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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88) - 만왕의 왕, 만주의 주 Ⅱ
본 문 : 계시록19 : 16절
계19:16절입니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지난번에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주제를 강해를 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 좀 더 추가하여 강해를 할 필요성에 따라 한 번 더 이 주제로 강해하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기독교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디로 귀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었는데, 기독교는 예수를 이용해서 내 소원을 이루고, 내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가는 것을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스 엔 토 소마티 무 바스타조’(στίγματα του Ίησου ἐν τω σώματί μου βαστάζω =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곧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져야 하고, 종국에는 예수님의 뜻에 완전히 항복하는 종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아 자기 스스로 힘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이외의 것들을 통제하려 하는, 곧 자기만을 사랑하는 죄 된 본성을 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말로는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러한 신앙생활의 본질을 출애굽 광야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옛 사람 60만 명이 광야에서 다 죽고, 새로운 은혜의 세대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림을 구약 성경을 통해 보여주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이 광야 인생길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 땅에서 예수를 통해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예수처럼, 예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죽은 한 강도의 구원의 사건을 통해서도 기독교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도 자기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그분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현실 속에서는 나의 소원과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알기에 그냥 ‘예수와 함께 죽는 자’,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켜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그렇게 죽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그렇게 원수를 위해 죽어주는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 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또한 중요한 의미는 그렇게 죽는 삶 자체가 세상의 죄를 고발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 자체로 세상의 악함을 고발하는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또한 세상의 악함을 고발해야 합니다.
곧 이런 말이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죽는 모습으로 살다 가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의 근거를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악을 더욱 악답게 증명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에서는 늘 죄인들의 공격과 의인들의 피 흘림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이 모두 그것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마23:35절을 보지요.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이 누구입니까? 타락한 아담의 첫째 아들인 가인의 동생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가인의 죄 성을 낱낱이 고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사가랴는 누구입니까? 유다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 역대하에 보면, 요아스 왕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선지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선지자 사가랴가 유다 방백들 앞에서 ‘너희들은 왜 회개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가 너희를 버리셨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요아스 왕을 비롯해서 유대 백성들이 선지자 사가랴를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이처럼 선지자 사가랴도 당시 유다 왕 요아스와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패역한 지를 증명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렇게 아벨에서부터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죄를 고발하며 의로운 피를 흘렸습니다.
그 의로운 피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악한 자들의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고난 받고, 낮아지고, 군림의 자리가 아닌 섬김의 자리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이고, 그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기독교는 ‘복이나 받고, 병이나 고치고, 내가 종교적 열심을 부리면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고지에 올라가게 해 주는’ 그런 만사형통의 종교가 되었는가? 그러면 오늘날의 기독교가 어떻게 이렇게 만사형통의 종교가 되어버렸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태초에 전적으로 하나님 의존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던져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 후로 인간들은 하나님의 생명력인 ‘ - 바라크(복)’을 상실했습니다. 인간들은 채워지지 않는 그 ‘복’의 자리를 스스로 채우려고 시도하게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자원을 빼앗아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시도했고, 교육과 훈련과 수도(修道)를 통해서 그 공허함을 메워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원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종교심이 본능적으로 잠재해 있습니다.
죄인의 표상으로 불리는 가인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인간의 교만과 종교심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샤마니즘’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슴 한 쪽의 텅 비어 있는 곳을 채우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는데, ‘나’ 자신에게는 그러한 것을 충족시켜줄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보호와 자신의 행복을 도와줄 힘 있는 존재와 자신 사이에서 중재해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샤먼’인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무당이라고 합니다.
그 ‘샤먼’은 직접 신과 접촉하고 교류해서 신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인간의 정성을 신에게 전달하기도 하며, 신의 도움을 빌어 병을 낫게 하기도 하고 예언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샤마니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시대나 시베리아, 아프리카의 오지 같은 곳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중재자의 도움을 받아, 어떤 힘 있는 존재로부터 복을 얻어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샤마니즘’은 타락한 모든 인간의 내면(內面)속에 잠재해 있는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식하고 잔인한 밀림 속의 부족들에게도 모두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샤마니즘’에서는 자기가 도움을 청하고 있는 ‘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보다 힘이 센 신을 달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복’만 받아내면 그만입니다.
