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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고 하니 소경
본문<요9:30~41>
<9:30-34>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오늘은 요한복음 9장의 3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낫게 하시는 내용이었지요. 주님의 침은 ㅎ님의 생기인 진리의 말씀을 의미하고 흙은 죄로 죽은 인생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도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을 모르고 살아들 갑니다.
그러나 택한 자에게 때가 차서 주님이 오시면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을 깨닫게 하셔서 IX를 믿게 하심으로 죄사함이라는 용서의 세계로 끌어드려 ㅎ님의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율법적 행함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오직 ㅎ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구원입니다. 구원에 있어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정성은 일체 필요가 없기에 기쁜 소식, 복음인 것이지요.
우편 강도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무슨 선한 일이라도 했습니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온갖 악한 짓을 저질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회개의 영이 부어지자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어, 그간에 저질러온 죄악으로 인해 마땅히 죽을 자임을 토로하면서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아니, 자신과 함께 옆에서 죽어가는 나약한 예수를 보고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합니까? 그의 영안이 열려져서 예수가 메시야임을 보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 우편강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냥 건성으로 ‘ㅎ님은 사랑이시니까 용서하신다고 써있겠지’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면서 내심은 ‘나는 저 친구보다는 낫지, 그래도 수십 년을 교회 다녔고 쪼들리는 생활에도 불구하고 헌금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으니 내가 그래도 낫지..’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나 자기 행함에 일말이라도 의미를 갖는다면.. 모든 생각이 꽝입니다(틀렸다는 말임)
우편 강도가 바로 우리 모두라는 고발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그저 죄와 심판의 대상이라고 폭로합니다. 죄로 죽어 있는 자가 무슨 선을 행하고 반듯한 삶을 살며 또한 그가 행한 것들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삶을 산다한들, 그게 공로가 되어 자신의 태산 같은 죄를 없이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율법의 의가 자랑이 되어 자신을 우월한 자로 내세우게 되니 교만 죄가 더해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행위는 죄를 없애는 게 아니라 겉만 포장하는 회칠한 무덤만 만들어 갈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편 강도처럼 악행만 저지르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 행운이 복 터진 자들입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도 나를 자랑할 건덕지가 1도 없는 자들이니 누구에게 위세를 떨며 갑질할 수가 없는 처지들입니다. 그래서 이웃에게도 ㅎ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며 감사와 찬양만 해야하는 자들이지요.
지금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심경이 그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눈을 떠 보니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놀라운 세상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고함과 냉랭함으로 무장된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시비를 겁니까? ...(24절을 읽고)
‘이봐, 너를 눈뜨게 한 분은 ㅎ님이지, 저 예수가 아니야, 그러니 ㅎ님께 영광을 돌려, 저 사람은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이야’ 라고 회유합니다. 그러자 방금 읽은 30~32절과 같이 놀라운 대답을 하게 되지요. ‘아니, 이분이 죄인이라고? 그게 말이나 되나?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창세 이후로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인데 이게 죄인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눈을 뜬 장본인이야, 이 분은 ㅎ님께로서 오신 게 확실하다“고 반격합니다.
그러자 그의 말에 분기탱천한 바리새인들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라고 말하며 그를 출교시켜 버립니다. ‘출교’를 당한 사람은 이방인으로 취급 받아야 했습니다. 직업도 가질 수 없고 다른 유대인과의 사고파는 행위나 식사, 교제가 전면 금지 됩니다. 즉 유대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로 인해 눈이 열린 자가 되었지만 그 대가로 유대사회에서 퇴출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로 인해 눈이 열린 자들 즉 예수의 제자된 자들의 이 땅에서의 운명입니다. 예수 믿으면 육신적으로 좋은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 세상의 정신사조와 배치되는 이질적인 영이기 때문입니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과 복음은 원수지간)
바울의 예를 보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대제사장의 신임을 받아 예수 믿는 자들을 추적하는 추노꾼의 선봉장이 되어 출세가 보장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행복 끝, 고난 시작’이 전개 됩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그간의 모든 율법적 행함이 썩은 내나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 후, 오직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복음에 목숨을 건 자가 됩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쟁이 벌어집니다. 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전도의 대상이었는데, 율법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라 IX를 믿어야 구원이라고 하니, 이단으로 몰려서 사선을 넘나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고후1:8절을 보면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져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증언하기도 합니다.
