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엘(구약묵시문학)
한강성당 대성전 2층에서 최승정신부님 다니엘서 묵시문학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열심하신 한강성당 교우분들과 함께 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 네 권의 예언서가 있습니다. 사대 예언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문학 관점에서 보면 다니엘서는 예언문학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묵시문학이라고 분류를 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묵시문학에는 다니엘서, 신약에서는 요한 묵시록이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는 잘 읽는 책인데,
언제가 되면 읽을까요? 바로 연말이 되면 읽습니다. 전례력으로 연말이 되면, 전례력으로 연중 33주, 그다음에 그리스도왕 대축일, 대림 1주, 2주가 되면 묵시록의 이야기들을 읽어요. 바로 끝이 왔으니까, 전례력이 한 바퀴 돌았다는 것은, 우리들의 인생으로 말하자면 탄생부터 죽음까지에요. 또는 세상으로 이야기하자면 창조부터 종말까지를 의미해요. 그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시간에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조금 있으면 대림의 시기에요, 대림은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시기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탄생, 그것은 동전의 앞면이에요. 그리고 그 뒷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승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가 다시 돌아오시리라는~ ~~
초대 교회에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하게 바랬던 일입니다.
한데 요즘의 우리는 전통적이 그 마음 가짐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신부님이 물으셨어요,
"여러분들은 종말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까? 천천히 오기를 바랍니까?"
주님 빨리 종말이 오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는 분이 있을까요? 없어요??!^^
아무튼,
종말이란 표현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 또는 이거? 사교 아닌가? 예전에 1999년에 종말, 휴거라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모습들과 오늘날 신천지와 같은 곳에서 1440명만 과천에서 구원된다 해서 사람들을 모으다 숫자가 넘어가 버리니까, 그것이 구역장 숫자다! 는 말을 바꿔서 '참 특이하다.'라고 생각을 하셨다고 해요.
종말에 관해서는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단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어서 빨리 오소서(아람어로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소서)를 간절하게 했던 기도가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나? 에 대해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얘기하는 종말이라는 신학과,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종말은 어떤 차이가 있지 않을까? 라는 것에 대해서도 강의 말미에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다니엘서는 문학작품으로 보자면, 묵시문학이다.
묵시문학이라는 단어는, 묵시= 계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묵시는 "아포칼립시스"라는 그리스 말에서 나왔는데, 의미로는? 무언가가 보자기 같은 것으로 덮여있는데 그것을 열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계시라는 말은 "아포칼립시스"라는 그리스말이 라틴말로 번역할 때 "레벨라시오"라고 번역했는데, 레벨라시오를 우리말로 번역해도 계시에요.
따라서 묵시와 계시는 동의어에요.
문맥에 따라서 어떤 때는 계시, 어떨 때는 묵시라고 쓸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아!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야."라고 사용하고, "그것은 묵시문학이야."라는 표현을 쓰지 "계시문학이야."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습니다.(인간, 혹은 사람처럼)
아포칼립시스와 레벨라시오는 무언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로 전체적인 맥락을 알고 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묵시문학이 문학적 장르에 이름으로 쓰였을 때는 어떤 뜻이냐?
천상과 지상이 있어요. 그런데 천상의 질서는 이상적이고 지상의 질서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면 어느 시점이 되었을 때 천상의 질서가 지상에서도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종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묵시문학입니다. 천상의 질서가 우리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워낙에 상징적이라서, 천상의 질서를 사람들이 보기에는 환시나 환청 같은 것으로 보게 되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상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연구가들은 해석해 주는 천사(해석천사)라고 부릅니다.
다니엘이나 어떤 사람이 환시나 꿈에서 무언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니 해석천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천상의 질서가 이상적이고 이 지상의 질서가 불완전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이 지상의 질서가 역전된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복음서의 예를 들어보자면,
"그날이 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잘못이해하면 우리들의 손주들에게 "너~~ 학교에서 꼴찌 해야 해. 첫째 하면 큰일 난다."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그 의미란?
