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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사찰 순례
1.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보일 시示에 홀로 단單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상형문자이다 즉 혼자 조용히 앉아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1700 공안 중에 <이뮛고 시심마> 화두를 많이 참구하고 있다. <내가누고?>라는 화두를 들고 수행한다. 다른 말로 성성적적(惺惺寂寂)이다. 나라는 존재가 늘 깨어 있어야한다.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융은 선불교에 대하여 “선사들이야말로 안개에 쌓인 불확실한 미래를 지켜주고 있는 산꼭대기의 햇불이다”라고 설파했다. 선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다 손가락으로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불성을 가르킨다. 참 불성을 체득하면 바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조계종의 종지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한 근본교리를 받들어 체득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로 한다.
참선은 오직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될 수 있다는 성불비대리성(成佛非代理性)이다 나는, 지금, 여기 (self, now, here) 이 세가지가 중심 주제이다. 오직 자신이 주체가 되어 네 운명은 내가 스스로 개척한다는 강한 자기의 자발성을 요구하고 있다.
2. 소림사 두부 이야기
소림사(少林寺)는 산이름이 소실산(少室山)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소림사라 했다. 인근에는 태실산(泰室山)이 있고 태림사(泰林寺)라는 절이 있다. 소림사와 태림사는 무예와 수련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태림사가 사세가 번창하면서 소림사 스님들도 점차 태림사로 이동하고 소림사는 방장과 부방장 두 분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태림사의 최고 실력자와 무술대련을 하여 소림사 명예회복을 하고자 대련을 청하였다. 태림사는 최고의 실력자를 산발하여 만나는 장소에 갔다. 한편 소림사는 먼저 방장이 “부방장이 시합에 나가 주세요” 했다. 부방장은 “그래도 방장화상이 나가시야지요”했다. 방장은 “그래도 방장의 최면이 있지 부방장이 나가세요”하여 결국 부방장이 장소에 나갔다. 태림사와 소림사 서로 마주 본 두 분의 고승 먼저 태림사 스님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우주(주먹)는 하나(손가락)다)
이에 소림사스님은 손가락 두 개를 보여 주었다(우주는 2개다)
태림사 스님은 손가락 하나를 보여 주면서(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소림사 스님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 주었다. (내 주먹이다 또는 맞아 죽을래) 태림사스님은 얼른 도망갔다.
소림사 방장은 초조한 마음으로 부방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부방장이 왔다 결과를 물었다.
먼저 태림사스님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소림사는 두부 한 모에 얼마냐?)
소림사스님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이백원이다)
태림사스님이 손가락 하나를 보이며(백원에 파느냐)
소림사스님 주먹을 쥐었다(너 맞아 죽을래)
*태실산에는 영태사(永泰寺)라는 중국 비구니 조정사찰(尼衆祖庭) 이 있었다. 과거 북위의 효문제 손녀 영태공주가 출가하여 비구 니스님이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절이 깨끗하고 참 좋았 다. * 아줌마와 조폭의 공통점
1. 검정옷을 입는다. 2. 칼을 사용한다.
3. 형님이라 부른다. 4. 떼로 몰려 다닌다.
5. 문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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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사신과 이인(異人)
고려시대, 중국 사신이 고려를 찾아왔다. 소문에 고려는 예의바른 나라이니 반드시 특별한 이인(異人)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성 시내를 걸어가는데 키가 큰 거인을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중국 사신은 "저 사람이 내가 찾는 이인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먼저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거인은 사신을 한참 보더니 손으로 네모를 그려서 보여 주었다. 사신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거인은 손가락 다섯 개를 보이며 응답을 주었다. 사신은 옷을 들어 보였더니, 거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르켰다. 사신은 왕궁으로 급히 돌아와 고려의 재상에게 오늘 거리에서 만난 키가 큰 이인(異人)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개성 시내를 걸어가는데 키가 큰 거구의 이인(異人) 있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먼저 내가 손을 들어 우주와 하늘은 둥글다라고 하면서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려보였더니, 거인은 손으로 네모를 보이면서 땅은 네모라고 응수 하였다. 그래서 내가 손가락을 세 개 보이면서 그 속에는 天 地 人 삼재(三才)가 있다라고 하자 거인은 손가락 5개를 보이면서 五常, 五倫(仁義禮智信)도 있다라고 응답을 하였지요. 내가 옷을 들어 보이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표현하자 거인은 입을 가르키면서 말세에는 구설(口舌)로서 천하를 다스립니다 하였습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 이 정도라면 사대부나 벼슬하는 재상들은 얼마나 학덕이 높겠습니까" 하였다.
왕실의 재상은 거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거인을 왕실로 데리고 오게 하였다. 그리고 푸짐한 예물을 주고 은근히 물었다.
"중국 사신이 길에서 나를 보더니 호떡이 먹고 싶은는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습니다. 나는 네모를 그려 보이면서 인절미를 먹고 싶다고 했지요 중국 사신은 손가락 세 개를 보이면서 나는 하루 세끼를 먹는다고 해서 나는 다섯 번 먹는다고 손가락을 다섯 개 펴 보였어요 그리고 중국 사신은 옷에 관심이 있다고 손으로 옷을 가르켰어요 그런데 나는 입에 먹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입을 가르켰답니다.”
