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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편 11절-12절: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11절: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구원’이라고 할 때 크게 보면 사람으로 통해 구원되는 게 있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구원이 되는 게 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이 두 구원이 비슷하게 보인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도 인간의 방편이 들어있고, 사람의 구원에도 인간의 방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눈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두 구원이 목적이 서로가 배치가 된다.
인간으로부터 되는 구원은 껍데기 표면적인 것이 잘 되는 것을, 세상적인 것이 잘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또한 세상 속화된 기독자들도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되는 구원은 어디에 속한 거냐? 하늘나라, 신령계에 속한 거다. 이 구원은 성도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만큼 영능의 실력이 되어 나온다.
사람의 몸보다 강력한 것은 정신세계다. 정신력이 강하면 육신적으로 웬만한 어려움은 능히 이겨나간다. 육체에 좀 고난이 닥친다고 해도 이걸 이길 수 있는 것은 정신적인 힘이다. 정신력으로 육신의 죽음까지 ‘이까짓 거’ 하며 이기는 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힘 때문이다. 정신적인 작용에서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면 기독자들이 신앙에서 나오는 정신적 작용성은 땅으로부터 되는 거냐, 하늘로부터 되는 거냐? 세상 속화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신앙의 정신적 차원이 표면이요 껍데기요 외부요 모양이다. 이 중심으로 들어간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속화된 기독교인들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 라고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을 이뤄달라고 구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서 자기에게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닥쳐도 거기에 마음과 정신이 빠지지 않고 그걸 능히 지혜롭게 이기고 나갈 수 있다. 이 지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거다. 그러니까 교훈적 신앙 사상적인 면에서 속화된 기독자들과,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성도와는 배치가 된다. 다시 말하면 원수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는다는 게 뭐냐? 나는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의미인지, 나에게 힘을 줘서 이기게 한다는 말인지? 돕는다고 할 때 어떤 면으로 돕는 거냐? 몸이 아플 때 이 병을 이기려면 몸 밖에서 ‘병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러면 병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병자가 병을 이길 수 있는 영양분을 먹어서 힘을 얻는 게 이길 수 있는 건지?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성도에게 도움이 온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것인데, 기독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자꾸 몸 밖에서 어떤 이적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성령님께서 어디서 역사하기 쉽겠느냐? 진리의 성도들이다. 진리의 성도에게는 성령님의 역사가 늘 잠재적으로 들어있는 거다. 성도가 진리교훈을 받을 때 성령님께서 이 성도의 신앙양심을 붙잡고 속에서 활발히 운동을 하신다. 그래서 진리성도는 자기에게 어떤 사건이 왔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라고 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바로 하는 면에 육신의 목숨을 내놓고 나간다. 이것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라는 말씀에 해당이 되는 거다.
그런가 하면 성도가 바로 해 나가는데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 아시고 이적적인 역사로 해결해 주시는 것도 있다. 이런 게 다 성령님의 역사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체험했을 때 ‘하나님, 나중에 또 도와주세요’ 이런 식은 안 된다.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대적을 치게 하소서.’ 대적은 쳐야 하느냐, 도와줘야 하느냐, 내버려둬야 하느냐? 쳐야 한다. 안 치면 어떻게 되느냐? 안 치는 자기가 대적들에게 죽는다. 자기가 대적에게 잡아먹히는 게 사랑이냐, 쳐야 사랑이냐? 쳐야 사랑이다. 신앙의 세계는 상대를 치고 정복을 해야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복을 하는 곳에 임한다. 상대는 하나님의 사랑에 잡아먹히는 게 행복한 거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거고, 실력이 올라가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특히 시편에 이런 게 많은데, ‘원수를 죽여달라, 대적을 쳐 달라. 없애 달라’ 라는 등의 말씀을 보면서 몽둥이를 가지고 치고 죽이라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 ‘잔인하다느니, 사랑이 없다느니, 순 이기주의라느니’ 이런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눈으로 보는 개념과, 영적인 개념, 즉 하나님께서 보시는 개념과는 정반대다.
