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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궁극의 내 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2장 1절-19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지난 설교 보충.
◆ 일반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자기 나라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이면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러니까 방언이란 말은 말인데 못 알아듣는 것을 말한다. 이때는 중간에 통역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용어를 빌리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쓰는 말을 하면 인간이 못 알아듣는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신령한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 신적인 능력성이 들어있는데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지 않으면 이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니, 하나님의 도덕성이니, 하나님의 능력성이니’ 하는 이 말도 인간의 말을 빌려서 하는 것이라서 듣는 사람이 인간의 지혜지식성이니 도덕성이니 능력성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어쨌든 인간은 하늘나라의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하려면 누군가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동역하는 사람을 당신의 신으로 감화 감동을 시키지 않으면 통역을 못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항상 신의 감화 감동이 들어있는 거다. 신의 감화 감동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의 감화 감동을 입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기초가 놓여졌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의 영을 당신의 구속으로 살렸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되어서 영이 죽었는데,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죽은 영이 살아났다. 타락된 영은 죽은 상태라서 하나님이 살리시지 않으면 스스로는 못 살아난다. 세상의 어떤 권세도 못 살린다. 살려놓은 중생 된 영 속에는 기본적으로 성령님이 항상 내재해 계신다.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이 성령님은 절대로 이 사람을 떠나지 않고, 이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고, 활동적으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행:2의 이적과 기사를 생각해 보자.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모인 무리에게 유대인의 말로 복음을 전하는데 각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자기 나라말로 들렸다. 이때 사도가 자기는 유대의 말을 한다고 하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의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면서 사도들이 자기가 어느 나라 말을 하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시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분이라서 당신이 하고자 하면 못할 게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능지수를 뛰어넘는 분이다.
사도들이 하는 말이 어느 나라 말로 들리건 변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이게 하나님께서 방언을 하게 하는 목적이다. 방편이야 어떻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게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이다.
성경에 보면 자기만 아는 방언도 있다. 이것은 남에게는 필요가 없다. 자기에게만 필요한 방언은 자기 혼자 밤새도록 하든지 해야지 남에게 이런 방언을 하도록 강조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기 때문에 한 교회나 자기에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방언을 하나님의 신을 입은 자가 통역을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는다. 이것은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는 다른 거다. 즉 성경이 아닌 방언과 예언을 하는 거다. 무슨 말이냐? 오늘날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느냐? 한국 사람이 다른 나라의 말로 방언을 한다면 그 나라에 가서 해야 알아듣는 거지 한국 사람에게 말을 하면 못 알아듣는데 이것을 성령의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니 이런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이 아니다.
내가 어느 집회에서 본 장면인데,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하니까 통역하는 사람이 이 방언을 성경에 있는 내용으로 통역했다. 그 방언이 가짜인지 통역이 가짜인지 모르겠으나 이미 성경에 있는 것을 말하는 방언은 들으나 마나다. 성경을 보고 깨달으면 된다. 그리고 이런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방언을 들어보니까 같은 말을 계속 반복을 하는데도 통역하는 사람이 성경에 있는 내용으로 길게 통역을 하고 있으니 이런 통역을 믿을 수 있는 거냐? 이런 방언과 통역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신기한 것도 아닌 마귀의 말이다.
성경은 문서화 되기 전이나 구약 때도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을 증거한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 되어지도록 설계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다. 신약으로 와서는 예수님의 언행심사를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화 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무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고 해도 이런 교훈이 없다면 뭐 하는 단체냐?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격화 성품화 되는 게 없다면 뭐 하는 거냐? 우리는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하나님의 은복을 받는 게 현재 예수 믿는 자기인데, 이건 없고 마음이 항상 예수 덕으로 세상에서 잘 되는 쪽으로 흑마의 저울이 달려있다면 이게 예수 믿는 거냐? 이런 사람은 저울추가 사망 쪽으로 내려진다. 무게가 죽는 쪽으로 내려간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 즉 백마로 갈아타야 한다. 거룩해지고 깨끗해지고 죄가 사멸되어야 한다. 살아생전에 이게 되어야지 안 되면 안 되느니만큼 자기는 흑암이요 눈물이요 고통이요 불행이다.
자기가 출생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게 누구의 머리로 살았느냐? 이유를 붙이자면 조상들이 잘못 가르쳐 줘서 미신을 믿었었고 귀신을 섬겼었다. 그래서 점쟁이나 무당에게 얼마나 착복을 당했느냐? 모르면 앞으로도 속는다. 이런 것에 속지 말라고 성경을 준 것이니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이치적으로 바로 전해야 하고, 받는 자는 바로 받아야 한다. 그래야 영리하고 똑똑하고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남이 보지 못하는 사건을 직감하고 세상의 파고를 무난히 넘을 수 있는 실력자가 된다. 이게 하나님의 자녀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똑똑한 왕이나 박사라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사망적인 왕이요 사망적인 지식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다.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이게 없다면 예수 믿는 효력이 뭐냐?
성경은 절대적인 사물의 원칙, 우주만물의 진리이치, 신앙 면의 진리이치, 생명이치를 가르쳐 준다. 예수 믿으면서 이 절대 정확성을 모르면 자기가 세상에서 배우고 경험한 대로 늘 변질 변동되는 세상의 지식을 기준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의 바람이 불면 같이 날아가 버리고, 자기가 주동자가 되든지 동조자가 되어서 악한 일을 하게 된다.