오로지 현세의 ‘복’만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 ‘샤마니즘’은 인류의 죄가 존재하는 한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 ‘샤마니즘’은 모든 종교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처럼 모든 인류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샤마니즘’ 속으로 특별히 불교가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원래 불교는 ‘무아(無我)와 몰아(沒我)’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깨닫고 해탈하는 종교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단지 ‘illusion’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의 육신을 비롯한 이 땅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불교가 샤마니즘과 섞이게 됩니다. 왜요? 샤마니즘은 인간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현실적 복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적 복(바라크)을 다시 부어주시기 전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고등종교가 들어와도 인간 내면에 여전히 뿌리깊이 존재하고 있는 ‘샤마니즘’ 위에 얹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샤마니즘과 섞이게 되면 ‘무아와 몰아, 색즉시공, 공즉시공’의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절에서 중들이 점을 쳐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는 ‘칠월성군, 북두칠성’을 모신 ‘칠성당’이 절에 들어섰고, 복 받는 방법으로 연등도 팔고, 절간의 기와도 팔기도 하고, 그리고 대웅전이나 명부전은 한산한데 유독 사업이나 자식들에 대한 소원을 비는 ‘삼성각’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불교는 이 땅의 것들이 모두 ‘illusion’, 불교 용어로 ‘황’ 즉 ‘헛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훌훌 털어버리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력을 빌어 ‘나’가 속한 색(色)에 속한 것들을 풍성히 얻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잡탕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색즉시공, 공즉시공’이 아닙니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불교에도 ‘찬불가’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독교에 ‘찬송가’가 있듯이 불교에도 ‘찬불가’가 있습니다. ‘찬송가’라는 것은 전적 타력(他力)종교인 기독교에서 완전히 타락하고 무기력한 나를 구원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비해, 스스로 수도(修道)를 해서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적인 자력(自力)종교인 불교에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찬불가’가 있습니다.
부처는 앞으로 나올 많은 부처의 본보기일 뿐이지 다른 사람들이 부처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교에서 ‘고마우신 부처님, 복 주시는 부처님’이라고 찬불가를 부릅니다. 이건 코메디라 할 것입니다.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현세에서의 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휴암 스님이라는 분이 ‘한국 불교의 새 얼굴’이란 책에서 “이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고행의 길을 갔는데 너희는 지금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오늘의 이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불교 신자가 천 삼백 만에서 백 삼십 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이 타락한 불교의 기복주의는 깨어져야 한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라는 글을 썼겠습니까?
이것은 불교의 무당화(巫堂化)를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분은 그 글에서 ‘내 조국이 대한민국에 과연 불교가 존재하기는 하는가?’라고 안타까운 결론을 맺었습니다. 예불(禮佛)도 하고 수도(修道)도 하고 보시(布施=자비심으로 베풂)도 하는데 장작 진짜 불교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외면적 형태만 남아있다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샤마니즘 위에 유교가 얹혔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교의 핵심은 ‘군사부 일체’ 같은 ‘상하 질서’ ‘예의(禮義)’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의로 섬겨야 하는 분이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내어 그 대상이 죽은 뒤에도 ‘예의’를 표하는 것이 유교입니다.
그런데 이 유교가 샤머니즘에 얹히면서 ‘제사’가 마치 죽은 조상의 도움으로 ‘액운’을 면하게 해주고 ‘복’을 받게 해주는 의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제사를 안 지내면 조상의 귀신이 삐쳐서 복을 안 줄까봐’입니다. 아닙니다.
유교의 제사는 죽은 조상이 주는 복과는 아무 상관없이 후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제사였는데, 샤머니즘과 섞이면서 제사도 ‘복’을 받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조선의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왜 그렇게 많이 순교자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거부해서 가족들이 내쳤기 때문입니다. ‘저 놈이 예수 믿고 제사를 거부하면 나까지 조상들에게 봉변당할 까봐’ 일가 종친들이 고발한 것입니다.
