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 시가 있는 시론 95 담징 스님의 금당벽화
담징 스님의 금당벽화에 대하여 연구자들에 관심을 대한불교조계종 승려들은 무관심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또한 병이다. 물론 담징스님의 존재를 바르게 성찰할 수 있는 불교예술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불교계에서는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잘못이라고 밀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찰을 관리하는 힘이 바로 주지에게 있기 때문이다. 주지에게 주어진 힘은 사찰에 관리자일 뿐인데 사찰의 관리가 연사를 바르게 고찰할 수 있는 적임자를 택해야 한다.
물론 고구려 승려인 담징 스님에 일본에 불교벽화를 그림 시점에 대하여서도 연구가 미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조명하는 것은 오늘의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불교예술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찰을 관리하고 있는 책임자들이 전문성이 없는 이들이 주지로 임명을 받기 때문이라고 단정 할 수 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담징 스님은 고구려 승려화가인데 서양에 화가들에 비유한다면 일본에 건너간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부터 7세기라고 기옥하고 있는 문헌을 참조한다면 일본에서는 6월 14일부터 7울 21일 까지 국보호류지 금당 전을 연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고구려 승려 담징 스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담징 스님이 일본에 어떻게 갈 수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을 하고 있었던 시기로 본다면 고구려는 진나라와의 교구를 하고 있었던 관계로 고구려 승려들이 진나라에 유학을 하였던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에 있는 불교문화에 대하여 오늘날에 불교예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소수인 가운데 고대 불교문화에 대한 발표를 할 수 있는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지만 이 또한 미래를 준비하는 불교예술 가들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하게 들린다. 하지만 연구자들을 통해서 기록을 하는 것은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비록 일본에서 금당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려 담징에게 있어서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금당에 벽화는 고구려 승려인 담징의 작품이라고 기록하고자 한다.
담징 스님이 벽화를 그린 그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백제의 관음상에 대하여서도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백제관음상을 제작한 자들에 누기인가 말이다. 백제 관음상은 백제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벽화는 분명히 당징 스님이 그린 벽화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소설가의 글을 통해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담징 스님의 벽화라는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
고구려의 승려·화가. 5경과 그림에 능했다.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고행과 수도에 힘을 쏟았다. 일본의 승려 호조와 함께 생활하면서 불법을 가르치고 그림 및 맷돌·종이·먹 등의 제조법을 전해 주었다. 그가 일본 호류사에 그린 <금당벽화>는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혔는데, 1948년에 불탔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사 5층탑 벽화에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 컴퓨터로 재생되어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해 주었다. 담징(579∼631) 자료 참조
고구려 승려 담징 스님
고구려 승려 담징 스님을 생각하며
오늘날에 불교예술을 생각하게 하자
불교문화를 창조하는 자에게 있어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본다
전국에 있는 수행자들이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것인가
담징 스님 같이 벽화를 기린다면
최고의 작품을 기록할 수 있는데
아직도 그러한 역사를 모르고
침묵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있다면
스스로 반성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모습으로 나서야 한다
일본에 있는 담징 스님의 벽화는
비록 불에 타 없었던다고 해도
그의 영혼은 지금도 남아서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비로
묘법연화경 사경을 수행의 몸으로
택하게 된 것도 또한 예술
불교예술을 창조하기 위함
나에게 주어진 역사를
창조하련다
담징 스님을 생각하면서
2019년 12월21일
진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