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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聾巖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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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 이현보(李賢輔) | 민족문화추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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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수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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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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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년(세조13) ~ 1555년(명종10))의 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1665년(현종6)에 외손 김계광(金啓光)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여러 차례 난리를 거치면서 유고(遺稿)의 태반이 없어졌다. 후손들이 간행을 의논하여 가장(家藏)하고 있던 시문 약간 편을 수습하고, 김계광의 편차를 고증하여 5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1911년에 후손 이재명(李在明)에 의해 속집(續集)이 간행되었다. 본 문집은 원집 5권ㆍ속집 2권ㆍ연보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의 권1~3은 시문이고, 권4~5는 부록이다. 시는 유배를 당했던 1505년 이후 중년과 만년(?年)의 작품들로, 걸양(乞養)하여 외직에 있는 동안이나 귀향해서 지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수창시(酬唱詩)의 경우는 제가(諸家)의 시도 함께 실려 있다. 권2에는 이황에게 쓴 편지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은 잡저로서 기(記)? 발(跋)ㆍ서(序)ㆍ제례(祭禮) 등의 글과 가사(歌詞)가 수록되어 있다. 부록으로 저자에 대해 쓴 행장, 비명(碑銘), 만장(挽章)과 1508년에 걸양(乞養)하여 영천 군수로 나가는 저자를 송별하면서 교유한 문인들이 지은 별장(別章)을 모은 ‘영양별첩(永陽別帖)’과 저자의 시에 차운한 제가(諸家)의 시장(詩章)이 수록되어 있다. 속집에는 시(詩)ㆍ서(書)ㆍ묘갈이 수록되어 있고 부록에는 이희보(李希輔)ㆍ박상(朴祥)이 지은 서(序) 2편과 영양별장(永陽別章)의 시(詩), 차운시 등 제가(諸家)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연보는 권수에 세계보(世系圖)가 있고 부록으로 교서와 제문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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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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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聾巖集)(15-16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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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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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 1685聾巖 李賢輔의 문집. 原集은 5권 2책. 續集은 3권 2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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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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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집의 原集은 이현보의 外裔孫 金啓光에 의해 1665년(현종 6)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續集은 1911년 ?孫 在明에 의해 간행되었다. 속집은 농암의 詩文과 附錄? 年譜로 구성되어 있다. 연보는 농암의 아들 叔樑이 처음 만들었으나 이후 여러 대를 거쳐 수정·보완되어 1882년 일차 완성을 본 후 재차 수정과 보완을 거쳐 1911년 속집의 간행과 함께 간행되었다. 규장각본 ≪聾巖集續集≫<奎 12462>에는 卷三의 <年譜>·<附錄>·<跋文> 등이 목록에만 표시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빠져 있는데 이 부분은 ≪聾巖先生年譜≫<奎12461> 2권 1책으로 별도 수록되어 있어 이로써 보충하였다. 原集의 詩와 歌詞 등 많은 작품에는 창작시기? 창작경위 등을 서술한 序와 小註가 붙어 있다. 續集의 完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성균관대 중앙도서관·성암고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울러 1935년 李彰淵이 김계광본을 재간하면서 원집의 내용을 첨가하였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이 1935년 재간본을 다시 증보하여 6권 2책으로 간행한 것이 성균관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 이것은 ≪國朝實錄≫·≪退溪集≫ 등에서 疏·箋·啓辭·諭書·批答 등의 자료를 채록한 것으로 김계광본에 비하여 훨씬 풍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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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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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李賢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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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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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1555 (세조13-명종10)字: ?仲? 號: 聾巖? 