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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 눅 16:1-13
시골마을들을 찾아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꾸미는 TV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는 스튜디오까지 올라와 퀴즈대회를 즐겼습니다. 진행자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깁니까?”라고 물었지요. 어떤 팀은 호랑이, 어떤 팀은 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호랑이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을 못합니다. 사자라고 대답한 팀에게 왜 사자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물었더니 할머니 한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사자가 무섭지요. 호랑이든 사람이든 다 잡아 가는 건 저승 사자여유.” 스튜디오 안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이 시간이라도 부르시면 힘센 권력도, 건강했던 몸도, 쌓아둔 재물도 다 소용없습니다. 모든 인생에겐 끝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인생관이 다른 것은 종말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발점을 가진 인생은 반드시 종착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젠가 끝이 있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마지막이 있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살았으나 죽을 날이 있고, 건강하나 병들 날이 있고, 성공해도 실패할 날이 있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내려올 날이 있습니다. 문제는 시작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듯이 끝나는 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헬라의 어떤 왕은 아침마다 신하를 시켜 한마디 인사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왕은 일어나자 말자 그 인사를 듣습니다. “왕이시여 당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기분 좋은 아침에 얼마나 기분 나쁜 말입니까? 왕은 그 인사를 들을 때마다 자기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인 걸 알고 겸손한 왕이 되기 위해 힘썼다고 합니다. 참 지혜로운 왕입니다.
우리도 옆에 있는 분들과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종말을 의식하며 사는 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하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소극적으로 종말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종말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예수님의 재림이었고, 그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종말을 크게 의식하지 않습니다. 재림에 대해 별로 관심 없어합니다. 자연히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간격이 좁혀졌고, 어쩌면 구분하기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지구상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흔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제목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붙였습니다. 주제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삶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도 지혜로운 삶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떠난 지혜로운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말씀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헛일입니다. 1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청지기였습니다. 청지기는 종과 다릅니다. 종에겐 자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약간의 자유가 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어느 정도 재량권이 주어집니다. 때로는 주인을 대리하는 역할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의 재산을 관리했던 엘리에셀이나, 보디발의 살림을 살았던 요셉처럼 말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부자들은 집을 청지기에게 맡기고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때 불의한 청지기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권한과 지위를 남용해서 주인의 재산을 빼돌리거나 착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주인의 주머니가 아닌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이 청지기의 불의한 일이 주인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2절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는 주인에게 불려갔습니다. 청지기를 부른 주인은 노기가 충천했습니다.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습니다. 금방이라도 어떻게 할 것 같은 자세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였던 청지기에게 배신을 당하였기에 더욱 화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들어봤자 변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가 가진 정보가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해고를 선언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청지기는 주인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설사 용기를 내서 말한다고 해도 그 분위기에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일단 주인 앞에서 물러나왔습니다. 이제 큰 일 났습니다.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불명예 퇴직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마지막이 닥쳤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아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마지막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천 년, 만 년 살 줄 아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만은 영원히 종말이 오지 않을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건 모든 사람이 가진 ‘보편적인 착각’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움켜쥡니다. 한 번 움켜잡았다 하면 놓지 않습니다. 한 번 주머니에 들어갔다 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물질에 집착합니다.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가지려고만 욕심 부립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주머니 속에까지 손을 넣으려고 합니다. 마지막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편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지혜로운 삶의 출발은 자기의 날을 계수하는데 있습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껴서 자신의 마지막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2017년 통계에 한국 여성의 평균 수명이 85.7세라고 발표했습니다. 남성의 평균 수명은 6세 아래입니다. 여성이 6년을 더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평균 수명을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평균 수명 이전에 천국갈 수도 있습니다. 이는 둘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래 살고 싶다고 소원해서 오래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좋은 걸 많이 먹는다고 해서, 또는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평균 수명 이전에 죽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세의 고백을 빌리자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 90:10). 무슨 말입니까? 오래 살수록 고생을 많이 한다는 말입니다. 오래 살수록 슬픔도 많이 겪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계 21:4)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균 수명까지만 산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다. 