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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항구다. 서울과 가장 가깝다. 쇄국정책이 느슨해지면서 거의 모든 신문물이 인천항으로 들어온 이유다.
난생처음 보는 진기한 물건들에 사람들이 눈은 휘둥그레졌다. 인천은 거대한 테스트 베드(Test Bed)였다.
새로 들어온 문명의 이기들은 인천에서 처음 시험가동 됐다. 인천 최초는 조선 최초와 같은 말이었다.
인천에서의 시험을 통과해야 전국으로 보급됐다.
그 사례는 셀 수 없다. 전기통신(전보)과 유선전화도 인천에서 시작됐다. 1896년 한성의 궁내부에서 내린 어명이 인천감리서(현 출입국사무소)의 수화기를 통해 울려 퍼졌을 때 사람들은 경천동지했다.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철도가 국내 최초로 개통됐다. 당시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본 어느 기자는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연기는 하늘로 치솟아'라 묘사했다(독립신문1899.9.19).
신식호텔(대불호텔), 기상대(인천기상대), 서양식 공원(자유공원), 공설 운동장(웃터골), 근대식 등대(팔미도 등대), 갑문식 도크(인천내항) 등 국내에 처음 도입된 도시 인프라들은 인천에 가장 먼저 설치됐다. 우체국(인천우체국), 병원(성 누가 병원) 등의 서양식 공공서비스도 인천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고속도로(경인고속도로)나 자동차(새나라 자동차, 현 한국 GM)도 인천이 발상지다.
공공재뿐만 아니라 소비재도 인천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사이다(Cider)'는 그 중 하나다. 1905년 일본인 히라야마 마츠타라가 화정거리에 '인천탄산수제조소'를 만든 게 시초였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있어도 꼽뿌(컵의 일본어) 없이는 못 마십니다'라는 랩가사는 그런 근거가 있었다. 담배와 성냥의 제조도 인천이 효시였고, 짜장면 짬뽕도 인천 청관거리에서 처음 만들어 부두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문제의 '쫄면'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초 인천의 광신제면소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연륜이야 짜장면, 짬뽕에 대지는 못하지만 명성과 인기는 그에 못지않다. 그 쫄면 앞에 '문제의'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가 있다. 아직 그의 탄생에 관한 진실이 명쾌하게 가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탄생설화는 대충 두 갈래다. 하나는 '실수가 빚은 명작'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치열한 연구개발의 산물'이라는 거다. (참조 :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2015. 9)
문제의 쫄면, 그 탄생의 진실은
전자는 냉면을 뽑던 직원이 피곤에 겨워 사출기의 체(구멍)를 잘못 끼워 두꺼운 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순전히 실수고 단순한 우연이었다는 말이다. 후자는 더 쫄깃하고 더 맛있고 더 특색 있는 면을 찾기 위한 지난한 노력 끝에 탄생한 창조물이라는 설이다. 전자가 정설처럼 굳어진 상황이지만, 쫄면사랑 40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장본인으로서 나는 후자에 한 표 던진다.
나름 근거는 있다. 우선 재료와 공법이 다르다. 냉면은 주로 메밀을 쓴다. 메밀면은 질기지 않다. 툭툭 잘 끊긴다. 전분이나 밀가루를 섞어도 쫄면만큼 질겨지지는 않는다. 쫄면은 밀가루를 쓴다. 뜨거운 열로 반죽을 하고 강한 압력으로 사출해 탄성을 더한다(조선일보 2014.11.3, 푸드 이야기). 색도 다르다. 메밀은 거무스름하지만 쫄면은 노르스름하다. 하얀색 반죽을 뜨거운 열기로 살짝 익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초창기 쫄면은 지금보다 더 굵고 더 질겼다. 당시 함께 시식했던 부친께서 꼭 기저귀 고무줄 같다며 중간에 젓가락을 내려놓으실 정도였다. 면 기저귀를 쓰던 당시, 아기들의 허리춤에 기저귀 고정용으로 매어 있던 노랗고 동그란 고무줄을 방불케 했다. 지금은, 특히 가정용으로 만들어 파는 쫄면은 확실히 더 얇고, 덜 질기다. 아마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춰 개량한 듯하다. 물론 확인된 바는 아니다.