이 이상적인 세상이 지상에서도 구현될 때 그 모든 것들이 뒤집힌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시작될 것이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 오백 년 전의 조선 사람들에게 설명이 되겠습니까? 사진을 찍어 보여준다고 해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이메일도 인터넷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따라서 묵시문학은 상징적인 언어로 가득하고 그것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알아들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서만 구약의 묵시문학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사 24~27장 : 이사야 묵시록
이사 33장 : 소(小) 묵시록
그 외에도 묵시적인 언어로 쓰여진 많은 내용들이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다니엘의 이름은 엘이 재판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 안에 종말론적인 심판의 어감이 담겨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가릿 문헌에 보면 청동기 시대(주전 1500경으로 짐작)의 토판에 다닐루라는 임금이 등장하는데, 그 임금은 공정하고 지혜로운 재판으로 유명하였어요.(당시에 임금이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지녔었다)
다니엘 = 엘(EL)이 재판/ 심판한다
우가릿의 임금 다닐루
따라서 다니엘과 다닐루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실제로 다니엘서,
다니엘서 1장-6장 : 다니엘의 지혜로움
1장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바빌론으로 유배가 3년 동안 교육받다.
1,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사람들을 잡아서 바빌론으로 데려가는 내용인데, 다니엘도 그중에 한 명이더라. 그들 중에서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보라고 임금이 이야기하자, 이 네 명이 뽑혀 3년 동안 교육을 받아요. 바빌론은 무엇보다도 지혜 사상이 중심이라 그 사상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과정에서,
다니엘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내시장에게 말하는 부분 (다니 1,8)
따라서 채소만 먹어요. 요즘엔 그것을 비건이라고 하죠.
이때 내시장이 거절을 하고(젊은이들이 말라서 임금에게 혼날 것이라 생각하여), 다니엘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다른 학생들보다 네 명이 더 통통하고 혈색도 좋아서 내시장이 안심하였다는 내용
2장 네브카드네자르의 꿈과 다니엘의 해몽
2,44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꿈을 꾸는데 그 꿈이 번상치 않자, 주위의 현인들에게 꿈해몽을 요구하는데,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믿지 못해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맞추라고 말한다.(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창세기 마지막~ 요셉이 이집트에 가서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는 부분보다 더 높은 "내 꿈부터 맞춰봐!! 하고 말하는 네부카드네자르)
여기서 잠깐ㅡ,,ㅡ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어떤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 점쟁이는 자신감이 충만해서 자신의 사무실 입구에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일이란 없다!" 하고 써 놓았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점쟁이를 찾아가서 사무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점쟁이가 "누구세요?"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잘하고 있네." 하고 말하고 돌아갔대요. ㅎㅎㅎㅎ
반대로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이십 년 전쯤에 시성 된 비오 신부님은 고해 신부로 유명하셨는데, 그분께 고해를 보고 "내가 회개했다."분들이 많았어요. 어떤 사람이 그 비오 신부님을 회고하면서 "내가 어느 날 고해소에 들어갔더니, 비오 신부님이 화를 내면서 '나는 네가 올 줄 알았고 네가 정말로 회개하지 않는 채 고해성사 보러 온 것도 알고 있어. 정말 회개할 마음이 생기면 그때 다시와.' 하고 말하셨어요. 그래서 시간이 흐른 후에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봤어요." 하는 이야기가 비오 신부님의 책에 실려 있어요.
그래서 신부님도 본당 신부였을 때 그런 본당 신부가 되고자 하셨는데, 하느님께서 그런 은총을 주시지 않으신 것 같다고....
다시 다니엘서로 넘어가, 현인들이 꿈을 알아낼 자신이 없다고 말하자 네부카드네자르가 화를 내면서 "해몽하는 사람들 다 붙잡아와! 다 혼내서 죽여 버릴 거다." 하고 말하니 현인 수업을 받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난리가 난 거예요.
바로 그때 다니엘이 책임자를 찾아가서 "내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황제와 독대하고 꿈이 무엇이고, 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혀 줍니다. 그러자 황제는 놀라면서 다니엘에게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기게 됩니다.(요셉의 이야기와 비슷)
그 다니엘이 해몽한 이야기(다니 2,44)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약의 메시아니즘과 같은 내용.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는 내용과 비슷한 말을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하늘의 하느님
이 표현이 유배 이전의 이스라엘의 문학에서는 나오지 않고 유배 이후의 이스라엘 문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배 간 곳은 바빌론입니다. 바빌론은 아카디아로 밥일룸(하늘의 문),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면서 어떤 신학자들은
다니엘은 이 세상에는 야훼 하느님밖에 없다(신명기적인 고백),라고 생각했는데 바빌론에선 하늘의 신을 섬기는데 그 신의 가능성에는 야훼 하느님이든지, 존재하지 않는 신이든지 그 두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일신관에 의해서 '너희들이 믿는 신도 야훼야.'라고 보편적으로 이야기는 하는 것이다.
