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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소리와 말가락
송수권
1. 언어의 대활령大活靈과 소활령小活靈
모바일 시대, IT 강국이 되면서 우리 시대는 너무나 발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이 변화된 속도 속에 은폐되거나 소멸 또는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전통문화 속의 고유한 탯말들을 나는 ‘봉인封印된 말’이라 부른다
가령 「왱병」이라든가 「소반다듬이」 등 봉인封印된 말들에 관해서이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용품들인데 기억해 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50~60대 어머니들마저 이런 기억상실증에 있다는 증후군에 대해서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왱병’과 ‘소반다듬이’를 아는 어머니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매일 그 밥상 위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고 촛병을 사용하면서도 그렇다. 2011년 11월 27일에는 마침 아침 방송으로 KBS-TV 특집 ‘名人’ 시리즈에서는
‘나주 소반장’ 김춘식 씨의 나주반을 만드는 공정을 다큐로 재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서막에 나의 시 「소반다듬이」 전문이 걸쳐서 떠오른다. 아직 시집에도 나가지 않은 작품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연이어 몇 통의 전화도 걸려온다. 물론 신세대는 아니다. KBS-TV ‘퀴즈 대한민국’ 구성작가의 전화도 있었는데 나의 시 「남도의 밤 식탁」 중에 나오는 ‘지린 홍어의 맛’이 퀴즈로 나가는 모양이어서 ‘지린’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왔다.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라 했더니 “아, 맵고도 지린 홍어의 맛/ 너와 함께 곁두리 소반상을 들면/ 그처럼 밤도 깊은 남도의 식탁”이란다. 원래는 ‘지릿한’으로 표기했는데 이 출판사 저 출판사에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된 모양이라고 얼버무렸다. 원형은 ‘지리다’, ‘지릿하다’ 등이 맞을 것 같다. ‘오줌냄새’를 표현할 때도 그렇게 쓰기 때문이다. 암모니아(질소)의 그 구릿한 냄새, 즉 홍어가 잘 삭으면 코를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음식이 곰삭으면 이 독특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발효 음식에서만 나는 이 독특한 냄새와 맛은 9천여 개의 미각세포 중 서양인의 혓바닥에는 없는 맛의 영역이다. 특별히 이 맛의 영역을 두고 우리는 ‘발효 미지각 영역’이라고 부른다. 이 곰삭은 맛을 두고 ‘개미가 쏠쏠하다’ 또는 ‘그늘 있는 맛’이라고 표현한다. 이 ‘그늘’이란 말이 판소리로 가면 ‘그늘 있는 소리’ 즉 째진 목이 아니라 ‘옹근목’(수리성)이라고 한다. 수리성이 되지 못한 캄캄한 소리를 남도 사람들은 ‘왱병 모가지 비트는 소리 작작하라’고 ‘퉁’을 주기도 한다. 요즘 소리꾼들의 목은 거개가 ‘째진목’(건넘은 소리)인데 비해 임방울의 소리가 상한가를 치는 것도 이 ‘그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도 품새가 넉넉하면 ‘그늘이 있는 사람’, 시도 깊은 서정이 우러나면 ‘그늘 있는 시’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개미와 그늘은 1차 문화인 음식에서 온 것들이다.
그늘 있는 맛과 시는 우리들의 영혼을 흔든다. 아니 이 그늘에서 한국인의 기질과 성품, 인성 그리고 영혼이 유전자 소인으로 각인된다고 함이 옳다. 봉인된 이 언어에 시의 혼 즉 대활령大活靈이 숨쉬고 있다. 향토색이 없는 표준말은 시의 폭력적 언어에 가깝다. 이는 극단적인 말이긴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 고향 탯말인 ‘웜매, 이 잡것 봐라!’고 했다면 욕설이기 보다는 어깨를 툭 치고 싶은 정겨움의 시적 아우라를 갖는다. 더구나 세계 공통어인 영어만 쓰는 워싱톤이었다면 이 정서는 배가 될 것이다. 특히 신세대의 모바일 언어에는 이 대활령이 죽어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 표준말만을 강요하는 학교교육은 시어로서는 상당히 부적절한 언어임을 실감한다.
