 상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료상의 기록일 뿐 그동안 고려의 해상 활동을 증명해 줄 자료가 없어 사학계는
애를 태워 왔다.
28일 언론에 공개된 고려 선박 2척은 중국 산둥(山東) 성 산둥 반도 북단에 있는 펑라이(蓬萊) 시 소재 항구
유적인 덩저우수이청(登州水城) 해안에서 발굴 인양된 것으로 중국으로 장사를 하러 떠났던 14세기 무역선
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5개월에 걸쳐 원·명나라 때 유명 항구였던 덩저우수이청을 발굴하던 산둥 성 문물고고
연구소와 옌타이(煙臺) 시 박물관, 펑라이 시 문물국 소속의 중국 학자들은 중세 무역선 선박 4척을 발굴
했다. 고려 배로 추정되던 2척의 배(펑라이 3, 4호)를 조사하기 위해 한중 공동조사가 이뤄진 끝에 선박
2척이 고려의 것임이 최종 확인된 것.선박의 국적이 확실해진 증거는 크게 세 가지.
첫째, 선박에서 발견된 질그릇이다. 인양된 선박에서는 고려청자와 질그릇 등이 대거 발견됐다.
만약 고려청자만 발견됐다면 고려청자를 구입해 간 중국의 선박일 수도 있겠지만 발견된 질그릇은 중국
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오직 고려의 민간에서만 사용되던 그릇이라는 것.
둘째, 배의 재질이다.
중국의 배는 전통적으로 삼나무와 장목을 많이 썼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소나무를 배의
주재료로 써 왔다. 중국에서는 소나무가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선박의 주재료로 이용
되지 못했다.
셋째, 건조 방식이다.
중국의 선박은 철못으로 이음새를 연결했지만 우리는 나무못을 썼다.
또한 중국의 배 밑은 다이아몬드의 아랫부분처럼 뾰족하게 돌출돼 있지만 우리의 배는 밑이 편평한 이른바
평저형(平底形)이다.
발견된 고려 선박의 길이는 17.2m이고 복원 추정치는 22.6m에 이르러 현존하는 고려 선박 중 가장 큰 것
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려 선박 중 가장 큰 것은 전남 안좌도에서 발견된 ‘안좌선’으로 길이가 13m였다.
조사에 참여했던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김성범 관장은 “지금까지 발견된 선박의 규모로는 고려의 원양
항해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선박은 원양무역을 가능케 할 정도의 크기다”라고 밝혔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target=_blank>polaris@donga.com
역사학계에서 고려시대 연구는 미개척 분야다. 남아 있는 문헌이 별로 없고 중요한 유적이 북한에 주로
있는 탓이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 왕조는 정권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고려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고려시대를 균형 있게 바라볼 기회가 일찍부터 차단됐던 셈이다.
지난해 8월 중국 산둥(山東) 성에서 고려 선박 2척이 발굴되어 학자들을 흥분시켰다.
1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배는 길이 22.6m에 화물 170t을 실을 수 있는, 당시 조선기술로는 초대형
선박이었다. 이 배가 만들어지고도 200년이 경과한 16세기 초, 마젤란이 세계일주 때 사용한 배는 고려
선박보다 작은 130t 규모였다. 고려의 조선기술이 얼마나 앞선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제교역 적극적이었던 해상강국
13세기 후반 고려와 연합군을 만들어 일본 정벌에 나섰던 원나라(몽고)는 ‘원나라 전함은 바다에서 돌풍을
만나 모두 깨졌으나 고려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고 기록했다. 고려가 해상강국이었고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실제적 증거가 없었으나 중국에서 발굴된 선박은 ‘해상 선진국 고려’
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해상무역을 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
과 가까운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중국 배는 물론 일본, 아라비아 배까지 드나들었다.
국내 학계에서도 이 분야 연구가 결실을 보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10년 연구 끝에 최근 펴낸 ‘개경의 생활사’는 벽란도의 번창했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1040년 아라비아 상인들이 수은 몰약 등을 갖고 와서 고려 임금에게서 후한 대접과 함께 금 비단을 받아
돌아갔다.’
고려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개경의 부잣집 여인들은 겉옷은 물론 속바지까지 비단으로
지어 입었다. 남자들의 비단 수요도 적지 않았다. 남자 어른들이 쓰고 다닌 두건은 비싼 비단으로 만든 것
이었다.’
고려는 신라에 이어 상업을 중시했으나 조선은 바닷길을 막는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배를 타고 10리 이상 나가면 왕토(王土·국토)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참형에 처했다.
