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1. 서안에서 낙양으로 - 낙양의 역사
BC 770년 역사무대 등장…천년간 대륙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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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 |
사진설명: 중국불교 최초 사찰로 알려진 백마사. 축법란스님과 섭마등스님이 백마에 경전을 싣고 와 백마사에 머물렀는데, 사찰 정문엔 경전을 싣고온 백마를 조각한 백마상이 서 있다. |
천년고도 서안에서 3박4일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보낸 뒤인 2002년 10월7일 오후. 서안을 출발해 또 다른 천년고도 낙양으로 출발했다. 서안에서 낙양까지 거리는 대략 350km. 아스팔트 깔린, 서안 - 낙양고속도로는 대단히 좋았다. 가을을 맞은 주변의 경치도 흥취를 더했다.
서안과 함께 ‘중국의 2대 고도’로 명성이 자자한 낙양은 어떤 곳인가. 오후의 나른한 햇살과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함께 맞으며 낙양의 역사를 떠올렸다. 황하 지류인, 중국 하남성 서부 낙하(洛河) 유역에 위치하는 낙양은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화북평원(華北平原)과 위수(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장안(지금의 西安)과 함께 중국 역사상 자주 국도(國都)가 된 곳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낙양이 역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 하, 은대 낙양 부근이 수도로 된 적은 있었지만 - 기원전 770년 주나라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부터다.
이에 앞서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낙양을 동방경영 기지로 정하고 축성했으며, ‘낙읍(洛邑)’으로 불렀다. 그러다 기원전 770년 주왕조가 현재의 섬서성(陝西省) 호경(鎬京)에서 낙읍으로 천도하자, 낙양은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했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조위(曹魏), 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후한 시절 도성 규모가 ‘남북 9화리(華里. 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에 ‘구륙성(九六城)’으로도 불렸다.
‘낙읍’으로 시작된 도시 이름은 전한(前漢) 때 ‘낙양’으로 개칭됐다, 25년 후한이 국도로 정하며 낙양으로 확정했다. 낙양을 무엇보다 유명하게 만든 왕조는 북위. 북위(北魏)가 화북지방을 평정하자, 효문제(孝文帝)는 493년 산서성 대동(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했다. 호수(戶數) 약 11만, 불사(佛寺) 1,378곳을 헤아렸던 당시 낙양의 모습은 양현지(楊衒之)가 저술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잘 나타나 있다.
5~6C 낙양모습 ‘낙양가람기’에 잘 묘사
가사협의 〈제민요술〉, 역도원의 〈수경주〉와 함께 북위 시대 삼대 걸작으로 꼽히는 〈낙양가람기〉는 양현지가 547년 “폐허가 된 낙양을 둘러보고, 낙양의 이야기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 저술한 책. 이 책은 “단순히 5세기말 6세기 초 낙양의 사정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까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낙양가람기〉가 다루는 시기는 북위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493년부터 도읍을 ‘업(현 하북성 임장현 서북쪽)’으로 천도한 534년까지의 40여년. 당시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 삼국은 모두 남, 북조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 중국문화 수입에 적극적이던 시절이었다. “삼국 중 가장 늦게 통치체제를 완비한 신라는 법흥왕에 의해 율령이 반포되고,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약 120년간에 걸친 화북의 분열(오호십육국 시대)을 평정한 북위는 389년 선비족 탁발부(拓跋部) 출신의 탁발규가 세운 왕조. 주지하다시피 북위의 화북 통일 이전, 화북지방은 한족 이외 다섯 민족(흉노, 갈, 강, 저, 선비)이 쟁패를 다투고 있었다. 왕조 건국 이후 세력을 점점 넓힌 북위는 439년 태무제(太武帝) 때 화북 전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493년 도읍을 낙양으로 옮겨, 낙양을 가장 발전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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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마사 제운탑 옆에서 쉬고 있는 스님. |
화북지방 통일 이후 북위는 중국 대륙 통일과 완전한 통치를 위해 강력한 한화(漢化)정책을 실시했다. 분란의 소지가 있는 피정복민들을 수도 근방으로 대거 이주시키고, 종래의 유목민을 농경화하여 부족장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나아가 한인 귀족들을 정치에 참여시켜 유목 국가의 성격을 탈피한 ‘중국식 전제 국가’로 전환하고자 했다. 왕실의 성도 탁발씨에서 원(元)씨로 바꾸었다. 그러나 한화정책은 탁발족이 차지하던 권력의 일부분을 한족들에게 이양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한화정책 추진과정에서 자연스레 ‘소외 세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외된 선비 귀족과 북방 군진 병사들은 점차 불만을 갖게 됐고, 산서성 서북부 일대에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주영(爾朱榮)’은, 효명제가 후사 없이 죽고 호태후가 세 살 밖에 안된 ‘교’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전면에 등장해 효장제를 옹립했다.
