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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7장 15-19절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 6절 이하에서 기도하시는 대상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로 열두 명을 세우셨지만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시는 대상은 열두 명 모두가 아니라 열한 명의 제자입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12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멸망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열한 명의 제자만이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었고, 때가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여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게 됩니다. 반면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 세상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합니다. 미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도 미워합니다. 즉 세상은 세상에 속한 자를 좋아하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하나님께 속한 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저들을 보전해 주시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보전하시는 자체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세상적인 측면에서의 하나 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기쁨을 저들도 한 마음으로 가지길 원하셔서 그것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직접적으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마지막 부분인데, 앞서 살핀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복적이면서도 조금 더 상세하게 기도하십니다. 우선 15절과 16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지난 시간 살핀 10절, 11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10절에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제자들이 결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11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게 되지만 저들은 계속해서 세상에 있게 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세상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다시 말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가 지금 15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15절은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사하여 영생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그런 차원에서 결국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데려가실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디로 데려 가시는가?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신 ‘아버지 집’입니다(요14:2).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할 때 가시는 그곳입니다. 소위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라고 말하는 그곳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자들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비록 세상은 죄악 되고, 죄악 된 만큼 괴로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로 부르신 만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로 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는 세상에 두시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만, 왜냐하면 죄와 완전히 결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구별하여 내실 때 목적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에 있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 그 목적하신 바를 이루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겁니다.
제자들의 사명, 그들을 향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세상에 두시는데, 방금도 말했지만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죄악으로 편만합니다. 문제는 제자들조차 죄 문제와 관련해 완전히 다 해결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래서 죄책에 있어서는 완전히 해결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 안에도 여전히 부패함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고, 제자들 안에는 부패함이 있어서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악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연약함이란 죄가 전혀 없는 아담조차 유혹에 넘어갈 정도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없는데도 유혹에 넘어갔다면 본성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어떠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저들을 향하여 반복적으로 기도하시는 게 저들을 보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보전해 달라고 하시는가?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11절에서는 단지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15절에서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누구에게 기도하시는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런 반복적인 기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의 안전은 하나님 안에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주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유일한 안전지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위험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없다는 것도 아니며, 유혹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위험이 있고 어려움도 있고 또 유혹도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 안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죄악이 가득합니다. 죄악으로 편만합니다. 죄인이 살아가는 이상 죄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내신 하나님의 백성 안에도 죄가 있습니다. 부패함이 있습니다. 심지어 연약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지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힘, 우리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관련해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타락했을 때 그 타락은 전적 타락입니다. 결코 부분적인 타락이 아닙니다.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의지까지도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3항에서는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인간은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이르는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본성적인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가 영적 선을 싫어하고, 죄 가운데 죽고,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와 관련해 자신을 예비시킬 수조차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된 자는 어떠한가? 4항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로 그를 옮길 때, 하나님은 죄 아래 놓여 있는 본성상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그를 자유케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그가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그러나 그의 여전히 남은 부패 때문에 그는 선에 속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악에 속한 것만을 행하고 의지한다.
비록 중생된 자라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영적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으로 영적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적 선을 행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부패성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은 결코 완전한 형태의 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0% 선 자체가 아니라 그 선에도 우리의 부패가, 우리의 점과 흠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고, 그리스도 없는 의와 선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이해와 달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가르침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화와 관련해 죄와의 싸움도 내가 하고, 그래서 거룩해 지는 싸움도 내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말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 싸움에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하나님이 빠진다든가, 아니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역사 안에서 펠라기안주의로, 또 반펠라기안주의로 나왔던 것 아닙니까! 인간이기에 뭐든지 할 수 있다, 혹은 중생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스스로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없이는 어떤 악에서도 이겨낼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비중생자만이 아니라 중생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보전하심이 없다면 중생자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악에 빠질 수 있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 없이는 하나님께 속한 자의 열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열매를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요한복음 15장에서 이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3절과 4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자들인가? 3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러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해진 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깨끗해졌다고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너희 안에 거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게 가지와 포도나무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와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의인이라는 법적 칭호를 받은 자라 할지라도 스스로는 결코 열매를 내놓을 수 없습니다. 누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하는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그가 없이는 어떤 열매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5절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를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펠라기안주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떠나서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반펠라기안주의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그들도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은혜는 도움을 받는 정도이지, 그들은 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인간의 의지에 무게를 둡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떤 열매도 없습니다.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9장 4장이 말하는 것처럼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열매를 맺는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부패성으로 말미암은 점과 흠이 있습니다. 그런 점과 흠조차 그리스도의 공로로 채워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되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 없이는 세상에서 악과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나아가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저들은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신분의 변화를 분명히 맛본 자들입니다. 그러나 신분이 변했다고 해서 그가 행해오던 습관이 한순간 변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의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의를 행하기보다는 죄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는 세상의 원리가 우리의 주된 관심이고, 말씀은 알지만 말씀을 행할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기도하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힘이요, 그분에게서 우리의 모든 힘이 나온다는 사실을 진실하게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요청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잠언 3장 6절을 통해 가르치는 바가 이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인지 하나님을 인정할 때,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가르쳐주시고, 친히 그 길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보전만 있으면 되는가?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은 17절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16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인데, 15절과 관련해서는 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와 관련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절 말씀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고, 나아가 17절의 자리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미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게 속한 자로서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을 의미하는데,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자요 구별된 자로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지만 모든 신자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라면 결코 세상과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속이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속한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왜 불러주셨는가? 그가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그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언제부터 우리를 향한 거룩의 목적을 가지셨는가? 창세전부터입니다. 창세전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할 때 그 선택은 거룩을 목적으로 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18절에 보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어디에 보내시는가? 세상에 보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하자면 세상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는 죄인인 자들을 죄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와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낸다는 것은 사도들의 사명도 죄인 된 자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할 목적으로 그들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보내시는가? 세상입니다.
