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보 전설이 깃든 경남 산청 장란 벽화마을오마이뉴스|김종신|입력2015.12.14 12:29
[오마이뉴스 김종신 기자]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장죽리에 있는 양천강 언덕 위 솔숲.
ⓒ 김종신
바람이 세찼다. 지리산 자락은 하얀 눈에 덮여 있다. 그런데도 아침이 밝아오는 12월 4일, 오전 7시에 바람을 맞으러 길을 나섰다. 춥다고 움츠려든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더구나 밤 근무의 흔적과 함께 마음속 찌꺼기도 훌훌 날려버리고 싶었다. 경남 산청군 산청읍에서 퇴근하면서 진주로 곧장 가지 않고 신안면에 이르러 합천, 의령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우를 많이 키우는 동네라 고깃집이 길가에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소고기국밥 맛있기로 소문난 동제국 식당을 지났다. 찬바람에 소고기국밥 한 그릇으로 허한 마음 채워보고 싶지만, 너무 이른 시각이다.
신안면 문대리 삼거리에서 합천, 의령, 생비량면쪽으로 우회전했다. 소고기 맞나기로 유명한 장죽리 한빈식육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에서 양천강 쪽으로 난 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강 언덕에 솔숲이 있다.
궁궐 짓는데 사용했던 곧은 소나무 금강송이 숲에 함께한다. 소나무가 마치 절의 일주문처럼 서 있는 아래로 계단을 천천히 밟고 올라가자 한하루(漢霞樓)가 나온다. 누각에 올라가기 전에 긴 의자들이 소나무 아래, 강 벼랑에 놓여있다.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장죽리 솔숲에서 바라본 양천강과 생비량면 도전리 마애불상군이 있는 봉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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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강이 빚은 풍경이 어여쁘다. 구름 잔뜩 낀 하늘에 작은 빈틈 사이로 햇살이 어려있다. 강에 비친 그대로의 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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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펜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시원한 바람이 함께 한다. 생비량면 도전리 마애불상군이 저 너머 보이고 아래에는 양천강이 너른 들을 돌아간다. 누각에 올랐다. 왜가리 6마리 너른 들을 가로질러 동으로 날아간다.
누각에서 내려와 그네가 놓인 숲에 섰다. 솔 향이 은은하게 마음을 즐겁게 한다. 왼편에 재실이 있다. 재실 쪽을 빙 둘러가는 길로 내려갔다. 재실 앞 시멘트 포장 강둑에서 양천강을 바라보자 까치떼가 알은체하며 지나간다.
강 건너 집현산 하늘이 붉게 물든다. 산 너머 햇살 품은 하늘이 강에 어린다. 곱다. 양천강은 합천군 금곡산과 의령군 한우산에서 발원해서 합천 쌍백면과 삼가면, 의령 대의면을 거쳐 산청으로 흘러들어 생비량면과 신안면을 지나 남강으로 흘러간다. 문득 강에 배를 띄워 내 집까지 뱃놀이하며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숲으로 다시 올라왔다. 한빈식당 뒤로 좁다란 길을 따라 강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울산도깨비바늘'들이 마치 사열을 받는 양으로 계단 옆에 서 있다. 돌아가는 강물이 빚은 풍경이 어여쁘다. 구름 잔뜩 낀 하늘에 작은 빈틈 사이로 햇살이 어려있다. 강에 비친 그대로의 모습이 정겹다.
▲ ‘도깨비보’라 불리는 경남 산청군 장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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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차에 올라 강을 따라 난 강변도로를 달렸다. 아파트에 사는 나처럼 부처님 스물 아홉분이 1층, 2층, 3층, 4층 아파트처럼 계신 도전리 마애불상군을 지났다. 장란마을에 차를 세웠다. 마을 앞 양천강에는 장란보가 있다. 메타세쿼이아 아래로 정자가 있고 그 앞에는 귀여운 도깨비가 그려진 장란보 안내판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천강에 보가 있는데 물살이 너무 빨라 번번이 홍수에 휩쓸려 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운창 이시분 선생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보를 만들 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다음날 새벽에 운창 선생이 강에 나가보니 노인이 말한 그 자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 마치 줄을 그어놓은 듯하였다.
그곳에 표지를 세우고 공사를 하였으나 급류로 인해 보를 막을 일이 쉽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 도깨비들이 몰려와서 메밀 죽을 끓여달라고 하기에 마을 사람들이 집집이 메밀 죽을 끓여서 대접했다. 그랬더니 도깨비들이 달려들어 큰 바윗돌을 굴려다가 며칠 만에 100m가 넘는 보를 완성했다. 그러나 메밀 죽을 못 얻어먹은 도깨비가 돌 한 개를 빼어버려 늘 그곳에 탈이 났다고 하여 '도깨비보'라고 부르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 사이 의자에 앉았다. 이미 온기를 잃은 캔커피를 마셨다. 풍경이 온기를 대신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풍경을 구경하기에는 아쉬워 장란보 아래에 있는 다리를 건넜다. 장란보는 하얀 거품을 만들며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산에 가린 해님은 저너머에서 올라오고 있다. 내 걸음에 놀랐을까. 하얀 왜가리 한 마리 날아올라 강둑 소나무들 사이로 가버린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장란보와 양천강 풍경에 넋을 잃을 무렵 인근 초등학교 노란 통학버스가 다리를 건너온다.
