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라바 기도 그리스도 기도>의 줄거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조롱이 마지막 까지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왜 극악무도한 사형수 바라바보다 예수님을 더 증오했을까요? 예수님이 아버지의 주권 안에서 향하시는 십자가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바라바의 이름 역시 예수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라바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 선택의 기준이 십자가입니다.
바라바 기도 그리스도 기도
(마태복음 27:32~44)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바라바 기도 그리스도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바라바 기도 그리스도 기도’
본문에서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골고다(Golgotha)는 헬라어 표기이고 라틴어로는 갈보리(Calvary)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고난의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합니다.
앞서 본 27장 15절 이하에서 바라바라는 인물이 언급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바라바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총독 빌라도는 관습에 따라 명절에 방면할 죄인의 선택을 요청했고, 유대인들은 극악무도한 죄인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라바와 연관하여 유대인의 마음가짐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바라바에 대한 각주를 보면 “바라바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오늘 본문에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본래 이름과 같습니다. 이처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시몬이나 예수라는 이름은 대단히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별칭을 붙여 구분하였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던 예수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감옥에 갇혀있던 흉악범 바라바 예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인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빌라도의 재판에서 예수님은 침묵을 통해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모두 끄신 상태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상태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빌라도가 방면할 죄인을 고르던 중 두 예수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이시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써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가 됩니다.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와 동일합니다. 이 여호수아가 헬라어로 축약되면서 예수로 표기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이름을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온전히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예수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 판가름하는 과정이 하나 더 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움직여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에 그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 앞에 바라바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를 제시하고 방면할 사람을 선택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의 선택이 요청됩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바라바 예수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치고 바라바 예수를 선택할 사람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바라바 예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말과 마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유대인의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주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조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로는 얼마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믿는다고 해도 마음으로는 십자가의 예수를 조롱하는 일을 평생토록 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예배당에서 장로님 권사님으로 살았을지라도 그 삶에서 예수님은 조롱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아닌 바라바 예수를 선택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정확하게 믿는다면 삶은 저절로 살아지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면 삶은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일은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확하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대표적인 경우는 기도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바라바 기도 그리스도 기도’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지만 실제로는 바라바 예수를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라바 예수를 부르며 기도를 한다면 바라바 예수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기도도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님!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오니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바라바 기도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조롱하는 자들이 바로 선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40절을 보면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손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온 몸이 채찍에 맞아 살갗이 다 찢어진 상태로부터 스스로 내려올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정말로 그들의 요청대로 내려오셨다면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게 된 사람들 중에서 단 한 명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매달리셨고 그 자리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로부터 구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주권의 현장이 됩니다.
한편 34절을 보면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아주 맛이 쓴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포도주에 진통제로 알려진 몰약을 탔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십자가 극형의 고통을 다소나마 줄여주려는 배려의 행동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포도주를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안티세력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실행 될 때에 온전한 의식으로 참여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참 인간의 모습이란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에는 세상을 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은 세상을 떠나서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신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리고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이 임합니다. 이때에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가면과 장갑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주권이 활동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은 섭리로 움직여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상태에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마음은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머물고, 이 땅을 살아가는 육체의 현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이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담긴 마음상태가 끝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요청대로 십자가에서 그대로 내려오셨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인정을 받으실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은 결코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야말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바라바 예수를 부르는 유대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돈을 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구원은 돈이 없는 상태에서 돈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은 자녀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구원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바라며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조롱하고 바라바 예수를 선택한 유대인의 마음가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한다는 것은 이렇게 마음에 세상의 가치들을 담은 상태를 죽이지 않고 유지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극악한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마음에 이 세상 것을 담은 것은 강도요 살인자인 사형수 바라바와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건강해지는 것을 구원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 지금 제가 건강이 안 좋은 상태입니다. 건강하게 해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건강을 마음에 담고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악무도한 바라바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 바라바의 상태에서 구원을 바라며 예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그리스도 기도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지금 저의 마음에 하나님 대신 건강 문제가 가득 찼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구레네 시몬은 본의가 아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공유하는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레네 시몬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와 건강 문제로 가득 찬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까지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를 통해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던 유대인은 바라바 예수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곧 바라바 예수와 자신들을 동일시함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짜 극악무도한 죄인은 사회의 법을 어겨서 감옥에 있던 바라바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법은 어기지 않았으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을 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던 모든 사람이 바라바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죽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없애버린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돈을 담고 건강을 담고 가족을 담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하나님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죽인 마음보다 더 큰 죄악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조롱하는 자들의 마음은 바라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바라바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죄사함 받았다는 고백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죄사함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 안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가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자가 마음에 배우자의 문제를 담고, 자녀의 문제를 담고, 직장 문제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설령 목사님들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사함을 받고서 마음에 목회 문제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로 예배당 중심의 모임이 중단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짜 목사와 가짜 목사가 가려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예배당 중심의 목회를 담고 있다면 끝내 예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목사는 바라바 기도를 하는 목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가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평강과 감사가 깨어지지 않는 목사라면 그리스도 기도를 하는 목사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담고 있으면서 기도하는 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예수 이름을 부름으로써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해 죄사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전과 동일한 삶을 이어나간다면 죄사함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죄 속으로 빠지고 있는데 죄 사함을 언급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대신 세상이 들어온 상태를 죽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돈 담고, 건강 담고, 가족의 형통을 담고, 성공과 출세를 담고, 비전과 꿈을 담고, 목회를 담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바라바 예수와 나를 동일시하면서 구원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에 수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돈이 없는 상태에서 있는 상태가 되고, 건강이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바뀌는 것을 구원으로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부르는 예수님은 바라바 예수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가장 극악무도한 죄는 마음에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는 바라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제는 분명히 그리스도 기도를 함으로써 진짜 예수 믿는 맛을 느끼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내가 부르고 믿는 예수님이 바라바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하게 하셔서 십자가의 예수를 조롱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구레네 시몬은 자기도 모르게 십자가를 공유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