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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문화대혁명 - 5
ㄱ.2월 역류-국무원의 담진림, 이선녕, 서추리등이 문혁에 반대하여 주은래의 중재에 의 하여 담진림만이 실각한 사건 ㄴ.무한사건-무한부대 사령원인 진재도는 무한에서 정부측과 위병사이에 발생한 무투를 진 압함에 있어서 중앙 문혁 소조에 연루되어 있는 일파를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 가 있자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사부치, 왕력<문혁소조원>을 체포하였는데 주 래의 중재로 석방된 사건 (4)삼결합과 극좌파의 출현 -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부각된것이 ‘삼결 합,’ ‘혁명위원회의 구성’이었다. 1967년 7월 무한사건이 일단락 된 후 1968년 초까지는 중 국의 각처에서 벌어졌던 무투는 크게 수그러들고 중국내부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는데 이 는 삼합을 내포하는 균형, 타협의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ㄱ.삼결합- 대중<조반>의 대표. 군의 간부, 혁명적인 정부와 당의 간부로 구성된 것. 따라서 삼결합은 그들의 결합상태에 불만을 갖고 안정을 파괴할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있었다. 구당료의 반발이 앞에 지적한 2월 역류이다. ㄴ.극좌파의 출현- 극좌파는 모책동이 67년 1월 하순부터 삼결합의 방침을 강력하게 밀고 나감에 따라 혁명파 내부에서도 왕력, 임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5.16병단이라 자칭하여 무한사건에 대한 군의 책임을 추궁하는 형태로 구체화 되었다. (극좌파는 이론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유리한 입장 차지) 극좌파의 군에 대한 공격은 중 앙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만큼 강화되었고 지방 군부의 군 지휘관들에게도 큰 타격을 가 하였다. 더 나아가 주은래로 공격의 범위를 넓혀 나가게 되자 모택동을 위시한 혁명파의 의구심 고조 그들을 숙청에 이르게 되었다. (5)문혁의 수습- 탈권 투쟁이 혁명위원회의 성립과 유소기등 ‘당권파’를 완전히 타도하는데 이르자, 그들 사이의 격렬한 무투란 오히려 새로운 질서의 방해로 보여졌다. 그리하여 모 택동,강청등의 문혁 지도자, 임표를 필두로 하는 군, 국무를 총괄하던 주은래 등은 문혁의 수습을 희망하기 시작하였고 혁명위원회의 전국적 성립의 시기에 학교나 직장에 ‘모택동 사상 노동자 선전대’가 파견되어 홍위병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68년 10월에 개최된 당 8기 12중 전회는 이미 실질적으로 타도된 유소기를 정식으로 단죄하고, 새로운 당의 조직을 추진하는 당 9회 대회의 준비 착수했다. (6)임표사건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이며 계승자”라는 인식이 대두되면서 새로운 그의 시 대가 부각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뒷면에는 새로운 권력 투쟁의 시초가 도사리고 있었 는데 이것이 71년 “임표사건이다. 임표 사건의 내용인 즉, 당에 많은 공헌을 하면서 임표 에 대한 당의 신뢰도가 높아가자 모택동은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받아 그를 조금씩 밀쳐 내기 시작하였고 임표는 반혁명무장 쿠데타를 일으켜 모택동을 암살하고 따로이 중앙을 만들려고 하는데까지 이르렀지만 그 음모는 실패로 끝나고 임표는 비밀리에 비행기를 타 고 소련 수정우의에 몸을 위탁하였던 끝에 몽고의 윈댈한에서 추락사하였다. (7)비림비공 -임표사건 이후 중국 정치의 중심과제는 임표 일파의 영향력 일소, 군대힘의 삭감과 당에 의한 ‘일원적지도’ 의 강화, 그리고 경제의 재건과 서방측에서의 접근등이었 다. 암표 비판은 비림비공 운동으로 칭하게 되었는데 임표의 잔영을 일소하는 운동에 비 공, 즉 공자의 비판을 첨가하였는데는가에 관한 추측중 가장 유력한 견해가 주은래를 겨냥했다는 주장이다. 은연중에 계급 투쟁에 반대하면 온전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주은래와 그의 추종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모택동을 앞세우는 문혁파가 비림비공 운동을 이끌어 갔다는 것이다. 비림비공 운동은 시일이 지날수록 주은래의 실용주이적인 생산력 중시의 정책을 비난, 공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갔다. 주은래의 사망은 정치우위를 강조 하는 문혁파와 기술 능률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실무파 사이에 새로운 경기를 마련했다. (8)사인방 숙청 - 1976년 9월9일 모택동 사망후 10월 7일 강청, 장춘교 제 2부 주석 왕홍운, 요문원등 상해 그룹이 사인방이라는 이름으로 제거 되는 것으로 결말 지어졌다. 결론 (1)11기 3중전회의 의의 1978년이 되자 제 2차 대약진계획의 무리함에 따른 파탄이 도처에 나타나고 또 4인방 비판이 높아갔다. 이러한 가운데 1959년의 대약진 이래의 여러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공 제11기 중앙 위원회 제 3회 총회(11기 3중전회)는 대전환의 획기적인 첫걸음이 되었다. 3중전회는 1975년 말 이래의 「우로부터 되잡으려는 풍조에 반격을 가하는 운동」 및 천안문 사건을 반혁명으로 인정한 결의를 과오로서 취소하고, 팽덕회 등의 명예를 회복시키며 진운과 호요방을 필드로 등소평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요직에 배치시켰다. 그와 동시에 중국의 구체제를 파괴하는 혁명의 이론, 방법으로서는 유효하였던 모택동의 이론, 계급투쟁과 대중 동원을 강조하는 방법이, 경제건설의 이론 및 방법으로서는 실격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확실히 「모택동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