4. 달마동(達磨洞)
소림사 절에서 달마동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1시간 남짓 소요된다. 가다가 중간에 초조암(初祖庵)도 있다. 달마동에 올라가면 굴안 뒷면에 동래조적(東來肇跡 동쪽으로 오셔서 족적을 남긴유적)의 한문이 각인 되어 있고, 이곳에서 그 유명한 단비구법(斷臂求法)과 안심법문(安心法門)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2조 혜가가 일주일 동안 눈 속에 서서 기다리다가 자신의 왼팔을 잘라 불법의 이치를 구했다는 역사적 현장이다. 혜가는 원래 도교사람인데 신광이라 했다. 8년간 장좌불와하고 32세에 달마를 찾았다.
어느날 혜가는 달마에게 묻는다 <저의 마음이 불안 합니다 저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십시요> <너의 마음을 가져 오너라 그러면 내가 안정 시켜 주리라><아무리 찾아도 저의 마음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의 마음이 안정 되었느니라> 이것이 안심법문이다
달마대사는 이곳에서 벽을 바라보고 9년을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를 벽관바라문이라 불렀다. 왜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을까?
5. 소림사 (禪宗祖庭寺刹)
중국 선종의 초조는 보리달마대사이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불교에 입문하여 마하 가섭으로부터 내려온 선법의 28대 조사가 되었다. 달마대사는 3년간 향해하여 (520-525)에 중국 광동성 광주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무제(464-549)를 만나고 서로 불교의 심의를 나누었다. 양무제는 자신이 지금까지 행한 여러 가지 공덕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몰인정하게 공덕이 없다고 <무공덕>이라 하였다. 어의가 없었던 양무제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달마대사는 대답한다. <확연무성廓然無聖 텅 비워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텅 비워져서 본래부터 성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이다. 즉 불사선 불사악이다 본래 청정한 그 자리는 시비분별망념이 끊어진 곳이다. <그럼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하니 <나도 모르오 불식不識>이라 했다. 인도의 라즈니쉬는 달마의 <불식不識>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답이라고 하였다. 달마대사는 무공덕 확연무성 불식으로 대변된다.
소림사 사찰에는 <입설정立雪亭>이라는 전각이 있다. 전각의 좌우 주련에는 단비구법 입설인(斷臂求法 立雪人 눈속에 서서 팔을 잘라 바치면서 법을 구한 사람)과 선종조정 천축승(禪宗祖庭 天竺僧) 선종의 1대조사 인도에서 온 스님이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법당안에는 초조에서 5조까지 모셔져 있고 조사상 위에는 청나라 강희제친필 설인심주(雪印心珠 눈속에 붉게 찍은 마음 도장)의 편액이 걸려 있다.
무비림(無臂林)은 팔없는 수행자로 부르면서 달마의 제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중국스님들이 합장할 때 오른손만 가지고 합장한다. 그것은 왼손이 없다는 표식이다. 무비림 선수행자들의 합장법이다.
달마의 안심법문은 나중에 마조도일에 오면 심지법문(心地法門)으로 발전한다.
서방성인전(西方聖人殿)
달마대사를 모신 전각을 서방성인전이라 한다.
이 곳은 스님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수련장이다. 그래인지 바닥이 움푹패여있다.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은 달마대사가 저술한 책인데 스님들이 좌선수행을 오래 하면 몸이 굳어지는데 이것을 유연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고 또 굶주린 도적들이 소림사를 찾아와 스님들의 식량을 뺏어가는 일이 종종 발생 하였다. 이것을 본 달마대사는 역근경을 만들어 스님들의 건강을 되찾고 떼강도를 좇아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는 것이리라 일설에는 이조 혜가대사의 왼팔이 없는것도 모두 도적들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도적들이 왔는데 사찰의 공양물을 보호하고자 대신에 자신의 팔을 잘라 주었다고 한다. 서방성인전에는 선무벽화도 그려져 있다.
소림사 관음전에는 당나라 당태종 이세민을 구출한 것을 소림사스님들을 그리고 있다. 이세민이 황제가 되기전, 낙양을 순시하는데 지방의 군벌들에게 발각되어 포위 당했다. 옆을 지나가던 곤(棍)을 든 소림사 스님 13명이 봉술이 발휘하여 포위군을 격파하고 탈출하게 하였다. 이세민은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무사히 빠져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영화로 만들어져 이연걸의 일명 제트리의 소림사 1,2,3편까지 나왔다.
대만에서 만든 달마대사 영화도 있다. 달마대사를 새롭게 해석한 영화이다. 그 영화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를런지......
달마대사의 시적지 웅이산 공상사 (達摩大師 示寂地 熊耳山 空相寺)이다. <형상이 공한 절>이 공상사이다. 달마는 혜가에게 전법하고 537년 웅이산 공상사에서 입적하셨다. 나중에 양무제의 사신 송운(松雲)이 파미르고원을 넘을 때 달마를 만나다. 달마는 송운에게 돌아가면 이미 황제는 죽었을 거이야 웅이산에 나의 관을 살펴보게
돌아와 보니 황제는 2년전에 죽었고 관에는 짚신 한짝만 놓여 있었다. 원오극근의 茶禪一致, 백장해회의 農禪一致, 소림사의 拳禪一致를 삼사일치(三事一致)라 한다.