고후11장에서는 더 적나라하게 고난을 기술하는데, 40에 하나 감한 매 곤장을 5번 맞았고(율법에 죄인을 40대를 치라고 명시함. 그런데 치는 자가 행여나 숫자를 잘못 헤아려 41대를 치면 자기가 죄를 범하니 한 대 감하여 치는 전통..결국 유대인들에게 고난 받음), 3번 태장으로 맞고(가죽에 쇠붙이 달린 채찍), 1번은 돌로 맞고(죽은 줄 알고 버려짐), 3번 파선 1주야를 흑암 속에서 보냄(배가 난파 당하여 일주야를 죽을 고비 겨우 넘김), 수 없이 감옥에 갇히기도 함..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까요?(네가 죄인임을 깨달으라고..무가치함 자/십자가가 마땅) -예수 믿으면 일취월장 형통하고 행복할 거라고 착각 마시라..(죄인이기에 고난이 옴)
그가 복음을 설파하는 롬1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ㅎ님의 능력이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복음을 왜 부끄럽다고 하지요? (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이 세상의 영과 충돌하는 영입니다. 이 세상의 정신사조는 ‘뿌린 대로 거둔다’입니다. 선을 뿌리면 선을 거두고, 악을 뿌리면 악을 거둔다는 인과율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릅니다. 우편 강도처럼 자신은 악행만 저질렀는데.., 그래서 지옥이 마땅한데, 천국이 주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처사입니다.
어쩌면 복음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운석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지요.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천상의 물질이 운석 아닙니까?.(부르는 게 값, 천문학적 가치..) 이와 같이 복음은 이 세상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가치체계입니다. 운석처럼 땅에서 생성된 가치체계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의 생명의 법칙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매기는 율법신앙은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복음에 대해 눈이 열리면 하늘의 보석을 가진 자가 됨. 성도는 천문학적 가치의 존재입니다(영생의 복..무엇과도 비교가 안되는..)
그럼에도 복음은 이런 세상에서 말도 안되는 발상이기에 사람들이 비웃게 되지요. 아니 그게 말이나 되냐? 자기가 지은 죄를 자신이 책임지는 게 마땅하지, 왜 너의 죄를 예수가 지고 너는 죄 없다고 하는데?(반발하지요. 믿어지지 않습니다./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님) 아무리 복음의 이치를 설명해도 미친놈 취급하며 귀를 막습니다. 미친놈으로 여기지요. 그래서 예수가 이단의 괴수이고 바울도 이단으로 취급하는 거지요.
이런 개념으로 조성된 바리새인들은 그를 향하여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라고 말합니다.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였기에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난 자’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의 본질적인 문제 즉 그들의 율법주의적 신앙관의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지요. 이것이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율법주의적 신앙관의 중심에는 인간의 행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율법을 잘 지켜서 ㅎ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들의 관념 속에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인간의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둔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이게 세상의 영)
그래서 불행을 당한 어떤 사람을 보면 당연히 율법을 무시한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으로 태어난 이 사람을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즉 너는 버러지 같은 저주 받은 놈으로 여김). 이러한 그들의 오만함이 죄인의 친구로 오셔서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를 무시하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온전히 죄 가운데 태어나 한 번도 율법을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이 자신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즉각 분노하며 그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출교 조치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들의 오만함이 분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성경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칭 율법의 최고 전문가들이라는 자긍심을 생명삼고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근처도 가보지 못한 자가 자신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는 모습에 분노했던 것이지요. 자신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고, 더불어서 ㅎ님도 잘 안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사는 자들이니, ‘나는 아는 자다, 나는 보고 있는 자다’라는 자기 확신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소경이었다가 눈이 열린 자가 하는 말이 옳았습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자는 없었습니다. 율법의 ‘율’자도 모르는 이 사람도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가 ㅎ님이 보낸 선지자라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칭 율법의 최고 전문가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것조차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오만함이 이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의 오만함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아 보입니다. 이들의 신학 지식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과 오만함은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마치 자신들이 하늘의 모든 지식을 갖고 있는 양 우쭐대며 설교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나 가르침에는 십자가 진리가 실종된 윤리도덕만 강조하는 인본주의 사상에 불과 합니다.
<고후11:4> 읽고~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잘도 용납한다고 개탄스러워 합니다.
다른 예수(오병이어의 예수-복 주고, 병고치고, 문제 해결하는..), 다른 복음(복음은 인간의 죄를 폭로해서 저주와 심판의 대상임을 역설하여 십자가를 붙잡게 하는 건데, 오히려 사람의 가능성을 부추겨서 ㅎ님을 섬기면 복 준다는 거짓 복음을 말함)..이런 게 다른 영(사단의 영)
<고후11:13~15>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단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데, 다 속고 있음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의 성경의 무식함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오만함은 하늘을 찌를 태세입니다. 자신들의 오만함이 자신들의 귀를 닫아 버리고 ㅎ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ㅎ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마23장, 천국 문을 닫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막고 있음)
<요9:35-39>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그 자가 출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를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신 후 그 자리를 떠나셨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계속 주목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 라고 질문하십니다. 그가 “주여 그가 누구입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인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한마디로 인자란 ㅎ님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ㅎ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이지요. 다니엘서를 보면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단7:13-14>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 7장은 인류의 흥망성쇠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본 인자는 하늘에서 오시는 분입니다. 세상을 끝장내는 인자이지요. 다니엘이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부는 겁니다. 그런데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오는 겁니다.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곰 같고, 셋째 짐승은 표범 같고, 넷째 짐승은 머리에 열 뿔이 달린 아주 괴상한 놈이에요. 그런데 그 짐승들은 장차 세상에 일어날 큰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큰 제국들이라는 겁니다. 환상으로 계시를 받는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제국들을 짐승으로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앞서 다니엘서 2장에선 이런 제국을 금 신상으로 보여 주셨어요.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그 발은 철과 진흙하고 섞어 있는 겁니다.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동일한 내용입니다.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기를 정금 머리(사자로 비유) 같은 나라는 ‘바벨론’을 말하고,
가슴과 팔이 은인 나라는(곰으로 비유) ‘메데 바사’를 말하고, 배와 넓적다리의 놋 나라는(표범으로 비유) ‘헬라’를 말하고, 종아리와 다리가 철과 흙인 나라(머리에 열 뿔 달린 괴물로 비유)는 ‘로마’를 말하는 겁니다. 4번째의 무서운 짐승이 비밀(로마 캐톨릭..적그리스도 상징/생략)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이 멸망 받을 짐승의 나라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혀요.