신부님 고등학교 때에 윤리선생님께서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같은 분 아닐까?"라고 하셨던 생각들이 이 안에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신을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유배 이후에서부터 부르기 시작했고 유배 이후의 문학인 유딧기, 다니엘서도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이 주님의 기도에도 있습니다(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3장 네부카드네자르
"금상" 하난야 + 미사엘 + 아자르야, 영광송
3,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96 이제 나는 칙령을 내린다. 어떠한 민족이나 나라나 언어권에서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 욕되는 말을 하는 자는 사지가 찢겨 나가고 그의 집은 쓰레기 더미가 될 것이다. 이처럼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신은 다시없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바빌론을 지키는 높은 지위에 있자, 사람들이 그들을 질투하면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금상을 만들게 하여 한 달 동안 다른 신에게 절해서는 안되고, 이 금상에만 절하게 하시어 누가 임금님에게 충성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유다인인 세 사람은 예루살렘을 향해 절은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 셋을 잡아가 죽이려고 하는데 하느님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고발한 그들이 죽게 됩니다. 그러면서 네부카드네자르는 황제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의 다른 이름)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은 하느님에 영광을 노래하는 부분으로, 같은 패턴이 4장에서도 등장합니다.
4장 네부카드네자르의 꿈과 해몽, 영광송
4,21 임금님, 꿈의 뜻은 이러합니다. 그것은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 내리신 가장 높으신 분의 결정입니다.
22 임금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쫓겨나 들짐승들과 함께 사시겠습니다. 그래서 소처럼 풀을 드시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젖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일곱 해를 지내시고 나서야, 임금님께서는 비로소 가장 높으신 분께 인간들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이에게 그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겠습니다.
23 또 그 나무의 뿌리등걸을 남겨 주라고 한 것은, 하늘이 세상을 다스림을 임금님께서 깨달으신 다음에야, 임금님의 나라가 임금님께 되돌려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24 그러니 임금님,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다니엘의 조언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서도 우리의 지도자들이 귀여겨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신다고...
이런 꿈의 해몽에도 네부카드네자르는 다니엘을 칭찬하고, 중요한 일을 맡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는 다니엘이 한 이와 같은 일, 하느님이 자신을 심판하는 내용을 몸소 경험하고 다시 회개해서 영광을 되찾고 돌아오는 것이 4장의 내용
5장 벨사차르, 왕궁 벽에 글을 쓰는 손가락, 살해
다니엘서를 보면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정보를 많이 줍니다. 그중에 하나의 내용인 부분으로 벨사차르가 네부카드네자르의 아들로 나오는데 사실은 손자입니다.
벨사차르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왕궁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써요.(무섭겠죠?) 그리고 나서 그 글씨가 무슨 뜻인지?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서 궁금해하는데 다니엘이 나타나 그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그 다니엘이 얘기합니다.(다니 5,25)
5,25 그렇게 쓰인 글자는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입니다.
당신의 왕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해석해 줍니다. 그런데 벨사차르도 다니엘을 벌하기보다는 다니엘을 칭찬하고 상을 내립니다. 다니엘의 말대로 5장의 마지막 내용엔 벨사차르가 죽었고, 벨사차르는 바빌로니아 왕국에 마지막 임금이에요.
6장 다리우스, 사자굴의 다니엘, 영광송
바빌로니아 왕국은 멸망했지요? 따라서 메데와 페르시아가 고대 근동에 패권을 쥐게 되는데, 그 메데의 지도자가 다리우스예요. 다리우스가 다니엘을 어쩔 수 없이 사자굴에 집어넣었지만, 다리우스는 다니엘을 아꼈던 것 같아요. 다음날 보니 다니엘이 무사하였고, 하느님이 다니엘을 보호해 주시는 것을 알고 다니엘을 고발하는 이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과 영광송이 나옵니다.
6,23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묵시문학입니까? 아니죠? 여기에서 황제의 꿈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언어로 되었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역사서문에 가깝습니다.
7장부터 왜 다니엘서가 묵시문학이라 불리는지 보여줍니다.
6장까지의 내용은 시간적으로 보면은 정배열입니다.(네부카드네자르ㅡ 벨사차르ㅡ 다리우스) 바빌로니아는 번영으로 이끌었던 네부카드네자르부터 멸망으로 이끈 벨사차르까지, 그다음에 나오는 메데와 페르시아의 지도자로 나오는 다리우스까지.
그런데 7장에서 시간이 다시 벨사차르에게로 넘어갑니다.
7장 (벨사차르 제 일 년)
다니엘의 환시와 천사의 해석
다니엘의 환시가 문제가 됩니다.
7,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환시를 하고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자, 천사가 나타나서 해석해 주었더라. 는 게 7장의 내용입니다.