本貫: 永川? 父: 欽? 母: 安東 權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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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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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식년문과에 丙科로 합격하여 權知校書館副正字를 시작으로 永興訓導·檢閱兼春秋館記事官·奉敎·典籍 등을 지냈다. 1504년 正言이 되어 書筵官의 非行을 탄핵하다 安東의 安奇驛으로 유배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전적에 다시 기용되었다. 1508년 형조전랑이 되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로 옮겼다. 1523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532년 홍문관부제학·지제교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官歷은 <常爲親乞外>라는 퇴계의 표현에 보이듯 守令·觀察使와 같은 外官職을 주로 역임하였다. 1542년 致仕하였고 이후 향리에 은거한 상태에서 嘉善을 거쳐 崇政大夫에 올랐다. 89세까지 享壽했다. 諡號는 孝節이다. 교우관계로는 퇴계의 숙부인 松齋 李?(1478-1543)·晦齋 李彦迪(1478-1543)·慕齋 金安國(1478-1543)·愼齋 周世鵬(1495-1554) 등과 가까웠다. 연하인 퇴계와는 가장 각별한 사이로 수창한 시와 편지가 많았고 많은 저술이 퇴계와의 토론을 거쳐 이루어졌다. 스승으로는 洪貴達에게 경전을 배웠다. 榮利를 추구하지 않고 늘 자연과 交感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와 시조를 남겼다. 兩親이 장수하였고 자신도 89세의 壽를 누렸으며 6형제의 多男子를 두어 老福을 고루 갖춘 인물로 평가되지만 영남사림파 내에서의 위상은 이황과 이언적에 비해 취약한 면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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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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聾巖集 내용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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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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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 1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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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
1665. 이현보의 외증손 김계광의 부탁을 받고 趙絅(1586-1669)이 쓴 서문. 퇴계의 문집을 통해 선생의 위상을 비로소 알게 되었음을 밝힌 후? 중국에도 천수를 누린 사람은 많지만 선생처럼 儒學者로서의 덕행과 학문을 겸비하면서 90 향수를 한 사람은 없다는 점을 들어 칭송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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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謫中憂旱(1504)? 關東途中示弟國卿(1506)? 偶吟示三兒(1511)? 永川雙淸堂次蘇都事元友-世良? 金丹城-萬鈞枕流亭次李明仲-?? 明農堂-幷序? 附次韻-松齋? 慕齋? 思齋作? 次暎湖樓? 花山養老宴詩-幷序? 次愛蓮堂? 獨坐愛蓮堂憶大休-文繼昌? 送朴德璋-璨赴賢良科? 召賀情離思兩交?? 題安東?舍? 聾巖愛日堂? 次觀風樓? 次金山樓? 歸來亭? 次永川光風堂? 甘浦次魚興海子游(1526)? 寄李上舍景浩-滉赴試在京? 詠梨樹示子姪? 會老庵次文忠公韻示兩上舍? 再次各贈兩翁? 奉別李仲友-希雍年兄出按海西? 遊靑鶴洞次徐祐之-福慶? 又遊藏義寺後溪次祐之? 秋日飮權禮判仲虛-?? 相公新宅次主人? 附原韻-沖齋作? 示安竹窓挺然-珽? 題終南遊錄後? 謝挺然送菊? 盆魚行錄奉李景明-瀣昆季求和? 憶汾川伊川兩家? 次金國卿-安國(1540)? 附原韻-慕齋作? 辛丑重陽與諸公登河都事家北亭(1541)? 廣津舟中次景明? 濟川亭次餞別諸公? 宿三田渡憶在京子弟? 到月溪? 驪興舟中? 次竹窓追賦兩絶呈舟中? 踰竹嶺? 到南院東望農莊喜吟呈城主? 追次周景游-世鵬題愛日堂奉寄? 嘲景游未遊淸凉? 題靈芝精舍? 附次韻-黃俊良? 李瀣作? 附次韻-幷序李滉作? 次黃學正-俊良留別? 杜妄臺奉別黃學正覲還之行? 春日芝山精舍獨吟二絶寄仲擧? 肯構堂? 送周景游以司成徑遞上洛? 冬至後二日與景浩遊靈芝精舍? 洞門臺奉別? 甲辰仲春初八日李復古-彦迪以方伯來訪聾巖旣歸吟長律以寄次其韻(1544)? 附原韻-晦齋作? 附次韻-退溪作? 又吟一絶寄謝李使相復古? 謹次姜相國壽瑞詩? 醉時歌書示座上諸公(1544)? 簞石遊次李應敎錄呈行軒? 和李景浩寄新曆? 丁未元日次仲擧(1547)? 聞景浩移卜川沙有中藏萬卷之絶?其韻以續舊戱? 次汾川續九老會? 附原韻-李仲樑作? 附次韻-李滉? 李文樑? 黃俊良作? 九老會乃余昔日爲椿府設而因成古事至今不廢前年重九子仲樑以永川郡宰記念舊規來設此會大辨供具極盡歡悅今年此日不敢虛過余又草設因故退行於十三永川及宦京兒輩在家子弟畢會具參越一日望兒輩仍設獻席餉余花山兩宰及本邑主守激請俱臨設幕於汾江西岸秋波澄綠赤葉漫山主勸賓酬終日娛樂日暮捨陸登船月出東山江淸如鏡緩棹中流絲管嘲?船窄未上子弟五六人率工妓十餘登上聾巖歌舞??舟中之客亦移上簞石相望秩舞或各自歌上下樂聲喧鬧雲天夜深而罷余念古人有塵世難逢開口笑之句方此佳辰鄕老與隣近守宰助具四美連設盛集豈非喜幸因次花牧永川唱酬之韻以誌不忘云? 謝丹山守景浩惠色紙一封? 愛日堂重新次退溪? 附原韻-退溪作? 寒食日立石于曾朝義興公追贈兵曹參議之墳基城太守李景浩以公外裔盛辨祭具來助祭祭後飮福諸宗黨歡話終日不勝欣感吟絶句謝呈行軒? 同景明景浩遊屛庵至晩泛舟汾川次景浩? 重陽日避寄芝舍遇雨有作錄奉仲擧? 奉?退溪茅舍會飮? 附原韻-退溪作? 聞退溪喜其胤子新基有溪澗卽命移構今悔而更卜他處凡三遷故詩以嘲之? 次濯淸亭? 次雙碧亭? 庚戌暮春望後二日邀景浩飮聾巖杏村下是春寒花未發而歌兒唱蘇仙爭挽長條落香雪之句次其詩拜呈求和(1550)? 次學士絶句? 寄退溪? 閏六月望泛舟賞月次退溪? 訪黃上舍漢忠于愚溪? 往寒栖明日景浩以詩謝次? 附原韻-退溪作? 次監司趙松岡-士秀因謝退溪和示? 附原韻-松岡作? 附次韻-退溪作? 奉?溪堂絶句? 奉次溪堂謝往一絶? 附原韻-退溪作? 奉?退溪? 奉和退溪生辰垂賀長律? 至日偶吟錄奉溪堂? 仲冬謝退溪枉訪? 雪中邀退溪? 閒餘憶得前日雪中枉駕謝詩絶句安字韻演成長律錄奉溪堂? 溪堂暮春邀退溪共賞蟠桃? 映湖樓次丁使相-應斗? 附原韻-應斗作? 偶吟寄仲擧? 淸和節賞倭??憶挺然? 雨餘泛舟遊簞石次景浩? 附原韻-退溪作? 次新寧水亭-幷序? 九月初四日聞金承旨-緣設壽筵于烏川? 重陽後二日餞安佐郞公信于牆邊盆菊下? 和景浩? 元夕獻筵詩-幷序? 次仲擧春日寄詩? 次文樑八日觀燈? 甲寅六月晦日自聾巖移寓臨江是日入秋節夜半聞??感而有作適有歸京人書奉退溪旅軒欲見鄕家愁悶氣像(1554)? 次寄退溪? 寄贈柳叔春赴燕京? 奉和退溪? 再?元夕絶句呈退溪? 蟠桃下招仲擧? 再?促之? 病中聞退溪自京新還吟寄二絶? 病起吟呈退溪(1555)? 附原韻-退溪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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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中眞率會賦 (39) |