급기야는 유학으로 공부한 선비들이 조상의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묘 자리’, ‘명당자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명당자리’를 써야 후손이 복을 받고 그 후손 중에 큰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명당을 써서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집념은 조상의 시신이 훼손이 되건 말건 자신들의 복을 위해 조상의 시신을 이리저리 굴립니다. 여기에 어디 충효와 예절이 있습니까? 이건 원래의 유교가 아닙니다. 유교 역시 잡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사도 지내고 예절도 갖추는 등 외면적 형태는 남아 있는데 진짜 유교는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샤마니즘에 먹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샤마니즘에 기독교가 얹히게 되면 어떤 것이 되는가? 역시 모양은 기독교처럼 보이는데 내용은 샤마니즘에 빠진 엉터리 무당 잡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세상 사람들은 첨단의 전자 장치로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의 진수식 때 꼭 고사를 지냅니다. 첨단 과학의 결정체 앞에서 돼지 머리에 절하고 돼지 코에 돈을 꽂아 액운을 막고 복을 비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영화를 찍을 때도 어김없이 고사를 지냅니다. 젊은 사람이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기도 합니다. 원혼을 달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샤마니즘’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반성하는 의미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진정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적어도 집 안에서 고사를 지내거나 ‘굿’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대신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좀 솔직히 터넣고 이야기 해 보자고요. 그리스도인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나 이사를 갔을 때 왜 굳이 목사를 불러다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혹 그 예배를 통해 마귀가 주는 액운을 막고 사업의 번영을 위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무당’이 목사로 바뀌고, ‘고사’나 ‘굿’이라는 이름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것 이외에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사업이든 이사든 그 외 일 등)을 시작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서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맡기시는 것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동참하겠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의 흥망의 문제보다는 이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기를 바라면서,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바라는 마음에서 사업이 시작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업의 실패로 인해 ‘내가 낮아지고, 이 땅의 것들의 무상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거기서 하나님의 그를 향한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그 망함 속에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지금까지 사업이 망해서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나의 유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30년 전 쯤에는 성광교회의 고등부를 담당했던 시절이었는데, 학생들 중에는 시험 때만 되면 그 시험을 위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도 그 학생은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는데 기도는 열심히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남들은 밤잠도 아끼면서 공부를 할 때 그 학생은 잠자느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고 대신 기도를 열심히 한 것이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시험을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남들보다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것은 무속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기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당연히 하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기도는 정한 수 떠놓고 칠성당에서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사람들과 뭐가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고등부 학생들의 부모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대부분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아이의 능력보다 더 잘 보게 해 달라는 것은, 겉은 기도교적인데 속은 여전히 샤마니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의 주일은 거룩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일날에 밖에 나가 자장면이라도 사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 지킬 때에 행했던 것들을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왕이면 그 날 주일날 하루라도 제발 거룩한 구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날 하루만 그렇게 유난을 떨고 나머지 날은 전혀 신앙적 삶과는 상관없는 엉터리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바로 샤마니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집 식구들이 목욕을 하지 않고 오거나 혹여 딴 생각이라도 품으면 곧 ‘부정’ 탔다고 외칩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목욕재개하고 허튼 생각 품지 말고 오직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하여 빌어야 하는데 어떻게 목욕도 안 하고 천지신명 앞에 서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굿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날은 자기가 복을 비는 신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굿하는 당일만큼은 목욕재개하고 정갈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액운이 막아지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샤마니즘의 내용입니다.
샤마니즘에는 ‘샤먼’이 굿을 하는, 샤먼이 의식을 행하는 그 시간과 공간이 다른 시간과 공간과 구별된 곳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샤먼이 집례 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그 공간과 시간 속에서는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샤마니즘이 기독교와 합쳐지면서 예배당이 성전으로 둔갑해서 ‘거룩한 장소’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강대상에 절대 신을 신고 올라갈 수 없습니다. 왜요? 그곳은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일날은 자장면도 안 사먹고 거룩하게 살려 한다는 것이지요.
왜요? 그 의식이 행해지는 시간과 공간이 부정을 타면 ‘나’에게 액운이 생기고 ‘복’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복사상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그냥 여느 ‘집’입니다.
