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jngAX3TgRoM?si=31-gO6henOE3WqHV
안녕하세요 화정입니다
제 소박한 시와수필낭독방을 찾아와주시고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시간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백마흔세번째 글은 세 번째 셋집이라는 수필입니다. 남편이 입사한 지 4년 만에 회사 사택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요.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경남 고리입니다. 어떤 일들이 생겼을까요? 들어보세요
세 번째 셋집
하필이면 이사 전날 서울에서 언니들이 오셨다. 부산에 사시는 둘째언니집에 들렀다가 내친김에 일광 우리집까지 오셨던 것이다. 이삿짐들이 거실 이곳저곳에 쌓여있고 주방 살림도 내일 아침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그릇만 남겨놓고 대충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큰아이가 세 살이었고 뱃속에는 팔 개월 된 아기가 있었으니, 내 모양새도 집안만큼이나 어수선했다. 손님을 손님으로 맞이할 여건이 아니었다. 대충 함께 잠을 자고 대충 아침을 드신 뒤 도망치듯 올라가셨다. 제대로 손님 대접을 못한 죄송함과 아쉬움까지 짐차에 싣고 이사를 하였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사택을 배정받았던 것이다. 넓은 방 두 칸에 넓은 거실과 잘 갖춰진 주방이 있는 집. 거기다가 거실 바로 바깥쪽에는 작은 텃밭도 있었다.
어디를 가나 주변 환경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더 중요하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산 중턱에 사택들이 즐비했다. 회사 사택이니만큼 고향과 나이와 성격과 말씨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서너 달 정도 살아보니 그곳 여자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 절약과 근면이 몸에 배어있고 고지식하고 자식들이 초등학생인 부류와 도시에서 바로 들어온 듯 활기차고 진취적이며 자유로워 보이고 자식들이 유치원생이나 아가인 젊은 부류가 있었다. 내 아이들이 어렸으므로 젊은 부류에 섞여 보았으나 기름에 물처럼 섞이지 못하였다. 차라리 나이 든 쪽이 진득하고 편안하였다.
바로 옆집에는 나이 든 부류에 속하는 애논이 엄마가 살았다. 주방문을 열고 나가면 대여섯 발자국 거리에 그녀 집 주방문이 있어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거리였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았다. 결혼을 일찍 해서 큰아이는 초등학생이었고 둘째 아이 애논이가 내 큰아이와 나이가 같은 네 살이었다. 애논이 엄마는 아이들을 웬만큼 길렀으므로 시간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발벗고 나섰다. 부산 사투리로 명랑하면서 약간은 시끄러운 어투로 말하였다. 언니였으며 인생 선배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 왕래 하였다. 둘째를 낳아 시간이 부족했던 나보다는 애논이 엄마가 거의 출근하듯 우리집으로 왔다. 아기도 봐주고 김치도 버무려주었다. 결혼 선배로서 여러 가지 살림의 지혜도 들려주었다. 낯선 동네에서 내 편이 생겼으므로 나는 대만족이었다. 빠른 속도로 옆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게 된다는, 간격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게 원인이었다. 친해진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는 의미다. 더 많은 것을 해 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이웃보다 무엇이든 먼저여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텃밭에 열린 호박 하나라도 다른 집에 먼저 주면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얼마나 어려운 주문인가. 얼마나 무서운 족쇄인가. 이성 간의 사랑처럼 이웃 간의 관계도 족쇄처럼 느껴지는 순간 피곤이 몰려오고 불편해진다. 소소한 것에서도 실망감과 섭섭함을 느끼게 되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더 큰 문제는 내 개인적인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에너지가 충전되는 타입이다. 혼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 때나 들이닥쳐서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애논이 엄마는 내게 부담이었다. 내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었다. 