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우리는 모두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요즘 나는 매일 여자들에게 사랑과 나이 듦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흔이 넘으면 그런 이야기가 더욱 필요한 법인데, 재미있는 건 40대 여성들이 이전 어느 때와 달리 이제는 나이 드는 게 나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는 사실이다. 어려움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지만 나이 듦에는 분명 즐거움과 기쁨이 따른다. 마흔 이후의 삶이 썩 만족스럽다는 말이 젊은 여성들에게는 아마 새로운 이야기일 것이다. 실망스러운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이쯤 되면 우리는 좌절하고만 있지 않고 털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게 된다. 중년의 삶이 가진 힘과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 덕은 상당 부분 페미니즘에 빚지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이제는 마치 날씨에 대한 잡담처럼 흔하고 빤한 것이 되었다지만 말이다. 여성 해방, 여성 인권, 그 무엇으로부르건 페미니즘은 여성이 나이 듦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놓았다. 나이가 들면 언제나 욕을 달고 살면서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며 남자도 여자도 아닌 좀비로 변한다는 둥 30~40대가 되면 여자의 인생이 끝난다고 일러주던 과거의 답안지를 던져버린 우리 세대는 이제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에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과거의 삶의 각본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페미니즘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 듦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었고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또한 바꾸었다. 페미니즘 덕분에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을 때, 한동안 계급적 특권이든 교육 혜택이든 덕을 본 건 일부 여성에 불과했다. 대체로 시류를 잘 알았던 부류는 종종 예외적인 혜택을 얻었고, 기대 이상으로 성취했다. 페미니즘은 한편으로 이들을 높이 띄웠지만 성과는 대개 일부 여성에게 한정되었으며, 평범한 대다수 여성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 듦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은 널리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몸에 대한 성차별적 관념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미에 관한 새로운 기준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통통한 몸이 얼마나 감미로우며 둥근 배가 얼마나 숭고한지, 팔이나 다리에 난 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등. 페미니즘은 애정 생활에서든 직장 생활에서든 자아실현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나이 듦을 더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 여자들은 '중년의 사랑'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게 된 것들』이라는 인터뷰집에서 베스 베나토비치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작가 에리카 좋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지금 선구자를 탄생시키는 정신적 혁명기를 살고 있다. (・・・) 나이 든 여성들은 예언자나 조언자로서의 옛 지위를 다시 부여받는다. ・・・) 이 시대에 위대한 변화가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몸에서도 그동안 아름답다고 여겨졌던 곳 이외의 부분에서 영감을 발견하고, 선구자로서 생의 후반기를 재정립해야만 한다."
나이 들어가는 여성에게도 어려움은 여전히 많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세대, 모든 계급, 모든 인종의 여성이 그 어려움에 건설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나 배우자의 죽음, 자녀의 비극적 죽음, 빈 둥지 증후군 등은 우리 삶에 심리적 혼란을 가져왔지만, 진솔하고 열린 대화가 있어 도움이 되었다. 나이 듦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여러 가지 독창적인 방법을 보여주는 여성들이 없었더라면, 삶의 고통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는 진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 그리고 다른 많은 여성에게 중년에 접어드는 게 짜릿했던 이유는 이들이 더는 자기 시간을 죄다 남을 돌보는 데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드디어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이들을 평생 괴롭혀왔다. 그네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나날이 오기만을 기다려왔다. 노동을 잊고 놀이와 휴식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말이다. 그런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중년의 삶보다 더 바랄 만한 것은 없으며 그때가 되면 삶이 이전보다 달콤할 거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그전까지 행복했더라도 중년은 그보다 더 행복할 거라고 말이다. 다만 나는 중년의 삶 또한 여성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전부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지구상에 태어난 첫날부터 여자는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핵심이 되지만, 대부분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전혀 유쾌하지도 않다. 여자에게 중년의 삶이 마법이라는 것은 이제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자신이 통제하며 스스로 시간과 방식을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자들은 생애 대부분을 가부장적 길잡이들이 이미 지정해놓은 사랑의 길을 따라가야 했다. 여자들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실망스럽더라도 비판하거나 도전하는 대신 지배 구조 안에서도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페미니즘 운동과 그 이후의 많은 진통 끝에 여자들은 이제 '사랑'과 '지배'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데 그 어느 때보다 힘껏 동의한다. 