8장 히브리어! 1인칭! (벨차사르 제 삼 년)
다니엘서는 구약성경 중에서 좀 이상해요. 구약성경 중에서 세 가지 언어로 쓰였습니다.
1장~2,4절 앞까지는 히브리어로
2,4절 뒷부분부터~7장까지는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8장부터 다시 히브리어로 쓰여요.
그리고 1장~6장까지는 다니엘이 3인칭으로 나오는데,
7장 그리고 8장, 9장, 10장, 11장, 12장은 다니엘이 1인칭으로 나옵니다.
6장, 7장, 8장을 거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언어상, 내용상, 인칭상의 변화도 일어난다)
6장까지는 묵시문학이 아닌 것 같고 7장부터는 묵시문학적인 내용이 등장하더라.
다니엘의 환시 : 숫양과 숫염소 + 가브리엘의 해석
여기서 숫양은(페르시아 제국) 숫염소는(그리스 제국, 헬레니스트)
☞잠깐 집어봅니다.
고대 근동의 제국들!!
아시리아제국 ㅡ 바빌로니아제국ㅡ 페르시아제국ㅡ 헬레니스트 제국ㅡ 로마 제국으로 기억해 주세요^^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바빌로니아는 남유다를 멸망시켰고, 페르시아 제국이 패권을 잡으면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리고 알렉산더와 함께한 헬레니스트 제국과 그 역사 안에서 마카베오 혁명을 일으키면서 왕국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국이 실패하고 주전 64년부터는 고대 근동 전체가 로마 제국의 손으로 넘어가더라~
8,17 그러자 가브리엘이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깜짝 놀라 엎드렸다.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사람의 아들아, 깨달아라. 환시는 종말의 때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제국들이 다 무너지고 이제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완전한, 온전한 세상이 우리로부터 시작할 것이다.라는 내용.
9장 (다리우스 제 일 년)
메데아의 지도자인 다리우스, 하지만 여기서도 다리우스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다리우스 제 일 년!
예레미야 묵상(일흔 해) + 기도 + 가브리엘이 전하는 말씀(일흔 주간)
다니엘이 성서신학자처럼 예레미야 예언서를 묵상해요(유배중에 있으니까), 그런데 에레미야 예언서를 읽다 보니까 칠십 년이 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라는 묵상을 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유배는 50년입니다.(587년~537년까지)
그런데 70년이라는 예레미야 예언서 이야기도 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에요. 587년은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시기고요. 그보다 20년쯤 앞서서 주전 607년에 이미 바빌로니아가 남유다를 쳐들어와서 첫 번째로 유배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배기간은 70년이에요. 따라서 이 일흔 해에 의미에 관해서 기도하고 자신의 민족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 가브리엘 천사가 와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더라~(다니 9,2)
9,2 그의 통치 제 일 년에 나 다니엘은 성경을 펴 놓고,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채 채워야 하는 햇수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흔 해였다.
예레미야 예언서에 일흔 해에 관해서 두 번 정도 나옵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이 다니엘에게 한 말씀을 전합니다.
9,24 너의 백성과 너의 거룩한 도성에 정해진/ 일흔 주간이 지나야/ 악행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속죄가 이루어지리라/ 또한 영원한 정의가 펼쳐지고/ 환시와 예언이 확증되며/ 가장 거룩한 곳에 기름이 부어지리라.
여기서부터는 시간적으로 보면 그보다 먼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양적인 일흔 주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일어날 사건들을 일흔 주간으로 나눠서 이야기하는데 그 최종적인 언급이 안티오코스 4세의 범죄입니다.(헬레니스트 제국의 셀리우코스 왕조의 황제였는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모독합니다. 앞에서도 보면은 그 부분에 관해서다니 3,95-96)
네부카드네자르가 금상을 만들어 절하라고 하고, 다른 상에 절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금상이 누구의 상인지 알려주지 않아요.