옹립된 효명제는 이주영 세력이 커나가는 것을 항상 불안하게 여겼다. 결국 효장제가 이주영을 죽이자, 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가 거병해 효장제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황제를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한 이주씨에 대한 반항운동이 고건(高建) 등 하북 각지의 명족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회삭진 출신의 고환(高歡)과 연합하여 ‘이주조’를 섬멸했다. 고환은 ‘효정제’를 세우고 수도를 ‘업’으로 옮겨 534년 동위(東魏)를, 무천진 출신의 ‘우문태’는 장안으로 달아난 ‘효무제’를 받아들였다 그를 죽이고 535년 문제를 세워 서위(西魏)를 각각 건국했다. 이후 우문씨를 대신해 서위의 권력을 이어받은 수나라(581~618) 문제 양견이 589년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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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낙양 옆을 흐르는 낙하. |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인 605년, 병란으로 황폐한 북위의 낙양성 서쪽 15km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로운 성을 건설하고, 낙양을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다. 이것이 현재 낙양의 전신이다. 수나라를 이은 당(唐)나라도 부도 낙양의 지위를 인정하고 ‘동도하남부(東都河南府)’라 불렀다. 다시 말해 서쪽 장안이 ‘정치도시’였다면 동쪽 낙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산이 집산되는 장소로 번영을 누렸다.
낙양은 그러나 755년 일어난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망하며 시작된 ‘오대(五代)의 혼란’ 땐 후당(後唐)의 국도가 되고, 북송(北宋) 때까지만 해도 서경(西京)으로 불렸으나, 원(元), 명(明), 청(淸)대엔 지방 도시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다 중화민국 시대 한때 하남성 성도(省都)가 되고, 1933년 남경(南京)정부가 이곳으로 이전해 오기도 했다. 결국 1948년 시(市)로 승격된 낙양은 현재 정주(하남성 성도)와 더불어 ‘하남성의 2대 공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성주풀이’ 노래와 북망산으로 더 유명
사실 낙양은 ‘천년고도’보다,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이라는 김세레나가 부른 노래 ‘성주풀이’로 우리에게 더 알려져 있다. ‘성주풀이’ 노래 가사 1~2절 전문은 다음과 같다.
에~ 에헤 에헤 에헤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인데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거들거리며 놀아보자
에헤라 만수 에헤라 대신이야.
에~ 에헤 에헤 에헤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반갑네 반가워 이화춘풍이 반갑고
더디구나 더디구나 암행 행차이 더디구나
남원 옥중에 수절이 들어 더허 도덕이 되었구나
에헤라 만수 에헤라 대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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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마사 내에 있는 섭마등스님 무덤 앞에 있는 비. |
낙양은 또한 북망산으로 유명한 도시다.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간다는 북망산이 있는 도시가 바로 낙양이다. 북망산은 물론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이곳에 왕성을 쌓은 이래,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 북위(北魏), 후당(後唐)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 번창했던 낙양엔 수많은 귀인, 명사들이 살았다.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혔는데, 특히 한나라 이후 역대 제왕,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북망산에 많다.
이런 연유로 어느 때부터인가 ‘북망산’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됐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통하고 있다.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현재 북망산 주변엔 논밭이 생기고 목장도 들어서 있는데, 막상 가보면 북망산은 ‘산’이라기보다 ‘구릉’이나 ‘언덕’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음호엔 낙양과 중국불교 전래를 다룹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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