6. 초조암(初祖庵)
초조암의 법당안에는 한 가운데 달마대사 좌우에는 2조 혜가와 3조승찬이 협시로 있다. 법당 마당에는 6조혜능이 직접 심었다는 측백나무 고목이 우뚝 서있다. 수령이 1300년이 된다.
송나라 황정견이 쓴 글을 풀이하면
달마구년수일칙어 직지여금제방잠거
達磨九年垂一則語 直至如今諸方賺擧(속일 잠)
소림굴에서 달마대사 9년 면벽하면서 한마디 하신 말씀이여
아직까지도 제방의 선원을 속이고 있구나
이 무슨 말인가?
안심법문을 듣고 과연 혜가는 안심이 되었는가? 그러면 안심 법문을 들은 그대와 나는 안심 되었는가 우리는 혜가처럼 팔을 끊을 용기가 있는가 안심되었다고 착각하지 말라 달마는 애초부터 안심시켜 주지 않았다. 안심은 본래부터 없었다. 안심할 그 무엇이 본래 없는 것이다. 공산무인空山無人수유화개水流花開 아무도 없는 산속에 물은 흐르고 꽃은 피더라
7. 이조암(二祖庵)
이조암은 소림사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다.
경내 들어서면 사미정(四味井)이라는 우물이 4개 있다. 쓴맛, 단맛, 신맛, 매운맛이 난단다. 그런데 물을 먹어보니 나의 입맛에는 모두 비슷한 것 같았다. 어째든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다 혜가대사가 이곳에 와서 수행을 하는데 물이 부족했다. 스승 달마대사가 와서 석장(錫杖.....긴 막대기 끝에 쇠고리를 댄 지팡이가 석장(錫杖)이다. 쇠고리가 몇 개인가에 따라 사환장·육환장·십이환장 등으로도 불린다. 고리는 석장이 흔들릴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다. 수행자가 석장을 짚고 걸어갈 때 소리가 나면 기어다니는 미물들이 물러나 살생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으로 땅을 치니 물이 솟아났다. 그래서 탁석천(卓錫泉)이라한다.
이조암에서 1키로쯤 가면 이조 연마대(二祖 煉魔臺)가 있다. 사방 6미터나 되는 큰 바위이다. 서쪽으로 천길 낭떨어지기이다. 위험 표지판이 있지만 조심해야한다. 아득한 절벽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혜가대사는 달마에게 팔을 잘라 바친 후 이곳으로 옮겨와 몸을 치료하면서 심신을 수행 했다고 전한다. 이곳을 멱심대覓心臺 양비대養臂臺라고 한다. (자른 팔을 양생 시킨곳...양비대)
혜가스님은 중국 낙양 무뢰 사람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신광(神光)이다. 신광은 출가 전부터 많은 책을 두루 읽어 학덕이 뛰어난데다, 출가 후에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했고
32세부터는 향산에 돌아와 8년 동안 좌선했다.
그리하여 자주 오묘한 이치를 이야기 하였으나, 마음의 편안함을 얻지는 못하였다.
신광이 하루는 탄식해 말하기를
『유교·도교의 가르침은 법도가 여리고 깊은 이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근자에 멀리서 오신 덕 높은 스님이 소림굴에 계시다 하니,
그 분을 찾아가 물으면 의심한 바가 풀려 깊은 진리를 얻으리라』
하고 달마대사를 찾아갔다.그때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벽을 향하고 앉아서 전법할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광은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겠다는 일념에서 조석으로 달마대사를 친견하러 나아갔으나,
스님은 항상 벽을 향하고 계셔서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광은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고 계속 토굴 앞에 머물면서 스스로 자책했다.
『옛 사람은 도를 구하기 위하여 혈맥을 잘라 굶주려 죽어가는 이를 구하였고, 낭떠러지에서 몸을 날려 굶주린 호랑이를 살려 주었다.
옛날에도 오히려 이같이 하였거늘 나는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그날 밤 하늘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광은 날이 밝아 쌓인 눈이 허리를 넘을 때까지 돌장승처럼 서 있었다.
달마대사는 그때서야 눈 속에 서있는 신광을 보고
저으기 놀라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가 눈 속에 오래 서서 뭘 구하려고 하느냐?』
달마대사의 물음에 신광은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감로문을 열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소서.』
이에 달마대사는 신광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모든 부처님의 위 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에 정진하여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 이룬 것인데, 어찌 적은 덕과 지혜로서 그리고 경박하고 오만한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구하려고 하는가 ? 한갓 수고로움만 더하여 괴로울 뿐 이다.』이 말을 들은 신광은 홀연히 허리에 차고 있던
섬뜩한 패도(칼)를 들어 자기의 오른 팔을 잘랐다.
이때 떨어진 팔을 때 아니게 피어난 파초 한 잎이 받아 들었다.
신광의 이같이 열렬한 구도의 마음으로 보고 그가 불도를 수행할 만한 큰 그릇임을 안 달마대사는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도를 구할 때에도 법을 위하여 몸을 잊었는데, 네가 지금 팔을 끊어 내 앞에 내놓았으니 구함이 있으리라』
하신 후 곧 입문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제자로 삼았다.
그러자 혜가의 오른 팔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붙였다.