1) 네부카드네자르가 섬기는 신의 상
2) 네부카드네자르의 자신의 상
신학자들은 두 번째, 자신의 상일 것이라고 생각, 이미 헬레니스트 제국에서 유다인들이 힘들었던 것은 황제들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나는 반신반인이었다. 그래서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특히 안티오코스 4세(=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로 황제기억^^
9,24을 내용을 보면서 다니엘 예언서를 썼던 시기가 안티오코스 4세의 시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지금 우리에게 이런 악행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나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의 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다 두고, 자신의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못 견디고 마카베오 혁명이 일어납니다.(마카베오기 상하권)
10-12장(키루스 제 삼 년: 티그리스 강가)
다니엘의 환시(세주 동안의 고행)- 단식, 절제
민수기에 보면 나지르인의 서원, 우리로 생각하면 수녀님들 첫 서원과 종신 서원이 있는데, 이스라엘인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한달 정도의 기간동안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하느님과 함께 거룩하게 살겠습니다. 머리와 외모에 신경을 안 쓰고 포도로 만든 것을 먹지 않는 생활)
10,20 그러자 그( 사람 모습을 한이)가 말하였다. "너는 내가 왜 너에게 왔는지 아느냐? 나는 이제 돌아가서 페르시아의 제후 천사와 싸워야 한다. 내가 그 일을 마치면 그리스의 제후 천사가 올 것이다.
이제 페르시아가 망하고 헬레니스트 제국이 새로 세력을 떨치는 시기가 온다는 뜻
21 이제 나는 진리의 책에 적힌 것을 너에게 일러 주려고 한다. 너희의 제후 천사 미카엘 말고는 나를 도와 그들을 대적할 이가 없다.
11,1 나는 이미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제 일 년에 미카엘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그를 뒷받침해 주려고 나선적이 있다.
기저에 깔린 생각? 고대 다신적 신관 안에는 다수의 신들이 있고 자신의 영토의 자신의 국민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었고, 이스라엘 땅은 야훼의 땅, 바빌론은 마르둑의 땅이고 바빌론 사람들은 마르둑의 백성이라고 생각함.
그런데 이제 유일신관으로 바뀌면서 야훼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서 온 세상의 하느님으로, 하느님께서 각각의 천사들에게 각각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라고 생각하였다. 특히나 미카엘 천사는 이스라엘 담당이라고 여겼기에 미카엘의 통치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민족.
12,1 그때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내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천상의 하느님께는 인간에 구원에 관한 책이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죽었다가 깨어난다(부활의 관한 개념)을 말하는데, 신약의 생각이 다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부활에 관한 가장 원시적인 생각이 드러남 => 구약에서는 사람이 살다가 신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신을 잘못 섬기면 벌을 받는데 죽고 나면 다 끝이다! 죽은 이들은 사는 세상으로 가는데 그곳에는 다스리는 신이 따로 있다.
그런데 두 번째의 생각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정말 믿는 사람이 그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죽는 일이 생긴다(특히 페르시아 제국의 시기가 끝나고 헬레니스트 제국으로 넘어오면서) 그때 죽은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물었을 때, 그 사람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시간이 되면 그를 하느님께서 살려 주시어 복을 받게 하시고 다시 죽게 돼!라고 생각하였다.(욥의 경우 살아서 두 배로 받았다),
그리스도교에서 생각하는 하늘나라에 관한 생각이 유다교에는 많지 않아서, 지금 21세기에도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그러한 생각 때문이다(내 세한 관한 죽음에 대한 불만으로)
그렇다면 신약에서의 부활은? 이 세상의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나자로의 환생처럼), 전혀 새로운 삶으로 불림을 받는 것,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현명한 이들(지혜문학에서 곧 토라에 충실한 이들)
12,12 행복하여라, 천백삼 심 오 일이 될 때까지 견디어 내는 이들!
13 그러니 너는 끝까지 가거라. 너는 잠들어 쉬겠지만 끝 날에 일어나 네 몫을 받을 것이다." (행복 선언으로 12장이 마무리됨)
뒤따르는 내용은 다시 그리스어로 수산나와 벨과 뱀에 관한 내용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임,
오늘날 다니엘서 연구가들은 12장까지 연구함. 뒤에 오는 내용은 따로 떼어서 공부.
신부님도 12장까지 하시고 주로 어떤 것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이어서 설명해 주셨어요.