주일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요일에 예수님의 부활하셨으므로 그 부활을 근거로 그날을 주일로 생각하며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성찬을 나눈 날입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요일을 주일날로 변환하여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는 담아 지키지만 사실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골2:16~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금욕생활강요문제)과 절기(유월절,오순절,장막절,나팔절,부림절등의 명절)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편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갈4:10~11절도 보면, “너희가 날(안식일,금식일 등)과 달(월삭)과 절기(명절)와 해(안식년,희년)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신약성경은 어떤 한 날을 정해서 그 날을 특별한 날도 지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어느 한 날이 거룩하니까 그 날은 반드시 지켜야하니까 모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한 날 뿐만 아니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습니다.
히10:25절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어떤 한 날의 거룩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로서 국한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대 속죄일 등의 절기에는 모두 쉬어야 하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으로 있으면서 아무리 땀을 흘려도 얻을 수 없었던 안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창조 이후의 안식, 그 안식을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내셨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절기라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어질 참된 안식의 징표였기 때문에 그날은 거룩하게 구별해서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 홀로 이루어 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지요. 참 안식,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니(사9:7 ; 왕하19:31 참고) 너희는 그날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한 날을 지정하여 ‘거룩한 날’이라고 부르며 지키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위반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공통적으로 쉬는 어느 한 날을 정해서 자신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기 모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날 모임을 특별히 거룩한 날이라는 의미를 덧붙이지 않는 선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공동체가 모이는 날은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처럼 다른 일로 분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일 날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의 신분에 감사하며, 다른 모든 날들도 주일처럼 하나님께 예배적인 삶,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치않아요? 어떻게 정해진 한 날을 가리켜 거룩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날’ 자체가 어떻게 거룩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 모인 ‘무리’가 거룩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공동체가 주님의 부활을 근거로 해서 모이는 주일날 한 날은 교회가 합의하여 드리는 것이므로 우리의 육신을 위한 분주함을 멈추고 모여서 성도간의 교제나 영적인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그 날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경우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거룩한 주일을 범하는 죄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주일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그러한 상황과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죄인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종교 의식을 행하는 날과 장소를 거룩하게 생각하고 다른 날과 다른 장소에서는 전혀 거룩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당 ‘굿’을 하고 있는 거와 진배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는 삶은 무엇입니까? 오직 성경만을 지표로 삼아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는 사람들이 성경이 아닌 관습이나 소문, 경험들을 기준 삼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 버젓이 기독교적인 것인 양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교에는 항상 남신과 여신이 있습니다. 마치 바알과 아세라가 짝을 이루듯이 이교에는 여신의 역할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이교에서 나름대로 지성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뭔가 허전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의당 있어야 할 여신의 자리가 비워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너무 허전한 나머지 그 여신의 자리에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 자리에 채워 넣었습니다.
그게 바로 5세기 초반에 기독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란 용어를 적용하고, 마리아 숭배교리(A.D.431년)를 공포했습니다. 그게 바로 ‘마리아 숭배사상’ 곧 ‘marilogy’(성모신학)인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마리아를 숭배하라는 요구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교 사상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기독교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럽의 커다란 성당의 부조물들을 보면 이교의 우상들의 모양을 조금 바꾸어서 그대로 세워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풍요를 가져다주는 이교의 신들을 차마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혹은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이 기독교화 되어버린 예도 많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사서 열심히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잘 낫지 않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하다가 머리맡에 성경책이 있어서 성경책을 베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두통이 씻은 듯 나았습니다.
그런 일을 경험한 그 사람은 ‘두통에는 성경책을 베고 자는 것이 최고’라는 것의 전도사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시키려고 합니다. 이처럼 어떤 개인의 경험이 와전되어서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진리인 것처럼 되어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종교 개혁 이전까지는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 무릎을 끓고 성찬 떡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무릎을 끓고 성찬 떡을 받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은 성찬 상을 둘러앉아, 혹은 둘러서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게 정말 예수님의 피라면 내가 이렇게 멀뚱이 서서 받으면 않되겠다. 무릎을 끓고서 경건하게 받는 것이 좋겠다’라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릎을 끓고 성찬 떡을 받아보니 서서 받을 때 보다 훨씬 감동이 컸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따라 하기 시작했고 ‘어떤 교회가 성찬 떡을 받을 때 무릎을 끓고 받는데 그 교회 전체가 은혜롭더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교회 저 교회가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전체 교회가 전부 성찬 떡을 받을 때 무릎을 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성찬 떡을 받을 때 무릎을 끓는 것은 성찬 떡에게 무릎을 끓는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상숭배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냥 앉아서 혹은 서서 성찬을 나눕니다. 이처럼 개인의 경험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둔갑한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예화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그냥 부활절을 맞이하기가 밍밍하니까, 예수님의 광야 40일을 흉내 내서 부활절 40일 전부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감격스러운 부활절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경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사람 저 사람이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전체 교회에 퍼졌고, 부활절 전 40일 동안은 돼지고기도 먹지 말고 경건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진리화 되어버렸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루터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부활절 전 40일 동안 돼지고기를 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당신은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생활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성경에 근거한 답을 주십시오.’