혜가가 스님께 여쭈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가르쳐 주소서.』
스님이 대답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은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혜가가 다시 물었다.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
이에 달마대사는 중대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 너를 위해 편안케 해 주마.』
그로부터 혜가는 물도 긷고 나무도 하면서 앉거나 눕거나 말할 때나 움직일 때마다 자기의 마음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혜가가 이렇듯 피나는 정진의 6년 만에
홀연히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본래 빈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뚜렷이 깨달았음을 보일 수 있게 되자
혜가가 달마대사와 다음과 같이 문답하였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끝내 찾을 수가 없습니 다.』
『내 너를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한 것이 끝났 다.』
이렇게 해서 혜가스님은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부촉받아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되었다.
혜가스님은 552년 제자 승찬(僧璨)에게 법을 전하고
34년 동안 업도에 머물면서 설법하다가,
뒤에 관성현 광구사에서 <열반경>을 강하여 많은 사람들을 깨닫게 하시고 593년에 입적하시니 세수 107세였다.
8. 삼조암(三祖庵)
➊수박여(誰搏汝)
중국 선종의 제 3조는 승찬스님이다 스님은 나이 40에 출가하였다.
그는 나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낙양에 향산사에 있던 혜가대사를 찾아가 제자가 되고자 했다.
<저는 풍질(나병)이 있습니다 저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십시오>
<죄를 가지고 오너라 내가 씻어 주리라>
<발견 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아미 사면이 되었노라>
3조 승찬대사는 우리에게 수박여(誰搏汝)와 신심명(信心銘)으로 잘 알려진 선사이다. 어느날 제자 도신이 와서 물었다
<해탈법문으로 이 몸의 속박을 풀어 주십시요>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묶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대자유인이다 어찌 또 해탈을 구하느냐>
이것은 3조 승찬이 4조 도신에게 일러준 <속박여>라는 유명한 심지법문(心地法門)이다. 심지법문은 마조도일때부터 시작된 언어이다
나중에 석두선사에게 어느 제자가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수박여(誰搏汝)라 했다.” 또 대주선사에게도 ”“어찌해야 진정한 해탈을 할 수 있습니까”“너는 본래 속박 당한 일이 없으니 해탈을 구할 필요가 없다”
삼조사는 서주 천주산(일명 환공산)에 있다. 삼조사에는 삼조동(三祖洞)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그곳이 수박여(誰搏汝)가 탄생한 곳이다. 삼조동 입구에는 너럭바위가 있고 큰 바위에는 해박석(解搏石)라는 글자를 각인해 놓았다. <속박을 풀어 준 바위>라는 뜻이다.
삼조동 안에는 3조승찬선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➋대국난을 피하다
이조 혜가는 앞으로 법난이 일으날 것을 예언하고 승찬에게 전등전법을 할 때 “앞으로 대국난이 있을테니 행화를 하지말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삼조승찬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낙양에서 이곳 환공산(천주산)으로 내려 왔다.
원래 이 절은 양나라 보지화상(寶誌和尙)이 산곡사(山谷寺)라는 사찰로 최초로 창건되었다. 그러다가 승찬이 이곳에 와서 주석하게 된다. 이곳 삼조사에서 1백 13키로 쯤 가면 사공산에 2조 혜가가 내려와 살았다는 2조사가 있다고 한다.
➌만해 한용운의 <선사의 설법>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줄을 꼬아 단단하게 함)
금강경에는 무유정법이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했다
최고의 진리는 위대한 법은 박제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때 중생의 병통에 따라 활발발하게 활용되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승찬과 도신은 수박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만해스님은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진리인가?
8세기 중엽 당(唐)나라 청원(靑原) 선사의 말로서《경덕전등록》에 있는 글이다.
山是山 水是水 (산시산 수시수)....................정(正)
山是非山 水是非水(산시비산 수시비수).........반(反)
山是山 水是水(산시산 수시수)......................합(合) 변증법
산은 산이요 물은 이라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사랑할 임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목숨을 바쳐서 사랑할 임이 있다면 그 사람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인생이란 답이 없다 다른 말로 인생이란 모든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의상대사는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살았다. 지상이란 형상의 정점이다. 공부를 하든 ,재물을 확충하든, 문화를 창달하든 그 형상의 정점에 이르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출세하기를 바란다. 세속의 부귀영화가 지상이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상>이라는 과제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화엄경은 통만법(通萬法)을 말한다. 만법을 통달하여 그 정상에 이르는 것이 지상사이다. 달마대사의 마지막 입멸지는 공상사(空相寺)이다. 모든 형상은 공한 것이고 궁극적 본질은 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버려라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워라 껍데기에 천착하지 말고 알멩이를 보라 알멩이는 본래 공이다. 공을 체득하라. 달마대사는 공상사에서 입적했다. 공상은 달마의 메시지이다. 지상과 공상은 과연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다. 원래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저 화엄경에 일즉다 다즉일 이라 했으며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했다. 둘은 본래 같다 그래서 불이문이다.
유법지극 귀어무법 有法至極 歸於無法이라 했다. 유법과 무법은 본래 같은 뜻이다.
➍삼조탑
삼조사에는 8면 5층 탑이 있다 삼조탑이라 부른다 높이가 무려 30미터나 된다. 중국의 3무1종의 법난으로 몇 번의 보수가 있었다. 탑의 내부에 계단을 설치하여 올라다닐 수 있는 공심탑(空心塔)인데 1층 입구에 선어록을 새긴 벽비(壁碑)가 있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무상송이다.
