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시화록(時化錄) 18--장대 끝에 섰으면 한발 내디디어라
박용덕 교무(가수교당) 원광 200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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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로 가지 말고 전주로 가라
진안 마령면 평지리에 오백석지기하는 과부 田씨가 살고 있었다.
영감을 사별한 뒤 물난리로 전답 60마지기가 유실되었고,
또 친정 식구에게 일 맡긴 것이 잘못되어 살림에 상당히 축이 났다.
한번은 정월 초하룻날에 천도재를 하면 좋다고 하여 절에 갔다.
강정리에서 북수골을 30분 남짓 올라가면(1.4Km) 광대봉 아래 보흥사寶興寺라는 절이 있다.
고려 때 세웠다는 5층석탑이 있고
살림집과 겸한 법당 뒤에 마이산하고 똑같은 석질의 회사무리한 것 같은 기암괴석에
의지한 산신각이 매우 인상적이다.
전씨는 딸 셋을 돌림병으로 잃고 오직 외동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
여기서 비단장수 최씨를 만났다.
이후 최씨는 형님 형님하며 자주 평지리 모사실 전씨네 집을 드나들었다.
한동안 뜸하였던 비단장수가 모사실 전씨네 집에 득달같이 달려와서
생불님이 출현하셨으니 뵈러가자고 충동질하였다.
외동아들이 잘되려면 생불님의 상좌가 되어야 무병장수하고 복록이 무진하다는 것이다.
이 말에 허위단심 2백리 길을 전씨는 부안 변산 봉래정사로 달려갔다.
전씨는 생불님을 뵙고 삼배하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또 삼배를 드려 삼삼參參이란 법명을 받았다.
석두거사가 처음 만덕산에 온 것은 임술년 설날이었다.
전삼삼은 임실에 집을 장만해놓고
영감 3년상만 끝나면 바로 이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씨네 산제당에서 전삼삼-전음광全飮光 모자는 생불님을 배알하고
‘임실로 가지 말고 전주로 가라’는 말씀을 받잡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씨 일가는 담제가 끝나자 바로 전주 완산동으로 이사 갈 준비를 서둘렀다.
산제당에 머물고 있던 이원화가 와서 이사 준비를 거들어주었다.
계해년 이월스무하룻날(1923. 4.6)에 이사하였다.
식구라야 전씨와 안살림을 봐주던 언니, 그리고 며느리 권씨와 그녀의 친정어머니,
또 이원화까지 안식구들만도 다섯이요,
사내라곤 새신랑과 그의 처남, 아직 15세 미만의 소년들이었다.
지게꾼 열 사람을 불러 이삿짐을 지우고 마령에서 관촌으로 나가려면 재를 세 개나 넘어야 했다.
절티고개, 소리개재, 서치재를 넘어 좌산리 배밑산 모롱이를 돌아
배나드리에서 섬진강 상류인 오원천 독다리를 건넸다.
지게꾼 하나가 주인 내외가 어린데다 안식구들은 늙은이들이라 만만케 보고
이삿짐을 진 채 도중에 달아났다.
관촌에서 전주까지는 달구지에 이삿짐을 싣고 갔다.
막상 전주에 와서 말썽이 생겼다.
미리 집을 보고 온 전삼삼이 길눈이 어두워
사 놓은 집을 찾지 못해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 다녔다.
겨우 집 소개를 해준 사람을 만나 찾아가니
완산칠봉 곤지봉 아래 곤질리의 방 두 칸짜리에 부엌이 달린 삼간 오두막이었다.
그나마도 살고 있던 두 가구가 이사 갈 엄두도 내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다.
마당에 짐을 부려놓고 방 한 칸을 비워달라고 하여 안식구들만 들어가서 자고
남자 둘은 근처 조카뻘되는 집에 가 신세를 졌다.
닷새 뒤에 한 집만이 이사를 가 일곱 자 방에 안식구들만 살고
전음광은 처남과 같이 1년 내내 남의 집 신세를 졌다.
방을 비워주지 않고 버티는 것을 보고
이원화는 식구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일렀다.
“우리가 참고 잘 봐 주세. 저런 사람을 좋게 해야 감화를 받지.
어떻게든 불공을 잘 혀야 쓰네”
생불님을 모셨던 분의 말씀이라 식구들은 군말 않고 방 한 칸에서 참고 살았다.
1년만에야 그 사람들은 미안해서 못 살겠다며 나갔다.