宋代에 司馬光이 주도하여 만든 모임인 眞率會는 天然과 簡素함을 추구하였지만? 그것이 蘭亭의 修?나 竹林七賢의 모임과는 달리 유가적 修養과 事君의 정신을 견지하였던 점을 들어 찬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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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中庸賦-幷序 (40) |
後漢의 伯始 胡廣을 가리켜 당시 사람들은 中庸을 실천한 군자라 추대하였지만? 그가 여섯 임금을 지조없이 섬기고 권신들에게 아부한 일을 지적하여 反中庸의 小人이라 비판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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笏賦 (41) |
1499. 聖王이 笏의 제도를 제정한 취지가 <正己>에 있음을 밝히고? 笏에 가탁하여 <修身>에 힘쓸 것을 경계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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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退溪書 (1) |
농암이 靈芝山에 있는 靈芝寺를 접수하여 기거하던 중 이를 개축하여 <靈芝精舍>라 하였다. 그 후 개축의 전말을 기록한 記를 지었는데? 이것을 이황에게 보내어 교정과 함께 시집으로 만들어 보내 줄 것을 부탁한 글. 서두에 <靈芝山人>이라는 美號 사용에 대한 농암의 戱語가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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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退溪書 (1) |
이황으로부터 <靈芝山人>의 미호를 양보한다는 내용의 회신과 詩를 받고 농암이 답한 글. 시집의 교정에 대한 몇 가지 당부와 미호 사용에 관해 다시 언급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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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退溪書 (2) |
1545. 추위와 건강 때문에 國喪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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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退溪書 (3) |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를 물음. 특히 새로 제수받은 軍職을 체직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려 줄 것을 당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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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退溪書 (3) |
1547. 농암이 만든 酒禮와 祭禮의 抄에 대한 퇴계의 회신을 보고 농암이 다시 답한 글. 祭禮에 비해 酒禮가 보다 잘못된 점이 많다는 의견을 인정하면서도 祭禮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위를 밝히고 제례의 초고에 대한 자세한 교정을 당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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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退溪書 (4) |
1547. 酒禮와 祭禮에 대한 집필을 앞두고 몇가지 남은 의문점 - 初獻條의 立興兩字와 西東再拜에 대한 해석? 受?條의 ?辭의 실시가 불가한지의 문제? 附位의 祭를 지내는 문제 등-에 대해 퇴계에게 의견을 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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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白 (6) |
酒禮와 祭禮의 草稿에 대한 퇴계의 회신을 받고 답한 글. 初獻條·受?條·附位條에 대해 재차 의견을 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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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白 (6) |
酒禮와 祭禮에 대해 퇴계와 의논한 글. 讀祝·婦人助祭 등의 문제를 언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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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退溪書 (7) |
퇴계에 대한 그리움. 臨江寺와 蟠桃壇에서 수창하던 詩와 이전에 왕복하던 絶句詩를 모아 仲樑에게 간행케 할 예정이니 가을에 같이 가서 보게 되길 기약한다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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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退溪書 (8) |
1554. 元日宴會詩에 화답을 청한 편지를 보았는지 물음. 肯構堂을 개수하고자 하는데 퇴계도 후손이 되므로 필적을 남겨 줄 것을 요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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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退溪書 (8) |
樑母의 葬事에 자식들이 灰炭을 사용하는 것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家長으로서의 자신을 자책. 周世鵬(1495-1554)의 죽음을 애통해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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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日堂戱歡錄 (1) |
1527년 농암이 兵曹參知를 제수받아 관리들이 玉貫子를 가져왔다. 옥관자를 보고 母婦人과 戱語했던 일? 1528년 同副承旨로 근친왔을 때 母婦人이 언문으로 가사를 지어 농암을 맞이하려 한 일과 이를 보고 監司 申?이 감동하여 絶句를 지었던 일 등을 기록하여 小帖으로 만들었다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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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日堂九老會 (2) |