쇄국 정책은 대원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국제무역은 육로로만 가능했다. 명나라는 외교사절을 통해 이뤄지는 조공무역 이외에 사(私)무역을 불허
했으므로 육로무역이라고 해 봐야 1년에 몇 차례씩 중국을 오가는 사절단을 통한 게 고작이었다.
조선 사회의 불만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유몽인은 “중국과 일본은 활발한 무역 때문에 부강
해진 반면 규모가 작고 자원이 빈약한 조선은 무역을 하지 않아 가난해졌다”고 비판했다.
박제가는 “고려 때는 송나라 상선이 해마다 왔으나 조선은 400년 동안 중국 상선이 한 척도 오지 않았다”
고 개탄했다. 유형원은 “우리나라는 백성이 가난하여 남쪽으로 선박과 접한다면 넉넉해질 것”이라고 제안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기록이 수없이 나온다.
1년 내내 가물다가 7, 8월에 큰비가 내려 모두 휩쓸어 가는 한반도는 농업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한국이 1960년대 이후 ‘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수출무역 덕분이었으니 실학자들의 지적이 옳았다.
대한민국 갈 길, 고려가 이미 보였다
고려시대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고려를 무조건 미화하는 일도 옳지 않지만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고려시대 문화에 대한 평가는 선진국에서 더 호의적이다.
고려 청자와 불화(佛畵)가 호평을 받는 것은 물론 2011년 1000주년을 맞는 고려대장경에 대한 찬사도
그치지 않는다. 문화는 번영한 국가에서 꽃피는 법이다.
한국은 무역의 문을 여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고려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갈 길을
정하는 데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고려도경>봉 경 封境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글안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
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경동(京東)·
회남(희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는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내州)·빈주(濱州)·체주(체州)와 서로 바라다보인다.
지도저본:대청광여도 등주주변도
* 이때 만약 등주(登州)한곳만 기록 하였다면 등주는 함경도 안변에 있던 등주라고 주장하였을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자가 현명하여 산동반도의 북쪽연안에 있는 래주.빈주.체주를 병기하여 당시 사문도의 위치가
혼동되지 않도록 배려를 한것입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사문도가 바다건너로 서로 마주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천여리나 떨어진 요동반도의 북안을 운운하는것은 단연코 통탄을 금치못할 실수가 될
것입니다.(필자 주)
<고려사>연표에 기록된 등주 주변 축성기록 발췌
보기:
*경도 황성,평양성.서경. *등주성.청주성.낙능성외 책성(내원성.의주성등)북방계 장성
*919년 10월 평양성 축조.
*922년 7월 태조 평양에 거동하여,관부를 설치하고,재성(在城)을 쌓게함.
929년 안수,흥덕에 성을 쌓음.
*930년 8월 청주(靑州)에 나성(羅城)을 쌓음.
*947년 4월 서경(西京)에 왕성(王城)을 쌓음.
950년 장청진(長靑鎭),위화진(威化鎭)에 성을 쌓음.
952년 북계(北界) 안삭진(安朔鎭)에 성을 쌓음.
*967년 낙릉군(樂陵郡)에 성을 쌓음.
968년 5월위화진(威化鎭)에 성을 쌓음. 11월,영삭진(寧朔鎭),장평진(長平鎭)에 성을 쌓음.
970년 안삭진(安朔鎭)에 성을 쌓음.
973년 12월 장평(長平),가주(嘉州)등에 성을 쌓고,신도성을 수축.
979년 청색진(淸塞鎭)에 성을 쌓음.
984년 압록강 연안에 관성(關城)을 쌓고,문주(文州)에 성을 쌓음.
994년 서희(徐熙)여진을 물리치고,장흥,귀화의 2진 및 곽주 구주성을 쌓음.
996년 서희(徐熙) 선주,맹주에 성을 쌓음.
1000년 10월 덕주(德州)에 성을 쌓음.
1001년 11월 영풍(永豊),평로(平虜)에 성을 쌓음.
1003년 덕주(德州),가주(嘉州),위화(威化),광화(光化)의 4성을 수축.
*1006년 2월 등주(登州),용진진(龍津鎭),귀성(龜城)에 성을 쌓음.
1007년 흥화진(興化鎭),익령현(翼嶺縣),울진현(蔚珍縣)에 성을 쌓음.
*1008년 통주(通州),등주(登州)에 성을 쌓음.
1014년 1월 궁궐을 신축.
1015년 9월 선화(宣化),정원(定遠),운림진(雲林鎭)에 성을 쌓음.