어느 날 항상 열어두었던 주방문을 닫고 쉬었다. 편안했다. 그녀를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가는 일도 삼가하였다. 의식적으로 멀리한 것이다. 내 태도에 애논이 엄마는 화가 났고 한동안 싸운 사람들처럼 못 본 체하고 지냈다. 나의 생활 방식을 솔직하게 말해주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뒷집 나이 드신 분의 배려로 나와 애논이 엄마가 말문을 트기는 했지만 예전의 간격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했다. 내게는 그때 일이 상처로 남았다. 사람을 만날 때에는 서로에게 누가 되지 않을 만큼,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처음에는 쉽게 가까워지는 듯 한데 더는 가까워지지 않고 어려워진다고 말이다. 곁을 내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애논. 옆집 딸이다. 동그스름하고 통통한 얼굴에 눈이 작고 살짝 올라갔다. 귀여웠다. 내 아들과 같은 네 살이었다. 제 엄마를 쪼르르 따라다녔으므로 자연스레 내 아들과 친해졌다. 사이좋게 놀다가도 티격태격 싸웠다. 베란다 밖에서 둘이서 아옹다옹하는 것 같더니 애논이가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고는 내 아들에게 돌을 힘껏 던졌다. 꽤 거리가 멀었는데도 적중했다. 이마가 깨지고 피가 흐르고 일곱 바늘을 꿰매고 난리가 났었다. 애논이는 겁에 질려 제 집에서 꿈쩍 못했고 애논이 엄마는 내 아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을 자꾸 사서 날랐다. 다시 가까워지는 듯 했다. 애논이네가 해운대로 이사를 갔을 때 내가 둘째 아기를 안고 찾아간 것으로 만남은 끝이었다. 거리가 멀어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한번 금이 간 틈은 메꿔지기 어렵다.
남편이 과장 승진을 한 것도 이곳에서다. 누구랄 것도 없이 남편들은 고시 공부를 하듯 과장 시험에 열중했다. 방을 얻거나 도서관을 이용했다. 내 남편도 친구와 같이 방을 얻어 공부하였다. 그 당시 한전에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은 각 지역에서 공부 꽤나 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를 비롯한 여섯부부 모임이 있었는데 기술직을 빼고 사무직 네 명은 반장이었거나 우등생이었다. 과장시험 합격은 로또를 맞은 것처럼 엄청난 행운이었다. 당연하게 회사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한 턱을 냈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 모든 행사를 할 때였다. 회사 사람들은 집에서 한 턱을 냈고 주변 아줌씨들은 음식점에서 한 턱을 냈다. 돈을 아끼던 때였으므로 부담이기도 했지만, 기쁘고 우쭐한 날들이었다.
이곳으로 이사한 지 두 달 만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해운대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았다. 서울에서 내려오신 시어머님께서 산바라지를 해 주셨다. 친정어머님이 오실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시어머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기를 낳고 이틀 후에 집으로 왔으므로 처음 사오일 동안 나는 아픈 몸을 추스르기도 바빴다. 내 몸이 조금씩 좋아지면서 이것저것 집안 살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주방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불결해 보였다. 짜증스러움이 불쑥 고개를 들었고 그 짜증을 말투에 섞고 말았다. 눈이 좋을 리 없는 노인이셨다. 젊은 나처럼 깨끗하게 하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젊음이 어찌 늙음을 알겠는가. 내가 늙음에 당도하고 보니 이제 겨우 늙음을 안다. 어머님을 본다. 우리는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중이다.
딸아이가 10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큰아이가 네 살이었으므로 자전거를 사 주었다. 1990년대만 해도 절약이 최고의 미덕이었으므로 새 자전거 값은 우리에게 거금이었다. 당연하게 자전거를 애지중지하였는데 어느 날 현관문 밖에 두었던 자전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자동차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새 자전거를 몰래 가져다가 팔아서 용돈으로 쓰는 중고생들이 있다는 소문을 이틀 전에 들은 터였다. 몸무게가 10kg이었던 딸아이를 끈으로 앞쪽에 안고 사택 1단지부터 3단지까지 잃어버린 자식을 찾듯 1시간여를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녔다. 자전거는 보이지 않았다.