불법재세간(佛法在世間) 불리세간각(不離世間覺)
이세멱보리(離世覓菩提) 흡여구토각(恰如求兎角)
불법은 세간에 있으니 깨달음은 세간을 떠나 있지 않는다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면 그것은 토끼뿔을 구함과 같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꿈같고 환영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
그것은 또한 아침 이슬과 같고 번개불 같다.
응당 이와 같이 觀(관)할지어다
➎입화탑(立化塔)
입화탑은 3조승찬이 선채로 입적했다는 열반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불교에서는 앉아서 입적하는 좌탈입망과 서서 입적하는
것이 있다 중국의 방거사 가족도 방거사의 딸이 앉아서 좌탈입망하자 방거사 본인도 딸의 시신을 화장하고 그 자리에서 좌화(座化)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은 밭 농사를 짓다가 서서 입망하고 부인은 어디로 사라져 천화했다고 전한다.
➏ 신심명(信心銘)
3조 승찬이 지은 책이다. 신심명이란 수행승이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글이란 뜻이다. 문둥병을 가지고 찾아가 이 무거운 죄를 사하여주십시오. 내 무거운 죄를 내놓아라.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이미 너의 죄를 사하였다. 바로 이분이 3조 승찬 대사이다. 그리고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고 거의 행적도 알려지지 않지만 단 하나 이 신심명이 선종의 보배 같은 글로 내려온다. 초기 선불교는 간단명료하고 한마디로 폐부를 콕 찌르는 것과 같다. 문자에 의거해서 진리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아야하는 것이다.
지도무난(至道無難):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혐간택(唯嫌揀擇): 오직 간택을 멀리하면 된다.
단막증애(但莫憎愛):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말라.
통연명백(洞然明白): 뻥 뚫려서 명백하다.
호리유차(毫釐有差):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천지현격(天地懸隔): 하늘과 땅 차이다.
욕득현전(欲得現前): 지금 바로 도를 얻고자 하면
막존순역(莫存順逆): 따르거나 거스름이 없어야 한다.
*문수보살게송 쓰디쓴 조롱박은 뿌리까지 쓰고........
삼조사
안휘성 안경시 잠산현에 위치한 천주산
삼조사는 계단식으로 돼 있는 사찰이다. 반야문 정진문 해탈문 세 개의 문 위에 걸린 건원선사(乾元禪寺)라는 현판이 삼조사를 찾는 방문객들을 맨 먼저 맞는다. 이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다보면 삼조선사(三祖禪寺)라는 현판이 걸린 입구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산곡사(山谷寺) 현판을 볼 수 있다.
삼조사의 원래 이름은 산곡사(山谷寺)다. 양무제가 양나라 고승인 보지(寶誌)화상의 요청으로 이곳에 절을 짓고 산곡사라는 현판을 걸었다. 승찬 스님이 산곡사에 머물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00~150년이 지난 뒤다. 산곡사 현판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승찬 스님이 서서 입적했다는 입화탑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보지화상이 참선을 했던 보공동이라는 동굴이 있고, 인근에 바로 승찬 스님이 수행했다는 삼조굴과 묘탑인 삼조탑이 있다. 삼조탑 벽에는 <육조단경>에 나오는 6조 혜능 스님의 ‘무상송(無相頌)’이 새겨져 있다.
당 현종 서주 별가(부지사) 이상후가 승찬 스님의 유골을 다비한 뒤 3백과의 사리를 수습해 이중 1백과는 조정으로 보내고, 1백과는 승찬 스님의 생가에 모시고, 나머지 1백과는 사리함에 넣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삼조탑은 이렇게 승찬 스님의 육신이 묻혀있는 곳이다. 삼조탑에서 우리 일행은 도량 마당에 엎드려 절을 하고 기도를 했다.
몸에 풍질(風疾: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풍질을 앓게 된 저의 죄를 참회케 해 주십시오. 죄를 가져오너라. 죄를 참회케 해 주겠노라. 죄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느니라. 그저 불법승에 의지해 안주하라.
승찬 스님이 2조 혜가 스님을 찾아가 불쑥 물었던 죄를 생각했다. 그때 승찬 스님의 나이가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수명이 길지 않았던 당시,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나병으로 힘든 생활을 했었을 스님의 고통이 느껴졌다. 무슨 죄가 많기에 나병을 앓게 되었느냐며 죄를 참회케 해달라고 했을 때에는 그 병으로 인한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본질적으로 자기성찰이 집요하게 화두로 자리잡았을 터, 혜가 스님을 찾아왔을 때는 절대절명으로 혜가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발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찬 스님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한 때 병으로 고통을 받았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마저 포기했을 때 느껴졌던 절망감. <신심명>을 품고 살며 건강을 추스렸던 지난 시절, 나 역시 얼마나 깊은 고뇌와 발심이 있었던가.
승찬 스님은 혜가 스님을 2년 동안 시봉하며 병도 치유하고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모든 병이 일어난다는 것은 욕심과 욕망 때문이며 그 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여겼던 승찬 스님. 나병이 나은 것은 혜가 스님으로부터 정견(正見)을 얻어 본래 업이 없는 이치를 알게 된 때문이다.