거룩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할 때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달리 말하면 죄악 된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구별된 자로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요 목적입니다. 이때 우리가 신자라는 것을 어떤 외적 모습만 가지고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머리 위에 신자라는 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외적 모습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우리가 구별된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만큼 절대적인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소위 세상은 변할지라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법이 바뀌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법이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과 우리의 차이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외적 모습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신자일지라도 얼마든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신자임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신자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을 주십니까? 신자이기에 당연히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도 주십니다. 왜 말씀을 주십니까? 17절이 그 이유요 목적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다” 우리의 거룩은 진리로만 가능한데,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의 교훈과 교육을 위하여 7일 가운데 한 날을 구별해 두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차이는 주일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로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주일을 지킨다면, 주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지킨다면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통해 경고하신 것처럼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것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여 무수한 재물을 가지고 나오면서도 마음 없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주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면 그 말씀으로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거룩의 구별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조차 구별되다고 말할 수 있는 바가 있는 겁니다.
물론 말씀만 있으면 거룩하게 되는가?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역사하시는가? 말씀 없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며,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에 말씀이라는 이 수단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진리인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규범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학입니다. 때문에 말씀에 무지한 사람은 결코 거룩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지식과 거룩은 반드시 함께 갑니다. 간혹 하나님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거룩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지식은 없는데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지식이 있는데 거룩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지식이 합당하게 있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지식이 없는데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거룩한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 거룩한가에 대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데 어떻게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된 믿음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어떻게 우리를 자랑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만 영광과 모든 감사를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겸손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지식은 우리를 아는 지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심을 알면 우리의 작음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면 우리의 무능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알면 우리의 불완전함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고 완성을 위하여 이끌어 가신다고 할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여기에 어떻게 겸손이 아닌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를 아는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 겸손히 구하. 구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성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즉 참된 믿음이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믿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동시에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의 부패성, 우리의 연약함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믿음인데 그 믿음이 늘, 항상 행함으로 나타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결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한결같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성경의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한결 같았습니까? 항상 믿음의 본으로만 나타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참된 믿음에 대한 열매로서의 거룩함이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주소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않았다, 아직 천국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패된 본성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싸움에서 우리 스스로가 싸워 승리할 수 있는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나 홀로만으로는 결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것 아닙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시면서, 동시에 19절의 말씀도 하십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성이 있어서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얼마나 연약한지 조금만 유혹해도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을 조금만 변경해도 괜찮은 것처럼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기준인데, 그래서 결코 변경해서는 안 되는데, 조금만 변경하게 유혹하여 넘어뜨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을 가감하는 것 죄입니다. 말씀을 범하는 것 죄입니다. 심지어 말씀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죄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구별됨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십니다. 누가 만드시는가?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동시에 오늘 본문 19절은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기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본래부터 죄가 없으십니다. 죄로부터 구별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그의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있다는 것이고, 또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는 분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하시는가?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거룩하여 나를 믿는 자에게 나의 거룩을 주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우리는 거룩이 누구에게 달려 있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되었다면 거룩해져야 합니다. 성경은 이 거룩 없이는 주를 볼 수 없다고까지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런데 우리 스스로는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누가 거룩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역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듯 그 안에 있는 거룩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십니다.
그러나 성화의 내용으로서 죄를 죽이고 의를 위하여 애쓰는 것 없이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역사로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죄를 죽이고 의를 위하여 힘쓰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과 흠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점과 흠이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거룩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3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지혜일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의로움이고,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거룩함이고,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함이십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전 순종 없이는 우리의 의도, 우리의 거룩도, 우리의 구원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의 가르침을 따라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거룩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도록 그 말씀에 우리 자신을 늘 비춰보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신자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고,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 말씀을 통해 표현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교회의 유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거룩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정확하게 말해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성경이라는 그물이 걸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할지라도 성경이 답을 말하지 않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살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고 할 때 실제로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으로도 부족합니다. 일단 이 땅에서 완전성화란 없기 때문에 부족하고, 또 거룩의 삶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거기에도 점과 흠이 있기 때문에 부족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런 부족함의 거룩을 받으시는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부족한 거룩함을 받으신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덧입혀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순종으로 거룩하게 된 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심으로 우리의 거룩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성화의 싸움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소속이 결코 세상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라면 세상적으로 사셔도 됩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 세상이 즐겨하는 것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 자신이 기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그 기준을 따라 살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노력하지만 대부분의 신자가 승리하기보다는 패합니다. 패했다고 해서 주일에 나오지 않으면 6일만 패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까지 패하게 됩니다. 주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구별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적어도 참된 신자에게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거짓이 아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