1533. 농암이 弘文館 副提學으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와 수연을 베품. 부친의 나이가 94세여서 鄕中의 80세 이상 노인 여덟분을 초청하여 香山故事를 모방 九老會라 이름한 사실과 生員 金孝盧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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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日堂重新記 (3) |
1548. 농암이 永川郡守로 있던 1512년 兩親을 위하여 지었던 愛日堂을 重新하고 지은 記. 애일당은 靈芝山의 한쪽 끝 바위 위에 지었는데 바위의 이름을 聾巖이라 하고 자호로 삼음. 아들 仲樑이 봉양하기 위해 永川郡守로 오게 된 감회. 別下淵·屛風庵·?巖 등 주위 풍경 묘사. <愛日>이란 奉親하는데 해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효도를 권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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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心樓重新記 (4) |
1549. 盈德 지역에 있는 淸心樓의 중건에 대해 쓴 樓記이다. 전임 군수 李股는 영덕의 옛 누각을 수리하고 또 작은 누각을 하나 더 지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실되었다. 이후 현 太守 尹復仁이 부임하자 소실되었던 청심루를 새로이 중건하였다. 낙성 후 邑人 申沃이 敎官으로 와 이현보에게 청심루의 樓記를 부탁해서 쓴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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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老書跋 (6) |
1536. 星州의 試席에서 얻었던 ≪壽親養老書≫를 간직해 오다 모친상을 당한 후 다시 꺼내 보고 중요한 조목만을 채록하여 <養老書>라는 책자를 만들고 이에 대해 쓴 발문. <壽親>이라는 제목을 없애고 <養老書>라고 한 것은 自養을 위해서라고 함. 治病·方藥 등에 관한 부분은 本文全書를 상고하게 하고 수록하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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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瑞詩序 (7) |
1585. 相公 姜文景이 근친갔다가 88세인 李 부부가 금슬이 좋은 것을 보고 이를 찬미하는 시를 지음. 당시 선비들도 강문경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를 모아 시집으로 만든 것이 ≪泗水李氏壽瑞詩帖≫임. 榮川郡守 龜巖 李禎(1512-1571)이 임기가 만료되어 떠나면서 家藏해 오던 이 詩帖에 대한 서문을 부탁하여 詩와 序文을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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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禮 (9) |
人家 宴會禮에서 술마시는데 따르는 禮의 법식을 정함. 아울러 交際 時의 예절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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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祭禮 (9) |
祭禮圖와 함께 陳設·參神·降神·初獻·飮福 등 제사 때의 절목으로 중요한 것을 선별하여 시행 방법을 설명. 단락을 바꾸어 酒禮와 제례에 관한 後敍가 첨부? 주례와 제례를 작성하게 된 계기와 경과가 서술되어 있다. 주례로는 鄕射禮와 鄕飮酒禮가 있고 제례에는 국가의 법식이 있지만 人家 宴會禮에 定式이 없음을 걱정하여 퇴계와 토론을 거쳐 만들었다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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效嚬歌幷序 (14) |
1542.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는 廣津 배 위에서 자신의 심경을 陶淵明의 歸去來辭를 效嚬하여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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聾巖歌幷序 (14) |
1542. 還鄕하여 뒷산 농암에 올라 舊遊陳跡이 의연함을 보고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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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日歌幷序 (14) |
1553. 還鄕한 後 10년째 되는 87세 생일宴에서 읊은 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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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父歌幷序 (15) |
九章으로 된 長歌. 농암은 黃仲擧가 전해준 <漁父歌> 一篇 十二章을 九章으로 개작하여 만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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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父短歌 (16) |
黃仲擧가 전해준 <漁父歌> 一篇 十章을 개작하여 五章으로 만든 短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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聾巖野錄後敍 (17) |
1549. 작자를 알 수 없는 <漁父歌>를 兒孫輩에게 얻은 뒤 이를 改刪하여 <漁父歌九章>·<漁父短歌五章> 두 편으로 만들고 이 둘을 합하여 一部新曲을 만들기까지의 경위를 씀. <聾巖野錄>이라 이름을 붙여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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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 |
