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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Persia) = 페르시아(Persia)
고레스왕의 칙령이 기록된 원통
BC 6세기 중엽 발흥한 나라로, 오늘날의 이란에 해당된다.
전성기 때 바사(페르시아)의 경계는 동쪽의 인더스 계곡, 서쪽의 애굽, 남쪽의
티그리스 강, 북쪽의 카스피 해였다. 바사는 이란의 우르미아 호 남부에 살던
아리아 인종 유목민들이 남쪽의 파르수마슈에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면서
세워졌으며, 4세기 중엽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할 때까지 서남 아시아
지역을 차지했던 중요한 나라였다.
바사인들은 인도 유럽계의 신화를 수용하여 신화를 만들어냈으며, 선과 악,
광명과 어둠의 이원론을 근거로 한 조로아스터 교를 믿었다. 바사 제국 시기에
바벨론에서의 포로 귀환, 예루살렘 성전 재건, 예루살렘 성벽 수축,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등의 일이 있었다.
성경 속의 바사 왕들
: 성경에 언급되는 바사의 왕으로는 고레스, 다리오, 크세르크세스, 아닥사스다
등이 있다.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레스(BC 539-530)
: 바사 제국의 기틀을 잡은 왕으로, 바벨론, 메대, 리디아 등을 정복했다. 칙령을
내려 바벨론으로 잡혀왔던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했다(대하 36:22-23; 스 1-6장;
사 44:28; 45:1; 단 10:1). 느부갓네살 왕이 빼앗은 성전 기물을 돌려 보냈고
스룹바벨을 예루살렘에 보냈다. 그는 피정복민들에게 관대한 정치를 했으며, 바사
내에 속하게 된 여러 나라들의 종교나 관습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다리오(BC 522-485)
: 바사 제국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의 왕으로, 영토를 넓게 확장했다. 그는 수도였던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여 평상시엔 상업적인 교역로로
사용했고 전시에는 수송로로 이용했다. 또한 금화 등 화폐를 제조하여 상품 유통을
활발히 했다. 성경에서 그는 바사의 재정을 사용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하도록
했다(스 4:5; 5:6-7; 느 12:22; 학 1:1; 슥 1:1).
크세르크세스(BC 486-465) = 아하수에로 왕
: 그리스와의 전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재위 기간 중에 영토를 많이 빼앗겼다.
성경에서 그는 아하수에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에스더서).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그는 유대인들을 멸하려던 하만의 음모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에 8-10장).
아닥사스다(BC 465-424)
: 성벽 재건 공사를 중단시켰던 그는 느헤미야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도록 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허락해 주었다(스 7:1, 21-26; 느 2:1-8).
[출처] 비전성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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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Zoroaster) = 자라투스트라(Spitama Zarathustra)
자라투스트라의 영어명.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다.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에 살았으며 20세 경에 종교생활을
시작해 30세 경에 아후라 마즈다신의 계시를 받고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고
한다.
출생-사망 : BC 630 ? ~ BC 553 ?
별칭 : 페르시아어 자라투스트라
활동분야 : 종교
자라투스트라의 영어명이다. 그가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은 고전 작가도 인정하지만,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Avesta》의
<야스나> 46의 14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그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비쉬타스바로
불리는 왕이 유력한 단서인데, 그 역시 페르시아왕조의 어느 왕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가 비교적 유력한
시기로 추정된다. 20세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세경에 아후라 마즈다신(神)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拜火敎]를 창시하였다고 한다.
[참조] 네이버지식배고가. [출처] 조로아스터 | 두산백과
자라투스트라 [ Spitama Zarathustra ]
고대 페르시아의 현자로, 기원전 6세기경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
(Zoroaster)의 본명. 출생 - 사망 BC 630 ~ BC 553
영어권에선 조로아스터, 독일에선 자라투스트라로 불리는 이란 북부 출신의
예언가다. 기원전 600년경에 태어난 그는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하고 절대
유일신 숭배를 주장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를 현자로 묘사했다. 한편 인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파르시교로
알려져 있다.
[참조] 네이버지식배고가. [출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012
페르시아제국 [ Persian Empire , ─帝國 ]
페르시아 제국은 이란 고지대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던 고대 제국을 통칭하는 말로, 그 기원은 아케메네스
제국(BC 550~ BC 330)이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
(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피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원은 BC 815년경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Susa)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Parsumash)에 정착한데서
시작한다. 이들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Elam)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왕자가 안잔(Anzan) 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키루스1세(CyrusⅠ)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는
메디아왕국(Media)의 공주 만다인(Mandane)과 혼인함으로서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캄비세스의 장남 키루스 2세(CyrusⅡ,BC559~529재위)는 쿠루쉬(Kurush)
라고도 불렸으며,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초석을 마련했다.