왜 이리 좋으냐
소반다듬이, 우리 탯말
개다리 모자 하나를 덧씌우니
개다리소반상이라는 눈물나는 말
쥐눈콩을 널어놓고 썩은 콩 무른 콩을 골라내던
어머니 손
그 쥐눈콩 콩나물국이 되면 술이 깬 아침은
어, 참 시원타는 말
아리고 쓰린 가슴 속창까지 뒤집어
흔드는 말
시인이 된 지금도 쥐눈콩처럼 쥐눈을 뜨고
소반상 위에서 밤새워 쓴 시를 다듬이질하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우리말
오리, 망아지, 토끼 하니까 되똥거리고 깡총거리며
잘도 뛰는 우리말
강아지하고 부르니까 목에 방울을 차고 달랑거리는
우리말
잠, 잠, 잠하고 부르니까 정말 잠이 오는군요, 우리말
밤새도록 소반상에 흩어진 쥐눈콩을 세며
가갸거겨 뒷다리와 하니, 두니, 서니 숫자를 익혔던
어린시절
가나다라 강낭콩
손님 온다 까치콩
하나, 둘 다섯 콩
흥부네 집 제비콩
우리 집 쥐눈 콩
소반다듬이 우리말 왜 이리 좋으냐
― 「소반다듬이」(『퉁』) 전문
시나위(산조) 가락은 호남이 그 발생지로 알려져 왔다. 예를 들면 대금 명인인 이생강의 젓대가락만 보아도 정악 대금보다 산조 대금이 훨씬 매력적이다. 이 산조散調 가락을 흘림기법과 덤벙기법 또는 허튼가락이라고 부른다. 판소리 발생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숨어있다. 동시에 시나위는 민중의 가락이면서 흩는 기법이다. 이생강의 경우 스승 박종기 명인의 대금산조大笒散調에 자신의 창법을 얹어 흩는다.
시 또한 표준말의 정악기법으로는 무미건조하여 파격의 멋과 가락이 생기지 앉지만 토속어의 감칠맛 나는 “그런데”가 아니라 “그런디”나 “그리하였는디”로 갔을 때 노래가 형성된다. 시는 노래의 체계에서 비평의 체계로 넘어왔다고 우김질해보아야 마치 나전칠기에서 사용하는 발색기법인 건칠乾漆에 불과하다. 표준말의 정서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바람과 파도가 잦아들고 잠잔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또한 이 젓대 소리인 대금산조였음은 이미 판명이 났다. 그래서 시나위가락이란 곧 한밤의 달빛을 타고 흐르는 우리 고유 정서에서 온 가락임도 알 수 있다. 한밤중의 그 젓대소리 어찌 열두 시름 깊은 한恨으로 멍든 간장을 끊어 놓지 않겠는가? 이생강의 젓대소리가 산진수회山盡水廻의 맥놀림으로 한밤의 큰굿거리 판에서 징 소리와 한 몸통이 되어 박수무당들이 불어제끼는 그 시나위가락임도 이미 판명이 난 사실이다.
북무남창北舞南唱의 그 남창南唱이란 말은 곧 대(竹)의 숨구멍에서 왔음도 알 수 있다. 시詩로 가면 그것이 곧 ‘구슬리는 말법’이요 ‘눙치는 가락’이 된다. 이것이 또한 서북정서와 남도정서의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인용한 시들에서 ‘신바람’은 곧 남도풍류를 말함인데 남도풍류는 검약과 절제의 정신으로 다져진 즉흥성과 구강성의 멋과 맛의 가락으로 ‘구슬리는 말법과 눙치는 가락’으로 요약된다. 줄풍류(가야금, 거문고, 해금, 아쟁)와 대풍류(대금, 중금, 소금) 중 대풍류는 난세에는 죽창竹槍으로 빛났고 태평성대엔 피리소리로 뜬 것이 남도역사다. ‘문 안에 들어가면 대밭이 있는데 방 안에 들어가면 어찌 난초가 없겠는가?’하는 말은 재인才人들이나 의병들이 그 끼를 자랑할 때 쓰는 말이다. 줄풍류나 대풍류는 고을 원님(목사)을 맞이할 때 삼현육각三絃六角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소개말에서 고형진 교수가 내 시의 정신을 뻘과 황토와 대(竹)의 정신으로 요약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이를 국토의 3대정신으로 해석하는데 내 시는 여기에서 한 치 반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88년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인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시골길 또는 술통」은 황토정신의 표본작이며 99년도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인 「눈내리는 대숲가에서」나 「줄포마을 사람들」은 대(竹)의 정신을 표방하고 「뻘물」이나 「대역사大役事」, 「여름낙조」 등은 뻘 즉 개땅쇠(개+ㅅ+땅+쇠)의 정신을 드러낸 작품들이다. 나는 이 정신을 ‘안땅’ 또는 ‘물둑’의 정신으로 표현한다.