1556. 李滉이 쓴 행장. 전체적으로 농암의 개인적 德行만이 아니라 治者로서의 실천의 측면을 균형있게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이현보의 가계와 성장과정을 언급하고? 檢閱·正言 등의 초기 京官職 재직시 직언을 아끼지 않아 귀양까지 가게 되었던 행적과? 이후 밀양부사·안동부사 등 지방관 재직시의 善治에 대해 구체적 사건을 들어 상세히 기술함. 榮利를 추구하지 않아 향리에 물러나 있었지만 儒者로서의 나라를 근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仁宗과 明宗에게 올린 상소문을 통해 제시하고 군주에 대한 충정과 佛敎를 엄격히 배척한 사실을 지적함. 1555년 퇴계가 농암을 문병하러 왔을 때 호남지역에 왜적의 弊害가 크다는 말을 듣고는 울분을 토로했던 사실을 덧붙임. 농암의 효성·성품·평소의 행실 등을 일화를 통해 칭송하고 끝으로 농암과의 교유에 대해 언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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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銘 (10) |
1566. 忍齋 洪暹(1504-1585)이 짓고 宋寅(1516-1584)이 쓴 神道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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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祭文 (17) |
1555. 明宗이 예조좌랑 朴仁元을 통해 내린 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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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 (17) |
1557. 이현보에게 <孝節>이라는 諡號를 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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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18) |
1555. 경상도 관찰사 雙翠軒 權轍(1503-1578)과 朝奉大夫都事 梁應台 등이 쓴 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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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20) |
1556. 錦溪 黃俊良(1517-1563)이 쓴 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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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章(22) |
安玹·鄭士龍·趙士秀·洪暹·宋麒壽·丁應斗·鄭惟吉·李滉·林億齡·宋希奎·黃俊良 등이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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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永陽別帖: 次韻-李希輔? 申?? 金世弼? 金安國? 崔淑生? 柳雲? 金瑛作? 明農堂詩:次韻四首-李瀣? 李滉? 金緣? 周世鵬作? 花山養老宴時:次韻十四首-朴祥? 權?? 金瑛? 曺伸? 黃孝獻? 鄭士龍? 李荇? 蘇世讓? 魚得江? 李希輔? 金安國? 李?? 李長坤? 張玉作? 聾巖愛日堂詩:次韻十四首-南士華? 朴祥? 金世弼? 金瑛? 曺伸? 鄭士龍? 李荇? 蘇世讓? 李希輔? 金安國? 李?? 李長坤? 洪彦國? 柳希齡作? 退休時別帖:送李參判南行二首-鄭士龍李滉作? 濟川亭送李參判辭還七首-曹繼商? 金安國? 成世昌? 宋麟壽? 張籍? 趙士秀? 李滉作? 次昌寧韻-李滉作? 再次呈舟中-李滉作? 追次濟川亭韻呈舟中-安珽作? 奉餞李先生是夜獨宿書堂曉起風雨凄然有感而作示竹窓-李滉作? 次韻-安珽作? 醉時歌:次韻二首-黃俊良? 周世鵬作? 續九老會詩:次韻三首-權應挺? 權應昌? 李文楗作? 元夕獻筵詩:次韻八首-李文樑? 李希樑? 李仲樑? 李季樑? 李叔樑? 李滉? 黃俊良? 金綏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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聾巖 李賢輔(1467-1555)의 詩文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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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卷1:詩:謫中憂旱(1504) , 關東途中示弟國 卿(1506), 偶吟示三兒(1511), 永川雙淸堂次蘇都事元友-世良, 金丹城-萬鈞枕流亭次李明仲-?, 明農堂-幷序, 附次韻-松齋, 慕齋, 思齋 作, 次暎湖樓, 花山養老宴詩-幷序, 次愛蓮堂, 獨坐愛蓮堂憶大休-文繼昌, 送朴德璋-璨赴賢良科, 召賀情離思兩交?, 題安東?舍, 聾巖愛日堂, 次觀風樓, 次金山樓, 歸來亭, 次永川光風堂, 甘浦次魚興海子游(1526), 寄李上舍景浩-滉赴試在京, 詠梨樹示子姪, 會老庵次文忠公韻示兩上舍, 再次各贈兩翁, 奉別李仲友-希雍年兄出按海西, 遊靑鶴洞次徐祐之-福慶, 又遊藏義寺後溪次 祐之, 秋日飮權禮判仲虛-?, 相公新宅次主人, 附原韻-沖齋作, 示安竹窓挺然-珽, 題終南遊錄後 , 謝挺然送菊, 盆魚行錄奉李景明-瀣昆季求和, 憶汾川伊川兩家, 次金國卿-安國(1540), 附原韻-慕齋作, 辛丑重陽與諸公登河都事家北亭(1541), 廣津舟中次景明, 濟川亭次餞別諸公, 宿三田渡憶在京子弟, 到月溪, 驪興舟中, 次竹窓追賦兩絶呈舟中, 踰竹嶺, 到南院東望農莊喜吟呈城主, 追次周景游-世鵬題愛日堂奉寄, 嘲景游未遊淸凉, 題靈芝精舍, 附次韻-黃俊良, 李瀣作, 附次韻-幷序李滉作, 次黃學正-俊良留別, 杜妄臺奉別黃學正覲還之行, 春日芝山精舍獨吟二絶寄仲擧, 肯構堂, 送周景游以司成徑遞上洛, 冬至後二日與景浩遊靈芝精舍, 洞門臺奉別, 甲辰仲春初八日李復古-彦迪以方伯來訪聾巖旣歸吟長律以寄次其韻(1544), 附原韻-晦齋作, 附次韻-退溪作, 又吟一絶寄謝李使相復古, 謹次姜相國壽瑞詩, 醉時歌書示座上諸公(1544), 簞石遊次李應敎錄呈行軒, 和李景浩寄新曆, 丁未元日次仲擧(1547), 聞景浩移卜川沙有中藏萬卷之絶?其韻以續舊戱, 次汾川續九老會, 附原韻-李仲樑作, 附次韻-李滉, 李文樑, 黃俊良作, 九老會乃余昔日爲椿府設而因成古事至今不廢前年重九子仲樑以永川郡宰記念舊規來設此會大辨供具極盡歡悅今年此日不敢虛過余又草設因故退行於十三永川及宦京兒輩在家子弟畢會具參越一日望兒輩仍設獻席餉余花山兩宰及本邑主守激請俱臨設幕於汾江西岸秋波澄綠赤葉漫山主勸賓酬終日娛樂日暮捨陸登船月出東山江淸如鏡緩棹中流絲管嘲?船窄未上子弟五六人率工妓十餘登上聾巖歌舞??舟中之客亦移上簞石相望秩舞或各自歌上下樂聲喧鬧雲天夜深而罷余念古人有塵世難逢開口笑之句方此佳辰鄕老與隣近守宰助具四美連設盛集豈非喜幸因次花牧永川唱酬之韻以誌不忘云, 謝丹山守景浩惠色紙一封, 愛日堂重新次退溪, 附原韻-退溪作, 寒食日立石于曾朝義興公追贈兵曹參議之墳基城太守李景浩以公外裔盛辨祭具來助祭祭後飮福諸宗黨歡話終日不勝欣感吟絶句謝呈行軒, 同景明景浩遊屛庵至晩泛舟汾川次景浩, 重陽日避寄芝舍遇雨有作錄奉仲擧, 奉?退溪茅舍會飮, 附原韻-退溪作, 聞退溪喜其胤子新基有溪澗卽命移構今悔而更卜他處凡三遷故詩以嘲之, 次濯淸亭, 次雙碧 亭, 庚戌暮春望後二日邀景浩飮聾巖杏村下是春寒花未發而歌兒唱蘇仙爭挽長條落香雪之句次其詩拜呈求和(1550), 次學士絶句, 寄退溪, 閏六月望泛舟賞月次退溪, 訪黃上舍漢忠于愚溪, 往寒栖明日景浩以詩謝次, 附原韻-退溪作, 次監司趙松岡-士秀因謝退溪和示, 附原韻-松岡作, 附次韻-退溪作, 奉?溪堂絶句, 奉次溪堂謝往一絶, 附原韻-退溪作, 奉?退溪, 奉和退溪生辰垂賀長律, 至日偶吟錄奉溪堂, 仲冬謝退溪枉訪, 雪中邀退溪, 閒餘憶得前日雪中枉駕謝詩絶句安字韻演成長律錄奉溪堂, 溪堂暮春邀退溪共賞跳桃, 映湖樓次丁使相-應斗, 附原韻-應斗作, 偶吟寄仲擧, 淸和節賞倭??