대부분은 자신의 생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겁니다. 살아온 시간보다 남아 있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젊은 분들은 아직은 여유가 많이 있다는 표정이네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꼭 주민등록번호 순서대로 가는 것은 아니죠? 여러분, 인정하세요? 우리는 자기 날을 잘 계수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워할 시간 없습니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입니다. 헛되게 보낼 시간 없습니다. 주님께 충성하기에도 짧은 시간입니다. 움켜 쥘 시간 없습니다. 손을 내밀어 나누기에도 짧은 시간입니다.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손을 펴고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은 손을 펼치고 죽습니다. 누구도 주먹을 쥐고 죽지 않습니다. 혹 주먹을 쥐고 숨을 거두었다면 나중에 그 손을 펴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마지막은 빈손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빈손 될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래서 미리 대비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종말을 알면 지혜로워 집니다. 자기의 마지막을 알면 더 이상 미련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못할 짓 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악하게 굴지 않습니다.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물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개인적인 종말을 먼저 맞이할지 우주적인 종말을 먼저 맞이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종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마지막이 닥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하늘의 소망을 품고 인내하며 살게 됩니다. 종말을 기억하며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3-7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청지기는 주인에게서 물러나오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별 뜻 없이 쓰인 내용이 아닙니다. 당시의 고리 대금업자의 수법을 적어 놓은 책이 있는데요. 그것을 보니, 어떤 사람이 돈 많은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내가 3월말까지 돈을 갚을 테니 100만원만 빌려주시오” 하면, “이 증서에다 150만원이라 쓰시오”라고 했습니다. 실제 돈은 100만원을 주면서 증서에는 150만원이라 적고, ‘150만원을 갚으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당시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헤롯 아게파 1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재정적인 파산에 직면해서 그의 신하 ‘마이야스’를 보내 돈을 빌려오게 했습니다. 그 신하가 한 부자에게 가서 ‘2만 드라크마’를 빌려오려는데, 차용증에는 ‘2만 드라크마’를 쓰고 실제로는 ‘1만 7천5백 드라크마’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빌린 돈은 ‘1만7천5백 드라크마’이고, 나머지 ‘2천 5백 드라크마’는 이자였다는 말이며, 헤롯 아게파가 갚아야 할 돈은 ‘2만 드라크마’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차용증에 이자까지 포함시켜서 쓰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이 통례였다는 말이죠.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전주 에코시티의 어느 교회가 아주 크게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금고 5곳에 191억 원을 근저당으로 잡았습니다. 이 액수는 140%를 잡은 것으로 실제는 135억 원을 빌린 것이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통례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기름 ‘100 말을 빌렸다’는 것은 실제로는 ‘50 말을 빌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청지기가 그 사람에게 ‘50을 쓰라’고 한 것이죠. 또 밀을 ‘100 석을 빌렸다’는 사람에게는 ‘80을 쓰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실제로 빌려간 것은 80석이고 20석은 그 이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청지기는 무턱대고 깎아준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받을 이자를 감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부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청지기의 이 행동으로 주인에게는 이자 소득이 없어졌지만, 채무자 편에서는 ‘주인의 자비’를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구약성경은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19-20절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만 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시편 15:5절상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성경과 율법이 이자를 금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청지기의 주인이나 당시 부자들은 이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부자들이 돈놀이, 이자놀음을 해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이자를 없애주자 빚진 사람들이 ‘어? 알고 보니 이 주인은 그래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그 주인을 칭찬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재미있다는 말이죠. 그 주인은 청지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곧 빚진 자들에게 어떤 후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주인이 실제로 손해 본 것은 없습니다. 그렇죠? 바로 이런 면에서 청지기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데는 다 계산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자기가 해고당하기 전에 채무자들에게 잘해 주면 해고된 후에 자기를 모른 체하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입니다. 청지기는 마지막에 몰려 자기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청지기의 권한입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권한은 주인이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그걸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이 무엇입니까?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원히 자기가 소유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건 망상입니다. 엄청난 착각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내가 갖고 있을 뿐이지 사실 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돈을 잠시 맡고 있는 겁니다. 오늘까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가 다음날 빈손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달라고 하면 어느 때라도 내어 주어야 합니다. 계산하자고 하면 즉석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우리에게 건강을 달라고 하면 주인에게 돌려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는 어떻습니까? 물론 내 것이 아니죠? 주인이 잠깐 맡겨주신 겁니다. 달라고 하면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럼 자녀들은요? 마찬가지죠? 내 소유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갑니다. 웨딩마치는 자녀가 공식적으로 부모 곁을 떠나는 소리입니다. 생명은 말할 필요도 없죠? 여러분, 내 것이란 없습니다. 내 소유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다 주인이 주셨고, 주인이 달라고 하면 돌려 드려야 합니다.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겠지만, 주인이 맡기신 것이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때가 되면 주인이 찾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재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있는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런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해가 비치는 동안에 건초를 준비하라.” 