이웃 마을 투구봉 아래에 옴쏙 기어들어간 산동네에는
도축을 하고 파는 백정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사람은 다 같은 것잉게 당췌 차별 두지 마소잉”
전씨네가 오두막집에서 궁색하게 살면서도
고향에서 오백석지기 행세하던 오랜 반가의 관습를 버리지 못하자 이원화가 당부하였다.
고향에서는 함부로 부리던 상사람들이었지만,
전주에 와서는 그들에게 ‘하게’도 못하고 피차 ‘예, 예’ 존대하며 지냈다.
어느 날 며느리 권씨는 잘 사는 어느 백정집이
양반들 못지않게 격을 갖추고 떡 벌어지게 신행을 차리고 가는 걸 보고
‘돈이 있어 가지고 꾸미면 다 양반이구나’
하고 비로소 반상 차별 관념을 타파하였다.
큰내 전주천은 물이 맑아 아이들은 멱을 감고 아낙은 빨래를 하였으며,
참게 뱀장어가 많아 천렵도 하였다.
전주천을 건너면 바로 시장이라
이원화가 장사를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고추장을 만들어 팔자고 하였다.
그래서 정성 들여 고추장을 한 독 담아 개울 건너 남부시장에 팔았다.
이 일에는 장사 경험이 있다는 이원화가 나섰는데,
아닌 게 아니라 고추장이 맛있다고 줄을 서 단박에 고추장 독이 바닥나고 말았다.
물건은 동이 났으나 1전에도 한 그릇, 5전에도 한 그릇씩 고추장을 퍼주어
정작 이문이 남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장사는 그것으로 손을 털고 말았다.
이원화는 어떻게나 손이 크고 남 주길 좋아하는지 예산 머리라곤 도무지 없었다.
이웃에 목물장사를 하는 하재룡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 사람의 부인 김씨가 성격이 쾌활하고 인정이 있어 이원화와 퍽 가깝게 지냈다.
계해년 동지달에 소태산이 영광에서 바로 전주로 와
동문에 한달간 말미로 집을 하나 빌려 머물렀다.
이원화는 김씨를 소개하여 향산옥(金香山玉)이라는 법명을 받고,
섣달 보름날 밤에는 전음광의 처가 식구들이 와서 처음 소태산을 만났다.
상투머리에 검은 수염, 큰 체구에 눈빛이 부셔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무엇하러 여그 왔냐?”
소태산의 이 물음에 총명한 권씨는 미리 이원화가 가르쳐주던 대로
“사람 노릇 하는 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지금은 사람 노릇 안하고 짐승 노릇 하는가?”
이 되물음에는 이원화가 미리 가르쳐주지 않아 권씨는 그만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섣달보름날의 만남을 인연으로 하여 전음광의 각시는 동화(權動華),
처남 육룡이는 대호(權大鎬), 장모 김씨는 만공월(金滿空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새 회상 창립의 전초기지
선후천이 개벽한다는 갑자년 정월에,
석두거사는 부안 변산 봉래정사의 일을 정리하고
아주 하산하여 익산을 경유하여 경편철도로 전주에 왔다.
비단장수 최도화가 미리 옷감을 떠주어 권동화가 두루마기를 지어 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석두거사는 상투머리에 탕건, 그 위에 갓을 썼으며
옥양목 새 두루마기를 입고 내장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며칠 뒤에 삭발을 하고 중머리가 되어 돌아왔다.
내장산 들어갈 때 분위기하고 사뭇 달랐고
일행은 건장한 체격의 남정네 다섯이나 불어나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최씨를 불러 경성으로 가자며 길잡이로 앞세웠다.
당신님 상투머리는 이원화에게 건네졌다.
상투머리는 이웃에 사는 김향산옥에게 건네졌고
그녀는 ‘잣다리를 만들면 쓰겠다’는 낭자머리 작은 이웃에게 다리로 쓰는데 주었다.
곤질리 전음광의 집(현 동완산동사무소 근방)은 전주 완산칠봉 곤지봉 아래에 있었다.
완산칠봉은 전주시 중앙부로 흐르는 전주천을 따라 이어진 산줄기이다.
해발 163m의 중봉을 비롯, 주변에 곤지봉(108m), 투구봉 (100m), 용두봉(132m)등 7개의 봉우리가 어깨를 나란히 이은 완산칠봉 일대는 전주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중봉 일대는 동학농민운동 때 전주부성을 점령하여 입성한 혁명군과
뒤쫓아온 관군이 대치하여 격전을 벌였던 전적지이다.
그래서인지 터가 세어 완산칠봉 아래 일인들은 한 사람도 거주하지 못하였다.
