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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살신사건의 알리바이>의 줄거리:
유대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수순을 밟으면서 드디어 십자가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참으로 특이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그 죽음이 내 사건으로 재현되듯이, 하나님이신 예수를 죽이는 일 또한 가해자의 입장으로 재현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살신사건에 대한 알리바이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살신(殺神)사건의 알리바이
(눅22:47-62)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살신(殺神)사건의 알리바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살신, 살신(殺神)이라는 것은 살인이라고 할 때의 그 살(殺)자와 살인의 인(人)자 대신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신(神), 그래서 ‘살신(殺神)사건의 알리바이’
예수님이 이제 잡히시지 않습니까?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구체적인 수순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죽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그 사건의 알리바이의 문제를 우리가 함께 생각합니다.
여러분, 알리바이라고 하는 것의 뜻을 다들 아실 겁니다.
현장부재증명입니다.
살인사건이든 어떤 사건이든지 범행이 저질러졌을 때, 그 범행이 저질러진 그 시간과 그 공간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이 증명이 되어야 용의자 선상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은 시간과 공간에 묶여있습니다.
즉, 그 시간대에 다른 공간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면 나는 용의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너무 먼 얘기 같습니다만, 십자가사건도 멀리 있었던 사건이니까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줄리어스 시저가 살해당합니다, 칼에 찔려 죽습니다.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어요.
줄리어스 시저가 죽을 그 당시에 그곳에 있던 자가 양아들 브루투스입니다.
브루투스에 의해서 죽어요, 난 책임이 없지요? 알리바이가 증명이 됩니다.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할 때 저는 책임이 없어요, 지금 다른 장소에 다른 시간대에 있으니까, 그때 그 장소에는 없었기 때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정몽주가 죽임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사건도 분명히 죽인 사건이에요, 살인사건이고 그리고 그것은 살인에 끝나지 않고 살신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인간이시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시고 인간이신 그분을 유대지도자들이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신 이 사건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기억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마음이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재현됩니다.
그리고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나의 죽음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은 날마다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을 재현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재현된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 재현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나 자신이 죽으신 예수님과 동일시함을 통해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 예수님의 죽으심이 반복되지 않으면, 주님의 십자가사건에서 나는 가해자로 서서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일 쪽에 가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기념함을 통해서 재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지 않는 한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재현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은 모든 인류를 끌어들인 사건입니다.
특정 사람에게 한정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나를 연합시키지 않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지금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가정에서 가족을 대할 때, 직장에서 직장생활 할 때, 학교에서, 어디에서든 간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기억되지 않고 있는 한,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지금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재현하고 있다는, 이 살신의 사건에서 어떻게 내가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예수님을 죽이고 있지 않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신 그분을 죽이고 있는 살신의 현장에 있지 않다, 라는 알리바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을 잡으려고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을 데리고 옵니다.
우리는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생포하는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알리바이가 있는 것 아닙니까?
마치 줄리어스 시저가 살해당하는 현장에 우리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생포되고 죽게 되는 그 사건의 현장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알리바이를 다 제거해버리십니다.
우리가 200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있다고 믿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알리바이를 다 제거해버리신다는 얘깁니다.
53절에 주님께서 ‘어둠의 권세’라는 말을 하십니다,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다’
대제사장과 성전에서 경비하는 사람들과 장로들이 가룟유다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을 생포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대제사장과 성전의 경비하는 자와 장로들로 국한시키지 아니하시고, 어둠의 권세라고 말씀을 해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생포해서 죽이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어둠의 권세에 속한 자들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접촉을 하며 붙잡는 그 사람들에게 한정시키지 않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알리바이가 없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둠의 권세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으로 재현되고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둠의 권세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그러면…
왜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2000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고, 계속해서 우리가 기억을 함을 통해서 나의 죽음으로 재현되어져야 할 사건이기 때문에, 그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는 사건도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는데, 내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면, 내가 어둠의 권세의 특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어둠의 권세의 유전자를 갖고 있고 어둠의 권세의 특징을 갖고 있는 한, 나는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밥 먹듯이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둠의 권세’가 뭘까요?
왜 주님께서 ‘어둠의 권세로다’라는 말씀을 여기서 하실까요?
바로 앞에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의 기도, 감람산으로 올라가셔서 겟세마네라고 불리는 지점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늘 그렇게 그 지점을 이용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기도하신 사건과 비교해볼 때 ‘어둠의 권세’는 어떤 것입니까?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너무너무 괴로울 것이지만, 그것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이게 바로 ‘어둠의 권세’에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 이야기를 하십니다.