- 언어
히브리어 1,1-2,4a
아람어 2,4b-7,28(부분적으로 그리스어: 3,24-90)
히브리어 8,1-12,13
그리스어 13,1-14,42(수산나와 벨과 뱀의 이야기)
각각의 이야기들이 단편적으로 왕이 어떤 꿈을 꾸었고 다니엘이 해몽해 주었다. 지혜로운 다니엘과 하느님의 영광의 테마로 1-6장까지 이야기되고,
7-12장까지는 다니엘의 환시와 그 환시에 대한 천사의 해석, 묵시문학적이 내용이 후반부에 일어나는데 그 안에서 충돌이 다음과 같이 일어난다
1,5절 :: 2,1.25 (충돌)
1,19 절:: 2,25절
6,29절:: 7,1절
예를 들면 앞에서는 어떤 임금이라고 하였는데 갑자기 시간적인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다거나, 1,5절에서 그들이 바빌로니아에 와사 3년 교육받았다 했는데 2장으로 넘어가 갑자기 네부카드네자르 2년이라는 말을 한다거나, 시간적인 혹은 내용적인 배열에 관해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다니엘과 세명의 동료들의 이야기에서도, 이 네 사람이 함께 언급될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3장에 와서 세 친구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거기에 등장하지 않는 다니엘이 그 내용을 거기에 끼워 넣기 위해서 이 네 사람이 함께 바빌론에 유배 갔다는 1장의 내용이 첨가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요. 앞서 말씀하신 대로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3인칭으로 넘어가는 문학적 일관성이 결여된 부분을 볼 수 있음
다니엘과 동료들의 개명 - 다니엘이 없는 3장
3인칭(1,1-7,1) :: 1인칭(7,2-12,13) :: 3인칭(13-14장)
하늘의 하느님 : 에즈라 + 느헤미야 +유딧 + 토빗
호칭에 이해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해 주셨음
야훼 : 9,2.4.13-14장
다니엘에서는 야훼라는 신명이 9장에서만 등장함. 어떤 사람들은 왜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다니엘서에서는 사용을 했겠는가? 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데, 적어도 유배 이후의 시기에 유다는 야훼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서 다른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들이 발견한 적합한 호칭이 "하늘의 하느님"이었을 것 같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의 의견이 단일하지 않음을 보여줌.
그러면서
다니2,17 의 내용에서
다니엘은 집으로 가서 자기의 동료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자르야에게 사정을 알렸다.
18 또 자기와 동료들이 바빌론의 나머지 현인들과 함께 죽지 않도록, 그 신비와 관련하여 하늘의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자고 하였다.
19 그러자 다니엘에게 그 신비가 밤의 환시 중에 드러난다. 다니엘은 하늘의 하느님을 찬미하며
20 이렇게 말하였다. "지혜와 힘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이름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2,37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임금들의 임금이십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께 나라와 권능과 권세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네부카드네자르에 대한 영화와 권능도 하늘의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호칭은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사용
2,44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종말론적인 왕국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호칭 사용)
황폐의 흉물(히브리어로, 스코시 슴무)- 바알 샤멤(비슷한 히브리어)
학자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는데, 어떤 사람들은 황폐의 흉물이라는 것이 임금이 자신을 신격화한 신상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빌론이 섬기던 신도, 아카디아어로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는데 그 하늘의 하느님상을 만든 것을(이스라엘은 신상을 만들 수 없으니까) 황폐의 흉물이라고 불렀다! 는 의견
이날 오후 다섯까지 신부님께서는 고민을 하셨는데, 모르시겠다고 하셨어요^^ 따라서 이런 이런 의견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11,31 그리고 그가 보낸 병력이 자리를 잡고서는, 성소와 성채를 더럽히고 일일 번제를 폐지하며,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울 것이다.
12,1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가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12,11 일일 번제가 폐지되고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런 것(직역: 황폐의 흉물)이 세워질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흐를 것이다.(어디에?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진다는 것)
신약에서도 등장하는 황폐의 흉물
마태 24,15-16 : 마태오 24장(마태오의 묵시록)
15 "그러므로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ㅡ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ㅡ
16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마르코 13장 :마르코의 묵시록
마르 13,14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는 ㅡ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ㅡ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그때는 종말의 시간으로 하느님이 개입하실 것이야)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느냐? 다니엘서가 얘기했을 때는 헬레니스트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가 문제였다면, 마르코 시기는 로마 제국의 시기인데 로마의 황제들도 비슷한 짓을 했어요. 따라서 다니엘서를 가져온 것이죠. 그리고 같은 종말론적인 예고를 합니다.
루카 21,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에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반면에 루카 복음서는 앞에서 쓰여진 다니엘서를 인용하지 않고(마태오나 마르코처럼), 황폐라는 말을 억지로 쓰긴하는데 루카 복음의 독자들은 이방인들이어서 예루살렘 성전에 무엇이 세워지고 일어났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 전체적인 다른 문장을 사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복음 21장도 루카의 묵시록
따라서 후에 책을 읽다가 공간묵시록을 발견하시면, 마태 24장, 마르 13장, 루카 21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루카 21장이 돌아오는 주간의 복음입니다.(복음을 들으면서 루카 21장 잘 걸렸어~~~ 하고 들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사람의 아들
7,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하였다.