무슨 말입니까? 해가 지기 전에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주인이 달라고 하기 전에 준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잘 준비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건 주인의 것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나눔의 삶입니다. 청지기는 나누어주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처음엔 자기 살 궁리 차 그렇게 했습니다. 채무자를 불러놓고 빚을 50%, 20%씩 깎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증서를 새롭게 작성해줬습니다. 이 때 채무자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연신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청지가가 처음엔 자기 살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젠 나눔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눔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8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예수님은 청지기의 이점을 칭찬하셨습니다. 청지기에 대한 평가는 분명합니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불의한 청지기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내용은 그 뒤에 나오는 것입니다.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청지기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준 나눔의 삶을 칭찬하신 겁니다. 전도서 11:1절 ‘너는 네 떡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나눔의 삶이란 떡(음식)을 물위에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 후에 도로 찾는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나눔이 헛되지 않다는 겁니다. 마치 저축과 같다는 겁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이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의 태풍이 불어 닥치면 다 물에 떠내려가고 맙니다. 결국은 다른 사람과 나누었던 것만 남습니다. 전도서 11:1절의 말씀은 나눌 때의 마음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물 위에 떡을 던질 때 다시 찾을 생각으로 던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떤 것을 나눌 때 되돌려 받을 생각을 추호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받을 생각을 하고 준다면 그건 나눔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래가 아닌 나눔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나눔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음식만 버리고 물만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도로 찾되 여러 날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나눔엔 분명히 보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나눔을 실천한 자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눔의 삶을 산다고 당장 보상받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노년에 가서야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얼마 앞두고야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식 대에 가서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천국에 가서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맘으로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나눔까지만 하면 됩니다. 보상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아멘” 했습니다. 앞에 앉은 신사 한 분이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야, 설교 참 잘 하신다.’ “여러분이 번 돈을 함부로 낭비하지 마시고 많이 저축하십시오.” 또 모인 사람들이 “아멘” 합창을 했습니다. 앞에 앉은 신사 분 계속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캬~ 설교 기가 막히다.’ “여러분이 가진 돈으로 하나님께 후히 드리고 사람들과 나누는데 많이 사용하십시오.” 이번에는 한 두 사람만 “아멘”을 했습니다. 앞에 앉은 신사 분도 이번에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입니다. ‘에이, 설교가 잘 나가다가 망치는구먼!’ 여러분, 많이 버는 것보다, 많이 모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쓰는 것입니다. 많이 쓰되 잘 쓰는 것입니다. 보람 있는 일에 쓰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일에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벌기를 원합니다. 많이 모으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잘 쓰기를 원하는 마음은 그렇게 간절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살고자하는 소원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돈을 잘 버는 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돈을 관리하는 지혜도 주시기를 원합니다. 돈을 모으고 늘려가는 지혜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돈을 잘 쓰는 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돈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물질을 나누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복음의 나눔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언젠가는 주님이 우리를 불러놓고 결산하자고 하실 겁니다. 복음을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몇 사람에게나 나눠졌는지를 틀림없이 확인하실 겁니다. 그 때 여러분은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청지기가 예수님께 칭찬받은 내용입니다. 청지가가 재물로 친구를 사귄 점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복음의 친구를 삼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복음의 친구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으로 복음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재물의 사용처를 바꾸는 말입니다. 불의한 곳이 아닌 거룩한 곳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연락이 아닌 영혼을 구원하는 데, 사치나 쾌락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헌금에 인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데 쓸 것을 아껴서 선교헌금을 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10-12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선교헌금을 후하게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직장생활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맡은 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사업을 하나님의 일로, 세상의 직업을 성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세상의 직업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 직분에 충실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사업에 충성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나라 사업에 충성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벌기만 하면 됩니까? 목적이 선하다고 과정은 악해도 상관없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목적 지상주의를 경고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비성서적입니다.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처음엔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비에 쓰겠다고 선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물질로 교회에 봉사하겠다는 좋은 목표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들어갑니다. 돈벌이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때부터는 재물이 목적이 되고, 하나님은 수단이 됩니다. 우선순위에서 물질이 1번이 되고, 하나님은 2번으로 밀립니다. 