우리네 인간사를 떠올려본다. 병의 근원은 정신에서 오는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본래 없는 자리로 돌아가는 근본을 아는 것이니, 선의 생명은 일정한 틀이 없는 것이다. 종교의 진정한 생(生)의 열기는 사상적 새 삶의 활로이며, 그것은 연기적 삶 그대로 신선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런 가르침을 담고 있는 조사선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법이라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법의 바탕에는 사람이 어떻게살아야 하는가가 함축돼 있다. 사람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그리고 사람의 본래자리는 해탈돼 있음을 그 옛날 혜가 스님과 승찬 스님은 말한 것이다.
승찬 스님이 수행정진했다는 삼조굴에 들어서니 승찬 스님의 영정이 눈에 들어왔다. 승찬 스님은 많은 행화(포교)를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승찬 스님은 본래 나병을 앓아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어 적두찬(赤頭瓚)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삼조사 기록에는 승찬 스님이 거의 동굴에서 살았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나병으로 인해 변해버린 외모가 포교보다는 선 수행에 매진케 한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삼조굴 바로 앞에는 해박석(解縛石)이라고 음각하고 빨간색으로 페인트칠을 해놓은 널따랗고 평평한 바위가 누워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속박을 풀어준 바위라는 뜻인데, 이곳이 바로 승찬 스님과 승찬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4조 도신 스님(580~651)이 선문답을 주고받은 곳이다.
청하옵건데 해탈법문으로 이 몸의 속박을 풀어주시옵소서.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는가? 저를 묶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자유롭다. 그런데 어찌해 해탈을 구하고 있단 말이냐. 인간 존재의 밑바탕인 자성(自性)은 본래 속박된 일이 없다는 절대적인 자유를 말한 그 유명한 수박여(誰縛汝)라는 화두가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우리의 본래 자리는 속박된 적이 없으니 해탈을 구할 필요조차 없이 자성 그대로가 해탈이요 부처임을 일깨워 준 안심법문이다.
삼조사는 꽤 조용하고 깨끗했다. 이곳에는 스님이 20여 명 가량 있다고 한다. 마침 마당을 쓸고 있는 스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이곳 스님들은 승찬 스님의 법을 잇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향객(香客:신도)과 관광객들에게 승찬 스님에 대해 설명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승찬 스님을 추모하는 의식과 행사도 연다. 이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신심명(信心銘)>이다. 이곳 스님들은 모두가 <신심명> 이야기를 한다. 내게도 <신심명> 책 한 권을 건넸다. 삼조사에서는 승찬 스님은 <신심명>이고 <신심명>은 곧 승찬 스님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至道無難)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但莫憎愛) 통연히 명백하리라(洞然明白) <신심명>은 4언절구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어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지극한 도는 본래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볼 수 없는 것은 간택을 했기 때문이다.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이름을 붙이는데서 시비가 생기고 스스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간택심과 분별심을 버려라. 그러면 본래 그대로다. <신심명>이 말하는 본래자성이야말로 수행자가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찾아야 할 좌우명이다.
승찬 스님은 선 채로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입화탑(立化塔) 앞에 서니 승찬 스님의 체취가 느껴진다. 승찬 스님은 이 나무 밑에서 대중설법을 마치고 나서 합장한 채 서서 입적했다. 원만구족하지 못한 형상 때문에 사람들에게 드러나 포교하기가 쉽지 않아, 은자로서 정적인 삶을 사셨다고 전해진다. ‘스님은 정적인 삶 속에서도 항상 동적인 삶을 함께 갖춘 중도의 정신을 보이려고 서서 입적하지 않으셨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입화탑에는 승찬 스님의 그런 인간적인 고뇌와 그 고뇌를 법으로 승화시킨 원력이 담겨 있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9. 풍전한(風轉漢) 선사
선수행을 하는 선사들의 선어록을 읽어보면 일반인에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나온다. 멱살을 잡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술을 먹거나, 남의 물건을 없애 버러거나, 불상을 태우거나, 심지어 칼로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퀘스천 마크(?)를 가지고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봐 보면 위대한 반전이 나온다.
선사들은 기존 관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막으려고 기행(奇行) 역설, 모순, 난센스등을 즐겨 활용한다. 따라서 선사가 활용하는 언어나 행동은 개념성이 없는 일종의 부르짖음이며, 감탄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의 진주보화선사이다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대략 9세기 임제의현의 사숙이라는 정도이다. 그의 행화(行化)는 임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보화선사는 밤이되면 묘지에 가서 자고 낮이면 거리에 나와 석장에 방울을 흔들면서
거리를 다녔다. 사람들은 보화선사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보화선사는 사람들에게 새옷을 한 벌 얻어입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삼을 만들어 드렸다. 그러나 그 옷이 아니라고 했다. 임제스님은 사중을 관리하는 원주스님에게 관(棺)을 하나 준비하라 일렀다. "임제가 과연 나의 심정을 아는구나."