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제주섬에서 겪은 4·3(1948) 사건은 남한과 북한이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을 반대한 민족 하나됨의 정신이다. 이 정신의 연장선에서 아직도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순사건(1948)이며 중음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 대다수의 빨치산들이었다.
소월의 언어에는 언어, 정신, 리듬의 3합에서 볼 때 가락이 승하고 백석의 시에서는 이 토속 전통정신을 갈무리하는 대활령이 진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아쉽게도 이분들의 정서에는 ‘대숲바람 소리’가 빠져 있다. 대(竹)의 남방 한계선은 강릉까지로 보기 때문이다. 표준어는 향토 색깔 언어에 대한 원형적 감각이 빠져있다 함도 여기에 연유한다. ‘왱병’을 ‘촛병’ 또는 ‘소반상’을 ‘식탁’이라고 불렀을 때는 음식맛이 쏙 빠져버린 껍데기 같은 이름만 남기 때문이다. 이 모듬살이 속에 바로 우리 민족정서와 전통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곡선의 상법想法과 소리의 상법 즉 ‘느림의 시학’으로 나름대로 시를 써온 후 시각과 청각에 의존해 왔던 이미지들이 나이들수록 미각과 후각으로 맛과 냄새에 민감해진 것 같다. 이는 다이앤 어커먼이 시의 언어를 ‘침묵의 감각’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시각에 선행되는 본능적인 미각과 후각의 원초적 촉발을 통하여 원형적인 삶을 갈망한 때문일 것이다.
특히 토속적인 원형감각을 지금까지도 고집스럽게 밀고 온 까닭은 표준어보다는 부족방언의 기능이 훨씬 시적 언어라는데 있다. 표준어에서는 언어의 대활령大活靈이 각박한 시대와 더불어 줄어들고 있음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이 대활령을 흔드는 정서는 모어중의 모어인 서북정서와 남도정서가 표본적 언어의 정서로 작용한다.
현대회화에서 처음으로 선線을 의식한 아티스트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로드첸코였다. 그는 색채 회화의 마지노선도 이 선線을 통해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훈더트 바서는 ‘기능주의야말로 범죄며 직선은 선과 도덕에 대한 부정’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선언대로라면 ‘곡선의 상법想法이야말로 힐빙heelbeing의 선이며 생체리듬의 선이다. 여기에 비로소 소리가 숨쉬고 가락이 있다. 이 가락은 곧 느림으로 가는 삶이다.
