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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창세기 15:17-18)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사무엘하 9:7-8)
1. 계약(Contract) 사회의 비극 : 행위와 조건에 갇힌 율법주의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관계와 질서는 철저하게 '계약(Contract)'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근로 계약, 은행와의 대출 계약, 심지어 현대 사회는 결혼마저도 서로의 조건이 부합할 때만 유지되는 일종의 계약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계약의 핵심은 **'상호 조건성(Conditionality)'**입니다. 내가 의무를 다하면 권리를 보장받지만, 내가 조건에 미달하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그 계약은 가차 없이 파기되고 손해배상을 청구받습니다. 세상은 인간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철저히 계산하여 얄팍하게 '분배'할 뿐, 무조건적인 헌신은 미련한 짓이라고 조롱합니다.
문제는 이 숨 막히는 계약적 세계관이 우리의 신앙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마저 '종교적 계약'으로 변질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계산합니다. "내가 주일 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냈으니, 하나님은 내 사업을 지켜주실 의무가 있다." 반대로 내 삶에 끔찍한 고난이 닥치면 "내가 기도를 게을리해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의 계약을 파기하셨구나"라며 율법의 채찍으로 자신의 영혼을 무자비하게 후려칩니다.
이러한 신앙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행위로 신을 조종하려는 지독한 우상숭배요, 펠라기우스적인 자력 구원의 망상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내가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느냐에 달린 조건부 계약이라면, 단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우리는 매일 아침 수십 번씩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져야 마땅합니다.
2. 카라트 베리트(Karat Berit) :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서약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택하신 백성의 관계를 결코 세상의 '계약(Contract)'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언약(Covenant)'**이라고 벼락같이 선포합니다. 은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언약이 체결되는 고대 근동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자식이 없어 절망하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어 내어 뭇별을 보여주시며 자손의 언약을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암소와 암염소, 숫양을 가져와 그 중간을 정확히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언약을 세우다(맺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트 베리트(Karat Berit)’**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언약을 자르다(Cut a covenant)"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두 사람이 맹약을 맺을 때, 짐승을 반으로 잔인하게 쪼개어 피가 흥건한 땅 위에 벌려 놓습니다. 그리고 계약 당사자 두 사람이 그 쪼개진 짐승의 핏물 사이를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이것은 "만약 우리 중 누구라도 이 언약을 어긴다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살과 뼈가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생명을 담보로 한 끔찍하고도 맹렬한 피의 서약이었습니다.
이 무서운 카라트 베리트의 의식을 준비해 놓고, 아브라함은 두려움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해가 져서 캄캄한 흑암이 덮였을 때, 인간의 이성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충격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언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함께 그 고기 사이를 걸어가야 마땅한데, 아브라함은 깊은 잠(죽음의 상태)에 빠져 꼼짝도 하지 못하고, 오직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하나님의 임재)'**만이 홀로 그 쪼개진 핏물 사이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3. 홀로 횃불을 드신 은혜 : 저주를 자신의 심장으로 받아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타락하고 연약한 아브라함(인간)이 결코 이 언약의 조건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없음을, 언젠가 반드시 우상을 숭배하고 배신할 것임을 영원 전부터 완벽하게 아셨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손을 잡고 그 고기 사이를 지나갔다면, 율법을 어긴 아브라함은 그 즉시 공의의 심판을 받아 쪼개져 영원히 멸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잠재워 두시고, 창조주이신 당신 홀로 그 피의 제단 사이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온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맹렬하고도 미친 사랑의 선서입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연약하여 수없이 나를 배신하고 이 언약을 깨뜨릴지라도, 내가 너를 찢어 죽이지 않겠다. 네가 치러야 할 그 배신의 저주와 찢어짐의 형벌을, 언약을 세운 나 여호와가 내 몸으로 대신 감당하겠다! 내가 친히 쪼개지겠다!"
동역자 여러분, 창세기 15장의 이 타는 횃불이 신약의 어느 역사적 현장에서 성취되었습니까? 바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깨뜨린 율법의 저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살과 뼈가 완전히 '쪼개지는(Karat)' 끔찍한 심판을 당하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완전히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짐승이 아닌 당신의 아들을 쪼개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생명의 길을 열어젖히셨다는 우주적 승리의 선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계약을 이행했느냐에 달린 얄팍한 조건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당신의 생명을 걸고 홀로 고기 사이를 지나신 그 맹렬한 '은혜의 언약' 위에 세워져 있기에, 세상의 어떤 마귀의 권세도 결단코 취소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완벽한 반석입니다!
