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컴퓨터를 빼놓을 수 없지요. 지금 우리가 이 글을 읽고 쓰는 공간 역시 컴퓨터라는 공간이네요. 어디에 실존하는 지는 모르지만요. 컴퓨터의 역사를 이야기하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시작으로 돌아가보면 앨런 튜링의 이름을 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영화 <이미테이션>을 통해 그의 삶을 알아볼까요?

16~17세 경의 튜링. ⓒ 위키백과
영화는 1951년,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시작합니다. 수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앨런 매티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년~1954년)의 집에 괴한이 침입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듭니다. 소음에 놀란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지만 정작 튜링은 별일 아니라며 경찰을 돌려 보냅니다. 하지만 이를 미심쩍게 여긴 형사는 튜링의 뒷조사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는 1951년과 1940년대 초반을 오가며 우리에게 튜링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줍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튜링은 독일군의 에니그마(Enigma) 암호 체계를 해독하여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운 일등공신입니다. 암호 해독을 위해 튜링은 클로써스(Clossus)라는 특별한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 기계가 현대 컴퓨터의 할아버지 정도 되나 봅니다. 선조 뻘입니다. 그래서 튜링을 컴퓨터의 아버지, 인공 지능의 선구자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학창 시절 절친했던 동성 친구의 이름이지요. 감독이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그의 동성애적인 경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로 보입니다.
사실, 비밀 연구를 통해 연합군의 승전에 아주 큰 공헌을 세우 튜링이었지만 전후에 그의 역할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동성애 문제였지요. 그는 2003년에야 사면을 받고 그의 역할이 비로소 재조명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수학자, 컴퓨터 공학자, 암호해독자로 활약하던 튜링의 모습과 함께 동성애자로 비참한 말년을 보낸 그의 모습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아니, 영화의 시작과 끝을 동성애 이야기로 꾸린 것을 보면, 감독은 튜링의 비밀스럽고 안타까웠던 말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밀 임무에서 해제되자 튜링은 맨체스터대학교로 옮겨가 컴퓨터 연구를 계속합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로 체포되고, 징역형을 선고 받습니다. 법정은 2년의 수감과 강제적인 (여)성 호르몬 주사법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합니다. 튜링은 연구를 위해서 호르몬주사를 선택하지요.
여성 호르몬 주사법은 남성 성범죄자에게 호르몬을 주사하여 성적 충동을 강제로 억제하는 방법입니다. 지금도 이 치료(?)는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여러 나라에서 형벌의 하나로 씁니다. 튜링이 맞았던 여성 호르몬은 디에틸스틸베스트롤(Diethylstilbestrol; 이하 DES)이라는 합성 여성 호르몬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악명 높은 약물입니다.

