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필요할 때’에 싸우는 사람이 부처
고난은 인간을 강하게 합니다.
대난은 신심을 단련시킵니다.
난에 도전하여 신심을 단련하면 나의 '기심(己心)'에 '불계(佛界)'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대난이 덮쳐 와도 '사자왕의 마음'으로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부처가 됩니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佛法)의 진수는 ‘신(信) 즉 성불(成佛)'입니다.
그 ‘신’은 자신과 만인의 불성을 믿는 ‘깊은 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관철하는‘지속의 신’이어야 합니다. 또 어떤 마성도 지지 않는 ‘강인한 신’이 성불하게 합니다.
이 ‘신’ 즉 ‘성불’의 깊은 뜻을 설한 <개목초>의 다음 한 구절은 정말 유명합니다.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弟子)는 제난(諸難)이 있을지라도 의심(疑心)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연(自然)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라. 천(天)의 가호(加護)가 없음을 의심(疑心)하지 말 것이며 현세(現世)가 안온(安穩)하지 않음을 한탄(恨歎)하지 말지어다. 나의 제자에게 조석(朝夕)으로 가르쳐 왔건만 의심을 일으켜서 모두 버렸으리라.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 (어서 234쪽)
어떤 고난에 직면해도 ‘의심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제천의 가호가 없고 현세가 안온하지 않더라도 ‘한탄하는 마음’에 빠지면 안 됩니다.
불퇴의 마음으로 신앙을 관철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신심의 핵심을 밝힌 가장 근본적인 지도이며 영원한 지침입니다.
이번에는 그 구절을 중심으로 니치렌 불법의 신심의 본질을 배우겠습니다.
사제(師弟)의 정수를 밝힌 일절
이 어서의 첫머리에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라고 호소하십니다.
<개목초>에서 니치렌 대성인 자신은 근원악(根源惡)인 방법(謗法)과 싸우는 ‘진실한 법화경 행자’이고, 일본을 법멸(法滅)과 망국(亡國)의 위기에서 구제하는 ‘일본의 기둥’이며, 범부성불을 밝힌 대법을 나타내어 말법 시대 어둠을 영원히 비추는 ‘말법의 본불’이시라고 밝히십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결국은 천도 버리시고 제난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어서 232쪽)라고 각오하시고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안목(眼目)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대선(大船)이 되겠노라.”(어서 232쪽)고 서원(誓願)을 사자후하며 정신의 핵심을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과 비교하면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로 시작하는 구절은 스승이신 대성인의 정신과 호응하는 신심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나의 제자들이여, 스승과 함께 일어서라!”
“사자왕의 자식답게 의심과 한탄을 타파하라!”
“필요한 때에 신심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면 안 된다!”
‘대성인과 함께’라는 스승과 같은 결의로 일어서서 광선유포에 매진하는 이가 진정한 제자입니다.
누구든지 대성인과 같은 마음에 서서 “니치렌의 일문”(어서 1360쪽)이 되었을 때 이미 성불의 길은 널리 열려 있습니다. 그 대도(大道)를 똑바로 걸어가면 ‘자연히’ 성불합니다.
부처가 설한 법은 만인의 생명 속에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밝힙니다.
사람들 가슴속에 그대로 잠들어 있던 ‘불지견(佛知見)’을 열고<開>, 나타내고<示>, 깨닫고<悟>, 들게<入> 한다. 모든 사람을 부처가 되게 해야 부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가 이루어진다고 법화경에서 명확하게 설합니다.
자기와 같이 만인을 ‘위대한 인간’이 되게 하는 실천이 불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어디까지나 스승과 같은 마음으로 투쟁하는 제자를 육성하는 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불교는 ‘사제의 종교’임이 틀림없습니다.
“천도 버리시고 제난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라고 말씀하신 니치렌 대성인의 빛나는 혼의 불길이 모든 문하의 가슴속에 불타오를 때 ‘사제불이의 종교’는 완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라는 호소에 “나의 문하들이여, 이진 삼진으로 뒤따르라.”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 배견됩니다.
불석신명이 사제의 유대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라는 말씀은 배독할 때마다 金文字(금문자)와 같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보통 종교인이라면 “나의 제자들이여”라고 일방적으로 물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성인은 “나와 더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렇다”라고 말씀하시는 마음에 사제일체(師弟一體)의 불법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제를 관통하는 강인한 핵(核)이 ‘불석신명’입니다.
스승인 니치렌 대성인 자신도 또한 법에 대해 ‘불석신명’하셨기 때문에 불법을 만인에게 열어 알리는 민중의 지도자라 할 수 있듯이, 제자도 역시 제자의 차원에서 법을 홍통하기 위해 스승과 똑같이 ‘불석신명’을 실천하여 끝까지 투쟁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르치신 글월이 “처자(妻子)를 가엽게 여기는 고로 현신(現身)으로 헤어짐을 한탄하리라. 다생광겁(多生曠劫) 동안 친근했던 처자와는 마음먹고 헤어졌느뇨, 불도(佛道)로 인(因)해 헤어졌느뇨, 언제나 같은 이별이로다. 자신이 법화경의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영산(靈山)에 가서 도리어 인도할지니라.”(어서 234쪽)입니다.
물론 목숨을 노리는 대난의 와중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군부 세력이 창가교육학회를 탄압할 때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과 함께 투옥된 간부들이 이 성훈을 위배하고 퇴전하여 권력에 굴복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제천·부처·신의 가호가 없다고 해서 절대로 의심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가호가 있습니다. 현세가 안온하지 않다고 한탄하면 안 됩니다.”