마틴 루터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마음껏 먹어라’ 루터는 그 일로 파문을 당했습니다. 당시에 파문이라는 것은 ‘out law’, 아무나 그를 죽여도 된다는 살인 허가였습니다.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목숨을 걸고 폐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루터나 칼빈이 목숨을 걸고 없애 버린 것을 한국 교회가 ‘사순절’이라고 해서 다시 만들었습니다. 부활절 전 40일 동안 금식하고 정진하는 기간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사순절’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루타와 칼빈이 성경에 없는 것을 목숨을 걸고 없애버렸는데 후배들이 다시 주워서 조립해 놓은 것입니다.
이왕 이야기를 한 바에 중요한 것 하나를 더 이야기를 하렵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관한 것입니다. 이 날이 정말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 맞습니까? 그 날은 로마의 태양신 미투라의 축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태양신을 섬기던 로마 사람들이 12월 25일을 태양신의 날로 정해놓고 잔치를 벌이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원래 로마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던 12월25일을 예수님이 탄생한 날로 삼고 축하를 해왔던 것이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유래입니다.
물론 태양신을 섬기던 12월 25일을 태양이 갖는 진정한 빛의 의미를 예수님에게 적용하여 그 날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정하고 축하하는 것에 하자를 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정확하게 아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왜 성경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을 기록해 놓지 않았을까요? 성도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어떤 날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1년 365일을 예수님이 오신 의미를 되새기고 묵상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일을 표기해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처럼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 우리가 굳이 추측해서 우겨가며 지키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마귀 사단은 기독교의 본질을 옆으로 밀어놓고 비본질적인 것에 몰두하도록 교회공동체를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 내가 자꾸 낮아지고, 부인되고 해체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기꺼이 기쁘게 섬길 수 있는 자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본질에서 벗어나 ‘내 감격, 내 자랑, 내 열심, 내 열매’를 추구함으로써 자꾸 기독교를 관념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는 체험도 하고, 감동도 받고 열심히 행하는 데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비기독교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죄의 뿌리인 ‘샤머니즘적 종교심’에 껍질만 기독교로 바꾸어버린 엉터리 기독교를 만들어서 진짜 기독교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속은 무당종교인데, 겉모양만 기독교인 척하는 가짜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잘하면서도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 부인과 자아의 해체를 추구하고 경험하기는커녕 여전히 이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고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높아짐, 재수(재물이나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는 운수)에 예수님을 이용하는 거짓 기독교가 참 기독교처럼 둔갑을 해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도 예배가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봉사도 있고 헌신도 있습니다. 때로감격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습니다. 낮아짐이 없습니다. 진정한 섬김이 없고 세상을 향한 죽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펄펄 살아서 자랑과 교만과 거들먹거림이 흘러넘칩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훈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티그마타 투 예수스 엔 토 소마티 무 바스타조’(στίγματα του Ίησου ἐν τω σώματί μου βαστάζω =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곧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져야 하고, 종국에는 예수님의 뜻에 완전히 항복하는 종으로 완성되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절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아니며, 이 땅에서도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 하라고 하심이 조금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하라시면 하겠다고 힘차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첫댓글 "왜 성경에 예수님 탄생을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성도들이 그날만 축하하고 기억하는것이 아니라
365일 예수님 오신 의미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살아야....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과 자아해체..".
계시록강해(88)잘 읽고 감사하며 ~
넘 감사..
믿음의 옳은 길을 가르치시는 유 목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널리 펴야 할 믿음의 말씀으로 인도하심 입니다.
마음(심령)의 청량제를 얻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