시로 보면 서정의 운율이며 음악으로 보면 선율이다. 건축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머물 수 있는 선조주의線造主義공법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는 대개 이 ‘곡선의 상법’에서 솟아난다. 나는 이 상법에서 나오는 체험의 소리 50여 편을 모아 『소리, 가락을 품다』로 책을 내기도 했다. 이는 내 詩 쓰기의 코드요 노자가 말한
‘곡즉전曲則全’, 즉 ‘곡선은 완전하다’로서 내 삶의 길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먼 데서 날아와 과녁의 중심을 물고 흔드는 화살이여
주변 감각들은
나의 중심을 허물지 못하고
길들여진 습관적인 말들로는
소리와 냄새 맛의 원초적인 감각을 흔들지 못한다
언어는 시로 형상화되는 것
촛불의 그늘 속에서 한밤의 달빛 속에서
사위어 가는 새벽의 별빛 속에서
애벌레의 울음 같은 시詩들이 탄생한다
비린내가 흥건한 포구의 불빛 속에서
황토흙을 태우는 그 모닥불의 연기 속에서
창호 문발을 치는 소슬한 대숲 바람 속에서
나는 봉인封印된 낱말들을 찾아 개봉한다
드팀전, 싸전, 잡살전, 다림방, 시계전, 어리전, 진전
마른전, 군치리, 물집, 마전, 말감고……
저 수표교가 서 있었던 자리, 정월 보름날은
당나귀 울음소릴 사랑하고
소망교회의 한 장로가 꿈꾸었던 무식쟁이의 청계천을
사랑하고
시의 언어가 시장市場이 되고 공약公約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종로바닥을 싹 쓸어버리고
쥐뿔도 고양이뿔도 전통이라면 찾아 내어
운종가의 봄을 새로 불러 오겠다
육주비전六注比廛의 바글거리는 왈패들과 짝패들
새로 단장한 팻션 거리, 명동 천주당과 투전꾼들
아오개와 배고개 소근개와 마당개들까지 한 통속이 되는……
말춤 속에 현대와 근대가 엇박자로 어수룩하게 맞물리는
강남스타일로
종달새와 뻐꾹새의 울음소리를 키우겠다
시 한줄이 우울증을 치유할 수 있는 프로작 한 알이라도
될 수 있다면
* 소근개와 마당개 : 소근개는 백정의 어린 자식, 마당개는 어른 백정을 말한다.
― 「봉인封印된 말을 찾아서」
위의 시는 내 시의 생성과 소멸을 의미하는 자전적 시론이다. 곡선의 삶, 즉 전통의 경계 너머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옮겨 본 것인데 나는 이런 말들을 일찍이 ‘봉인된 말’ 진짜로 우리의 숨결이 살아 있는 말들로서 ‘남도의 소리와 말가락’에서 구슬리는 말법 또는 눙치는 가락의 토속화된 언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이 말한 대로 전통이라면 시궁창도 좋은 것이다. 동시에 이런 언어들은 백석 시의 보고를 이루며 서북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장곡藏曲을 인식하며 최초로 쓴 시는 「시골길 또는 술통」이고 이후로 나의 시는 이 곡선 즉 소리의 상법에서 흘러나오는 상징기호가 되었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시골길 또는 술통」
2013년 새로 나온 15시집 『퉁』에서도 토속어가 많아진 까닭은 다분히 체질적인 내적 동기가 개입해 있다. 이는 내 시의 언어와 정신인 황토, 대(竹), 뻘의 정서와 정신을 천착, 비로소 남도 정서를 드러내며 서북정서와는 달리 음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통합 체현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지리산 뻐꾹새와 여순사건
새 중에는 울지 못하는 새가 있다. 얼마나 바보스럽고 멍청한가? 어떤 풍경 속에서 깊이 걸리지 못하고 울지 못한다면 얼마나 삭막한 새일 것인가? 대체로 습성이 강한 독수리 같은 놈은 잘 울지 못한다. 제 딴엔 가장 영리한 것 같지만 이따금 우뚝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나르시즘의 천치요 바보같아 보인다. 굴뚝새도 그렇다. 울타리 꿰기나 잘하지 나는 결코 이놈이 우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 이 시대에 울지 못한 놈처럼 불행한 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 뻐꾹새, 이놈은 걸려도 깊이 걸려서 거대한 산맥을 뿌리째 걸고 넘어진다. 걸려도 깊이 걸리고 울어도 진하게 운다. 제 피를 도로 받아 삼키는 이놈의 울음이야말로 나르시즘의 천재다. 울어도 참새처럼 찔찔거리지 말고 깊이 울어라. 저 뻐꾹새 한 마리가 수천 수백의 지리산 봉우리를 다 울리고 가듯이 울타리 가에서 울지 말고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울어라. 이 걸리지 않는 풍경 속에서 깊이 걸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삶이다.
40년 가까운 문학 인생에서 지금까지 열여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위의 글은 첫시집 『山門에 기대어』(1980)에 있는 자서다. 시답지 않은 시들 속에서 ‘울타리 가에서 찔찔거리지 말고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울어라’고 통큰 소리를 하고 출발했던 것 같다. 「지리산 뻐꾹새」는 1978년 발표한 시고 구례중학교 시절에 썼던 시다. 구례산악회의 후원으로 지리산 노고단에서 산상시화전山上詩畵展을 열기도 했다. 그때의 사진이 지금도 산장 벽면에 붙어 있다.