참으로 <개목초>의 정수를 담은 내용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신앙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최고의 법을 위해 살며 불석신명으로 투쟁하는 신심에서 생명이 단련되고, 금강불괴(金剛不壞)하는 성불의 경애를 확립할 수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불구자득(不求自得)의 성불
어서에는 난이 많이 일어나도 그것을 인내하고 신심을 관철하면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성불의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테면 ‘불구자득(不求自得: 구하지 않고 스스로 득했도다)’하는 성불입니다.
왜 구하지 않았는데 성불할 수 있는가.
본래 중생의 생명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당체(當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한 신(信)’에 의해 본래 갖추고 있는 묘호렌케쿄의 자재(自在)로운 작용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상에 이 묘호렌게쿄가 자유자재로 작용할 때, 그 생명을 불계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묘법의 무한한 힘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작용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 힘으로 발휘됩니다.
예를 들면 ‘홀로 서는 용기’ ‘인내하는 힘’ ‘고경을 헤쳐 나가는 지혜’ ‘남을 생각하는 자비로운 마음’, 그와 같은 이른바 부처의 생명으로서 설한 것들이 필요한 때에 적절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묘법의 힘을 인간의 힘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묘법의 힘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가 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미혹, 즉 ‘무명(無明)’이라는 점입니다.
‘무명’은 묘법을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無知)를 말합니다. 또 묘법을 모르기 때문에 생명이 방황하다가 충동적인 어두움에 지배당합니다. 이것이 불행을 초래합니다. 모든 불행과 고뇌의 근본에는 이 무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묘법을 알면 이 무명은 즉각 소멸됩니다.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면 묘법이 태양이고 무명은 태양을 가리는 검은 구름과 같습니다.
암운이 걷히면 햇빛이 비추듯 근본적인 미혹을 타파하면 바로 묘법의 힘이 생명에 작용하기 시작하여 각종 공덕과 가치창조 작용이 나타납니다. 그런 형태로 공덕과 가치가 꽃피는 것이 ‘연화(蓮華)의 법(法)’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묘법의 당체이고 본래 불계의 생명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만, 불계는 무명의 암운을 걷어 내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제목만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승려에게 부탁해서 대신 부르게 하는 것은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부르는 사람이 무명을 걷어 내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무명은 마음속에 있는 미혹이므로 이것은 역시 자신의 마음속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信)’을 관철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깨달음을 밝힌 법화경을 근간으로, 대성인이 자기속에서 발견하고 또 그것을 자신이 투쟁하면서 확인하고 실증해 온 묘호렌게쿄라는 근원법의 작용을 우리 생명에 자유자재로 나타내려면, 대성인과 같은 의미에서 ‘부른다(唱)’는 행이 필요합니다. 즉 그 근본에 ‘무명과 투쟁하는 마음’인 ‘신’이 있어야 합니다.
대성인이 넓히신 제목은 이를테면 ‘투쟁의 제목’입니다.
무명은 의심, 불안, 번뇌 등 각종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타파하는 힘은‘신(信)’ 이외에는 없습니다.
대성인은 ‘무의왈신(無疑曰信: 의심이 없음을 신이라 한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원품의 무명을 대치(對治)하는 이검(利劍)은 신(信)의 일자이니라.”(어서 751쪽)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날카로운 검입니다. 마와 투쟁한다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무명과 날카롭게 투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광선유포를 방해하는 마의 세력과 싸웁니다. 이 마와 투쟁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말하면 무명과 벌이는 싸움입니다.
또 인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곤란과 싸우는 것도 그 본질은 무명과 벌이는 싸움입니다.
묘법에 대한 ‘신(信)’, 즉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 ‘반드시 행복해진다’ ‘반드시 광선유포를 실현한다’라는 일념을 잃으면 인생의 곤란에도, 광포 도상의 장마(障魔)에도 지고 맙니다.
이 어서에서 ‘의심하는 마음’에 지면 안 됩니다. ‘한탄하는 마음’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심과 한탄이 바로 무명이 나타난 모습입니다.
(중략)
‘필요한 때’에 무명과의 투쟁을 잊지 마라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고 말씀하시듯이 ‘신’의 일념만이 의심과 한탄 등 무명의 생명을 타파하고 묘호렌게쿄의 역용(力用)을 생명에 나타내는 힘을 지닙니다.
그러나 ‘무명’의 힘도 매우 집요하고 뿌리가 깊습니다. 무명과 진정으로 싸워야 할 때 무명은 우리 마음속에 살면서 다가와 생명을 침해합니다.
그 어리석음을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할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고 훈계하십니다.
강성한 ‘신심’을 일으켜야 할 때 반대로 불신을 품고 의심을 일으켜 퇴전해 버린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이 ‘성불의 때’가 아닌가! 이 대난을 돌파하면 영원히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대성인이 외치는 혼의 울림이 전해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탄하지 않는다. 이런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창가학회의 역사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전 마키구치 선생님이 투옥되셨을 때, 대전 후 재건기에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어려웠을 때, 그리고 종문이 삼류의 강적으로서 악랄한 정체를 드러냈을 때 등, 지금까지 여러 대난에 직면했습니다.
이때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여기에 제자로서, 불법자로서 실직적인 본질이 나타납니다.
“필요한 때”에 투쟁하는 신심에 오직 '불계'가 빛나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이 어서의 한 가지 결론으로 배견할 수 있습니다.
☞ 개목초 강의 - 제16회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 에서
☞ 개목초 강의 - 제16회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 全文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