憶挺然, 雨餘泛舟遊簞石次景浩, 附原韻-退溪作, 次新寧水亭-幷序, 九月初四日聞金承旨-緣設壽筵于烏川, 重陽後二日餞安佐郞公信于牆邊盆菊下, 和景浩, 元夕獻筵詩-幷序, 次仲擧春日寄詩, 次文樑八日觀燈, 甲寅六月晦日自聾巖移寓臨江是日入秋節夜半聞??感而有作適有歸京人書奉退溪旅軒欲見鄕家愁悶氣像(1554), 次寄退溪, 寄贈柳叔春赴燕京, 奉和退溪, 再?元夕絶句呈退溪, 蟠桃下招仲擧, 再?促之, 病中聞退溪自京新還吟寄二絶, 病起吟呈退溪(1555), 附原韻-退溪作, 洛中眞率會賦(39), 天下中庸賦-幷序(40), 笏賦(41). 卷之二:與退溪書(1), 答退溪書(1, 李滉으로부터 ?靈芝山人?의 미호를 양보한다는 내용의 회신과 詩를 받고 농암이 답한 글), 答退溪書(2), 答退溪書(3), 答退溪書(3), 答退溪書(4), 再白(6), 再白(6), 與退溪書(7), 與退溪書(8), 與退溪書(8), 卷之三:愛日堂戱歡錄(1), 愛日堂九老會(2, 1533. 농암이 弘文館 副提學으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와 수연을 베품. 부친의 나이가 94세여서 鄕中의 80세 이상 노인 여덟분을 초청하여 香山故事를 모방 九老會라 이름한 사실과 生員 金孝盧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 愛日堂重新記(3, 1548. 농암이 永川郡守로 있던 1512년 兩親을 위하여 지었던 愛日堂을 重新하고 지은 記. 애일당은 靈芝山의 한쪽 끝 바위 위에 지었는데 바위의 이름을 聾巖이라 하고 자호로 삼음. 아들 仲樑이 봉양하기 위해 永川郡守로 오게 된 감회. 別下淵·屛風庵·?巖 등 주위 풍경 묘사. ?愛日?이란 奉하는데 해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효도를 권고함), 淸心樓重新記(4, 1549), 養老書跋(6), 壽瑞詩序(7, 1585), 酒禮(9), 附祭禮(9, 祭禮圖, 陳設·參神·降神·初獻·飮福 등 제사 때의 절목으로 중요한 것을 선별하여 시행 방법을 설명. 단락을 바꾸어 酒禮와 제례에 관한 後敍가 첨부, 주례와 제례를 작성하게 된 계기와 경과), 效嚬歌幷序(14, 1542), 聾巖歌幷序(14, 1542), 生日歌幷序(14, 1553), 漁父歌幷序(15): 九章으로 된 長歌, 漁父短歌(16), 聾巖野錄後敍(17), 卷之四(附錄一):行狀(1, 1556年. 李滉이 쓴 행장), 碑銘(10, 1566年. 忍齋 洪暹(1504-1585)이 짓고 宋寅(1516∼1584)이 쓴 神道碑銘), 賜祭文(17, 1555年. 明宗이 예조좌랑 朴仁元을 통해 내린 제문), 敎旨(17, 1557年. 이현보에게 ?孝節?이라는 諡號를 내림), 祭文(18, 1555年. 경상도 관찰사 雙翠軒 權轍(1503-1578)과 朝奉大夫都事 梁應台 등이 쓴 제문), 祭文(18, 1555年. 李滉이 쓴 제문), 祭文(20, 1556年. 錦溪 黃俊良(1517-1563)이 쓴 제문), 挽章(22), 卷之五(附錄二):詩永陽別帖:次韻-李希輔, 申?, 金世弼, 金安國, 崔淑生, 柳雲, 金瑛作, 明農堂詩:次韻四首-李瀣, 李滉, 金緣, 周世鵬作, 花山養老宴時:次韻十四首-朴祥, 權?, 金瑛, 曺伸, 黃孝獻, 鄭士龍, 李荇, 蘇世讓, 魚得江, 李希輔, 金安國, 李?, 李長坤, 張玉作, 聾巖愛日堂詩:次韻十四首-南士華, 朴祥, 金世弼, 金瑛, 曺伸, 鄭士龍, 李荇, 蘇世讓, 李希輔, 金安國, 李?, 李長坤, 洪彦國, 柳希齡作, 退休時別帖:送李參判南行二首-鄭士龍李滉作, 濟川亭送李參判辭還七首-曹繼商, 金安國, 成世昌, 宋麟壽, 張籍, 趙士秀, 李滉作, 次昌寧韻-李滉作, 再次呈舟中-李滉作, 追次濟川亭韻呈舟中-安珽作, 奉餞李先生 是 夜 獨 宿 書 堂 曉 起 風 雨 凄 然 有 感 而 作 示竹窓-李滉作, 次韻-安珽作, 醉時歌: 次韻二首-黃俊良, 周世鵬作, 續九老會詩:次韻三首-權應挺,權應昌,李文楗作,元夕獻筵詩: 次韻八首-李文樑, 李希樑, 李仲樑, 李季樑, 李叔樑, 李滉, 黃俊良, 金綏作 |
농암집(聾巖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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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서지 | 저자 | 가계도 | 행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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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서지 |
권수제 |
聾巖先生文集(原集) |
판심제 |
聾巖先生文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1665年刊 |
권책 |
5권 2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1×16.6(㎝) |
어미 |
上下花紋魚尾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소장도서번호 |
奎1685 |
총간집수 |
|
 |
권수제 |
聾巖先生文集續集(續集) |
판심제 |
聾巖先生續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1911年刊 |
권책 |
續集 2권ㆍ年譜 2권 합 2책 |
행자 |
10행 18자 |
규격 |
19.8×15.7(㎝)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
소장도서번호 |
D3B-212a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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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이현보(李賢輔) |
생년 |
1467년(세조 13) |
몰년 |
1555년(명종 10) |
소명 |
有慶 |
자 |
?仲 |
호 |
聾巖, 雪?翁 |
본관 |
永川 |
시호 |
孝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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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
기사전거 : 年譜와 行狀(李滉 撰)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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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세조 |
13 |
1467 |
정해 |
成化 |
3 |
1 |
7월 29일, 禮安縣 汾川里에서 태어나다. |
성종 |
15 |
1484 |
갑진 |
成化 |
20 |
18 |
부친을 따라 任所인 眞寶에 가다. |
성종 |
16 |
1485 |
을사 |
成化 |
21 |
19 |
鄕校에 나아가 修學하다. |
성종 |
17 |
1486 |
병오 |
成化 |
22 |
20 |
洪貴達에게 경전을 배우다. ○ 가을, ?堂文會에 나아가다. |
성종 |
18 |
1487 |
정미 |
成化 |
23 |
21 |
安東 龍壽寺에서 독서하다. |
성종 |
19 |
1488 |
무신 |
弘治 |
1 |
22 |
안동 권씨와 결혼하다. |
성종 |
21 |
1490 |
경술 |
弘治 |
3 |
24 |
4월, 조부의 상을 당하다. |
성종 |
22 |
1491 |
신해 |
弘治 |
4 |
25 |
가을, 龍山 地藏菴에서 李?와 함께 독서하다. |
성종 |
23 |
1492 |
임자 |
弘治 |
5 |
26 |
基城의 伊川村에 우거하다. |
성종 |
25 |
1494 |
갑인 |
弘治 |
7 |
28 |
가을, 鄕試에서 장원하다. |
연산군 |
1 |
1495 |
을묘 |
弘治 |
8 |
29 |
봄, 생원시에 합격하다. |
연산군 |
2 |
1496 |
병진 |
弘治 |
9 |