곤질리 전음광의 집은 비록 삼간 오두막집이고 옹색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새회상 창립의 전초 기지로 그 연락처와 창립 준비 등
교단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전음광은 이곳에서 2년간 살고 익산 신룡벌에 본관 건축을 하자
바로 그곳에 가 사가를 지었다.
전음광의 기와집은 제1회 정기훈련사로 초선지가 되었다.
장대 끝에 섰으면 내디디어라
석두거사는 경성에서 한달간 머물며 창립인연을 만나고
바로 전주로 내려와 완산동 곤질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석두거사는 익산 보광사에서 창립총회하기 전에 전주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모악산 금산사 아래 구봉교회 조공진 장로는
김제 원평에서 영생의원 한의사로 더 이름이 났다.
그는 젊어서 동학농민전쟁에도 참여하고 기미 만세운동에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또 선도와 풍류에도 관심이 깊었다.
이웃에 엿방을 하는 송찬오(宋赤壁)가 찾아와 권하였다.
“도덕이 상당한 사람이 모처에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떠시유?”
구천 상제 화천하신 뒤로 고대하였던 천사님을 십년만에 친견하였는데
그가 지금 전주에 와 계시다는 것이다.
무식하고 허황하기 이를 데 없어
조 장로는 내심으로 조금 접어두고 그를 대해 오던 터였다.
수차의 권고에도 물리치다가
어리석은 사람의 천 가지 생각에도 필시 한 가지는 얻을 게 있겠지 하고 조 장로는 따라 나섰다.
조 장로가 송찬오를 따라 찾아 간 곳은 전주 완산동의 삼간 오두막의 한 과부 집이었다.
(허허, 이런 오두막집에 성인이 계신다니!)
증산 선생이 ‘초막에 성인 난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인가 하여 별 괴이한 생각이 다 났다.
증산이 모악산 구릿골 약방에 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은 나하고 일할 사람이 없다.
내 일을 해 줄 사람은 뒤에 다시 나온다.
때가 되면 썩은 고목에 새순이 돋아나서 내 일을 이루니라.
이제 초막에서 성인 나오니라”
밀양 박씨 성을 가진 그 도덕군자는 지금 집에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한벽당으로 산보를 갔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중바위산을 바라보며 수양버들 휘휘 늘어진 천변(전주천) 길을 따라
20여분 남짓(1.6km) 걸어가자 한벽당이 나왔다.
누상에 올라가니 과연 듣던 말과 같이 풍후한 기상과
엄숙한 태도와 온유한 음성이 진실로 한번 토의할 만 하게 되었다.
소태산 도덕에 감탄하면서도 자신의 신앙 줄에 갈등하는 조 장로를 보고,
소태산은 왼손 검지를 치켜들며 말하였다.
“거개 세상 사람이 무엇을 찾아보려고 이 손끝까지 올라왔다가
한층 용기를 내어 날 줄 모르고,
원치 않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
무취미한 생활에 빠져 초인적 생활을 못하고 말지요”
백 길의 장대 끝에 한 발을 짚었으면
기우뚱거리지 말고 다른 한 발도 내디디어라!
이 비유가 비수같이 조 장로의 가슴을 찔렀다.
과연 태평양 바다를 뒤엎을만한 기개라 감복하였다.
“선생님의 말씀은 참으로 광대하옵니다”
조 장로는 석두거사가 말을 할 때마다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칭송할 頌 넓을 廣, 조송광의 법명의 유래가 이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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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 13.05.31. 10:35
최고 영광, 승리는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 진리다.
정상의 만족을 누릴 때 한발 내디어야 한다.
끝은 내리막길이다.
겸양하면 그것으로 족한다.
다음에 올 자를 위하여 양보하여야 한다.
그것이 최고를 누리는 것이다.
겸양하라
그것을 수용하라.
주산 13.05.31. 11:34
여자의 머리 숱이 많아 보이도록 덧드리는 딴머리.
'다리'란 말을 한자로 月子라고도 표기하네요.
전음광은 전주 완산동에 살다가 익산에 불법연구회 본관을 짓자 바로 총부로 이사합니다.
소태산열반 후 실망하고 이리읍내에 딴살림을 차려 내왕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대말에 입적합니다.
1971년 반백년기념사업 하나로 총부구내 사가들이 모두 총부밖으로 이사하게 됩니다.
공가와 사가 절반의 조화로운 도덕공동체 익산총부가
명실공히 출가공동체로 완전히 전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