하시고 곧바로 그것을 짊어지고 시내 사거리로 나가서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셨다. "임제가 나에게 직철을 만들어 주었으니, 내가 동문(東門)에 가서 열반하리라."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미친 스님 열반하는 모습 좀 보자." 며 다투어 동문으로 몰려가서 기다렸다. 종일토록 기다려도 존자께서는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더니, 저녁 무렵에야 관을 짊어지고 오셔서 말씀하셨다. "오늘은 일진(日辰)이 나쁘니 내일 남문(南門)에 가서 열반에 들리라."그 이튿날, 사람들이 다시 남문에 모였는데도 존자께서는 열반에 드시지 않았다. 또 그 다음날에 서문(西門)에서 열반 하시겠다고 하셔서 사람들이 몰려갔으나, 그 날도 역시 허탕이었다. 그러고는 다음날에 다시 북문(北門)에서 열반하시겠다고 선언하셨지만, 삼 일 동안을 계속 이와 같이 하셨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았다.그리하여 나흘째 되는 날, 북문에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보화존자께서는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혼자 스스로 관 속에 들어가셔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관 뚜껑에 못을 쳐달라고 부탁하셨다.
그 사람이 못을 쳐서 관을 봉(封)해 드리고는 성내(城內)에 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니, 소문이 삽시간에 번져, 사람들이 다투어 북문으로 몰려갔다. 보화 존자께서는 이미 열반에 드셔서 몸뚱이는 관 속에 벗어놓으셨는데, 공중에서는 일생 흔들고 다니셨던 그 요령소리와 함께 당신이 입으로 부르는 게송이 들려 왔다.
明頭來明頭打(명두래명두타)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으로 치고
暗頭來暗頭打(암두래암두타)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으로 치고
四方八面來旋風打(사방팔면래선풍타)사방팔면에서 오면 회오리바람으로 치고
虛空裏來連架打(허공리래연가타) 허공 속에서 오면 도리깨로 친다
선가에서는 진주보화선사 같은 분을 풍전한(風轉漢......황벽희운 선사가 임제의현 선사를 풍전한이라고 불렀다. 풍전한이란 상식이 없는 사람 뜻)이라 했다. 또는 풍전(風轉), 반광(伴光)이라 한다. 풍전한이 되려면 창의성과 적극성을 요구한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는 이런 것을 유구한다. 지금까지 기술산업시대는 순종(위계질서), 단합, 근면이 발전이 중요한 밑바탕이 되어 왔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빌 게이츠가 보여 주듯이 창의성, 자율성 다양성이 두루 있어야 한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시대 가장 큰 위험은 괴짜가 되겠다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인도의 라즈니쉬는 “나는 미친 사람이다. 심한 편은 아니지만 살짝 미쳤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풍전한 같은 풍광(風光)은 선의 기초를 이루는 주춧돌이다. 속은 멀쩡하면서 미친척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탁월한 정신에는 다소 광기가 섞여 있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나 풍전한의 흉내를 내면 안된다. 한암스님도 그런 의미에서 진주보화선사는 풍전한의 원조라 할 수 있다.
10. 사조사(四祖寺)
사조사(四祖寺)는 4조 도신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산문전(山門殿)에 ‘사조정각선사(四祖正覺禪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호북성 황강시 황매현 현정부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5km쯤 떨어진 쌍봉산 자락에 있다. 사조사의 원래 이름은 산문전 현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각사(正覺寺)’였다고 한다. 산 이름을 따 쌍봉사(雙峰寺)로도, 한때는 유거사(幽居寺)로도 불렸다고 한다.
도신 스님은 일곱 살에 출가했다. 열네 살 때인 수 문제 개황 13년(593)에 서주 환공산에서 3조 승찬(僧璨, ?~606) 스님에게 불법을 배웠다. 개황 20년(600)년 무렵 승찬 스님은 도신 스님에게 의발(衣鉢)을 전한 뒤 광동성 나부산에 은거했다.
스승과 헤어진 도신 스님은 수 양제 대업(605~618) 연간에 강서성 길주에 머물다가, 호남성 형산과 강서성 여산 대림사를 거쳐 당 고조 무덕 7년(624)에 이곳 쌍봉산에 들어왔다고 한다.
도신 스님이 쌍봉산에 터를 잡게 된 설화는 자못 신이롭다. 절터를 찾던 도신 스님이 쌍봉산의 상서로운 기운에 이끌려 며칠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노인이 다가와 사연을 물었다. 스님이 “가사 한 벌 놓을 만한 땅에 절을 짓고자 한다”고 말하니, 그 노인이 “기꺼이 시주하겠노라” 약속했다 한다. 노인의 말을 들은 도신 스님이 가사 한 벌을 던졌는데, 가사가 덮은 땅이 사방 십리였다고 한다.
그렇게 쌍봉산 자락에 사조사를 세운 도신 스님은 이곳에서 동산법문을 개창하고 30여 년간 후학들을 제접했다고 한다. 당시 스님을 따르는 이가 5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신 스님은 이곳에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참선 수행을 병행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가풍을 세웠다. 훗날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 스님이 내세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청규도 기실 백수십 년 전에 이미 도신 스님이 제창한 것이다. 스님은 평소 “좌선에 힘쓰되 15년은 일해야 한 사람의 먹거리를 얻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스님에게서 시작돼 홍인 스님에게서 꽃피운 동산법문은 선(禪) 사상과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규범을 체계화한, 중국 선종에서 처음 나타난 교단이라 한다.
도신 스님은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산과 들로 다니며 약초를 캐고 직접 맛을 본 후 그 효능과 용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의서가 《초목집성(草木集成)》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이시진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지을 때 민간에 전하던 도신 스님의 약초 표본을 참고했다고 한다.
