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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22차 (2024. 04. 13∼14) - (4)홍주순교성지 |
2024 .04. 14(일)
어렵게 구한 숙소에서 비교적 잠은 잘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정을 조금 바꾸었다. 원래는 대흥 봉수산성지에 먼저 갔다가 홍주 성지에 와서 주일미사에 이어 홍주 성지순례를 하고 점심식사를 한 후 해미 성지로 갈까 했는데 홍주 성지를 먼저 보기로 했다. 이유는 홍주 성지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아침 일찍부터 순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전시관이 있거나 야간에 문을 잠그는 성당은 그렇게 일찍 문을 열지 않기에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일단 07시에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 인근 거리에 나갔더니 이곳이 모텔이 많은 지역이라 예상대로 어렵지 않게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전주 콩나물 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24시간 운영하는 편이식당이었다. 식사 후 다시 숙소에 돌아와 짐을 챙겨 08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숙소를 나서서 홍주 순교성지인 홍주 읍성에 도착하니 8시 반쯤이었다.
홍주 순교성지 - 내포 중심관아를 적신 순교자의 붉은 피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110-6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37-1 (홍주 임대 건물 성닫)
홍주 - 충청도 충절의 고장
조선시대 충청도 서북부 내포지역에 위치한 홍주목(洪州牧, 지금의 홍성군)은 지역 방어와 행정의 중심지였기에 정3품 목사(牧使)를 두어 5군 22현을 관할했다. 그리고 한때는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하기도 했다. 이는 충청도 동북부(지금의 충북)의 청주와 서남부의 공주와 더불어 충청도를 삼분할 정도의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충청도 중에서도 양반세가 강하면서도 굳은 충절을 보여주는 인물이 많이 태어나 나라가 잘못될 때는 이를 바로 잡으려는 기질이 강했던 고을이었다. 고려시대 최영 장군이 그랬고 조선시대에는 사육신 성삼문의 충절이 빛났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청도 지역에서 최대 규모로 의병이 일어났던 고을이었다. 한말 나라를 빼앗겼던 때는 독립운동의 거장 중 한 명인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 독립지사 만해 한용운 등을 비롯한 여러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고을이도 하다.
서해안 방위의 핵심이 되었던 조선시대의 홍주성은, 왜구를 막기 위해 고려시대 때부터 이미 쌓았다고 하는데 추정되는 성곽의 규모는 1,772m에 달한다. 여러 차례 보수와 확장을 거친 홍주성은 지금도 약 810m가 남아있어 당시의 홍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성내 35개 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양문(朝陽門)과 관아의 동헌 안회당(安懷堂), 홍주아문(洪州衙門), 여하정(余何亭)뿐이다. 이들 건물에는 1870년 흥선 대원군이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 등의 현판을 내렸으나 지금은 모두 일실되었다. 1972년 홍주성 유적지는 국가지정 사적 제231호로 등록되었다.
홍주의 순교 현황
홍주 지역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전해져 많은 교우들이 신앙을 지켰던 곳이었다. 홍주에 인접한 북쪽 지역인 삽교천 부근 당진, 아산 지역에 많은 교우촌이 밀집되어 있음도 이를 말해준다.
내포지역에 교세가 강했던 만큼 박해시대에는 많은 교우들이 관할 지역에서 체포되었고 홍주는 상부 행정기관으로서 이들 체포된 천주교도들을 인계받아 구금, 고문, 재판, 처형의 순서를 밟아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당시 홍주는 관찰사 감영이 있는 공주에 다음 가는 순교지였다. 기록상으로 홍주의 순교자는 이름이 밝혀진 숫자만 212명에 이르며 무명의 순교자까지 포함하면 이들의 몇 배에 이른다. 이는 우리나라 성지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가 황새바위성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라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초기교회의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을 살펴보면 홍주의 초기 박해(1791-1801년) 때의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중기 박해(1812-1839년) 때는 이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후기 병인박해 기간에는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했다.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 순교자는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홍주 관아의 관변 기록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아 더 이상 구체적 상황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교회 순교록에 의하면 홍주의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공식적 처형 방법 이외에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행형으로 희생된 순교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감옥에서 재판을 받는 중 고문이나 아사로 죽기도 했고 죽기 전이나 또는 죽어서 성벽 위에서 던져지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시체 처리를 손쉽게 하기 위해서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이 생매장은 이웃한 해미 성지와 홍주 성지의 두 곳에서만 확인되는 잔인한 행형 수법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직 천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성안에 걸어 들어갔다가 성벽 바닥에 내던져지거나 차디찬 흙더미 속에 묻혀 시체조차 인멸되었다.