30 |
성균관에 들어가다. 7, 8년간 李希輔와 교유하다. |
연산군 |
3 |
1497 |
정사 |
弘治 |
10 |
31 |
8월, 館試에서 장원하다. |
연산군 |
4 |
1498 |
무오 |
弘治 |
11 |
32 |
3월, 文科 丙科에 합격하다. ○ 校書館 權知副正字에 選補되다. |
연산군 |
6 |
1500 |
경신 |
弘治 |
13 |
34 |
4월, 永興訓導가 되다. |
연산군 |
7 |
1501 |
신유 |
弘治 |
14 |
35 |
4월, 金世弼의 천거로 예문관검열 겸춘추관기사관이 되다. |
연산군 |
8 |
1502 |
임술 |
弘治 |
15 |
36 |
史官으로 하여금 가까이에서 왕의 言動을 기록하도록 계청하여 허락받다. |
연산군 |
9 |
1503 |
계해 |
弘治 |
16 |
37 |
藝文館 待敎를 거쳐 奉敎가 되다. |
연산군 |
10 |
1504 |
갑자 |
弘治 |
17 |
38 |
성균관 전적, 세자시강원 사서를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다. ○ 4월, 일 때문에 安奇驛에 유배되다. |
중종 |
1 |
1506 |
병인 |
正德 |
1 |
40 |
9월, 中宗의 즉위로 방면되어 典籍이 되다. |
중종 |
2 |
1507 |
정묘 |
正德 |
2 |
41 |
호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다. ‘燒酒陶甁’으로 불리다. ○ 예조좌랑으로, 王命을 받아 대사헌 楊?止의 祭文을 짓다. ○ 봉상시ㆍ상의원판관이 되다. |
중종 |
3 |
1508 |
무진 |
正德 |
3 |
42 |
4월, 형조정랑이 되다. ○ 9월, 봉양을 위하여 永川郡守가 되다. |
중종 |
4 |
1509 |
기사 |
正德 |
4 |
43 |
2월, 鄕校에서 釋奠을 행하다. 鄕飮酒禮를 행하다. |
중종 |
5 |
1510 |
경오 |
正德 |
5 |
44 |
1월, 휴가를 얻어 省親하고, 明農堂을 짓다. ○ 監司 宋千喜의 계청으로 褒賞받다. ○ 雙淸堂을 짓다. |
중종 |
7 |
1512 |
임신 |
正德 |
7 |
46 |
愛日堂을 건립하다. |
중종 |
8 |
1513 |
계유 |
正德 |
8 |
47 |
8월, 軍資監僉正, 司諫院司諫, 軍器寺僉正이 되다. |
중종 |
9 |
1514 |
갑술 |
正德 |
9 |
48 |
3월, 密陽都護府使가 되다. ○ 겨울, 歸省하여 明農堂에 題詩하다. |
중종 |
10 |
1515 |
을해 |
正德 |
10 |
49 |
가을, 災傷에 대한 현지답사 보고의 과실로 파직되다. |
중종 |
11 |
1516 |
병자 |
正德 |
11 |
50 |
9월, 繕工監副正이 되다. ○ 10월, 충주목사가 되다. |
중종 |
12 |
1517 |
정축 |
正德 |
12 |
51 |
겨울, 봉양을 위한 배려로 안동부사에 제수되다. |
중종 |
14 |
1519 |
기묘 |
正德 |
14 |
53 |
監司 金克成과 暎湖樓(安東)를 유람하다. |
중종 |
15 |
1520 |
경진 |
正德 |
15 |
54 |
歸來亭(安東)을 유람하다. |
중종 |
16 |
1521 |
신사 |
正德 |
16 |
55 |
겨울, 禮賓寺副正, 司僕寺正이 되다. |
중종 |
17 |
1522 |
임오 |
嘉靖 |
1 |
56 |
봄, 사헌부 집의가 되다. ○ 軍資監副正이 되다. ○ 10월, 봉양을 위하여 星州牧使가 되다. |
중종 |
21 |
1525 |
병술 |
嘉靖 |
5 |
60 |
成均館司成, 軍資監正, 侍講院輔德이 되다. |
중종 |
22 |
1526 |
정해 |
嘉靖 |
6 |
61 |
2월, 掌樂院正이 되다. ○ 경상도 鎭海 등지에 推鞫敬差官으로 가다. 이어 兵曹參知가 되다. ○ 9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다. |
중종 |
23 |
1527 |
무자 |
嘉靖 |
7 |
62 |
3월, 折衝將軍龍?衛大護軍으로 좌천되다. ○ 4월, 義興衛上護軍을 거쳐 大丘府使가 되다. 德興書塾에서 諸生들을 모아 講禮하다.(뒤에 後學들이 이곳에 德興書院을 건립하여 享祀하다.) |
중종 |
24 |
1528 |
기축 |
嘉靖 |
8 |
63 |
겨울, 平海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봉양을 위하여 榮川郡守로 옮겨 부임하다. |
중종 |
26 |
1530 |
신묘 |
嘉靖 |
10 |
65 |
1월, 모친상을 당하다. |
중종 |
28 |
1532 |
계사 |
嘉靖 |
12 |
67 |
3월, 형조참의가 되다. ○ 7월,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가 되다. ○ 11월, 우부승지가 되다. |
중종 |
29 |
1533 |
갑오 |
嘉靖 |
13 |
68 |
2월, 봉양을 위하여 慶州府尹이 되다. ○ 玉山의 獨樂堂으로 李?迪을 방문하다. |
중종 |
31 |
1535 |
병신 |
嘉靖 |
15 |
70 |
여름, 사직하고 귀향하다. ○ 9월, 李滉과 함께 愛日堂에서 遊賞하다. ○ 10월,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1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
중종 |
32 |
1536 |
정유 |
嘉靖 |
16 |
71 |
2월, 파직되다. ○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5월, 부인상을 당하다. |
중종 |
34 |
1538 |
기해 |
嘉靖 |
18 |
73 |
三世의 贈牒을 받아 焚黃告由하다. ○ 가을, 金正國이 明農堂을 내방하다. ○ 10월, 琴元貞ㆍ權希益과 함께 會老菴에서 노닐다. ○ 형조참판이 되다. |
중종 |
35 |
1539 |
경자 |
嘉靖 |
19 |
74 |
4월, 「棠陰比事」 1책을 하사받다. ○ 10월, 호조참판이 되다. |
중종 |
37 |
1541 |
임인 |
嘉靖 |
21 |
76 |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 7월, 휴가를 얻어 豆毛浦ㆍ三田渡ㆍ驪興ㆍ伊川 등지에 머물다. 10월, 고향에 돌아오다. |
중종 |
38 |
1542 |
계묘 |
嘉靖 |
22 |
77 |
1월, 禮安縣 靈芝山에 精舍를 짓다. ○ 겨울, 이황과 芝山精舍에서 노닐다. |
인종 |
1 |
1544 |
을사 |
嘉靖 |
24 |
79 |
耆老所에 들어가다. |
명종 |
1 |
1545 |
병오 |
嘉靖 |
25 |
80 |
4월, 「皇華集」 1책을 하사받다. |
명종 |
2 |
1546 |
정미 |
嘉靖 |
26 |
81 |
鄕人들과 結夫에 따라 부세를 의논하여 정하다. ○ 酒禮及祭禮圖를 만들다. |
명종 |
4 |
1549 |
기유 |
嘉靖 |
28 |
83 |
6월, 〈漁父詞〉를 찬정하다. ○ 〈淸心樓記〉를 짓다. |
명종 |
5 |
1550 |
경술 |
嘉靖 |
29 |
84 |
3월, 愛日堂 東岸에 있는 臨江寺에 우거하다. |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87 |
4월, 性理群書 1部를 하사받다. ○ 李希樑ㆍ李仲樑ㆍ李季樑 三子가 모두 乞養하여 近邑(奉化ㆍ靑松ㆍ連山)의 수령으로 부임하다. |
명종 |
10 |
1555 |
을묘 |
嘉靖 |
34 |
89 |
2월, 臨江寺에 우거하다. ○ 6월 13일, 肯構堂에서 卒하다. ○ 8월 28일, 道谷先塋에 묻히다.(靑?山 산록에 移葬) ○ 9월, 명종이 祭文을 내리다. |
명종 |
11 |
1556 |
병진 |
嘉靖 |
35 |
- |
이황이 행장을 짓다. |
명종 |
12 |
1557 |
정사 |
嘉靖 |
36 |
- |
‘孝節’(慈惠愛親曰孝 好廉自克曰節)의 시호를 받다.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 |
神道碑(洪暹 撰)를 세우다. |
광해군 |
4 |
1612 |
임자 |
萬曆 |
40 |
- |
鄕賢祠(禮安)에 봉안되다. |
현종 |