이 때 갑자기 하늘에서 뜨인 돌 하나가 나타나서 신상의 발을 쳐서 박살을 내요. 완전히 망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리곤 그 뜨인 돌이 세상을 끝장내고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는 계시지요.
그 뜨인 돌을 일컬어 다니엘 7장에서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가 만든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인자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이 구원한 백성은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본 그대로 세상 역사 속에 이런 일들이 영적으로 먼저 일어났어요. 2천년 전,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억압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어요.
로마는 세상에 속한 나라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에 속한 자들은 몽땅 저주하시고 하늘에 속한 성도들을 새로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나라가 바로 영적천국입니다. 그러니까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인자로 오셨어요. 뜨인 돌로 오셨다고요. 뭘 하려고 오셨습니까? 육적 이스라엘을 끝장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초림 때는 영적으로 끝장을 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 때는 세상이 완전히 끝장날 것입니다. 마24을 보면, 세상 끝 날에 이르러 인자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인자가 구름타고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인자의 나라를 만드실 것입니다. 구름타고 온다는 것은 묵시가 역사를 침범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땅을 삼킨다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두고 장차 이 세상은 불태워버린다고 했습니다.
(다시 본문) 인자란 ㅎ님의 아들 IX를 지징하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며 예수에게 엎드려 절합니다(주여는 메시야라는 말, 나의 왕이시여,..). 이를 보면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가 눈이 열려 다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그 예수를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9절을 보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이란 성경을 보아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볼 수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신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죄인들, 세리들, 병자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반면에 보는 자들이란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공식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성경을 정식으로 공부해서 성경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알고 이를 행하고 또한 남들에게 이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롬2:19-20절을 보면 “2:19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보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지요, 즉 성경이 무슨 책인지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들이 이러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 비밀을 갖고 있는 자로 생각하며 남들을 가르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소경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심판하러 이 땅에 왔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주제가 바로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을 읽고 이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요9:40-41>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소경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본다고 하니 우리도 소경인가?”라는 말로 예수에 대해 반발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소경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39절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인간의 인식체제는 이 땅에 속한 것에 국한된 인식체제일 뿐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공부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열심히 공부하면 성경에 대해 전문가가 될 것으로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기독교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ㅎ님의 구원의 비밀을 아는 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ㅎ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구원의 비밀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성경을 공부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ㅎ님을 알고 ㅎ님의 구원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진리의 기준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경지식은 예수를 알아보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2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기독교 역시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수 만개의 신학교에서 부지기수의 신학생들과 신학교수들이 밤새워가며 성경을 연구하며 ㅎ님의 구원의 비밀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소경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당시 성경의 최고 전문가이며 천국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자들로 인정받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모두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소경입니다. 성경을 그토록 연구한 자들이 왜 성경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를 보지 못할까요?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소경입니다. 공부로서 안되면 어찌하면 되나요?
ㅎ님의 구원방식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택한 자녀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자신의 죄에 눈이 열리게 하십니다.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보게 하셔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주님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의의 옷을 입히시고 ㅎ님의 진노와 상관이 없는 자들로 세워 놓으십니다.
그래서 복음의 세계에서는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동일한 자들로 만나는 것입니다. 누구는 선생이고 누구는 학생이 있을 수 없는 세계가 교회입니다. 모두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안에서 동일한 가르침을 받는 수혜자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는 오직 ㅎ님의 은혜만이 칭송될 뿐입니다.
성도란 다시 보게 된 자를 말합니다. 자신의 눈을 덮고 있던 신학지식, 기독교 지식, 교회 다닌 세월 속에서 신앙 경륜으로 쌓여진 자기 의의 오만의 비늘을 그 눈에서 씻어낸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입술에서 나올 수 있는 고백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 하나입니다. 이들이 성경을 아는 자이고 ㅎ님을 아는 자이고 ㅎ님의 구원의 비밀을 아는 자입니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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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