둘 중 한쪽이 존재한다면, 나머지 한쪽은 부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몇몇에게는 이 사실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지배'는 오늘날 여전히 주요한 질서이기에, 남성과의 파트너십을 원하는 여성들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권력에 대한 상실감은 대부분의 여성이 성장하면서 느껴온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에는 사랑받지 못한 채 영원히 버려지리라는 두려움이 뒤따른다.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난 지금의 삶에는 단지 권력을 회복할 뿐 아니라 마침내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한다. 예전과는 다르되 여전히 가부장적인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을 갖는 것이 어려움을 토로한다. 즉 여성들은 실상 자유를 완전히 허용하지는 않는 이 세계에서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은 이전 세대의 여성 대부분은 대면하지 않았던 새로운 쟁점들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우리 부모 세대 중 얼마나 많은 여성이 고통스럽고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50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그런데도 사회는 그게 여성의 운명이라고 가르쳐왔다. 오늘날 많은 여성은 절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페미니즘에 영향받았다고 인정하지 않지만, 위협을 당하거나 비참한 상황에 놓이거나 혹은 단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넘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면 그 관계를 그만둘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들이 삶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반면 '영원히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그들의 선배 세대는 대개 사랑에 회의적이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때때로 아버지의 무정함에 상처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바람을 피웠는데, 요즘 시대가 되어서야 그런 행동들이 미친 짓, 폭력으로 여겨진다. 당시 부모님은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되었고, 나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던 때였다. 1960년대 말 특유의 반항적인 용기와 자만심에 부풀어 나는 엄마에게 아빠와 헤어지라고 충고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슬프고 지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누가 나를 원하겠니?" 엄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진한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이런 엄마의 반응에 놀라 엄마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라고 묻자 엄마는 슬픈 목소리로 약간 떨며, 자신은 이미 한물갔고 자식도 많은데 도대체 어떤 남자가 자기 같은 여자를 원하겠냐고 설명했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중심에 살던 소녀 시절, 내가 사랑에 대해 배운 가장 고통스러운 교훈 중 하나다.
지금은 심지어 불행한 결혼 생활에 갇힌 이조차 적어도 자신에게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결혼이라는 관계와 제도 바깥에 자신을 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다행이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같은 문화에서 다른 여성들의 삶을 예시로 진실을 목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변화를 선택하든 그러지 않든 간에 여성에게 모델이 존재한다는 건 정말로 중요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진정한 사랑과 완벽한 관계를 탐색하던 소녀일 때와 마찬가지로 성인 여성에게도 사랑은 중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찾고 있으며, 일부는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을 이미 찾았다. 더는 어리지 않은 이 시기가 마법의 시간인 것은 우리 중 상당수가 이제 사랑의 의미를 조금 더 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제 사랑을 한다는 것, 사랑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안다. 경험이 쌓인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아픈 경험을 해보았다. 고통에서 가르침을 얻었고, 약속된 사랑을 스스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은 분명 약속을 지킬 것이다. 우리 중 몇몇은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지만 분명히 다시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지속될 것이다. 수많은 시련과 착오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을 탐색하다 보면 우리는 거듭해서 처음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여성인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돌아보고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 앞에 선다.
사랑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은 여성들이 삶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그럼으로써 여성해방운동이 추구해온 완전한 자아실현을 위한 모든 여성들의 자유를 약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미니스트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사랑과 로맨스에 대한 예전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갈가리 찢어버린 것은 물론 옳았지만, 소녀들과 성인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희망과 약속으로 가득한 새로운 자유의 이상이 필요했다. 안내서와 지도의 역할을 할 새로운 비전이 없다면, 사랑을 향한 탐색은 충족되지 못하고 사랑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숨겨져 있을 뿐이다. 여성들에게는 문화 전반의 분위기 쇄신과 구원하는 사랑에 대한 새롭고 건설적인 비전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시 사랑으로 돌아와 사랑이 가진 변화의 힘을 선언해야 한다.
<『사랑은 사치일까』에서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