6 |
1665 |
을사 |
康熙 |
4 |
- |
외손 金啓光이 문집을 간행하다.(趙絅의 序) |
- |
- |
1911 |
신해 |
- |
- |
- |
후손 李在明이 續集을 간행하다. | 기사전거 : 年譜와 行狀(李滉 撰)에 의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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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시문은 1665년(현종 6)에 외손 金啓光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여러 차례 난리를 거치면서 遺稿의 태반이 산실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간행을 의논하여 家藏하고 있던 시문 약간 편을 수습하였다. 이에 金啓光이 編次를 考證하고 6대손 李?弼이 繕寫하여 1663년 겨울에 시작, 1664년 3월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原集 初刊本인데, 권1~3은 저자의 시문이고 권4~5는 附錄이며 趙絅의 序를 뒤에 붙여 5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續集은 1911년에 胄孫 李在明에 의해 간행되었다. 續集은 저자의 詩文과 附錄, 年譜 2권을 合한 4권 2책이다. 年譜는 저자의 子 李叔樑이 처음 만들었으나 내용이 소략하여 여러 대를 거쳐 수정ㆍ보완되었다. 7대손 李復馨, 9대손 李祥?, 11대손 李文鉉ㆍ李奎鉉, 後學 李野淳ㆍ李家淳의 訂正을 거쳐 1882년(고종 19)에 완성되어, 胄孫 李進淵이 그의 아들 李羲肇에게 1통을 淨寫케 하고 附錄文字를 붙여 간행하고자 하였다. 이 연보는 1911년 李在明 등이 續集을 간행할 때 함께 간행하였는데, 속집에는 저자의 시문 약간 편과 원집 附錄에 빠져 있는 당시 諸賢의 唱酬詩章을 넣고 서원 창건 시의 여러 글과 緬禮 시 제문 등을 年譜의 附錄에 첨부하였으며 후학 李中轍ㆍ李康鎬가 지은 續集跋文을 수록하였다. 또한 目錄을 卷首에 붙였는데, 目錄에는 年譜와 附錄을 권3에 포함시켰다. 續集 4권 2책 完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ㆍ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성암고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성암장본에는 李?燾의 年譜跋 외에 1911년에 지은 12대손 李昺淵의 跋文이 첨부되어 있다. 原集은 1935년에 李彰淵에 의해 安東 肯構堂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이것은 1665년 간행된 金啓光本을 後刷하면서 내용을 첨가하여 追刻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1935년 간본은 조경의 序를 권수에 편차하고 권2에는 疏ㆍ箋ㆍ啓辭와 經筵記事 등 17板을 追刻하였고, 권3에는 이황이 지은 〈書漁父歌後〉 2板을, 권4에는 敎書와 賜祭文ㆍ祭文 4板을 追刻하여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 위의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을 증보하여 6권 2책으로 간행한 것이 성균관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目錄이 추가되고, 권1에서는 〈天下中庸賦〉의 幷序가 삭제되고 賦 2편을 追刻하였다. 권3에는 저자의 글 1편이 첨가되었으며, 전체가 新刻된 권6은 甲子推配事實을 비롯, 諭書ㆍ批答ㆍ傳敎ㆍ史論ㆍ敎旨ㆍ贈諡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本을 간행 당시 달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目錄 끝의 小註에 의하면, 疏ㆍ箋ㆍ啓辭 등은 國朝實錄에서, 書ㆍ賦ㆍ祭文은 家藏本稿에서, 跋文 1편은 「陶山文集(退溪集)」에서 각각 뽑은 것임을 밝혔다. 본서의 저본은, 原集은 5권 2책의 1665年刊 金啓光本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며, 續集은 4권 2책의 1911年刊本으로 성균관대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趙絅 撰), 續集跋(李中轍ㆍ李康鎬 撰)ㆍ年譜跋(李?燾 撰)ㆍ文集告成文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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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
본 문집은 原集 5권ㆍ續集 2권ㆍ年譜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集의 권1~3은 저자의 시문이고 권4~5는 부록이다. 권1에는 詩와 賦 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詩는 오언ㆍ칠언의 율시와 절구로서 창작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많은 작품에 저자가 창작 시기ㆍ배경을 기술한 幷序 또는 小註가 붙어 있다. 시기적으로는 유배를 당했던 1505년 이후 中年ㆍ?年期의 작품이고, 乞養하여 外職에 있는 동안 혹은 歸鄕 時 지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酬唱詩의 경우는 諸家들의 시도 함께 실려 있다. 권2에는 이황에게 쓴 편지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은 雜著로서 記ㆍ跋ㆍ序ㆍ祭禮 등의 글과 歌詞가 수록되어 있는데 각 歌詞에는 창작 배경을 기술한 幷序가 附記되어 있다. 특히 〈漁父歌〉 두 편은 旣存 노래를 저자가 刪改한 작품이다. 권4는 附錄으로서, 1556년(명종 11)에 이황이 지은 〈行狀〉과 1566년(명종 21)에 洪暹이 짓고 宋寅이 쓴 〈碑銘〉을 비롯하여 賜祭文ㆍ贈諡狀 그리고 權轍ㆍ李滉ㆍ黃俊良이 지은 祭文과 安玹ㆍ鄭士龍ㆍ趙士秀 등 11人이 지은 挽章이 실려 있다. 권5는 附錄으로서, 1508년에 乞養하여 永川郡守로 나가는 저자를 送別하면서 交遊한 文人들이 지은 別章을 모은 〈永陽別帖〉과 저자의 詩에 次韻한 諸家들의 詩章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1665년(현종 6)에 지은 趙絅의 序가 실려 있다. 續集은 目錄을 권수에 싣고 권1에는 詩ㆍ書ㆍ墓碣이 수록되어 있다. 詩는 原集에 있는 詩 가운데 빠진 부분도 실려 있으며, 書는 李滉에게 보내거나 답한 것 외에 金綏에게 보낸 편지도 1편 실려 있다. 묘갈 1편은 安普文에 대한 글이다. 권2 附錄에는 李希輔ㆍ朴祥이 지은 序 2편과 〈永陽別章(帖)〉의 詩, 次韻詩 등 諸家들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1911년에 쓴 李中轍ㆍ李康鎬의 續集跋 2편이 실려 있다. 年譜는 2권으로서 권수에 世系圖를 실었고 권1은 年譜이다. 권2는 附錄으로 敎書 1편과 〈汾江書院上樑文〉ㆍ〈奉安文〉, 현손 李榮運 등의 〈文集告成文〉, 〈請宣額疏〉, 陶山ㆍ三溪書院과 寒泉精舍儒生 및 여러 後孫들의 〈祭文〉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1882년 李?燾가 지은 〈年譜跋〉이 실려 있다.
필자 : 吳世玉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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