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개의 보석 같은 섬을 보유한 '바다의 땅' 경남 통영에서 육지와 섬을 잇는 가장 긴 다리는 '통영대교'다. 이 다리를 건너 처음 만나는 고갯마루 '세포 고개'. 곱게 포장된 2차선 도로 오른편으로 난 비좁은 샛길에 들어서면 생뚱맞게 '솟대'가 드는 이를 맞는다.
파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솟대 무리 옆엔 특이한 이름의 안내판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가는개 마을'. 마을 앞 긴 해만의 넓이가 좁고 가늘게 형성된 포구를 일컬었던 토박이 지명 '가는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세포 마을'이란 번듯한 행정 명이 있지만, 지역민들에겐 '가는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마을 주민 모두를 합쳐야 80가구 남짓. 60~70대 주민 대부분이 딸기나 매실, 무화과 농사로 생계를 잇는다.
해만이 가늘고 길어 유래
전체 가구 대부분 60~70대
극단과 손잡고 연극·시 창작
삶의 흔적 모아 산문집도
어느 곳과 다를 게 없던 평범한 농촌 마을에 난데없이 '문화와 예술'의 꽃이 폈다. 오직 농사지어 자식 뒷바라지하는 데 한평생을 보낸 촌로들이 손수 시를 써 시집을 내고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연극의 주연 배우가 됐다.
"동네 들어오면서 보셨죠? 담벼락에 적힌 시와 노래가 모두 주민 작품입니다. 본인들은 쑥스럽다고 하지만 볼 때마다 내심 뿌듯해 하세요. 무엇보다 난생처음 연극 무대에 섰을 때 설렘과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하죠." 신성안 이장은 "사실 돈도 안 되는 일이라 주민 설득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고 했다. 생업이 있다 보니 처음엔 한자리에 모이기조차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한솥밥 먹기'를 시작했는데 이게 의외로 주효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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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춰 마을회관을 찾은 주민들이 `한솥밥 먹기`를 한 후 다같이 모여 손을 흔들고 있다. 김민진 기자 |
2012년 통영시가 농어촌 공동체 프로젝트의 하나로 추진한 농어촌 체험마을 만들기에 참여하면서 주민 간 소통을 위해 "점심 한 끼라도 마을회관에서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밥을 같이 먹는 건 가족이라는 의미잖아요. 밥에다 반찬 서너 가지로 조촐한 상을 차렸죠. 처음엔 어색해 말없이 밥만 먹었는데 반주 한 잔 걸치자 말이 술술 나왔어요. 이런저런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짜 가족이 된 거죠. 이후엔 작은 일 하나까지 함께하는 게 더 익숙해졌습니다."
가는개 마을에는 예부터 '가는이 고개', '월서 정 씨 오매불망비' 설화 등 그럴싸한 이야깃거리가 유난히 많았다. 옹기장이, 대장장이, 삿갓장이, 소반장이, 기와장이, 챙이장이, 소달구장이 등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수많은 장이가 살던 곳 또한 이곳이었다.
문득 이런 아이템들을 활용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신 이장은 곧장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응모했다. 주민들은 통영연극예술축제위원회, 극단 벅수골과 손잡고 사라진 장이들의 삶과 설화에 얽힌 사연을 찾아내 창작시와 산문으로 풀어냈다.
주민 주도로 문화축제도 열었다. '2012 색깔과 이야기가 있는 가는개 공동체문화 마을 축제'다. 이 자리에서 주민들의 첫 연극 '쟁이마을 할미요'가 무대에 올랐다. 관리들의 전복과 수탈에 맞서 임금께 꽹과리를 울려 고발한 영세불망비 전설을 노래한 극이었다. 60, 70대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며 대사를 풀어내는 열연에 관람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듬해는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에 사람들이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솟대를 세웠다. 장이들의 가난한 숨결을 노래한 시를 벽화와 함께 담벼락에 새기며 야외무대를 설치했다. 이 무대에서 또 하나의 마을 설화를 연극화해 초연했다. 나붓등 앞바다에서 금괴를 건져 벼락부자가 됐지만, 결국 파산한 이야기를 담았다.
작년엔 주민 한 명, 한 명의 희로애락을 담은 창작시 모음집 '가는개 마을의 노래'를 펴냈다. 연말에는 설화 '처녀바위'를 배경에 둔 노래극 '치마 꽃'을 발표했다.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노력과 지역 전문 예술 역량이 결합해 생명력 있는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낸 마을 이야기는 농림축산식품부 선정 농촌현장포럼 발표회 대상을 받았다.
신 이장은 "상설 공연장과 문화센터를 유치해 마을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민진 기자 mj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