우리는 대적을 쳐야 한다. 대적을 칠 때는, 첫째는 자기 속의 옛사람을 이긴 자가 칠 수 있다. 대적은 옛사람으로 똘똘 뭉쳐 있는 건데 자기도 옛사람이 주격으로 된 상태에서 대적을 치게 되면 서로가 감정폭발이 일어나게 되게 되고 결국은 대적에게 먹히게 된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한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겠다고 하면 구원이 안 되고, 백 사람, 만 사람, 온 세계가 달라붙어서 구원하겠다고 하면 구원이 되는 거냐? 구원은 오직 누구에게만 있는 거냐?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다. 왜 그러냐? 구원은 하나님의 본질, 신앙의 본질,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의 본질이라야, 다시 말하면 진리라야 사람이 진리의 사람으로 구원이 되는 거지 세상적인 요소로의 구원은, 육적인 요소로의 구원은 진리로 된 게 아니라서 이런 것으로 아무리 구원을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에 해당이 안 된다. 물론 육적인 면의 구원도 있는 건데, 이 구원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되는 거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과 싸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이방인에게 먹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는 거다. 싸움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다. 영적 차원에서 정확하게 들어가는 거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아도 그곳에서 외치는 것이 구원이 아니면 아무 힘이 없는 거다. 그 지도자 인도자부터 아무 힘이 없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게 무슨 뜻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족속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입김으로 훅 불어서 대적들을 날려버린다는 거냐? 그게 아니다. 성도가 대적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 육적 세상적인 소원성을 가지고 이기게 해 달라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준다는 게 아니라 평소에 진리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감화성으로 살면 진리사상으로 무장이 되었기 때문에 대적들이 공격을 해 올 때 이것을 능히 이길 수 있게 되니 이것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거다. 이 무장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으로 되는 거다. 이게 누구의 힘이냐? 하나님의 것으로 되었으니 하나님의 힘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어떤 학박사를 만나도 이기는 거다. 이게 신앙의 세계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세계다.
오늘날 교회가 거의가 세상으로 속화되었는데, 속회된 교회는 하나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종교인으로 행세를 할 뿐 아무런 영적인 힘이 없다. ‘집사니, 장로니, 목사니’ 해도 그 사람 속이 세상화로 되어있으면 아무 힘이 없다. 뭘 보면 아느냐? 한 마디로 이런 자들이 성경을 아느냐?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 모른다. 그러니 자기에게 어려움이 부딪히면 그만 세상이 튀어나오게 된다. 이건 힘이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시듯이 신앙의 세계는 영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속 중심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정신적인 힘으로 삼아야 한다. 이게 정확하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가난에 찌들려도, 아무리 육신의 힘이 없어도, 아무리 얻어맞아도 누가 감히 무너뜨릴 수 없다. 혹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의 육신을 죽인다고 해도 이 사람의 정신은 살아서 승리다. 이게 순교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세상의 구원은 전부가 시간 안에 속한 거다. 자기가 이 땅에 살아있을 동안에만 해당이 되는 거다.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데 속한 거다.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속한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 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자’ 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속한 구원이냐, 하나님에게 속한 구원이냐? 사람에게 속한 구원이다. 이런 구원은 다 헛됨이니이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혓바닥이 나오도록 힘쓰고 애를 쓰며 믿어도 이 구원은 헛된 거다. 구원이 아니다. 이런 믿음으로 아무리 열심 충성봉사를 해도 구원이 아니다.
공부(주-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김경형목사님이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하러 오는 목사님 중에 자기가 있는 교회가 순 이질로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사례비도 안 받으면서 그곳에서 계속 일을 한다고 한다. 왜 신앙이 자라지도 않는 그런 곳에서 자기 말대로 독극물을 먹으면서 수종을 들고 있느냐? 헛되다. 굉장히 미련한 거다. 그럼에도 앞으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의 힘을 빌려서 좋은 교회로 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계속 그러고 있으니 이 목사를 어디에 쓰겠느냐? 그래서 나는 내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목사의 육신을 두들겨 부숴서라도 뒤집어지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한다. 이건 사랑의 기도다.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고 외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안 한다. 이걸 불신이라고 하는 거다. 한 인간이 자기의 앞날을 책임져 줄 것 같으냐? 아니다.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치시면 그대로 고꾸라지는 거다.
우리는 날카로운 진리의 도를 가지고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쳐야 한다. 공격을 해야 한다. 공격을 하라는 뜻은 상대방은 안 들으려고 하는데 억지로 붙잡아서 큰소리로 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서 깨닫게 하라는 거다. 이게 날카로운 칼이다.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것도 우리 성도들이 하루하루 진리말씀을 배우면서 신앙정신 면이 날카로워지기를 바라는 거다.
진리에 날카로우면 이 사람은 구별이 빠르다. 무딘 칼로 뭔가를 자르려고 하면 싹 잘라지는 게 아니라 뭉개져 버린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로 자르면 자르고자 하는 부분만 싹둑 잘라진다. 그런 것처럼 진리지식에 대해, 영적인 면에 예민해야 거짓과 진리를 명확히 구별을 할 수 있다. 진리에 예민하면 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을 바로 구별하게 된다. 사고방식이나 모든 면에 대해 늘 분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칼은 여러 번 쓰면 무뎌지기 때문에 또 다시 갈아서 써야 하듯이 진리말씀을 받는 사람은 늘 말씀을 새김질해야 한다. 이것을 전쟁용어로 말을 하면 무장이고, 인격적인 면으로 말을 하면 성장이다. 이런 게 다 이룰구원에 들어가는 거다.