이름이 높아지자 당 태종이 네 차례나 불렀으나 스님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당 고종 영휘 2년(651) 스님은 홍인 스님에게 의발을 전하고 입적했다. 이후 당 대종은 스님에게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諡號)와 자운(慈雲)이라는 탑호를 내렸다고 한다.
도신 스님이 창건한 사조사는 번창했으나 청 함풍 4년(1854)년에 전쟁으로 파괴되고, 광서제(1875~1908) 때 복구됐다가 다시 피해를 입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옛 건축물은 당대에 건립된 비로탑(毘盧塔)과 송대에 건립된 노반정(魯班亭, 일명 衆生塔), 의발탑(衣鉢塔), 원대에 건립된 영윤교(靈潤橋), 청대에 중건된 사조전(四祖殿), 자운각(慈云閣) 정도라고 한다.
사조사가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은 본환(本煥) 스님에 의해서다. 스님은 1995년부터 5년 동안 천왕전, 대불전, 관음전, 지장전, 화엄전, 조당, 장경루, 종고루 등 30여 개 전각을 복원했다고 한다.
2003년에는 정혜 스님이 방장 소임을 맡아 4조 도신 스님의 행화 도량에 걸맞게 선 수행 사찰로 사격을 일신시켰다. 스님은 선문화잡지 <정각>을 발행하고, 신도와 청년 불자들을 대상으로 좌선 모임, 여름 캠프 등 행사를 개최하는 등 선불교 중흥에 앞장섰다. 정혜 스님은 입적했지만 스님의 노력은 지금도 이어져 산문전 오른편 자운각에서는 재가선방인 ‘쌍봉선당(雙峰禪堂)’이 운영되고 있다.
대웅보전에 들러 예를 올린 순례단은 방장 명기 스님의 안내를 받아 대웅전 뒤편 벽면으로 향했다. 그곳엔 액자 형태의 사조사 역대 법맥도가 걸려 있는데, 명기 스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신라법랑(新羅法朗)’이라는 글자가 뚜렸했다. 도신 스님의 상수 제자 중 한 분인 법랑(法郞, 생몰년 미상) 스님이다.
법랑 스님은 신라에 처음으로 선을 들여온 분이다. 생애와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인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 스님의 비에 법랑 스님이 도신 스님에게서 법을 배우고 돌아와 귀국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신행 스님은 스승이 입적하자 당 유학길에 올라 북종 신수 스님의 제자인 보적(普寂) 스님의 문인 지공(志空) 스님에게 가서 3년 동안 공부하고 법을 이었다. 신행 스님의 법맥은 다시 준범, 혜은 등으로 이어져 9세기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으로 결실을 맺는다.
대웅보전에서 벗어난 순례단은 사조전으로 향했다. 도신 스님의 등신상이 모셔진 전각이다. ‘자비의 구름이 되어 지혜의 비를 뿌렸다’는 뜻의 ‘자운혜우(慈雲慧雨)’ 자수가 등신상 앞에 드리워져 있다. 도신 스님의 덕화를 상징하는 글귀다.
현재 사조사에는 30여 명의 대중 스님이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또 산내 암자에는 50여 명의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사조사 방장 명기 스님은 이곳에 2020년까지 초조 달마대사부터 육조 혜능 스님까지 6대 조사를 모시는 53m 탑을 조성할 계획이다. 쌍봉산 산내에는 이밖에 도신 스님이 오조 홍인 스님에게 법을 전했다는 전법동(傳法洞)과 도신 스님의 진신을 모셨다는 비로탑, 도신 스님의 의발을 모셨다는 의발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참배의 연은 닿지 않았다. 비로탑은 높이 11m의 정방형의 전탑으로 당나라 때에 조성된 것이다. 이 탑 안에는 도신 스님 진신상과 함께 신라 법랑 스님의 상도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한다.
5조사
홍인대사 _ 오조사, 대만보탑
"오직 법을 볼 뿐 사람은 보지 않는다"
"5조 홍인스님께 지심귀명례 하옵니다. 당신의 철저한 법에 참배하고자 당신의 후손 한국의 선원장들이 지금 이렇게 오조사에 왔습니다." 6조 혜능스님이 방아를 찧으며 처절한 수행을 하던 곳, 오조사. 법에 의지할뿐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부처님 사상이 그대로 실현되었던 5조 홍인 스님 행화도량이다.
혜능은 변방에서 온 아직 계도 받지 않은 행자이며 신수는 황제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학식과 인품이 훌륭하고 인물마저 훤칠해서 수많은 대중들이 떠받드는 상수제자다.
더구나 혜능은 20대의 청년이고 신수는 50대의 비구다. 만일 당신이 천여명 대중을 거느린 방장스님이라면 과연 전자를 후계자로 선택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첨단과 파격이 당연시되는 현대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1천 4백여년전에 홍인(弘忍, 601~ 674) 조사는 그러한 선택을 했다. 1천여명 넘는 제자중 1좌를 차지하고 있던 신수(神秀, 606~ 706) 스님을 제치고 갓 입문한 행자 혜능에게 법을 전해주었다. 그 선택은 인류에게 크나큰 공헌을 하게 됐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은 5조다운 결정이다. 오직 법을 볼 뿐 사람은 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퍼온글입니다)
일광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