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92)
어모장군(禦侮將軍) 예극양(芮克讓) 선생의 각산재(角山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이서면 각계리에 자리잡고 있는 각산재를 찾았다. 이곳에 배향 인물은 예극양(芮克讓)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의흥(義興)이며 자는 극겸(克謙)이다.
의흥 예씨는 고성(古姓)이며 고려 인종(仁宗) 때에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중국 금나라에 만수절(萬壽節) 성잘시(聖節使)로 갔으며 의종(毅宗) 때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하여 관직이 재보(宰輔)에 이르고 그 공훈으로 부계군(缶溪君)에 봉해진 낙전(樂全)이 시조이다. 증조부는 관찰사(觀察使) 공조참판(工曹參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한 수몽헌(守夢軒) 승석(承錫)이고 조부는 경주부윤(慶州府尹) 충년(忠年)이다. 생부(生父)는 난지(蘭智)이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조별좌(吏曹別坐)를 지낸 난종(蘭宗)의 계자(系子)였다.
공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으며 1500년 초에 입향한 의흥예씨 입청도조(入淸道祖)이다. 부인은 밀성 박씨 계명(繼明)의 여(女)이고 고려말 충신인 송은(松隱) 박익(朴翊)의 후예이다.
슬하에 인충(仁忠), 의충(義忠), 예충(禮忠), 지충(智忠), 신충(信忠) 5형제를 두었는데 그 후 대전을 세거지로 하여 지전(紙田), 내리(內里), 온막(溫幕) 등에서 집성촌으로 거주하고 있다.
공의 별세 이후 몇 년이 지나서 공의 학문, 절의, 의적(懿蹟) 등이 세상에 알려져 후손들의 추모가 간절하여 설단(設壇, 묘소가 실전되어 구전에 의해 설단함)하고 묘재인 각산재를 1632년(인조 10)에 창건했다. 3칸 솟을 대문과 팔작지붕 목조와가 5칸(중당협실형) 구조이다.
상량문송(上樑文頌)에 “함께 기획하고 운영을 잘하여 천만년 무궁하고/ 크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 조상의 음덕으로 후손에게 경사로움이 영원하리라”했다. 각산재 기문은 대종회장인 광해(光海)가 지었다.
1994년 목촌 춘호(牧村 春浩, 전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의흥 예씨 대종회가 창설되어 대종회관 설립(2001), 군위(軍威) 시조공 묘소를 비롯하여 당진(唐津) 선대 묘소 의 성역화, 각계 백호등(白虎嶝) 묘소를 사초(莎草)했다. 시조공 신도비 재건립(2008), 대전 뿌리공원에 의흥 예씨 유래비 설치(2016년), 대종회관 대문 건립(2017)을 했다.
또한 1804년에 문중의 족보인 갑자창시보(甲子創始譜)를 만든 이래 2019년에는 제7차 기해보(己亥譜)를 간행했다. 족보 편찬위원장은 재호(載浩)였다.
그리고 봉동정사규약(鳳洞精舍規約)에 “사람이 돌아가시면 연락하고, 장가를 들면 통지를 하고 집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도리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훈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여 모든 종친이 바른길을 가도록 권장한 의흥 예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이고 토대였다.
“의흥예씨”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시조공과 입향조의 성덕을 받들어
빼어난 학문에 대대로 충절이라
우뚝 선 봉황의 기상 오랜 고성古姓 의흥 예씨
첫댓글 조상님들의 발자취 감사히 배워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