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19> 서장 (書狀)
허사리에 대한 답서(1)
날마다 일어나 사용하는 곳은 모자람 없이 원만하여 석가나 달마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가 철저히 보지 못하고 투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몸이 소리와 색의 경계 속으로 도망가 도리어 그 속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므로 더욱더 어긋나게 됩니다."
법에서는 부처와 중생도 없고, 돈오와 점수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고, 나와 남도 없고, 진리와 거짓도 없고, 깨달음과 미혹도 없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사람의 정식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혜능 스님은 '법에는 돈점(頓漸)이 없으나 사람에게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잘 살펴보면, 정식(情識) 위에 나타나는 분별상은 늘 생멸(生滅)의 연속적 과정에 있을 뿐, '무엇'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것이 없다. 다만 명칭과 이미지로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고, 실제로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으로서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실상을 알고 보면 분별상이 바로 법이다. 그러므로 실상을 알고 보면, 정식의 분별상으로도 법을 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고 분별상에만 잡혀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법을 전하여도 분별상으로 받아들이니, 법은 전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상을 모르는 사람은 올바른 견해와 틀린 견해, 바른 가르침과 그른 가르침을 파악해내는 안목이 없다. 모두가 동일한 분별상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성인의 말씀도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한다.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별상의 실상을 깨달은 뒤에라야 비로소 분별상의 참된 재미를 알게 된다. 그 재미는 바로 법의 맛이다.
또한 아무리 오묘하고 잘 들어맞는 논리라 하더라도, 아무리 시원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라 하더라도, 어떤 포근 한 안락감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도덕적인 만족감을 주는 행위라 하더라도, 아무리 혹독한 고행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오래 앉아서 눕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식(情識) 위에서의 분별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런 것들이 공부에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생활하면서 매 순간 순간 문득 문득 분별심을 떠나고 정식을 떠나서 세계를 바라보라. 세계는 한 순간의 머무름도 없이 허무하게 흘러가지만, 흐름 그 자체는 한결같이 살아 있음을 볼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삼라만상으로 물결치며 변해가는 세계의 변함없는 바탕을 파악하도록 하라.
'그것'은 어떤 '무엇'도 아니며 '누구'도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으나, 그 무엇보다도 명명백백한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