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기
1949 - 2020
광주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내가 지휘하는 은빛합주반의
연습장을 영화제 때문에 비워주고
합주연습도 쉬게 되었다.
상영하는 영화는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이다.
키튼은 찰리 채플린과 쌍벽을
이루는 감독이자 연기자였다.
무성영화를 이야기하면 으레
찰리 채플린을 연상하지만
채플린의 익살보다는 키튼의
재치가 훨씬 예술성이 있다.
인물과 상황, 시간, 장소, 그리고
프레인 구성 등을 완벽하게
연출, 통제한다.
그 결과 아주 우습고 극적으로도
탄탄하며 긴장감이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 낸다.
지금도 그 영상을 보면
감탄할 정도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비어있는
농산물 창고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되었다. 사진이 움직인다고
하여 모두를 이렇게 불렀다.
움직이는 화면만으로도
충분한 눈요기가 되었던 시절에
영화의 스토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입장료도
당시 생활수준과 비교하면
비싼 편이었다.
나는 활동사진을 본적도 없었고
들은 적도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상영을 하는
창고 앞을 입장료도 없이
서성거렸다. 모두 입장하고
영화를 상영할 때까지 입구에
서있는 나를 측은히 보았는지
창고지기가 그냥 입장시켜 주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스크린에 비춰진 사람이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일어나 빛을 발산하는
쪽으로 가보았다.
재봉틀 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신기한 마술 기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변사가 말하는 소리에는
관심도 없었고 필름이 돌아가는
기계에 홀려 있었다.
창고 밖에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것이 또 무엇인가 싶어
영화를 보다 말고 밖으로
나와 살펴보았다.
난 몇 년 후 광주로 전학을 왔다.
미국 공보원에서 상영하는 홍보영화를
시간만 나면 보러갔다.
그리고 영사실을 기웃거리며
신기한 기계들을 살펴보았다.
무성영화시대가 지나서
변사는 없으며 언젠가부터
컬러 영화를 상영하였다.
나는 이 신기한 기계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영사기의 원리는 정지 화면을
빠른 속도로 이어 보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에디슨이 처음 발명한 영사기는
1초에 48컷을 넘겼으며
점차 기계성능이 좋아지면서
24컷으로 줄었고 또다시 16컷으로
되면서 무성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우선 필름이 있어야 했다.
난 용감하게 미국 공보원의
사무실에 들어가 폐기할 필름을
얻을 수 있냐고 물어 보았으나
양동 시장에 가면 구할 수 있다는
말만 듣고 나왔다.
즉시 양동시장으로 갔다.
당시 양동시장은 허름한 판자
점포들 이었으며 온갖 중고
전자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16mm
영화 필름이 있었다.
당시 밀짚모자의 테두리를 폐기한
영화 필름으로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고물상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필름을 구하였으니 다음은
필름을 한 컷씩 넘기는
기어가 필요했다.
고물상을 모두 뒤졌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영사기 만들기는
포기하고 만들다 중지했던
라디오 조립에 열중했다.
또 몇 년이 흘렀다.
다시 찾은 양동시장 고물상에서
필요한 영사기 기어를
구입할 수 있어 다시 제작에
몰두하였다.
모터는 내가 손수 만들었으며
그 외 부품들도 하나씩 하나씩
몇 달에 걸쳐 제작하였다.
드디어 엉성하지만
영사기가 완성 되었다.
필름을 연결하고 전원 스위치를 켰다.
몇 년 전 시골 창고에서 보던
영상이 내방에서 그대로 영사되었다.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네 아이들이 5분도 안 되는
이 화면을 보려고 모여 들었다.
물론 소리는 나지 않았고
화면도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장난감 수준의 영상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영사기와 촬영기를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8mm의 가정용 장비는
고급 필름 카메라 1대 값이면
살 수 있었다.
나도 무리를 하여 장비를
구입한 뒤 시간만 나면 촬영을 했다.
극장에서는 35mm 영사기를
사용하였고 영화 상영시간은 90분
정도인데 1개의 필름으로는
15분밖에 상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2대의 영사기를 설치하여
하나의 필름이 다 돌아가면
다른 영사기를 작동하여
스토리를 이어 갔다.
관객들은 이정도의 화면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이후 시네마스코프와
입체 영화가 등장하였고
또 극장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70mm 영사기를 앞
다투어 설치하였다.
필름의 폭이 넓을수록 화면은
선명하고 박진감 넘쳤다.
서울에서는 아이맥스 극장이 생겨서
초대형 화면으로 영화를
감상 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한없이
덩치만 커지는 영사기에
제동을 걸었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디지털 촬영이 가능해지면서
영사기도 디지털화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세계의 수많은
극장에서 사용하던 영화 필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필름산업은 급격하게 위축되었고
세계시장을 휩쓸던 필름회사들은
사양길로 들어섰다.
버스턴 키튼의 100년 전 무성영화를
이 시대에 상영을 하다니
꿈같은 일이다.
지금 당장 컴퓨터를 켜면
유튜브에서 키튼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스턴트맨 수준의 박진감 넘치는
흑백 화면이 보는 이를 놀라게 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거실의 진열장 속에
전시된 8mm 영사기를 꺼내서
내가 촬영한 필름 화면을 감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