우리는 차원 높은 진리사상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거다. 주님이 세상을 다 아시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는 진리이치를 터득해서 영적인 면이 올라가야 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초월했는데 예수 믿는 우리가 죽음 앞에 벌벌 떨고 있다면 그 믿음은 세상성이다. 이러면 세상의 바람이 불면 다 쓸려간다.
행2:에서 ‘어린아이들은 예언하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한 것을 오늘날 성경 밖에 있는 것을 들어서 해석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귀신놀음이다. 구약의 요엘이 예언한 게 행2:에서 사도들에게 임했는데, 이곳에 모인 무리가 사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당시에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전한 것은 슬슬 감추어지고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는 것에 이 말씀을 갖다 붙인다.
예언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하는 것을 구원적으로 해석해 봐라. 자기의 예언이나 방언이 구원도리의 이치가 나타나느냐? 아니라면 걷어치워라. 이런 것을 좋아하다가는 교회가 망하고 가정이 해체된다. 그 수준이 타락된 일반도 안 되기 때문에 귀신의 집이 되어버린다. 예수를 믿는다면 인격적으로 바로 올라가야 하는데 예언 방언을 한다는 사람이 도덕성도 저질이고, 성격도 더럽고, 살림살이도 바로 못 한다면 이게 될 일이냐?
어린 아이는 예언을 한다고 했는데, 예언이 뭐냐? 앞으로 될 일을 말하는 게 예언이다. 미리 알려주면 준비를 할 수 있다. 아닌 말로 몇 년도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미리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 이것을 영의 눈으로 해석하면 우리에게는 눈만 뜨면 전부가 전쟁이요 경주요 싸움터이니 미리 신앙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것을 모르고 세상을 살다가는 그대로 당하게 된다.
구약에 선지자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예언을 했는데, ‘어느 나라와 어느 나라가 싸울 것이다. 메대와 바사가 어떻게 될 것이다’ 하고 표면적 역사적으로 되어있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교회가 되어질 사상의 활동을 말하는 거다. 우리는 이 면을 깨닫고 미리 준비해야 자기의 사상과 정신면에 허점이 생기지 않는다. 이 이치를 모르면 그냥 먹혀버린다. 이 허점 속에는 자기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게 들어있다.
성경의 성문적인 것은 표면이고, 영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문 속에 알맹이가 들어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에 예언된 것을 역사적 표면적으로만 말을 하면 교인들이 성경 속의 알맹이를 못 먹는다. 이러면 신앙의 준비가 안 된다. 이룰구원은 영적인 면이라서 미래의 절대 정확한 것을 깨달으면 현실에서 자기의 행불행을 만들어 가게 된다.
가인의 후손이 물속에서 죽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가인의 피 없는 제사, 구속이 없는 제사, 죄 사함이 없는 제사, 세상의 사고방식과 이해타산과 가치평가를 가지고 제사를 한 정신에서 이 일이 되어진 거다. ‘말세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것을 인류 제 1차적 종말인 노아홍수 때 이미 보여줬다. 그리고 인류 제 2차적 종말 때도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말씀이 변치 않는 것을 전한다면 이것도 예언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을 가지라고 한다면 이것은 세상 속화요, 음란이요, 간음이다. 말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한 말씀이 자기에게 하는 말씀으로 알고 자기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예언하리라’고 한 것을 용어 그대로 보면 어린아이인데도 예언을 하는 것은 미래를 정확히 안다는 거다. 이것을 신앙 면으로 보면 우리의 이룰구원에 대해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어린아이다. 힘이 약하다는 게 아니라 신앙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신의 예언은 변치 않는 영적인 면을 미리 가르쳐 준다.
‘청년들은 환상을 보리라’고 했는데, 청년은 박력이 있고, 기백이 있고, 힘이 있다. ‘환상’이 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활동을 생각하는 거다. 이게 청년의 신앙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는데, 육적으로 늙은이라고 해서 다 꿈을 꾸느냐? 다른 사람은 못 보는 영적인 면을 보는 것을 말한다. 글자 그대로 젊은이는 다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해석하면 알맹이를 붙잡지 못하게 된다. 성경을 읽고 영적인 실상화로 못 들어가면 신앙이 무너져 버린다.
‘환상을 보리라’고 한 청년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다음에는 ‘꿈을 꾸리라’고 한 늙은이의 신앙으로 성장이 되는데, ‘꿈을 꾸리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대로 천국에서 누릴 꿈을 꾸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이 든 신앙은 평소에 예언이나 환상으로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면서 천국을 누릴 희망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신앙과, 청년의 신앙과, 늙은이의 신앙이 자기의 현실에서 다 필요한 거다.
성경에 ‘말세가 될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는데, 요즘의 성도들은 자꾸 흩어지려고 한다. 우리는 연령적으로 갈 길이 바빠지면(늙어갈수록) 주님을 붙잡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사람이 몸이 아플수록 자꾸 병원에 마음을 둔다. 이게 이치다. 믿는 우리는 나이 들고 믿어갈수록 진리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은 세상을 자기 생각대로 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하는 것도 있고,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가라’ 하는 것도 있고, ‘좀 더 하거라’ 하는 것도 있다. 이것을 말씀으로 깨달아서 자기의 상황에 따라 적절히 해 나가야 자기의 앞길이 밝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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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궁극의 내 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