상심해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하려는데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를 안고 같은 자세로 돌아다닌 게 허리에 무리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접시 한 개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허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의원에 가서 서너 번 침을 맞았던 일주일 동안 밥은커녕 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낯가림이 심한 딸아이는 옆집 아주머니도 부산에 살던 막내 고모도 손을 들만큼 밤낮으로 울어댔다. 결국 남편이 휴가를 내서 딸아이를 일주일쯤 돌보았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아주고 우유를 먹였다.그 뒤부터였다. 딸아이는 내가 섭섭해할 만큼 나보다 아빠를 따랐다. 아이와 부모는 함께 하는 시간에 비례하여 사랑이 자란다. 일요일에나 아빠를 만났으니 아빠의 사랑을 느끼고 가까워질 시간이 부족하였을 것이다.
두 아이를 기르느라 나는 힘이 들었다. 친정과 시댁이 모두 서울에 있었으니 잠시라도 대신 아이들을 보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피곤이 쌓여갔고 자주 네 살짜리 아들에게 짜증을 부렸다. 아기였던 둘째가 낮잠을 잘 때 나는 함께 자고 싶었지만 큰아이는 밖에서 놀고 싶어하였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잠을 제대로 못 잔 날은 더 짜증을 부렸다. 두고두고 미안했다. 아들에게 그때의 일들을 물어보면 기억이 없단다. 어미가 짜증으로 아이를 기르면, 아이가 사춘기 때 짜증이나 다른 부정적인 형태로 성격에 나타난단다. 다행하게도 아들은 온순하다. 마음을 잘 내보이지 않는 성격이기는 하다. 요즈음 자식을 기르고 있는 딸아이를 보면 존경스럽다. 큰아이가 네 살이 되도록 짜증이나 화를 내는 법이 없다. 끝까지 대화로 풀어낸다. 나는 소리부터 질렀었다.
남편은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졌다. 솔직해졌다. 취해서 들어오는 날에는 어린 자식들을 깨워 앉히고 일장 연설을 했다. 아니면 술이 깰 때까지 나를 붙잡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 날은 남편도 나도 잠을 자지 못하였다. 술을 잔뜩 마시고 휘청거리며 들어왔던 어느 여름날, 그가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나쁜 말들을 쏟아냈다. 여름이라 창문이 다 열려진 채였다. 이웃이 들을까 싶어 창문을 닫았는데 닫지 말라는 것이었다. 들으면 어떠냐고? 다들 그럴거라고? 사회생활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인간관계라 했다. 속으로만 삭이던 남편이 오랜시간 참아왔던 화를 분출해 냈던 것이다. 이해도 되고 불쌍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 시간 그의 목소리를 녹음해 두었다. 반복이 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틀 뒤에 들려주었더니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정말? 그렇게? 자신에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이 드니 저절로 술도 끊었다. 마누라 마누라 불콰해진 얼굴로 휘청거리며 불러대던, 정이 줄줄 흐르던 어눌한 목소리가 가끔 그립다. 이상한 일이다. 젊음이 함께여서일 것이다.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비춰드는 거실 미색 커튼 앞에 세 살짜리 딸아이가 서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난 뒤처럼 달콤한 웃음을 짓고 있다. 짧고 오동통한 팔과 손을 몸에 착 붙이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사진이 있다. 세발 자전거에 앉은 아들아이가 여동생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젖병을 문 채로 오빠 옆에 바짝 앉은 딸아이가 수줍게 웃고 있는 사진도 있다. 여섯 살과 세 살이었다. 세 살 딸아이와 동갑이었던 윗집 사내 아이는 나중에 결혼할꺼야 라고 말하는 사이였는데, 둘이서 하는 양이 하도 귀여워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택 뜰에서 춤을 추는 사진도 있다. 사내아이의 집 앞이다. 한 칸 아래쪽에 우리가 살았던 집이 보인다. 고리 사택 풍경이 찍힌 사진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액자로 만들어 거실 탁자에 올려 두고 오며가며 들여다본다. 돋보기를 쓰고 자세히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날도 있다. 그날의 내가 보인다. 그때 사람들이 보인다. 오! 옛날이여! 그리운 날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