읍성 안에서 형벌이 집행되었던 곳은 다음과 같은 6곳으로 확인된다.(안내도 참조)
1. 홍주 관아의 동헌
2. 관아의 감옥터
3. 조양문 앞, 진영장이 머물렀던 진영 관아
4. 조리돌림을 했던 옛 저잣거리
5. 북문교 건너 월계천변 참수터
6.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생매장터
이렇듯 홍주 성지는 관아가 있었던 홍주읍성을 시작으로 시내 곳곳에 성지가 흩어져 있어 관아의 고목과 무심하게 흐르는 월계천이 증인이 되어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상을 그대로 전해 준다.
홍주 관아
일단 성벽 따라난 길에서 멀찌감치 위치한 주자장에 주차를 하고 성벽 아래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홍주가 낳은 인물 흉상(胸像)을 보며 걸어서 성 입구 통행문을 지나 읍성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관아지역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을 갔다가 홍화문, 홍주성 역사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을 거쳐 바로 감옥 가까이 있는 성지성당을 가기로 동선을 잡았다.
홍주아문(洪州衙門)
읍성 관아 터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홍주아문이다. 홍주아문은 정3품 홍주 목사가 근무하는 정청인 안회당의 바깥문이다. 이 문은 1870년(고종7년)에 목사 한응필 목사가 홍주성을 수축할 때 지은 건물이다. 현판은 대원군이 써 주었다는데 지금은 그때의 것이 아니다. 5칸의 문인데 가운데는 솟을문으로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올렸다. 솟을문은 그만큼 관청의 위엄을 나타낸 건축 형식이기도 하다.
이 문을 들어가면 지금은 옛날의 관청 대신 홍성군청이 자리 잡고 있다. 마당의 노거수가 장난이 아니다. 엄청 크다. 홍주 고을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증인이다.
안회당
안회당은 조선시대 충남 서북부를 관할하던 홍주 목사의 근무 정청인 동헌이다. 22칸이나 되는 대형 목조건물로 숙종 때 처음 지어졌으나 고종 7년에 다시 지었다. 안회당(安懷堂)이라는 이름은 논어에서 따왔다. 공자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스승의 생활신조를 물었는데 공자가 그 질문에 답한 것으로 “노인을 마음 편하게 해드리고 친구에게 믿음을 주고, 젊은이는 품겠다.(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고 한 것이다. 그래서 安懷堂이다. 지방 수령으로 노인을 공경하고 젊은이를 이해하고 품어주겠다는 지방 행정관의 포부가 들어있는 당호다.
마침 바로 앞 건물인 군청사 도색 작업으로 거대한 사다리차 장비가 설치되고 있어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장비가 나오지 않도록 찍다보니 건물 정면 찍을 수 없다.
여하정((余何亭)
여하정은 안회당 후원 연못 안에 있는 정자로, 조양문, 안회문, 홍주아문과 더불어 홍주읍성 안에 남은 몇 안 되는 건물이다. 1896년(고종 37년)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옛 청수정(淸水亭) 자리에 세운 것이다.
여하정
정자는 육각형 나무기둥 6개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기둥에는 오언시가 주련으로 기둥 하나에 각각 2개씩 12구절이 걸렸다.
余方有公事 내 바야흐로 공무를 시작하여
作小樓二間 조그마한 누각 두 칸을 지었도다.
懷伊水中央 연못의 물은 중앙으로 맴돌고
樹環焉泉懸 나무가지는 샘가에 걸려 있노라.
開方塘半畝 수문을 열어 반 이랑 정도 물을 대놓으니
九日湖之湄 햇빛에 비친 연못의 물살이 아름답구나
一人斗以南 남쪽은 나 하나면 족하지만
捨北官何求 북쪽을 다스릴 관리는 어디서 구하리오.
環除也皆山 물에 둘러싸인 곳 모두가 산인데
於北豈無隹 이 북쪽엔들 어찌 새가 살지 않으리,
賓主東南美 손님과 주인이 동남에서 와서 아름답게 만나니
其必有所樂 반드시 즐기는 바가 여기에 있도다.
