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생들중 잊지 못할 분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차승남 선생과 우수영 박사는 잊을 수가 없다.내가 고3이던 1967년 8월 하순경이었던것같 다.키가 꺼벙하게 크고 얼굴윤곽이 뚜렷한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저녁 8시경 우리집에 하숙하겠다고 들어왔다.고향 완도에서 친척의 소개로 온 것이다.
차승남선생은 대학시험에서 낙방하고 3년간 군에 갔다가 제대하고 다시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러 온 것이다.악1개월정도 우리집에 있다가 "광주에서는 안되겠다"며 서울로 갔다.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중순쯤인 어느날 새벽에 집에 어느 한 깡마른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나는 생전에 그렇게까지 해골 바가지를 본 적이 없었다.
차승남 선생이었다.그는 상경후 대성학원 근처 독서실에 자리잡고 매일 라면먹으면서 학원과 독서실을 오갔다.그간 한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었다.어느 날 쓰러져서 움직일 수없는 상황이 되었다.그래서 공부고 대학이고 간에 다집어 치우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누님(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들렸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어야.승남이!떨어져도 좋으니까 원서만이라도 내고 고향으로 가게"하고 붙잡았다.그러고서는 한약을 지어서 지극 정성으로 달여먹였고 시험날 조선대 상대에 그야말로 이름만 쓰고 나와서 고향으로 갔다.
얼마후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어머니가 조선대 갔다.기슴조이며 합격자 명단을 보자 거기에는 분명히 "차승남"이라고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팔짝팔짝 뛰며"워따.워따 우리 승남 이가 합격했네.합격 해부랬어라우"하고 옆사람에게 까지 좋아서 소리지르셨다.옆에 있는 아주머니가"대체 누군디 그리 좋아하시우?동생이요?아들이요?" 어머니는 "우리집 하숙생인디라우"했다.그러자,"살다보니 별 사람 다 보겄네.하숙생 합격했다그 저리 좋아하는 사람은 내 생전 처음이네.저렇게 정이 많은 사람도 다 있네"했다.
그랬다.어머니는 정이 그리 많으셨다.차승남선생은조선대를 졸업하고 강진농고 싱업선생으로 재직하다가 서울 영등포여상으로 전근오셨다. 내가 국제결혼사업을 하던 초기 탐문해서 차선생을 영등포역 부근 식당에서 만나 차돌백이에 소주 한잔을 나누고 헤어졌다.그날 우리는 차선생과 친했던 우수영박사 소식까지 듣고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몇년이 지난 오후 5시경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석홍인가?나 우수영인디.나 기억 하겠는가?" "네.기억하고말고요.우박사님!어디십니까?" "지금 교대역인디,혹시 시간되면 나올 수 있겠는가?차승남선생도 나오기로 했어" "나가고 말고요.얼마나 보고싶은 얼굴인데요" 그날 우리셋은 교대역 부근한 정식집에서 밤 늦도록 막걸와 파전을 먹으며 옛날을 추억했다. 차선생은 내내 "내 인생을 바꿔주신 어머니가 그립네.그렇게 빨리 가시다니"하고 가신 분을추억했다.옆에 있던 우수영박사는 당시 목포대학교 공대학장으로
정년이 얼마 안남았는데 상경하면 꼭 전화함세.그때 또 만나세 했다.우박사는 당시 전남대공대에 다녔고 매사에 신중하고 꿈이 컸었고 우리와는 먼 친척이었다. 차선생과는 연령이 비슷해서 더욱 친했다.그때 나는 내모습이 너무 궁금해서 물었다. "형님들 보시기에는 제가 어떻게 보였어요?" 차선생이 대답했다"우리 눈에는 자네는 떠오르는 태양이었지.자네는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어머니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모범생 아들이었지.그런데 우리는 자네가 지금쯤 국회의원이나 장차관쯤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하며 아쉬워 했다.나는 속으로 "관료(감사원)가 싫어 제발로 나외서 제사업을 하고 있고 나름 대로 어느정도 성공해서 만족하고 있는 데요"그랬다.일반적으로 관료를 높이보는 경향때문이라고 생각했다.밤 열시가 넘어 우리는 교대역방향으로 나왔다.가을 밤바람이 취기어린 얼굴에 쌀쌀하게 다가왔다.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건깅하시라고 인사하면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