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95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있네 없네(有無坐斷露眞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선사
유무좌단로진상
有無坐斷露眞常
일점고명약태양
一點孤明若太陽
직하승당유끽방
直下承當猶喫棒
나감냉좌암사량
那堪冷坐暗思量
있네 없네(시비분별) 깔아뭉개
이슬처럼 맑은 진상을 드러내니
한 점의 외로움 없이
맑고 밝은 태양과 같구나.
곧 바로 알아채도
방망이(삽십방) 맞을 진데
찰나간 어찌 쓸쓸히 앉아서
이리저리 머리 굴려 생각하랴.
"
부처님
깨달음(무상정등각)의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
선(禪, Zen)의
세계(世界, 경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우선 논리(論理, 이치)를
세우는 것 부터가
금물(禁物)이다.
고정(固定)
집착(集着)되어
이미 관념화(觀念化) 된
의식(意識, 망상)이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念)이라는 그 자체가
철저하게 비워져야 한다.
있네(有)
없네(無) 하는
존재(存在)의 시비분별 차별,
고정관념(固定觀念)에
묶여 있으면
겉만 빙빙 돌며
헤매이고 방황(傍徨)하는
변견(邊見)에 떨어져
결코
중도실상(中途實常, 무상)을
통달(通達)하지
못한다.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에서
제 일구(第 一句)의 뜻은
바로 이러한 점(點, 요점)을
뚜렷하고 명백히 밝혀 놓았다.
유(有, 있다)와
무(無, 없다)를
일체(一切)
모두 다 끊어(絶)내어
없애고 나니
참되고
참 된 자리(깨달음)
한결같은 그 자리(본래면목)가
비로소
명백(明白)하고
분명(分明)하게 드러나더란
말(說法)이다.
밝기(명백함)가
한 점(一點) 태양(太陽)과 같아
어둠(無明, 無知)을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바로
이러한 자리에서는
알았다는 지견(알음알이, 견해, 知見, 認識)이 생기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물며
생각(觀念)을
굴리는 것이야말로
절대 금물이다.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는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선사(禪師) 스님께서 짓은(作)
시(게송, 禪詩)이다.
고려 말
보조국사(지눌)의
수제자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知訥) 스님의
법(정통법맥)을 이은(계승)
혜심(慧諶)은
보조(지눌) 스님을
찾아가 출가(出家)를 한다.
저서(著書)로는
『 선문염송(禪門拈頌) 』
30권(30券)을 지었는데
중국(中國)의
『 전등록(景德傳燈錄,
송(宋) 나라
북송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년)에
황제의 명으로
고승 도언(道彦) 스님이 출판한
불교 서적) 』에 버금가는
명저(名著述)로
알려져 있다.
※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은
고려후기
대선사(大禪師)로서
단속사(斷俗寺)의
주지(住持) 등(etc)을 역임한
승려(僧侶)이다.
성(俗性)은 최씨(崔氏)
자(字)는 영을(永乙),
호(字號)는 무의자(無衣子)
법명(法名)은
혜심(慧諶)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의
뒤를 이어 수선사(修禪社)
제 2세 사주(寺主)가 되어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면서 수선사의 교세를
확장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출가하기를 원하였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다음 해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를 만들어
교화 활동을 하고 있던
지눌(知訥) 스님에게 가서
어머니의 재(齋)를 올린 다음
지눌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부터
그(혜심(慧諶) 스님)는
힘써 정진하였으며
지눌 스님은
혜심(慧諶)의 재능을
매우 아꼈다.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入寂)하시자
혜심이
수선사로 돌아가
개당(開堂)하였다.
1212년
강종(康宗)이 수선사를
증축시키고
부처님 법(佛法)을
구(참구)하므로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고
당시
문하시중 최우(崔瑀)는
그에게 두 아들을 출가시켰다.
고종(高宗)은
왕위에 올라 혜심 스님에게
선사(禪師)에 이어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였으며
1220년(고종 7)
단속사(斷俗寺) 주지로
명(命)하였다.
1234년 6월 26일에
휘하문인(門人)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입적(入寂, 열반, 해탈)하였다.
세수(歲壽) 56세
법랍(法臘) 32세였다.
고종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浮屠)의 이름을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부도(浮屠)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전라남도
강진군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문인(門人 제자)에는
몽여(夢如)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麻谷)
등이 있다.
저서(著書)로는『심요』 1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
조계진각국사어록
(曹溪眞覺國師語錄) 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
(狗子無佛性話揀病論) 1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2권
금강경찬(金剛經贊) 1권
『선문강요(禪門綱要)』1권이
등(etc)이 있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언제든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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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