나오는 길에 홍주 순례길 동헌터 기념비와 안내문을 보며 홍주 역사관으로 이동했다. 이곳 순례길 안내는 대체로 기념비와 안내판, 그리고 순교와 관련된 조각품 하나가 한 세트로 되어 있다. .
홍화문 가는 길
홍화문(洪化門)은 홍주 읍성의 남문(南門)으로 소실된 것을 2013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했는데 지금은 가림막을 치고 또 보수 중이다. 그래서 자료 화면 하나로 대신한다.
홍화문 앞쪽으로는 조선시대의 비석거리가 있고 읍성을 정리할 때 나온 많은 석재들을 모아 두었는데 사찰 부재가 많다.
홍화문 앞쪽의 비석군은 원래 동문인 조양문 앞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옯긴 것이다. 이 비들은 조선 중기 홍주 목사를 지낸 다섯 분, 경심, 김희신, 윤동원, 유의, 변시익의 선정비이다.
아마도 홍주성을 쌓을 때 인근 지역에 있는 절터의 남은 부재를 많아 가져와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연화문 불상대좌 같은 것은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근처 잔디밭에는 근래에 세운 홍주정(洪州亭)이라는 정자도 있고 한글 기문 현판도 걸렸다.
홍주성 역사관
1911년 개관한 홍주성 역사관은 ‘하늘에서 북이 떨어진 천혜의 명당’이라는 뜻인 ‘天鼓落地(천고낙지)의 땅 홍주’라는 주제로 홍성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찾아보는 역사의 공간이다.
또한 홍성이 배출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이 남긴 자취를 다듬어보는 곳이기도 하다. 홍주 보부상의 활동과 유품, 천주교 박해 자취, 홍주와 의병, 한말의 독립운동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천년의 역사를 함께 느낄 수 있다.
▲국내 유일의 홍성 연산서씨의 석재 족보 - 홍부 구항촌에 암벽을 깎아 만든 석고에 석재 족보가 보된 되어 내려왔는데 1996년에 후손에 의해 공개되었다.
▲성삼문의 신주를 옮길 때 쓴 요여 - 요여(腰輿)는 작은 가마이다. 홍성 노은서원이 철폐되자 성삼문의 신주를 후외손 무안박씨 문중의 요여로 신주를 옮길 때 사용되었다.
▲홍가신 가족 목상 - 홍가신은 이몽학의 난으로부터 홍주를 지켜낸 인물로 민간에 신격화되었다. 홍주 사람들은 백월산 정상에 사당을 짓고 홍씨 가족의 목상을 만들어 매월 정월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홍주의 대표적 무반 가문 담양 전씨 영정 - 형제의 이름은 전일상 전운상이다.
▲권상하 간찰 (簡札) -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화양서원을 마을 안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해달라고 역참 관리에게 부탁하는 서찰이다.
▲기호학파 유학의 큰 별 남당 한원진 - 한원진은 송시열, 권상하를 잇는 기호학파의 적통이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다르다고 주장하여, 같다고 주장하는 이간(李柬)과 대립하였다. 전자의 주장을 호론(湖論), 후자의 주장을(洛論)이라고 한다.
▲무관 노상추의 천주교 박해일기 - 노상추는 신유박해시 홍주영장으로 천주교 박해상활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사악한 무리들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박해별 천주교 순교자 명단과 숫자
▲홍주 의병의 전개와 유산
▲홍성 출신 김좌진의 시
▲홍성의 의로운 역사 뼈아픈 역사
감옥 터
홍주 감옥은 박해기간(1790-1869) 동안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113명이 탄생된 곳이다. 이곳에서는 교수형이 제일 많았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옥중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최고의 고통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고,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은 투옥자들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저를 위해 온 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이제는 제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바칩니다.”
이는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의 마지막 신앙고백이었다.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순교자 중 초유로 동사(凍死)시킨 것이다.
홍주 감옥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잠시 갇혀있던 곳이며, 또한 성 다블뤼 주교와 성 오메트로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카가 처형되기전에 갇혀있던 곳이기도 하다.
세 칸의 감옥에는 각각 죄수와 형리들의 모형들이 만들어져 있다.
옥사 바깥에는 우물이 있다. 그런데 안내문을 보니 이 물은 지금도 마시는 물로 음용수로 적합하다는 수질 검사서가 붙어있다. 목마른 김에 한 잔을 마시니 물맛이 매우 좋다.