쫄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광신제면은 중구 경동에 있다. 주요 납품처는 길 건너 인현동, 신포동에 많았다. 주로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동네다. 인근의 만복당, 맛나당, 명물당의 3당과 DJ가 신청 음악을 틀어주던 대동학생백화점 분식코너 등은 쫄면의 성지였다. 그 중 맛나당이 원조로 꼽힌다. 실수로 나온 면발을 자청해 받아 재미 삼아 야채와 고추장에 비벼 먹은 게 효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천쫄면의 전통을 지키는 '만복당'파
원조를 비롯해 대부분 사라졌지만 만복당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자리에 있다. 최민준 사장이 지난 2016년 식당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최 사장은 원래 그 인근에서 '토요일 분식'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유서 깊은 만복당 자리가 매물로 나오자 얼른 인수했다. 그에 대한 추억이 애틋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M&A에 성공했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상호를 버렸다. 전통을 살리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최민준 사장이 인수한 후 만복당은 즉석떡볶이를 간판 메뉴로 걸었다. 형형색색의 떡과 삶은 달걀, 비엔나소시지, 꼬물이 만두가 기본으로 들어있다. 거기에 사리도 3가지나 얹혀 나온다. 라면과 쫄면과 납작당면이다. 그 순서대로 먹어야 한다. 라면이 퍼지면 자칫 맛을 버릴 수 있다. 당면은 두껍기도 하거니와 전분이 많아 제일 늦게 익는다. 이 집도 쫄면이나 떡볶이에 넣는 특제 양념장이 따로 있다. 라면, 떡 등을 넣고 끓이는데도 상큼하고 개운한 감칠맛이 돈다.
만복당의 원래 사장님과 사촌이자 동업자인 최갑태 사장 부부는 따로 독립해 동구 현대시장 안에서 만복분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자타공인 쫄면 1세대다. 1970년대 중반 쫄면을 개발한 당사자 중 하나다. 자부심이 대단하다. 지난 2017년에는 한 공중파 방송사로부터 쫄면의 달인으로 선정됐다. 쫄면 양념장이 특히 유명하다. 장을 만드는 데 무말랭이와 말린 토란대를 우린 물로 마늘간장 밥을 해 찹쌀 풀 대신 쓴다.
최 사장 부부의 쫄면은 가장 원형에 충실하다. 특히 국수가 그렇다. 마트에서 파는 면보다 2배는 두껍다. 그렇다고 2배 질긴 건 아니다. 2배 이상 쫄깃하긴 하다. 삶고 헹구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수십 년 내공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는다. 묵직한 식감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양념장은 독보적이다. 맛이 깊고 은은하다. 맵되 자극적이지 않고, 달되 간지럽지 않다. 제조 비법 자체가 특허감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라는 마라탕에도 쫄면이 빠지지 않는다. 중국 음식인지라 옥수수면이나 중국식 넓적한 당면인 콴분이 잘 어울리지만 쫄면도 그에 못지않다. 찰기는 그 둘의 중간이다. 그 독하게 매운 양념 앞에서도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는다. 식감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많이들 선호해 셀프 냉장고 맨 앞에 놓여 있다. 잘하면 쫄면이 중국으로 역수출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천정신을 상징하는 쫄면
쫄면은 질기다. 쭉쭉 늘어나지만 잘 끊기지는 않는다. 탄력성은 최고다. 북한식 냉면처럼 지나치게 가늘거나 하늘거리지 않는다. 두툼하고 우직하다. 그게 쫄면의 본 모습이다. 그만의 매력이다. 쫄면은 본디 그렇게 태어났다. 쫄면은 그런 제 모습을 쉬 흩트리지 않는다. 생면이지만 방부제를 넣지 않아도 금방 상하지 않는다. 뜨거운 물 속에서도 잘 불지 않는다. 끝까지 제 본 모습을 지킨다.
그런 쫄면의 본질은 인천 사람들의 정신과 닮았다 서구문물을 가장 먼저 들인 인천은 가장 화려한 도시였지만 6.25 전쟁의 최대 피해를 입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하지만 인천 사람들은 강인하고 질긴 생명력으로 끝내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전후 대한민국의 재건과 도약을 견인했다.
인천사람들은 온전히 제 의지와 노력으로 스스로를 닮은 쫄면을 만들어 낸 거다. 인천은 쫄면이다.
인천은 쫄면이다, 왜냐하면
끊김 없고 회복력 강한 인천의 정신을 상징하는 '쫄면'... 그 위대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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