1016년 1월 선주(宣州),철주(鐵州)에 성을 쌓음.
1017년 12월 안의진(安義鎭)에 성을 쌓음.
1023년 9월 요덕진(耀德鎭)에 성을 쌓음.
1025년 9월 상음현(霜陰縣)에 성을 쌓음.
1026년 2월 순덕(順德)에 성을 쌓음.
*1029년 8월 경도(京都)의 나성(羅城)완성.
1030년 2월 인주(麟州)에 성을 쌓음.9월 영덕진(寧德鎭)에 성을 쌓음.
1032년 1월 북계 삭주(朔州)에 성을 쌓음.
*1033년 8월 유소(柳韶) 북계(北界)에 장성(長城)을 쌓음.
1034년 11월 명주성(溟州城)을 쌓음.
*1035년 9월 서북계 송령(松嶺)의 동쪽에 장성(長城)을 쌓음. 창주성(昌州城)을 쌓음.
*1041년 9월 영원(寧遠),평로(平虜)에 성을 쌓음. 12월 동계(東界),환가(한자지원 않됨)에 성을 쌓음.
1044년 10월 장주(長州),정주(定州),원흥진(元興鎭)에 성을 쌓음.
*1052년 2월 황성(皇城)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신축.
1067년 7월 덕주(德州)에 성을 쌓음.
1068년 12월 남경(南京)에 신궁(新宮)을 창건.
1070년 6월 흥왕사(興王寺)에 성을 쌓음.
1074년 원흥진(元興鎭),용주(龍州),위주(渭州)에 성을 쌓음.
1091년 9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상음현(霜陰縣)에 성을 쌓음.
1107년 12월 여진 점령 지역에 함주(咸州)이하 6성을 쌓음.
1108년 2월 윤관 3진성(鎭城)을 더 쌓음.
*1117년 3월 요(遼)의 내원성(來遠城),포주성(抱州城)을 수복하여,의주(義州)를 둠.
8월 의주성(義州城)을 쌓음.
*1119년 3월 동북 변경의 장성(長城)을 증축.
*1129년 2월 서경(西京)의 새 궁궐 태화궁(太和宮)낙성됨.
*1131년 8월 서경(西京)에 임원궁성(林原宮城)을 쌓고,궁중(宮中)에 팔성당(八聖堂)을 둠 (하략)
맺음 말
등주라는 지명은 한반도의 함경도에도 안변도호부와 함께 있습니다.
고려사에 나와있는 산동반도의 등주성에 대한 기록을 감추기 위해서지요.
만약 함흥지방에 있다는 등주가 진짜라면 강단사학계에서 말하는 발해국의 등주성 공격이 성립이 될수
없는 얘기입니다. 발해국의 남경남해부를 함흥지방에 두었다고 하였으니까요.
발해가 등주를 공격한 시기는 서기 732년이고 백제 영토로 있던 등주를 당나라가 빼앗은 시기는 서기
660년이었습니다.
당시 신라는 발해의 등주공격을 기화로 당나라로 부터 영해군사(寧海軍使)라는 직권을 위임받아 영파.연태.
대련등에 통제부를 설치하고 해안지대의 중요한 요지에 신라방을 설치하여 무역활동을 강화하였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등주와 사문도의 출입항인 청주는 마치 입과 입술처럼 조선족들의 통치를 벗어난 시기가
많지 않았습니다.
낙능군 또한 청주의 서쪽으로 황하의 입해구 주변에 있는 중요한 군사 전략기지었습니다.
따라서 등주성은 고려에 의해서 복원되었다고 하는 고려사의 연표는 신빙성이 있다고 보며 <고려도경>이
주장하는 고려의 건국지는 등주.내주.빈주등에서 마주보이는 건너편에 있다고 하였으니 사문도를 벗어날
수 없는것입니다.
이렇게 엄연한 사실들은 명나라가 집권한 이후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바다밖으로는 10리를 벗어나서는
왕토를 이탈한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한다는 해금령을 내림으로서 나라의 해외무역은 봉쇄되고 400년동안
단 한척의 무역선도 오지않았다는 사실에 억울한 분통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한국은 바다를 자본으로 삼는 거대한 해양국가였습니다.
나라의 이름이 신시(神市)로부터 시작되고 상나라라는 교역을 자본으로 하는 문명국도 바다에서 배출시켰
습니다. 비록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위만이라고 하는 교역의 선구자를 위시해서 해신 장보고와
왕건으로 이어지는 걸출한 인물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곳은 발해해협을 무대로 하는 바다였습니다.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