홍주 성지 성당
지금 홍주 성당은 일반 건물에 세들어 곁방살이를 하고 있다. 지금 저잣거리 성지 부근에 건물을 사서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데 다음 달이면 입주를 한다. 그러기에 지금 성당은 작고 초라하다. 건물 정면에 성지 사무실이 있고 그 오른쪽 측면에 성당이 있다.
성당 안은 매우 단촐하고 벽에는 홍주지역 순교자 명단과 홍주 순교복자 네 명의 사진이 걸렸다.
원시장 베드로 (1732-1792)
충청도의 첫 순교자 원시장이 홍주 옥터에서 순교한다. 55세 때 천주교를 믿고 끊임없이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여 하루 동안에 무려 30가구나 입교시키기도 했다. 정작 자신은 체포되어 신해박해 때 옥중 세례를 받았다. 나이 50세 때였다. 추운 겨울 끼얹은 물에 얼음덩어리가 되어 숨을 거둘 때에 “저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봉헌합니다.” 라고 봉헌기도를 바치며 충청도의 첫 순교자가 탄생되었다
방 프란치스코 (?-1799)
감사(監司)의 비장(裨將)까지 지낸 방 프란치스코는 교리를 실천하는데 비상한 열정을 가졌다. 그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를 받고 슬퍼하는 동료에게,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사또가 마지막 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슬퍼만 하오. 만일 우리가 천당 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리오.” 하며 함께 옥고를 치른 후 순교하였다.
박취득 라우렌시오 (1769-1799)
박취득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심문 중에도 천주교를 전하며 “인생이란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인생을 나그네길이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리를 부러뜨리고 곤장을 1천4백대나 맞았으며, 8일 동안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으니 목을 매면 죽을 거요” 하니 형리들은 그를 새끼로 목을 졸라 죽였다.
황일광 시몬 (1757-1802)
홍주의 천한 백정집안의 출신으로 태어나 진심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실천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행실로 교우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죽은 후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하였다.45세의 나이에 태어난 고향 홍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자신 안에 평등과 자유를 실현한 순교자로 칭송이 이어지고 있다.
홍주의 순교터 6곳 중 이미 관아 내의 동헌과 감옥터 두 곳은 순례했다. 이제 남은 곳은 진영터,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이다. (안내도 참조)
성지성당의 교우 자매님 한 분을 만나 앞으로 가야할 네 곳의 위치를 설명 듣고 미사 시간이 많이 남아 이들 성지로 차로 이동을 했다. 진영터는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진영터
조선 시대 홍주의 동헌은 두 곳이다. 서쪽에는 문관인 목사(牧使)가 다스리는 동헌 안회당이 있었고 동쪽에는 무관이 다스리는 군사 진영(鎭營)의 동헌 경사당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진영을 관장하던 진영장(鎭營將)은 군사권과 죄인을 잡는 포토사(捕討使職)을 겸하였다.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 시에는 수많은 신자들이 여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다리뼈는 부러졌으며 살점은 형리에게까지 튀었고, 등뼈는 부셔져 밖으로 튀어나왔다. 죽을 때까지 때리는 장살이 이루어지고, 백지사(白紙死)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홍주는 가장 참혹한 형벌이 이루어진 곳이다.
배교한다는 한 마디만 하면 살려준다는 유혹으로 신앙인을 위협하였으나 순교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여기서 순교했던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죽음을 당할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순교자의 이러한 용덕(勇德)은 자연스럽게 후세에 이어졌다.
지금은 이곳은 한국통신(KT)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그 옆에 비집고 기념비와 안내판, 그리고 장살과 백지사와 관련된 조각상이 서 있다. 그리고 홍주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조양문이 바로 뒤쪽에 있어 증거자로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
원래 홍주 읍성에는 동문 조양문(朝陽門), 서문 경의문(景義門), 남문 홍화문(洪化門). 북문 망화문(望華門)이 있었다. 모두 1870년(고종 7년)에 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세웠다. 이중에서 남은 것은 조양문 하나뿐이다. 사형을 집행했던 곳은 북문 밖이었는데 천주교 박해시에는 천주교도가, 그 후에는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 역대 목사(牧使)나 영장(營將)들이 누각에 올라 이를 감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성문 주위 곳곳에 항일 의병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후 일본에 의해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었다.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하였으나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되었고 1975년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저잣거리
저잣거리 터는 당시 성내에서 가장 번화했던 장터로, 진영장이나 목사의 동헌, 옥사로 끌려가기에 앞서 신자들이 조리돌림을 당한 곳이었다. 손과 발을 묶이고 발가벗긴 채 ‘사학죄인’라고 쓰인 팻말을 목에 걸고 끌려 다니며 모욕을 당했다.