사람의 아들: 천사(야훼 하느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각 나라를 다스리는 세상이 온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사람의 모습을 천사가 와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7,14 그에게 통치권을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7,27 나라와 통치권과/ 온 천하 나라들의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되고/ 모든 통치자가 그들을 섬기고 복종하리라."
따라서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은 종말론적인 메시아와 관계가 있지 않아요. 이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묵시문학적인 체계 안에서 야훼 하느님이 각각의 나라들에게 천사들을 파견하게 되고 그중에 한 천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텐데, 그 천사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이 닮아 있었더라. 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구름을 타고 나타난다?( 직역: 구름과 함께 내려온다)
여기서 잠깐만요, 요즘에 천사를 그리라고 하면 날개를 그리잖아요? 천사는 영적인 존재인데, 영적인 존재는 중력의 영향을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따라서 날개가 필요가 없어요.
또 우주에서 싸우는 우주선들이 있잖아요? 거기에 날개가 필요할까요? 안 할까요? 거기에는 공기가 없어서 날개가 필요가 없어요.
한데 사람들은 날개가 없이 우주선이 안 그려지는 거죠. 그래서 스타워즈를 만들 때 전투하는 우주선에도 날개를 달아요. 마찬가지로 천사를 그릴 때에도 하늘에서 내려와야 하니까 날개를 달아요.
그런데 다니엘서는 아직 그렇게까지 생각을 못해서 하늘에서 내려올 때 구름이 필요한 거예요. 구름이 이동기구인 거죠. 그래서 직역하면은 천사가 구름과 함께 내려온다는 것이죠.
다니엘서 저자가 볼 때 천사가 그냥 내려오는 것은 위험해 보였나 봐요. 혹시 떨어지더라도 쿠션도 있으니까?!! ㅎㅎㅎ
고대인들의 신화적인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문화 안에서도 400년인가? 500년 이전에 그림에서는 천사가 날개가 없어요. 그 이후에 그림에서는 천사들의 날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8,17 그러자 가브리엘이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깜짝 놀라 엎드렸다.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사람의 아들아, 깨달아라. 환시는 종말의 때에 관한 것이다."
사람의 아들=> 사람은 앞서 이야기한 사람의 형상을 한 이들을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사람은 당시의 황제들을 부르는 호칭을 조롱하는 의미입니다. 황제들이 자기를 '나는 신의 아들이야." 하니까 옆에 있던 예언자가 "어?? 나는 사람의 아들이에요." 그렇게 신의 아들을 대변되는 표현입니다.
같은 표현이 구약 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서른 번 넘게 나옵니다.
에제 2,1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부르실 때 '사람의 아들아' 하고 부르십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일 때부터 정치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예언자를 뭐라고 불렀냐면,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황제들이 신의 아들로 자신을 부르기 시작하자,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하느님의 예언자를 "사람의 아들아, 너는 사람의 아들이야. 내가 해줄 말을 사람들에게 전해라."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역시 메시아니즘과 관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달라집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신약과 구약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중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문학작품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에즈라 사상, 또는 에녹서와 같은 문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경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외경입니다. 책을 구하셔서 보셔야 하는데.......
그 외경에 보면은요, 사람의 아들을 메시아니즘과 결합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이 세상의 끝이 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그 사람의 아들이 와서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세상을 심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새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라는 그림이 나옵니다. 따라서 다니엘서가 이야기한 사람의 아들의 형상을 한 그 마지막 통치자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나중에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보내 줄 메시아와 동일한 인물이야.라는 해석을 외경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서들이 이어받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그 호칭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합니다. 신약의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서 거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서의 내용 안에서 자신에 관해서 사용하는 유일한 호칭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에요.
그래서 찾아보면, 마태오의 묵시록 24장, 마르코 묵시록 13장, 루카의 묵시록 21장에서 평행하게 나옵니다(평행한다는 것은 공관복음에서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마태 24,30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다니엘 예언서 우리가 이미 볼 수 있었고 그리고 외경에서 메시아적으로 해석한 그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사람의 아들이'에 따옴표가 붙어있는데 다니엘서(7장)에서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마르 13,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종말론적인 표징입니다. 새로운 왕국을 위해서 새 백성을 모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심판받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해서 새로운 왕국이 시작될 것이다.라는
어떻게 보면 구약의 원시적인 그림을 공관복음서의 묵시록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그 점에 있어서 절제하고 있습니다.
루카 21,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루카 복음서는 이미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마태오나 마르코에 없는 내용이 나옵니다. 루카 복음서의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승천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아들에 대한 언급이 또 예수님이 대사제들에게 심문받을 때 나옵니다.
대사제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은? "당신이 메시아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에 예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마르 14,62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볼 것이다."
