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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히 4장12-13)
성경본문:히브리서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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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좀처럼 하지 않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던지, 아니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던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만나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라면 너무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리라 생각되는데,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대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순간, 그 사람이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해서 생기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 12절에서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그런데 그 정도가 "두 날을 가진 칼이 예리하게 쪼개는 것처럼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읽다 보니까 의미를 더욱 묵상하게 합니다.
"Indeed,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until it divides, soul from spirit, joints from marrow; it is able to judge the thoughts and intentions of the heart."
그냥 성경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soul from spirit" 그리고 "joints from marrow"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영과 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코에 생기를 넣으셨습니다(창 2:7). 여기에서 생기가 'spirit'입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living soul'이 되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을 넣었더니, 살아 있는 영혼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혼'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의 삶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보게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 관절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수는 관절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수가 없는 관절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주 선명하게, "양날의 검처럼 예리하게" 쪼개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 냄새나는 것과 향기, 선한 일과 악한 일의 기준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적어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곳에 기준이 세워진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해 사람들이 움직이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잘못 믿는다는 것,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이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 앞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세상적인 것과 구별된 것입니다.
존 스토트라는 신학자는 성경에서 사람들을 구별하는 조건으로 사용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독특한 개성이다."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성직자로서 특별하고 여러분은 조금 덜 특별해도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이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함을 받았고, 저는 성직자로서의 독특한 사역을 감당하고, 여러분은 세상에서 독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저는 몇 가지 비전을 봅니다.
1. 복음은 개인과 교회의 삶을 변혁시키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과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복음전도에 대한 비전은 바로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구별하게 됩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17절입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옥한음 목사님이 쓴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에 보면 로렌스 경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평신도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답게 보이는 건물과 그들 보기에 성직자답게 성장한 목사와 평소 몸에 익은 스타일대로 드리는 예배를 원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그들 혼자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어 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니 때로 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가만히 속마음을 보면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갈 때 일어날 변화가 두렵습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되, 아직 변화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킬 때, 그 변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시리라는 것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변화된 한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왜 나에게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 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던 일들이 왜 나에게서는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은 이 땅 위에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 리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때문에 이 세상의 문화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나오게 될 것이고, 나 때문에 이 땅의 경제와 정치를 바꾸어 놓는 한 사람이 나오리라는 믿음이 헌신하게 하고 사역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그 복음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내가 세상에 드러나게 쓰임 받지 않아도 나로 말미암아 쓰임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의 장로가 되고 중직자가 되는 기쁨보다 나로 말미암아 사역자가 나오고, 선교사가 나오고, 목회자가 나오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일들이 얼마나 선하고 귀한 일들이겠습니까?
저는 요즘 "선한 명예욕"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러한 것도 세속적이라면, 아직 버리지 못한 명예욕이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싶습니다.
몇십 년 후에 누군가가 만나교회에서 설교를 듣다가 이런 인생을 살게 되었노라고.
누군가가 TV에서, 인터넷에서 만나교회 예배를 드리며 만났던 하나님 때문에 인생을 이렇게 헌신하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는 그런 꿈을 꿉니다.
아니 그렇게 거창한 꿈은 아니어도 내 자녀에게 내가 복음 전하는 자가 되어서, 우리의 자녀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부모의 삶을 바라보고 사는 그런 복음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일까? 아니, 그것을 위대한 일이라고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2.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전도세미나에서 설교를 하시던 김상현 목사님의 간증이 기억에 남습니다.
목사님이 부산에서 목회를 할 때, 한번은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올라갔는데, 사모님이 아래에서 손짓을 하더랍니다. 느낌이 오기를 아들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와 축도를 마친 다음에 교인들에게 부탁을 했더랍니다.
제발 아들을 찾아달라고 지역을 나누어서 내보냈는데, 차를 타고 아들을 찾다 보니까, 시장에 서서 오뎅을 사 먹고 있는 교인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어떤 교인이 헐레벌떡이며 목사님을 찾아와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아직도 아들을 찾지 못했는데요, 걱정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저녁예배를 마친 후에 다시 찾아볼게요.”
그때 목사님은 그 교인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아들을 찾지 못했어도, 아들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속으로 “그래 당회 때 보자!”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관심과 동일하게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디모데전서 2장 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분해 놓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몇 년 전 사할린에 영성훈련을 인도하기 위해 갔을 때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면서, 영성훈련장에 정말 피폐한 영육을 가지고 참석한 사람들을 보면서 깊이 깨달았던 것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그들의 영혼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그 민족이 그렇게 철저하게 깨질 수 있다는 것, 특히 사할린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잡혀갔던 우리의 선조가 하염없이 자신들을 다시 고국으로 데리고 갈 배가 올 줄 알고 언덕에서 기다리다가 한 맺힌 채 죽어간 땅이기에, 눈물과 분노,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영성훈련에 팀멤버로 참석했던 사람들과 제가 시장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한여름에 샤워도 할 수 없었던 곳에서 10일을 지내며, 20명이 화장실 하나를 가지고 사용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저는 요즘 거룩한 부담을 많이 느끼며 살아갑니다.