미국의 큰 플라스틱 회사 사장인 스텐리 템 씨는 날로 번창하고 바빠만 가는 회사 일로 인해 옛날처럼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회사가 도산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물에 빠져가던 베드로가 주님을 찾음으로 극적으로 구원 받았던 일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급히 변호사를 찾아가서 이런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우리 플라스틱 회사의 사장은 하나님이시며 매 수익금의 51%는 사장님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매일 2시간씩 회사 일을 사장이신 하나님과 상의했습니다. 하루 2시간씩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 후에 그 회사는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그는 수익금의 51%를 어김없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결과 연간 200만 달러 이상의 순이익금을 내는 회사로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1순위로 삼았더니 나머지 2, 3순위를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인에게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맡기셨던 것을 주인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 때 부끄럼을 당하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맡은 것을 주인이 보시기에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야말로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남을 생을 주님의 기뻐하시는 청지기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모든 자녀들이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게 하시고, 부요하고 풍성하여 베풀며 살게 하옵소서. 나의 삶, 나의 물질, 나의 시간, 나의 재능과 은사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사용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달란트와 은혜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백배의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생애, 쓰임 받는 생애, 귀한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험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 눅 16:14-18
어느 의대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두 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학생이 병원의 로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게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를 본 한 학생이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저건 분명히 류마티스 관절염이야.” 그러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천만에, 저건 디스크가 틀림없어.”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다며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힘겹게 물었습니다. “저, 화, 화장…실이 어디죠?” 자신이 하는 일을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게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자존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되겠지만,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긍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기 분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지나칠 때입니다. 긍지는 속으로 가져야 합니다. 자부심은 자신에게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남에게 적용될 때 마찰이 일어납니다. 획일적으로 적용될 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연약한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줄 수 있습니다. 획일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똑같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할 때, 다양함의 멋을 알 때, 훨씬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섯 째 날 동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강하고 힘센 동물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작고 힘없는 동물도 만드셨습니다. 강자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약자도 만드셨습니다. 강자와 약자가 함께 어울려 사는 꿈을 꾸셨습니다. 강자와 약자가 더불어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꿈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건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창세기 9:3절에 보면 홍수 후부터 사람에게 육식이 허용됩니다. 아마 이때부터 동물들 간의 약육강식도 시작되었을 겁니다. 강자의 정의가 생겨난 셈입니다. 힘의 논리가 위력을 발휘하게 된 거죠. 요즘 미국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강자의 정의를 내 세우곤 합니다. 힘의 논리를 앞세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군 주둔비(방위비 분담금)를 말도 안되게 500%나 올려달라고 압박을 넣고 있습니다. 그것도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말이지요. 이것뿐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생화학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강자의 정의를 내세누는 일은 10여년 전 이라크전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이 이라크를 칠 때의 명분은 WMD(대량살상무기)였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간 이라크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유엔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를 침공하고, 그 후엔 ‘뭐, 없으면 말고’ 하는 식은 강대국으로서 무책임한 자세입니다. 미국이 강자의 정의와 힘의 논리를 내려놓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국제사회에 군림하라고 미국을 강대국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국제사회를 힘으로 평정하라고 강대국을 삼지 않았습니다. 약소국을 돌아보고, 약소국의 아픔에 동참하라고 강대국이 되게 하셨습니다. 미국이 이 사실을 알고 겸손하게 강대국의 사명을 감당했으면 합니다. 현재 우리사회엔 뚜렷한 강자가 없습니다. 대통령도 강자가 아닙니다. 그래도 강자가 있다면 그건 여론입니다. 대통령도 여론의 눈치를 보고, 거대 야당의 대표도 여론의 눈치나 살피고 있습니다. 무엇하나 여론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론은 생리상 좋게 쓰지 않습니다. 뭔가 지적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비판적이지 않으면 정부 기관지라고 하고 어용방송이란 말을 듣습니다. 여론은 본질적으로 비판적인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비판 기능을 잃어버린 여론은 맛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여론이 강자의 자리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현재의 여론은 강자입니다. 그렇담 여론은 강자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곧 이 사회를 좋게 이끌어야 합니다. 대결구도로 몰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론의 추이를 보면 다툼을 부추기고, 분열을 일삼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빅3로 불리는 신문들(조중동)은 대통령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합니다. 여러분, 강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강자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한없이 강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강자의 정의로 약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고, 힘의 논리로 연약한 자들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받으셨습니다. 대신에 강자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강자는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많은 것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다른 사람보다 더 힘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가지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지위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살고 있습니까?