마태 26,64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볼 것이다."
루카 22,69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양 된 모습, 그리고 재림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가 대사제에게 심문받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자신에 관해 증언하는 이 부분에서 우리들은 그 내용을 읽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적인 인용을 많이 할 법한데 안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이니까 나타니엘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요한 1,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도 7,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스테파노 부제가 이 이야기를 하고 유다인들의 노여움을 타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하느님, 사람의 아들, 황폐의 흉물 이와 같은 것들이 다니엘서부터 시작해서, 하지만 신학적인 발전을 거친 후 신약 성경 안에서 자리 잡게 됩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얘기하고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지?라는 문제라면, 신약 성경에 있어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이제 부활한 예수님이 언젠가 우리 가운데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그때가 언제지???라는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앞서서 말씀하신 마태오 24장, 마르코 13장, 루카 21장인 공관묵시록에서도 제일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그 질문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재림을 그들이 고대하고 고대했다는 것은, 그들의 현실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빨리 재림을 해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그리스도인들의 열망이었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종말에 관해서 오늘날 교회는, 전통적인 그림을 그렇게 한편으로는 지켜가면서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종말에 관해서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망하고 하느님의 개입으로 갑자기 새로운 세상이 시작하는 그런 종말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 완성된다는 의미에 종말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겠다. 두 가지 해결책을 오늘의 교회는 함께 뭉뚱거려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의 의지가 완성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까? 반대쪽으로 가고 있습니까?
신부님은 잘 모르시겠다고...
어떻게 보면, 기후문제라든지 환경재앙의 문제를 보면 우리들에게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종말, 올바른 길로 가서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완성되는 쪽으로 간다고 보기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누군가 신부님에게 "500년 전 조선에서 태어날래? 지금 2024년 한국에 태어날래?" 그렇다면 신부님은 요즘에 태어난다고 하실 것이라고, 요즘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신부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다면..
당장의 에로 신부님께서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셨는데, 그때에 신부님이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 잿빛이었던 것 같다고.... 자유, 민주주의가 군사 독재 안에서는 희망이 없었던 것 같으셨다고.. 우리가 이런 독재의 시기를 살아가는 것 아니야???
2024년 요즈음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하신다고 합니다. '요즘에도 세상에 관해서 좋지 않는 소식들을 듣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행복하지 않냐?' 이런 세상에서 살거라고 기대하지 않으셨다고 해요. 이렇게 맘놓고 대통령 비판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위해서 투표할 수 있고 떳떳하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좋지 않는 모습도 또한 보이는 것 같다고....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갖고 있는 생태계에 대한 관심들, 생태의식들을 세상이 올바르게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해서 바로 잡아야 할 문제가 있다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지도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4년 혹은 5년마다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하니까요. 신부님이 조금 걱정스럽게 봤던 것은, 지난번 선거 때에 환경이나 생태공약이 앞줄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깨어난다면 다음번 선거 때에는 선거 공약으로 환경문제, 생태문제에 대해서 해결해 보겠습니다.라는 공약들이 첫 번째, 두 번째 공약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다니엘서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우리가 보면 원시적입니다. 묵시문학적인 관점에서 상징적으로 얘기했지만 그 상징적인 내용의 바탕 안에서는 사람들에게 원시적이지만 희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곧 끝이 난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거야."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다니엘서 나오는 여러 가지 묵시문학적인 것들을 부분적으로 이어받으면서 한 장을 묵시적인 내용으로 할애한 것입니다.마태오 전체 28장에서 24장인 한장을 할애한 것입니다.(루카복음 21장을, 마르코 13장을)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것을 이용하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 시작할 세상을 구약의 언어를 빌려서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시적인 신관, 세계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뿌리를 내려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알아들을 수 있고, 옛날 다니엘서 이스라엘 백성이 꾸었던 꿈을, 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공관복음서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꾸었던 꿈을 2024년, 지금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꾸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흐름을 가져왔는지 되짚어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적인 근거를 우리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신부님의 오늘 강의 목적은?
돌아오는 주간의 복음서를 들으면서 "어~~~ 이거 무슨 얘긴지, 나 알아." 하고 반갑게 들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시작되는 대림의 시기가 예수님의 재림,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관계되는 시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단지 들뜬 마음으로 예수님의 탄생만을 기뻐하고, '크리스마스 선물 뭐 할까?'라는 것보다 그것을 넘어서는 "아! 이 세상은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고 또 그 가운데에서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큰 그림을 다시금 생각하는 대림의 시기를 기억하면서....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또 다음 강의를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