제 주변에 제가 돌봐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가끔 주변에서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괜히 돌봐준다고 하다가 낭패 보지 말고 그냥 모른 척 하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제가 많이 어려움을 당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을 잘못 소개해주고 난감함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탁을 들어주기에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이 된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여러분이 복음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이미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지는 거룩한 부담이 축복으로 고백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은 버거운 생각이 듭니다.
인생을 쉽게 살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런데 쉽게 사는 것보다 조금은 버겁게,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모습인데 어떻게 합니까?
몇 개월 전 뉴욕에서 유엔을 방문하고, 유엔재단과 월드휴먼 브리지가 협약을 맺을 때, 유엔 재단 사무총장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엔에서 도움을 받던 한국이 이렇게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바로 그 만나기 전 뉴욕 총영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뉴욕 주변에 한인들이 60만 명이 사는데, 1년에 한인들이 모으는 기부금 액수가 2-3백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이제는 미국 사람들도 한국 기업에 모금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모금액수가 빈약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스스로 가난하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미 충분히 축복을 받았는데, 그 축복을 나누는 자의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까?
아니, 그런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까?
교회에 갔더니 자꾸 부담되게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하며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를 보게 합니까?
이미 우리가 복음을 받은 축복된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라면, 우리의 삶에서 한번 기대해볼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3. 복음 전도는 우리의 순전함(integrity)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은 그들의 삶에서 순전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순전함이란 “일관성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전함이란 복음에 대한 신실성인 동시에, 삶에 대한 성실성입니다.
저는 이것을 “감동을 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복음 때문에 분명히 삶의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분명히 바뀌어야 하는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복음을 전할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성경에서 제일 좋아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것은 그의 삶의 일관성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올곧게 걸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할 때도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며 숨어 지내야 했던 시절에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도망자로 쫓기던 시절, 그를 죽이려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에도, 그에 몸에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4장 6절입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은 적어도 다윗은 기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다윗이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다윗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윗의 말에 권위가 실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비전이 달라집니다.
언젠가 TV에서 드라마를 보는데, 그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부인이 남편을 의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설득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헤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공원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부인에게 자신의 가슴을 헤치고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거기에서 신혼여행 때 함께 사진을 넣어 만들어 입었던 T- shirt가 있습니다. 아내의 얼굴이 커다랗게 박힌 옷이었습니다.
그때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내 가슴에 너의 얼굴이 있는데, 내가 누구를 생각하겠니?”
결국, 그 말에 이 여인이 감동을 하게 되고 가정이 회복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드라마를 보면서 그 내용을 막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다면, 우리가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가지는 복음전도의 비전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이 교회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들과 함께 단기선교여행을 가면, 늘 노방전도를 합니다.
그때마다 너무나 열심히 전도하는 청년들을 봅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특히 자신들의 동네에서 복음을 전도하는 것에 대하여는 꺼리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이 드러나면 불편한 것입니다.
운동을 하러 가서도,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지 않는 교인들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인 것이 드러나면 불편한 것입니다.
절대로 세상은 우리에게 감동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얕잡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이 매일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백성이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원받는 수를 더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신자들 사이에서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 된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순전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에게서 세상을 감동 줄 만한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준비된 복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사람들이 순전한 우리를 보면서 묻습니다.
너희 삶의 소망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할 때, 준비된 복음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세계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유럽의 기독교 팽창입니다.
콘스탄틴 황제까지 불과 300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한구석에서 12명의 제자, 그리고 바울의 동료가 시작한 자그마한 운동이 유럽을 휩쓸고 간 것입니다.
성경에서 “케리그마” 즉 “설교”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케룩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케룩스”는 정부의 “뉴스 전령관”을 일컫는 말입니다.
케룩스가 북을 치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는 꼭 알아야 하고 누구나 생활에 적용해야 할 중대 뉴스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온 마을이 거리에 나와 케룩스의 뉴스 선포를 들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기적적인 성장을 이룩한 것은 신도 전원이 케룩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크리스천이란 일주일에 한 번 성전에 예배 보러 나오는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신자 전원이 자기의 일터와 동네와 여행길에서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케룩스”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는 이야기하기를 우리의 경쟁상대는 다른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순전함이 이 세상 가운데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의 입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하나하나가 “헌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것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은혜가 전해져야 합니다. 은혜가 우리 속에 고이면 감격이 없습니다.
은혜는 계속해서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예배는 바로 우리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충만해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사랑의 교회는 이런 표어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초신자는 왕이다!”
모든 의견을 결정하는데, 초신자 위주로 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져야 하는 복음 전파에 대한 비전, 이 땅의 영혼을 바라보면서 가지는 영혼사랑에 대한 비전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비전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비전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하는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를 관리하도록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개인적으로 이곳에 부르신 이유는 양을 관리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을 생산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양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역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양이 다 늙어 죽으면, 우리의 사역도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생산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산은 기쁨이 있습니다.
생산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복음 전파에 대한 비전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비전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