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건 동시에 빚이라는 걸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 내 놓아야 합니다. 많이 받아 많이 누렸으면, 또한 많이 베풀고 많이 나눠야 합니다. 많이 받은 걸 자랑하고, 많이 누리는 것에 자만해선 안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많이 베풀고 많이 나누는 삶이 이론상으로는 쉬울지 몰라도, 실제로는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돈과 초월한 사람처럼 보여도,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보여도, 누구에게나 그 안엔 소유욕이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바리새인들입니다. 16:1절에 보면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엔 제자들만 있었던 게 아니고, 바리새인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반응이 본문 14절입니다.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비웃었습니다. “비웃거늘”의 원어 ‘에크밋테리조’는 ‘심하게 조롱하다’는 뜻입니다. ‘한낱 시골 촌뜨기 주제에 네가 뭘 안다고 까부느냐’는 식으로 심하게 조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해도, 스스로 교만한 자들은 마음의 눈과 귀가 어두워져 있으므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을 수 없다는 걸 분명히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긴 했지만, 말씀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말씀을 사모할 리가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니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할 리가 없습니다. 말씀에 아멘이 없으니 말씀에 순종할 리가 만무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 나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주일이니까 자동적으로 교회에 와서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시간되었으니까 습관적으로 예배하는 자리에 와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어떤 설렘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거룩한 흥분이 있습니까? 설교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아멘하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느냐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혹 어쩌다 말씀이 들어간다고 해도, 자기 생각이란 채에 말씀이 걸러지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일치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 말씀을 수용하는 잣대가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에 속하느냐, 진리에 속하지 않느냐에 있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생각과 일치하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마음의 쓰레기통을 비웠습니까? 예배자로 서기 전에 자기 확신의 굴레를 벗어던졌습니까? 말씀을 듣기 전에 자기 생각의 좁은 틀에서 빠져나왔습니까? 우리는 마음의 쓰레기통을 비워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살다보면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로 인해 마음이 오염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기 전에 먼저 마음의 쓰레기통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확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종종 자기 확신에 속고 살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확신하고 있는 것이 다 맞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히 틀린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의 틀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렘 23:29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방망이를 가지고 자기 생각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말씀으로 생각의 틀을 다시 짜야 합니다. 이 틀이 참 중요합니다. 네모 틀로 찍으면 네모가 나오고, 세모 틀로 찍으면 세모가 나오듯이, 말씀의 틀로 찍으면 말씀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자기 생각의 틀을 깨버리고 말씀의 틀로 짜시기를 바랍니다.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첫째, 우리가 말씀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우리가 말씀이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다 듣고 나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신통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9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 말씀은 자기들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거스린 겁니다. 그들은 물질을 쌓는 것에 주로 관심이 있었지, 물질을 나누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구제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율법을 준수하는 차원에서 했지,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나눔의 정신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13절을 보세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재물이 더욱 넘치게 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고, 빈핍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의 상관관계를 부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돈이 되든 되지 않든, 하나님을 1순위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돈이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꼭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결과로 축복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복을 받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와 사회가 일치된 시대였으니까 곧 그들은 사회의 특권층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특권을 이용하여 축재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받은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것이 정당하고,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예수님이 오히려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난했습니다. 가진 게 없었습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출신지도 변변찮지, 학력도 내세울 게 없지, 그렇다고 부모가 유명한 것도 아니지, 지연, 학연, 혈연 등, 자기들과 비교하여 무엇 하나 나은 게 없는 시골 촌뜨기가, 자신들이 정당하게 누리는 특권을 공격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는 체 하고 있다고 예수님을 비웃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누구든지 자신들의 이권에 침해를 당한다고 싶으면 공격적으로 돌변합니다. 평소엔 다 좋습니다. 안 좋은 사람 없습니다. 자기와 관계가 없으면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히면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합니다. 계산적으로 바뀝니다. 우선 자기부터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공통된 속성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을 가졌으니까 조금은 다를까요? 물론 조금은 달라야죠. 그러나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이해관계에 얽히면 예민해집니다. 이권이 걸려있으면 신경이 날카로워 집니다. 얼굴을 싹 바꿉니다. 신앙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말씀은 증발하고 없습니다. 기도할 때의 거룩한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아시죠? 누가 좋은 사람이고, 어떨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걸요. 결혼을 앞 둔 사람들은, 반드시 대판 싸워보고 나서 결혼을 하면 좋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고, 성격이 나타납니다. 