30여 년이 지나서야 나는 다시 이놈의 뻐꾹새 울음을 들을 수 있었다. 격포에서 일부러 집필실을 섬진강 가로 옮겨 왔다. 순천대학교 문창과에 교수직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변산의 뻘속에서 노을에 절어 살다가 이곳 산속에 와 출발점에서 썼던 뻐꾸기 울음을 개인적인 한을 극복하는 역사의 현장인 「빨치산」 투쟁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써진 것이 서사시집 (12시집)인 『달궁아리랑(2010)』이고 후속 작업인 14시집 『빨치산(2012)』이었다. ‘기록이 햇빛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말처럼 지리산과 여순사건이 현대사의 신화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꿈속에서 만났던 그 사람 종적을 알 수 없더니
백무동 골짝 용유담 맑은 물속에 숨어 살고 있었다
겨울 건기乾期를 지나 눈 녹고 봄비에 골짝물 불어나
폭포가 물기둥을 세우면
박치기, 박치기로만 물기둥을 뛰어넘는 가사어架娑魚
봄에만 석 줄의 붉은 띠를 두르고 나온다는 가사어
백무동에서 달궁을 넘고 피아골 청학동을 돌아
삼남의 지붕을 제 집 삼아 한 생애를 다한다 하니
빨치산의 넋들림이라고도 하고 빨치산의 두목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사살된 후 새로 생긴
산천어라고도 한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전생에 죄를 얻어 나처럼
금란가사 한 벌 두르지 못하고
이 산천을 떠돌았던 몽구리 중놈이었던가 보다
근 현대사 이후.
이 산천에 웬 곡비哭婢들 이리 많은지
햇뻐꾸기 벌써 나와 공글공글 반 되짜리 울음 울고
소쩍이는 밤새도록 소탕掃蕩, 소탕掃蕩
한 되짜리 울음 운다
― 「지리산의 봄」
그 외에도 풍류맛 기행으로 써온 음식시를 새로 추스려 13시집 『남도의 밤식탁』(2012)을 상재했다. 이는 한국현대시사에서 서북정서로 쓴 백석의 음식시(150여 종류, 고형진) 몇 편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안타까워 개인 시집으로는 처음 시도해 본 시집이었다. 개인적인 한이 집단무의식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는 허당이라는 말, 이 울타리를 뛰어넘을 때 역사를 작동시키는 ‘역동적인 한’, ‘생기로 피는 한’이 된다는 것은 그동안 시를 써오면서 터득한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섬진강이 네 오줌통이고, 지리산이 네 안방의 이불인 줄 아느냐’고 독설을 퍼부었던 것은 지리산 최후 여전사 빨치산이었던 정순덕이 감옥에서 했던 말이다. 나는 이 두 시집을 쓰고 학교를 정년했고 지리산도 여순사건과 함께 저물어 간다.
2012년까지 연구실을 지키다가 2013년도엔 어초장을 광주 우거로 옮겨 쓴 시집이 제15시집 『퉁』(2013)이었다. 2012년도 『빨치산』으로 김삿갓문학상을 받았고 『퉁』으로 구상문학상을 받았다. 문학인생 40년 고향 언저리로만 떠돌다가 고향 고흥반도에 바치는 16시집 『사구시의 노래』(2013)를 연말에 간행했다.
광주 우거에 돌아와 나는 지금 또다시 『빨치산』에 이어 4·3사건을 구상하고 있다. 이는 『새야새야 파랑새야』(1987)의 동학혁명, 그리고 5·18 사건인 제3시집 『아도』(1985), 『달궁아리랑』(2010)과 『빨치산』(2012)을 잇는 현대사의 복원이다. 서정시에 역사의식이 빠지면 가락과 소리만 남고 맥빠진 감상만 남는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한恨을 극복하는 부활의 힘이 솟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어트는 ‘25세에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시인은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문학 인생 40년에서 내가 확인한 키워드는 이 부분이 될 것 같다.
(문학의 집·서울강연. 2013년 8월)
-----애지, 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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