‘백합화를 보라, 아버지께서 입히신다.’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그러니까 백합화 속에 아버지의 원하시는 바가 들어와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가 공중의 새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모두가 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를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가 뚫고 들어오는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합니다, 막혀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바를 확정짓고, 내가 원하는 바를 따라서 계획하고 추진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여간 내가 원하는 바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백합화에서처럼 표현해내고 싶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 이게 바로 어둠의 상태라는 얘깁니다.
쉽게 간단히 말하면, 내가 내 소원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어둠의 권세의 특징이고,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한,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것이라 이겁니다.
내가 자식에게 말합니다, ‘너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가서 대기업에 취직을 하고, 열심히 일해 그 대기업의 사장이 되면 아빠는 좋겠다.’ 아빠가 자기 마음에서 생겨난 원을 표현해냅니다.
자식에게 말하는 이 순간에 수없이 예수님에게 창과 칼로 찔러대면서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죽음 아닙니까?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습니까?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내 인생 24시간 동안에 모든 장소 모든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에 눈을 감아버린 채, 나의 원대로 행동을 하게 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을 죽이는 일이고 내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가 십자가사건에서 가해자의 입장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나의 생활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그러면 나는 어둠의 특징을 갖고 있는 자이고, 이 어둠의 특징이 있는 한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칼을 들이대고 창으로 찔러대고 있는 거라는 얘기에요.
베드로의 부인(否認)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대제사장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좇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서 내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내가 소원을 확정짓고 내가 원하는 바를 확정지은 다음에 그 소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 이게 바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겁니다.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否認)은 사실 엄밀히 보면 거짓말은 아니에요.
기적을 일으키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문둥병자와 죽은 자를 낫게 하시고 살게 하신 그 예수님을 베드로는 압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왕관을 쓰실 예수님을 압니다.
그러나 저렇게 무력하게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서 재판받고, 이제 십자가를 향해 죽으러 가고 있는 그 예수님을 베드로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겁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언제나 예수님을 생각할 때 왕관을 쓰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소원을 확정해놓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능력의 예수님을 찾고 능력의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부인을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의 살인의 입장을 재현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부인 또한 재현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재현되고 있는 예수님의 살인현장, 예수님을 죽이는 현장에서 알리바이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그 죽이는 자들의 입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낼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어요.
십자가사건에서 가해자의 입장에 서는 그 위치를 벗어나서 도망갈 자리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사건은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일어났지만 온 인류를 끄집어들인 사건이고, 온 인류를 향해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죽이는 사건과 죽음의 사건은 계속 지금도 재현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알리바이를 제공해서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어요?
오직 한 군데밖에 없어요.
주님의 십자가로 뛰어 들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 말고는…
내가 지금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이천 년 전에 죽었다, 그러니 지금 이 회사에서 죽은 것이고 이 상황에서 죽은 것이고, 이 가정 안에서 죽은 것이다, 라는 사실을 잊고 행동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잊자마자 나는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 이외의 입장은 이 지구 위에 이 우주 안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자리에 서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죽이거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서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알리바이를 제공하려면 피해자의 자리에 서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가해자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유일하게 십자가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제공되는 알리바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자리에 서는 것, 예수님을 거듭 죽이는 일을 재현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나의 소원이 죽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을 대하면서 내 소원이 생길 때마다, 아 저것 갖고 싶다, 이루고 싶다,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과 원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하며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지 않고 그 원대로 움직이고 마음으로라도 그 소원을 길게 갖고 바라게 된다면 그것은 어둠의 권세의 특징을 갖고 예수님을 죽이는 현장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소원을 기도하고 있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현장에 있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 소원이 죽을 때라야 하나님의 원이 돌파구를 찾습니다.
그래서 백합화가 백합화가 되듯이 공중에 나는 새가 공중에 나는 새가 되듯이 내가 내가 되려면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로써 내가 되려면, 하나님의 원하심이 돌파구를 찾아야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서 내 소원이 죽을 때라야만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표현하려 하셨던 하나님의 원하심이 돌파구를 찾고 뚫고 나와서 빛의 세계를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자리에서만이 살신사건에 대한 유일한 알리바이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사건은 가해자의 입장도 피해자의 입장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 말고 제3의 자리는 우주 안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내 마음의 소원이 죽으므로 아버지의 원하심이 돌파구를 찾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내가 주님을 죽이신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제공됨으로 신앙이 제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