그때보고 아니다 싶으면, 빨리 포기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귄 것이 아깝다고, 결혼하면 고쳐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여러분, 맞지요? 예수님은 아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옳다고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옳은 사람들이 아니란 걸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옳다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또 스스로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사람들을 의식한 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게 어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대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서기관들이 종교적인 규례를 만듭니다. 그들은 힘든 종교적인 규례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길 좋아했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쁜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지키기 어려운 규례들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을 지키는 사람을 의인으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결국 자신들만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하면 옳은 사람이라고 각인되어 있습니다. 감히 바리새인들이 옳지 않다거나, 그들이 불의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규례들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동기가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기 위함이 아닌 사람에게 있는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떠들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보셨습니다. 자신들의 배만 불리려고 하는 걸 보셨습니다. 그걸 아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혹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그들과 닮은 모습은 없습니까? 혹 자신의 신앙생활을 최고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말씀이 아닌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까? 나만큼만 하라며 자신을 은근히 내세우지 않습니까? 나만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며, 자만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내가 사는 방식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남을 비판하려고 했던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일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입술을 얼른 가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만 옳다며 스스로를 높이는 자를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자신이 그를 수 있고 남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말씀만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옳은 것은 말씀 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16-17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둘째, 우리가 말씀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에 성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 소수의 사람들이란 종교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손에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말씀을 맡은 자들의 책임이 컸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였습니다.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말씀을 자기들 편리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 잘못된 해석을 가지고 주님께 대들기도 했습니다. 말씀을 잘 모를 때 용감합니다. 말씀을 알면 알수록 고개가 숙여집니다. 원래 무식이 용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해도, 말씀에 무지한 바리새인들은 그걸 수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법에 익숙해 있었던지라 그들이 복음이란 말에 생소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율법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이유도 굳이 못 느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자동구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6절하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사람마다” 곧 천국의 개방성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개방적이라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침입하느니라” 곧 침노하는 자의 천국을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가만있는 자가 아닌 침노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고 보았을 겁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7절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문제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칼빈은 자본주의를 말했고,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말했습니다. 똑같은 성서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여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문제는 성서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엔 문제가 없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옳습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천지가 없어졌으면 없어졌지 말씀은 영원불변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맡은 바리새인들이 호되게 당하는 것을 보고, 설교자로 부름받은 저는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말씀을 바로 전하고 있는가, 말씀을 왜곡하거나 잘못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내 심정이 아닌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가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성서 본문을 읽어놓고 본문과는 전혀 동떨어진 엉뚱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설교 준비를 하는데 몇 시간씩 쏟고 있지만, 그분 앞에서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니터링하실 때 지적을 많이 받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교를 열심히 해도, 여러분이 잘 안 들으면 소용없습니다. 또 여러분이 아무리 설교를 잘 들어도 제가 설교를 잘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우선은 제가 설교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야 합니다. 말씀이 전달되는 통로로서 인격적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걸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여러분이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바로 들으셔야 합니다. 곡해하여 듣지 않고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의 심정,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18절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셋째, 우리가 말씀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우리는 말씀의 생활화를 이뤄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혼을 허용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니 이혼을 남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근거로서 그들은 모세의 이혼에 관한 규례를 들었습니다. 모세의 법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아내를 버리는 죄를 정당화했습니다. 