에드워드 도이지. ⓒ 위키백과
여성 호르몬이 난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20세기 초에 알려집니다. 미국의 에드워드 도이지(Edward Doisy; 1893~1986)와 독일의 아돌프 부테난트(Adolf Butenandt; 1903~1995)가 1929년에 각각 여성 호르몬을 분리합니다. 하지만 ‘천연’ 여성 호르몬은 분리가 쉽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여성의 소변을 아주 많이 모으면 몇 mg 정도 분리할 정도니까요. 그래서 쓰임새가 많을 여성 호르몬이나 그 유사 물질을 쉽게 생산하려는 경쟁이 시작됩니다.
그 결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인공’ 여성 호르몬인 DES을 합성했고, 몬트리얼에서는 말 오줌에서 정제한 ‘자연산’ 여성 호르몬인 프레마린(Premarin; pregnant mare urine; 임신한 암말 오줌의 약자)을 생산합니다. 1940년대에 둘 다 여성의 폐경기 증상 치료제로 팔립니다. 하지만 개발자의 의도와는 달리 약은 엉뚱한 용도로 쓰이게 됩니다.
시카고에서 비뇨기과 의사로 전립선 연구에 전념하던 찰스 허긴스(Charles Brenton Huggins; 1901~1997) 교수는 남성 호르몬이 전립선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합니다. ‘멀쩡한’ 개의 고환을 잘라버리니 전립선이 위축되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번에는 ‘전립선암’을 앓는 개의 고환을 싹둑 잘라봅니다. 그러자 전립선암의 크기가 줄어듭니다.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립선암에 걸린 사람도 그렇게 하면-외과적 거세라 부릅니다-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환자들이 썩 내켜 하지 않을 테지요.
허긴스는 칼이 아닌 약, 마침 치료제로 사용되는 여성 호르몬을 환자에게 주사하면 고환에서 만드는 남성 호르몬의 효과를 무력화시켜 전립선 조직의 성장이 억제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이것을 칼 대신 약으로 쓴다는 뜻으로 ‘화학적 거세(chemical castration)’이라 부릅니다.
1941년에 허긴스는 전립선암 환자의 몸에 인공 여성 호르몬인 DES을 대량 주사합니다. 그러자 환자의 고환은 자신의 몸을 여성으로 착각하기 시작했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생산을 중지합니다. 결국 전립선의 정상 조직은 물론이고 암세포들까지 성장을 멈춥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대로 고환을 잘라내지 않고 여성 호르몬으로 고환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큰 부작용 없이(?) 전립선암을 치료한 허긴스는 1966년에 노벨상까지 받습니다.
1944년이 되자, DES 는 또 한번의 놀라운 변신을 합니다. 화학적 거세 효과를 이용해 남성 성범죄자들에게 징벌적 목적으로 주사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1951년에 튜링이 억지로 맞아야 했던 주사는 바로 영국에서 만든 DES 입니다.
튜링이 살던 시대에 영국에서 동성애는 ‘엄중한 문란행위’로 처벌받는 범죄였습니다. DES를 맞은 튜링의 몸은 점점 여성화가 일어납니다. 영화의 말미에 옛 약혼녀 조안과 재회하는 장면을 보면 피도 눈물도 없던 튜링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장면은 여성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튜링은 이런 치욕을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맹독인 청산가리(시안)가 든 사과를 한 입 베어먹고 목숨을 끊습니다.
튜링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안겨준 DES 는 20년 후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그 동안 DES는 폐경 여성 외에 조산(早産) 위험이 높은 임신부들에게도 널리 처방되었습니다. 그런데 1971년에 끔찍한 부작용이 확인됩니다. 조산 방지 목적으로 임신 중에 DES 투약을 받은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딸들이 보기 드문 여성암에 걸린다는 사실이 보고된 것이지요. 1938년에 세상에 처음 나와, 남녀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던 DES 는 33년만에 발암성이 확인되었고, 더구나 태반까지 통과해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악랄한 물질로 등극합니다.
정리해보면 DES 는 폐경기 치료제 → 항암제 → 화학적 거세제 → 임신부 유산 방지제로를 사용되었다가 퇴출되었습니다. 1985년부터는 DES 를 대신해 남자들에게 사용하는 약은 류프롤라이드(leuprolide)를 비롯한 몇 가지 약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11년부터 16세 이하의 아동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에게 여성호르몬을 이용한 화학적 거세를 합니다.

폰 노이만. ⓒ 위키백과
참,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입니다. 공교롭게도 튜링과 노이만은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만났고, 전쟁 중에는 공동으로 암호 해독 작업도 했습니다. 튜링의 기계는 암호를 푸는 데 쓰였지만, 노이만은 에니악(ENIAC) 컴퓨터로 원자폭탄을 만드는 복잡한 계산을 해냅니다.
튜링의 암호 해독은 전쟁을 2년이나 단축시켜, 1,400만 명의 목숨을 보존했다고 합니다. 노이만의 원자 폭탄은 미군 25,000명과 양측 수백만의 희생을 미리 막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튜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노이만은 인류에게 핵 공포의 서막을 열었다는 점은 달라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애플 컴퓨터의 로고와 튜링의 죽음을 두고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사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사과’가 두 번이나 등장하는데, 감독은 다른 과일보다도 유독 사과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궁금하신 분들은 숨어있는 사과를 잘 찾아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