12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는 영적인 면에서 선민 이스라엘이다. 선민 이스라엘이요 거룩한 이스라엘이다. 선민이요 성민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라고 한 후에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라고 했으니까 이 두 말을 합쳐보면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을 밟을 수 있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거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나 기도하며 구하는 사람이나 하나님께 물질적인 축복을 많이 달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을 자기 힘으로 삼는 거냐? 물질로부터 오는 힘이다. 이런 사람은 물질적인 힘을 배경으로 하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냐? ‘예수를 잘 믿어서 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무장이 됐다’ 이렇게 된다.
물질적인 것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로부터 부요성 물질성이 떠나가면 힘이 빠지지만 영적인 면의 부요성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물질이 있어도 거기에 안 빠지고, 가난해도 이 가난성에 안 빠진다. 가난과 부요가 자기의 신앙에 하등의 상관이 없다. 왜 이렇게 되는 거냐? 영적인 면의 부요성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사람 속에는 지혜지식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사건 환경이 닥치던 ‘이 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구나. 무슨 일을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바로 알고 잘 대처해 나가지만 물질적인 것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사람은 물질의 여부에 따라 자기 마음도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물질성이 다 빠져나가면 모든 힘이 빠져서 죽는 것만 같고 아무 일도 못하게 되는 거다.
오늘날 보면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나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들어서 빵을 물어오게 하시겠지’ 라는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신앙이면서 그런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는데 순 육적이고 세상적인 신앙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는 짓들이냐?
진리의 길을 따르다가 고생을 하는 목사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이것을 고생으로 여기지를 않는다. 물론 살림살이가 구차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망불평을 하지는 않는다.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그런 것으로 불평불만을 한다면 아예 돈을 벌면 되지 뭐 하러 목사를 하느냐? 목사가 물질성에 자꾸 애착이 가면 목회하기 힘들다. 이런 목사는 말로는 ‘내가 하나님의 종인데 이런 고생쯤이야’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자기 속에서 올라오는 원망과 고통은 부정을 못 한다. 오늘날 목회자의 세계에서 이런 일이 흔하다는 것이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성도가 대적을 밟을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라고 하는 건데,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인간의 주관성에서 발현이 된 신념이나 신뢰적인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의 말씀을 붙잡고 이것을 자기 인격화 자기 사상화 시킨 믿음을 말하는 거다.
성도는 이런 신앙상태에서 원수 대적을 밟을 수 있고 공격할 수 있는 담대성이 나오는 거다. 이게 성도의 무기다. 이런 신앙이라야 교만한 에돔의 신앙사상들을 밟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이 에돔의 교만한 신앙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이는 에돔신앙이다. 에돔신앙은 미녀작전이 나온다.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쫓는 신앙이라는 말이다.
다윗이 9절에서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라고 했는데, 에돔의 신앙사상을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있는 것은 육적 세상사상의 신앙으로는 불가능하다. 에돔의 정신을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 자체화, 진리 무장화된 신앙사상이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열어서 우리에게 이걸 증거하는 거다. 모든 정복의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거지 선악과 따먹은 정신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오후에 신학공부를 할 때 그 사상이 어디로부터 나온 건지 알아야 한다. 개혁주의라고 하면 칼빈의 사상인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우는 게 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기본적인 것은 옳은데 성화구원의 이치에 관한 것은 없다. 그런데 감리교나 성결교나 오순절 등등을 보면 기본적인 것마저도 없이 맨 자기 주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체험위주로 나가고 이런 식이다.
감리교나 성결교는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우기보다는 인간이 앞서기 때문에 활동적으로 굉장히 활발하다. 성령이 불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앙의 이치가 어그러져 있다. 개혁주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칼빈주의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앞세우는 것은 옳은데 여기에서 더 나가지를 못하니 성화구원이 힘이 들고, 감리교나 성결교에서는 인간을 앞세우게 되니 늘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역시 성화구원이 힘이 든다.
그래서 교리적인 면으로 보면 칼빈사상이 감리교나 성결교보다는 옳지만 이룰구원 차원으로 보면 이거나 저거나 똑같다. 속에 든 것은 항상 인간 주관성이다. 우리가 이런 면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을 만나서 ‘어느 신학을 나왔습니까?’ 하고 물을 때는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묻는 건데, 다른 사람들이 묻는 것은 자기 파에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묻는 일이 많다.
감리교나 성결교나 오순절 쪽의 분들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지식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자신들이 배운 것과 조합을 해서 신앙을 해 나가면 바른 신앙에 도움이 많이 된다. 우리가 주일 오후마다 배우는 ‘체계적 신앙신학’에는 이게 다 들어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