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자리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삶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비주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비주류란 주류 측에 있는 사람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비주류 가운데에서도 세상의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경계인의 삶을 사는 이도 있다. 경계인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하면 송두율 교수를 말할 수 있다.
지금부터 10년전 2003년, 한국사회는 이른바 ‘송두율 사건’으로 광폭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치렀다. 간첩혐의를 받으며 입국금지 상태였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이37년만에 마침내 고국을 방문했을 때, 국정원과 검찰에 자진출두하여 조사를 받았음에도 그는 결국 구속 수감됐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난 건 그로부터 9개월 후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로 갈린 채 광기의 마녀사냥이 벌어진 2003년의 한국 땅에서, 그는 한쪽에선 '당장 추방되어야 할 거물간첩'이라고, 또 한쪽에서는 '처벌받을 건 처벌받되 관용으로 품어야 할 대상'으로 불렸다.그는 자유 대한을 그리워 하면서도 이념적 관계로 남한에 들어와 결국 이념이라는 테두리로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된 현실에 안타까움을 기억한다.
언젠가 김수영 시인의 글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참으로 현대 시대의 참 시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서정적이면서도 내면의 아픔을 표현한 시의 내요을 보면서 고뇌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잠시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를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자.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이라는 이 작품은 시인이 타계하기 직전에 마지막 남긴 유고 작품으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창작되었다. 이 작품은 ‘풀’과 ‘바람’의 대립 구조로 짜여 있다. 시 안에서 풀’과 ‘바람’의 대립은 ‘눕다;일어나다’, ‘먼저;늦게’, ‘울다;웃다’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마치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속해 온 민초(民草)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풀은 우리이며, 바람은 풀을 눕히려는 마치도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념적 대립이라고 생각된다.
시인 김수영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10월 이런 시를 썼다.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시이지만 당시 이념적 관계 회복의 기틀을 마련한 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일성 만세
김수영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이 시는 그가 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발표되지 못했다. 이 시는 2008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나왔다. 1960년의 민주당 정부나 1968년의 박정희 군부정권이나 할 것 없이 그들은 ‘김일성 만세’라는 발언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은 더더욱 불가능한 말이다. 김수영은 개탄했다. 분명 남한에도 ‘김일성 만세’를 거리에서 외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말이다. 김수영이 생각하기에, 진정한 ‘현대사회’의 역할은 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다짜고짜 잡아가다 가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놔둬야 한다. 거기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민주적인 토론과 이성의 판단을 통해 사람들이 선택할 문제이다. ‘현대사회’의 역할은 이러한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가 부정되는 현실은 또 있다. ‘사상규제법’으로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다. 검찰과 보수언론은 송두율 교수를 충분한 물증도 없이 ‘거물 간첩’으로 몰아세우며, 사상고백과 공개적인 ‘전향선언’을 요구했었다.그것은 주먹이 없었을 뿐이지 여론의 형태를 띤 ‘고문’과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잊혀질만하면 국가보안법은 다시 등장해 체제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특정 단체를 탄압하는 도구로 쓰였다. 그러나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보듯이, 국가보안법에 대한 국민적 여론은 여전히 존치론이 우세한 게 현실이다. 그 폐지를 위한 정교한 논리가 여전히 요청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폐지돼야 한다. 사상과 양심이란 자기 뜻을 모색하고 세우는 ‘내면적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생 전체를 통해 형성되며, 자기 의지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의적 계기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형성된 사상과 양심을 근거로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 즉, 개인의 사상과 양심이란 삶을 영위해 나가는 ‘내면적 존재기반’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확인할 수 없는 내면의 문제에 간섭하여 그것을 징벌하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공권력의 적용은 엄격하게 ‘외부적인 것’에만 한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면은 알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어떠하든 국가 존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송두율 교수가 자신을 ‘경계인’으로 규정짓는 것이 간첩활동을 위한 기만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실제 ‘경계인’이 뜻하는 것은 단순히 남한과 북한 사이에 아무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 궤적과 학문적 지향을 응축해 놓은 개념이다. 또한 검찰은 송두율 교수가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개인의 양심까지 통제하고 단죄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사상과 양심의 제한이 필요하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 안보가 모든 사람들의 사상과 양심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강제로 가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헌법이 명시한 ‘자유 민주주의’란 정치적 자유를 핵심가치로 하는 것이다. 안보논리는 어디까지나 ‘국가 존립에 명백하고 현저한 위협’이 되는 사안에 한정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 단순한 주장이나 표현물의 제작・반포・소지가 반국가단체의 주장과 동일하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 존립에 ‘명백하고 현저한’ 위협이 될 수는 없다. 사상은 ‘사상의 공개시장’서 검증되고 비판받아야 하는 문제이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21세기의 왕조국가인 북한 체제를 긍정하거나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7조(고무, 찬양, 이적 표현물 소지)는 반국가단체의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그것을 유포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혐의를 처벌근거로 적용하고 있다.국가보안법은 한 사회의 정신적 복리를 높이기 위해서도 폐지돼야 한다.
나는 인천교구 신부이다. 인천 영종도에서 태어나 서해 바다에 대해 누구보다 친숙하다. 백령도, 연평도, 덕적도를 자주 다녀왔다.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은 NNL(북방한계선)을 노무현 대통령 때 포기했다고 발표하면서 자신의 권력기구가 마치도 국가수호기관으로 반포하고 있다.
국정원은 주류 가운데 가장 핵심 주류 세력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면서 휴전선이 남북으로 그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바다 지역은 휴전 경계선이 없고 단지 미군은 남한 정부가 해안을 통해 북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은 선이 북방한계선 NNL이다. 이 지역은 노무현 대통령은 서해평화지구라는 이름으로 남북해상교류의 물꼬를 트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마치도 과거 노무현 정부가 서해 바다를 북에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요즘 악의 실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는 것 같다. 악은 존재한다. 악은 선을 가장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세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국가 정보기관이 선거개입을 한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악의 실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 과정에 일어난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박근혜 당시 후보는 마지막 TV토론회에서 해당 사건에 대해 “국정원 여직원 선거에 개입한 증거가 없으며,민주당이 국정원 여직원의 인권을 침해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졌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장의 지시로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상부 지시로 사건을 은폐 조작했음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된 지금,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대통령은 국정원이 스스로 개혁하길 바란다는 말에 너무 어이가 없다.
법학을 가르치는 조국 교수가 페이스북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국정원에게 국정원 개혁을 맡기는 것은 싸이코 패스 연쇄살인범에게 피해자 보호를 맡기는 꼴이며, 상습적 아동 성폭행범에게 아동보호를 맡기는 꼴, 상습적인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관리를 맡기는 꼴이다.” 나는 조국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는 국가보안법과 함께 국정원이 자체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기업은 돌아가는 데 해고자는 더 늘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더욱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22조가 들인 4대강 정비사업에서 깊이 6미터의 진실이 감추어진 운하 사업이었다고 밝혀져도 테니스나 열심히 치는 MB의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
지난 2002년 6월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순이, 미선이의 아픔을 기억하면서 주한미군 주둔비로 8500억 이상을 한 해에 주면서 우리를 지켜주는 미군에 감사를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비주류를 선택하고 경계인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생명과 평화의 가치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소신의 가치를 더 깊이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문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우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이는 지금 우리는 경계인의 삶을 선택하며 비주류인의 행복을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아멘.
건강하게 동료들 곁으로 돌아 왔습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이야기
복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