“저 놈이 천주학쟁이다.”고 소리치면서 욕설을 하고 침을 뱉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인내와 신심으로 이를 이겨내고 순교의 길을 갔다.
저잣거리 역시 진영 터와 마찬가지로 길가에 기념비와 안내판이 있고 진영터의 형벌 조각상 대신 조리돌림 조각상이 서 있다.
다음으로 참수터를 가는데 찾기가 어려워 시간을 많이 끌었다. 주민을 만나 물어도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 사람에게 조선시대 감옥터를 물으면 그 위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자기와 관련이 없으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결국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오는 등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참수터를 찾을 수 있었다.
참수터
북문 밖 월계천변인 이곳은 예로부터 홍주 관아에서 사형을 받은 죄수들이 참수형을 받은 곳이다.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북문교 건너자마자 직진하지 않고 바로 우회전하여 조금 가면 된다. 조금 앞서도 이 부근에 왔으나 다리를 건너 그대로 직진하여 통과해 버렸기에 못 찾은 것이다. 순조롭게 참수터를 못 찾은 이유는 교통표지판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참수된 대표적 순교자는 신유박해 (1801)때 순교한 복자 황일광 시몬이다. 124위 약전에 기록된 대로 황일광 복자는 천민 중 천민인 백정 출신이었지만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여 박해를 피해 다니며 살다가 한양에서 체포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고향에 보내어 처형하여 그곳 백성에게 경각심을 주어라고 판결하였다. 이른바 해읍정법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이곳에서 순교의 칼날을 받게 되었다.
그는 천민 출신임데도 불구하고 은총의 힘으로 신분을 뛰어넘는 숭고한 용덕과 신심을 보여주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이름을 증언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는 ‘살아서는 지상 천국’을, ‘죽어서는 내세 천국’을 살았다.
병인박해 때에도 여기서 유 마르타 순교자 외 많은 교우가 여기서 참수형을 받았다. 참수터에도 진영터와 저잣거리에서처럼 순교비와 안내판, 그리고 여기서는 황일광 시몬 참수 장면이 조각판으로 서 있다. 그런데 여기는 꽃길 조성에 쉼터도 있다.
미사 시간이 다가와서 원래는 대흥 봉수산 성지에 가서 주일미사를 드릴려고 했으나 홍주에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홍주 성지성당 가서 미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당으로 향했다. 오는 도중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가 있는 공원을 지나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성당에 와서 미사를 참례했다.
주일미사
주일미사라고 해야 교우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미사보다도 더 엄숙 진지했으며 신부님도 강론 준비를 많이 하신 듯 충분한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미사 후에는 배부된 순례자의 기도와 홍주 성지 순교자를 위한 기도문을 함께 바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빈 물병을 하나씩 배부하길래 무엇 때문인가 했더니 바로 성당 앞 감옥터 우물물을 담아가라는 뜻이었다. 순례객들에게 생명수도 되고 신앙수도 되는 선물이라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시 우물터에 가서 물을 담아왔다.
미사 후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 한 곳 남은 순교터 합수머리 생매장터로 향했다.
합수머리 - 생매장터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 때 너무 많은 내포의 천주교인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자 그 대응책으로 일부 천주교신자들을 생매장한 곳이다. 이곳은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가장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서 교우, 신자들을 생매장하거나 시신을 이곳에 버리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여기서 생매장으로 순교한 순교자는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이며 이들뿐만 아니라 당시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참혹한 순교 현장이다.
생매장터는 2008년 3월에 이르러서야 순교성지로 재조명되어 홍주 순교성지 기념비와 제대가 세워졌다. 순교비 앞면에는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뒷면에는 ‘이곳 홍주골은 믿음을 지킨 성지로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이 숭고한 넋은 평화의 빛이 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순교비 옆 표지석에는 ‘이곳은 순교의 정신으로 내 나라 내 고장 홍주의 얼을 견고히 하는 거멀못이 될 것임에 삼가 순교자를 현양하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최근엔 조각가 고영환(토마스, 56)씨가 3년에 걸쳐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생매장 터에 세워져 순례자들의 기도 공간이 되고 있다.
십자가의 길
12시 반이 다 된 시간 이제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