왕위에 오른 키루스 2세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BC 545년).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앙과 제례의식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서 B.C. 529년 아랄해 연안의 자카르테스(Jaxartes)유역의
스키타이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선 키루스 2세는 전쟁 중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사망했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Kambyses II)가 왕위에 올라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멸망한 메디아의 종교지도자 가우마타
(Gaumata)가 캄비세스 2세의 동생임을 자처하며 왕권을 차지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집트에서 돌아오던 캄비세스 2세는 재위 8년만인 B.C. 522년에 이집트의
시와(Siwa)에서 사망했다.
캄비세스 사후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그를 도와 페르시아의 군인으로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던 아케메네스의 왕족 다리우스1세(Darius Ⅰ: B.C. 521~486 재위)가 이집트로 돌아와
B.C. 522년 가우마타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B.C. 521년 12월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1세와
그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Ⅰ: B.C. 486~466 재위)의 통치 기간 중 아케메네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다리우스 1세와 크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은 동서로는
히파시스 강에서 리비아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카프카스 산맥과
아랄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전국토를 20개 주로 나누었으며, 징세와 병역을
부과했다. 또한 정복민에 대해서도 관대했으며, 각 지방마다 ‘사트라프’로 불리는
총독을 파견하는 한편, 왕의 직속 관리들이 총독을 감찰해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리우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다(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활발한 건축 사업을 벌여,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엘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세웠다. 특히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을 묘사한 비수툰(Biston) 부조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과 세공품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뛰어난 예술 양식을 보여준다. 도로망의 확충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총 2,400 km에 달하는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도입하여 각 역에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쟁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여러 국가의
모범이 되었다.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BC 500년 경의 페르시아제국
다리우스 1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를 정벌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유능한 지휘관 마르도니우스가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erxsesⅠ:B.C.424년 사망)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
(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부터 왕족 내부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세(Xerxses Ⅱ)는
소그드인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후계자 다리우스 2세(Darius Ⅱ) 역시 그 정통성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리우스 2세의 장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ses Ⅱ,
재위 404?-358 BC)는 반란을 일으킨 동생 소(小) 키루스(Cyrus the Younger,
키루스 3세, 424?~401 BC)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이후 아르타크르크세스 3세(Artaxerxses Ⅲ, 재위 358-338 BC) 때에 이르러
아케메네스 제국은 B.C. 358년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B.C. 343년에는
이집트를 다시 정복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3세(Darius Ⅲ: B.C. 336년 즉위)가 즉위할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Alexander Ⅲ),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리스군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으며,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다음해 6월 다리우스 3세가 자신의 부하
베수스(Bessus)에게 암살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인해 헬레니즘
문명에 의한 페르시아 통치가 지속되다가 BC 250년에 파르티아 제국이 들어서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그 후 사산왕조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
팔레비 왕조(1925~1979) 등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출처] 페르시아제국 | 두산백과
페르시아 [ Persia ]
고대의 이란고대에 존재했던 방대한 제국 페르시아의 중심은 지금 이란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었다. 페르시아는 동쪽으로 인도까지, 서쪽으로 그리스까지 세력을
뻗었다. 한번은 그리스를 거의 정복할 뻔한 적도 있었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땅이 포함된 제국의 영토를 차지했다.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들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바빌로니아인들
보다 훨씬 인도적이고 너그러웠다. 그들은 유일신을 숭배했으므로 유대인들과 닮은
데가 많았다. (또한 신상을 만들기 싫어하는 점도 같았다.) 페르시아의 지배자인
키루스(고레스)는 바빌론에 억류된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나온다.
느헤미야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 왕의 궁정에서 일하던 하인이었다.
다니엘서는 바빌론에서 시작해 바빌론이 페르시아에게 정복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다니엘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다리오)를 충실하게 도왔으나 다리우스를
신처럼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자 우리에 던져진다(다니엘 6).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유대의 고아 소녀인
에스더는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왕의 아내가 되었는데, 왕이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폭로한다.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현자)들은 아마 페르시아에서 왔을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박사는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를 말한다. 점성술에 능한 그들은 아마 예수가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의 하늘에 왜 기이한 별이 떴는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기원전 529년에 재위했던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역대하, 에스라, 이사야, 다니엘에
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사야 45:1에는 신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성서에서 외국인 지배자가 그렇게 찬사를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지배 아래 지독한 고통을 겪은 탓인지 키루스를
크게 환영했다. 이에 키루스는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간 유대의
보물들도 돌려주었다. 이 조치는 너그럽고 포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방식이었다. 피정복 민족에게 그들 고유의 종교와 관습을 허용해
반란의 여지를 줄이려는 게 페르시아의 숨은 의도였다.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최초로 십자가 처형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페르시아의 황제는 '왕 중 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훗날 유대인들이 차용한 용어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은 방대한 제국의 공용어로 아람어를 사용했다. 아람어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시대에도 사용한 언어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기린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에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다. 신약성서의 시대에 이르러 페르시아 지역은 파르티아 제국이 장악했다.
그리스도교는 아주 일찍부터 이곳에 전파되었고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 심한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순간 파르티아는 노선을 바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종교는 무조건 나쁘다는 믿음에 근거한 조치였다.
[참조] 네이버지식백과. [출처] 『바이블 키워드』, J. 스티븐 랭 저 | 남경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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