4. 로드발의 절뚝발이 : 므비보셋을 찾아온 헤세드(Hesed)의 추적
이 거룩하고 일방적인 언약적 사랑을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라고 부릅니다. 이 헤세드의 은혜가 인간의 삶 속에 얼마나 압도적으로 침공해 들어오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사무엘하 9장의 다윗과 므비보셋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과거 요나단과 맺었던 생명의 '언약'을 기억합니다. 그는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평생을 쫓아다녔던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고대 사회의 법칙대로라면 이전 왕조의 씨를 말려버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복수가 아닌 '은총(헤세드)'을 베풀기 위해 원수의 핏줄을 수소문합니다.
그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발견됩니다. 므비보셋의 상태를 성경은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째, 그는 '로드발(Lo-debar)'에 숨어 있었습니다. 로드발은 '말씀(Debar)이 없는(Lo)', 즉 영적인 기갈과 생명이 끊어진 황무지를 뜻합니다. 둘째, 그는 두 발을 다 저는 '절뚝발이'였습니다. 유모가 도망치다 떨어뜨려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로드발에 숨어 덜덜 떨고 있는 절뚝발이 므비보셋! 이것이 바로 타락한 우리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실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황무지 같은 세상 속에서, 내 발로는 단 한 걸음도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걸어갈 수 없는 전적인 영적 무능력자요 영적 절뚝발이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도 없고, 내세울 조건도 없는 원수의 자식이었습니다. 왕의 군대가 므비보셋을 찾아왔을 때,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다윗 앞에 엎드려 자신의 실존을 이렇게 토해냅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삼하 9:8)
5. 스펄전의 통찰 : 왕의 식탁보로 덮인 절뚝거리는 두 다리
그러나 다윗은 두려워 떠는 므비보셋을 향해 율법의 칼을 뽑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일 일으켜 세우며 선포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 할아버지의 모든 밭을 내게 주겠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삼하 9:7)
절뚝발이요 원수의 핏줄인 그가, 왕의 자녀들과 함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식탁에 앉아 만찬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왜입니까? 므비보셋이 잘생겨서입니까? 그가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어졌던 그 일방적인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위대한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이 경이로운 본문을 강해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므비보셋이 다윗의 식탁에 앉았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식탁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므비보셋의 상반신은 왕의 아들처럼 화려하고 존귀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식탁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그의 두 다리는 여전히 흉측하게 비틀어진 절뚝발이의 다리였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자격 없는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에 앉힐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거대한 '왕의 식탁보'로 그의 그 추악하고 절뚝거리는 두 다리를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절뚝거립니다. 어제 회개해 놓고 오늘 또다시 똑같은 죄에 넘어져 절뚝거립니다. 결단하고도 돌아서면 혈기를 부리며 세상의 욕망을 향해 기웃거리는 그 흉측한 영적 절뚝발이의 모습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식탁보를 들추어내며 "이 절뚝발이, 죄인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식탁에 앉아 있느냐!"라고 참소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절뚝거리는 행위를 보고 우리를 왕의 식탁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졌던 그 영원한 은혜의 언약, 홀로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신 십자가의 피 묻은 맹세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탄이 내 죄악을 폭로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거대한 핏빛 식탁보가 내 모든 추악함을 완벽하게 덮고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얄팍한 배분과 거래를 넘어, 나를 완전히 덮어버리신 왕의 무한한 **'공급과 충만'**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자들입니다.
6. 결론 : 행위의 절뚝거림을 멈추고 언약의 식탁에서 만찬을 누리라!
존경하는 모든 세대의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율법의 짐을 지고 이 자리에 나아오신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더 바쳐야, 얼마나 더 완벽하게 살아야 내 삶에 복이 임할까"라며 얄팍한 종교적 계약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무능력과 반복되는 죄악 때문에 "나는 죽은 개 같은 자다"라며 로드발의 캄캄한 황무지에 숨어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고 계십니까?
이제, 내 행위로 구원을 유지해 보겠다는 그 모든 피곤한 시도를 십자가의 피 묻은 제단 앞에 완전히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율법의 고기 사이를 지나가려 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쪼개져 멸망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의지가 아닙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당신의 전부를 걸고 맹세하신 절대 취소되지 않는 '언약',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찢겨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급과 충만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드십시오. 우리는 계약직 종교인이 아니라, 왕의 식탁에 영원히 초청된 언약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육신의 절뚝거림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약함과 절뚝거림 때문에, 나를 온전히 덮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식탁보가 얼마나 위대하고 찬란한지를 온 우주를 향해 찬양하며 자랑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영혼을 옭아매던 모든 율법주의의 쇠사슬이 산산조각 나고, 오직 조건 없이 쏟아지는 언약의 피, 그 맹렬한 은혜의 바다 속으로 전 존재를 투신하시는 거룩한 폭발이 일어나기를! 왕의 식탁을 예비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장 맹렬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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