다리를 건너자 대둔마을이다. 마을 비석 옆에는 '집현산 등산 안내도'가 있고 빨간 화살표로 등산로를 가리킨다. 산에 올라갈 마음은 없었지만 붉은 기운 가득한 집현산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다리 입구에는 '비량이라는 승려가 선행을 쌓은 덕을 기리는 뜻에서 생겨났다'는 생비량유래비가 있다. 다시 다리를 건넜다.
▲ 다슬기가 많은 양천강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철새들이 인기척에 놀라 하늘로 박차고 날아올라간다.
ⓒ 김종신
다리 건너 장란마을에 따사로운 햇살이 드리웠다. 소나무 사이로 날아갔던 왜가리 한 마리는 다시금 일없다는 듯 강에 서 있다. 집현산은 아직도 해를 쉽게 토해내지 않는다. 햇살이 구름을 비집고 나오는 광경이 멋있어 잠시 서 있었다. 새 한 마리 날개를 쭉 펴고 저만치에서 하늘을 헤엄치듯 지난다. 새떼들이 날아다닌다. 지리산 자락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산 능선도 높이 순으로 햇살을 받아 짙음이 다르다.
다리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발걸음을 옮겨가며 하늘 구경하는데 아침 식사 중이던 오리들이 놀라 푸드덕 물을 박차고 올라간다. 양천강은 다슬기가 많이 살고 있어 먹잇감이 풍부하다. 내가 녀석들의 조용한 아침 시간을 뺏은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자 포도알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고욤나무 아래에 장란마을 표지석이 있다. 암소한우가 아니면 천만 원을 준다는 식육식당의 광고판 아래 풀을 뜯는 황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 벽화마을로 유명한 경남 산청군 장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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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라는 듯 밝게 웃는 장난꾸러기 같은 도깨비의 안내를 받으며 장란 벽화마을에 발을 들였다. 마을 경로당 앞에는 봉황정(鳳凰亭)이 있다. 마을을 감싸는 산 이름이 봉황산이다. 정자 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선비가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있다.
그 옆에는 도깨비들이 보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죽을 대접받는 벽화가 있다. 선비는 "옛날! 1600년대 중반에~" 시작하는 장란보에 얽힌 전설을 적고 있다. 보를 만드는 도깨비들은 힘든 노동 뒤에 막걸리 한 사발로 고단을 씻고 있다.
나 역시 도깨비 옆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양 볼에 가득 도토리를 채운 다람쥐가 보인다. 아뿔싸 녀석은 도토리 한 톨을 이미 저만치에 놓쳤다. 문간방을 열고 씨익 웃으며 낯선 나를 반기는 아이들. 서당에서는 공부가 한창이고 옆에는 봄을 맞아 입춘방을 쓰기에 분주하다.
▲ 감을 따는 아이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할머니를 그린 벽화. 그러나 정작 담 너머 진짜 감나무는 이제는 따갈 사람이 없는지 까치밥만 풍년이다.
ⓒ 김종신
담벼락이 없는 집은 붉은 남천과 노란 국화가 벽화처럼 예쁘다. 팽이 돌리는 아이들 옆에는 말뚝박기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마을은 온통 벽화다. 또한, 마을에는 기와집이 여러 채 있다. 재실이 많다. 감을 따는 아이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할머니. 그러나 정작 담 너머 진짜 감나무는 이제는 따갈 사람이 없는지 까치밥만 풍년이다. 전통 혼례를 마친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치르는 방 문풍지를 손가락으로 뚫어 몰래 훔쳐보는 아낙 뒤에 나도 살며시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저곳은 영화관이다. 매표소에 줄 선 사람들 사이로 대인 500원, 소인 300원의 요금표가 눈에 들어온다. 요즘 영화 한 편이 대인 8000원 내외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영화관을 지나자 황소와 함께 밭을 가는 농부 그림이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난다. 다가서자 까치 한 마리 인기척에 놀라 날아간다.
▲ 어느 산소 앞에는 등받이 있는 의자가 놓여 있다. 시묘살이하듯 산소 앞에서 부모님을 뵙고 수시로 문안을 드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모양새다.
ⓒ 김종신
통통한 고양이 한 마리가 저 구석에서 기지개를 켠다. 나도 슬며시 따라 두 팔을 하늘로 쭈욱 뻗었다. 마을 뒤편으로 올랐다. 노란 유채꽃이 피었다. 굴뚝에는 아침밥을 짓는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목화밭에는 목화가 하얗게 열매를 맺어 피었다. 목화밭 옆에는 배추 밑동만 남은 배추밭이 나왔다. 연꽃 아름답게 핀 벽화 옆에는 '광득문(光得門)'이라 적힌 솟을대문이 나온다. 여기도 어느 문중의 재실이다.
이 마을에는 재실이 여럿 있다. 이 작은 마을에 웬 재실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올라가는 뒷산에는 산소도 많다. 봉황산이 품은 마을이라 후손이 번성했기 때문일까. 산소 올라가는 길에 마치 조화(弔花)처럼 구절초가 한가득 피었다. 빨간 찔레 열매가 탐스럽다. 어느 산소 앞에는 등받이 있는 의자가 놓여 있다. 시묘살이하듯 산소 앞에서 부모님을 뵙고 수시로 문안을 드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모양새다.
마을을 내려다보자 해는 구름을 뚫고 올랐다. 마을 앞 양천강 너머로 집현산이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도깨비에 홀린 듯 즐겁게 마을을 돌아다녔다. 겨울이다. 춥다고 움츠리지 말고 도깨비와 함께 마을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 건강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