보수적인 샴마이학파에서의 이혼 조건은 아내의 부정이나 율법 파기 등에 국한시키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진보적인 힐렐학파에서의 이혼 조건은 이유를 불문하고,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를 밝힐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당대를 대표하던 두 학파 모두가 이혼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이혼문제를 꺼내신 배경에 관심이 쏠립니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무질서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이 부도덕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세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를 율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버리고 문란한 결혼생활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이혼이 합법적이라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부부가 이혼하는 것이 율법을 범한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이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내미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4:1-4절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6-8절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끝부분에 있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보내라고 한 것은,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마지못해서 허락한 것이지, 이혼이 가정을 지으신 하나님의 원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원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가도, 가정이 온전히 보전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원뜻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혼을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가 아닙니다. 가정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가정들이 너무 쉽게 깨지고 있습니다. 부부가 살다보면 서로간의 다툴 일이 왜 없겠어요? 차라리 갈라서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왜 없겠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혼을 막으십니다. 이혼의 아픔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장난삼아서라도 “우리 이혼하자”는 말 하지 마세요.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말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 한 마디가 멀쩡한 가정을 깰 수도 있고, 금이 간 가정을 회복시킬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장으로서의 가정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이 말씀의 실천 현장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말씀의 생활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혼을 권유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 교회 식구들의 가정이 말씀에 확고히 서서, 조금도 흔들림 없는 가정,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가정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스스로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옳게 보이려고 말씀을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행동과 말씀이 충돌할 때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생활화를 이뤄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도 중요하고,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생활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활 속에 스며들고 생활이 말씀 위에 확고히 서야 합니다. 특히 우리 생활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는 가정이 말씀으로 인해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하나님이 찬성하시는 것을 찬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항상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주님만을 섬기며, 그가 기뻐하는 것을 취하고,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부자와 거지 나사로 / 눅 16:19-31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여러분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다들 후회를 해보셨을 겁니다. 그 때는 그게 옳았는데,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은 소원이 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음을 느낍니다. 제목을 “후회”라고 붙인 노래나 노래 내용이 “후회”인 것을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해봤습니다. 몇 백개나 나오더라구요. 그 중에서 2개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래 힙합 그것이 날 죽였어/ 그리도 날 공부와 멀리하게 했던/ 그 라임 그 플로워/ 마약같은 여자같은/ 아주도 유치한 생각을 하게 만든 힙합/ 이렇게 난 또 다신 난 괴로워/ 가오의 정신이 오가며/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며 생각을 하네/ 공부나 할걸.” 대한민국 Hip Hop Flex가 불렀던 “후회”란 노랫말의 일부입니다. 그 땐 노는 것이 좋았습니다. ‘공부가 뭐 인생의 전부냐’며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힙합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공부나 할걸” “불러 본다고 불러 본다고 네가 돌아올 수 있을까/ 후회스러워 후회스러워 정말 너를 사랑했는데/ 생각해봐 줘 생각해봐 줘, 지금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지/ 그러길 봐래 그렇다면은 내 품으로 돌아와줘요.” 혜은이가 불렀던 “후회”란 노랫말의 일부입니다. 그땐 그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과 헤어지면 더 좋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후회스러워 후회스러워 정말 너를 사랑했는데” 이처럼 후회 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후회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지 않고 놀았어도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다시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기회가 있고 아니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는 기회가 없는 후회가 있습니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있습니다.
그런 후회를 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생전에 이렇게 호언했습니다. “기독교 전파에는 수세기가 소요되었지만 나 볼테르는 50년 안에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죽은 후에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20년 후 제네바 성서협회는 그의 집을 사들여 파리본부를 세우고, 전 세계에 성서를 보급했습니다. 볼테르는 임종직전 이런 탄식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성경 인물 가운데 크게 후회하면서 탄식했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에서라는 사람입니다.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 12:16-17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나라가 강성해지고 안정되었을 때 그에게 찾아온 것은 영적인 나태함입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 나가 열심히 전투하고 있는데, 오후에 늦잠 자고 일어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정욕에 사로 잡혀 그 여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범죄는 거기가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살인 교사죄까지 범하고 말았습니다. 왕의 권력을 남용하여 한 가정을 파괴하고도 편안히 지낼 때, 하나님께서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보내시고 그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그의 죄를 깨달았을 때 탄식하고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 다윗의 삶이 어떠했는지 성경은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후회해서는 안 될 일들을 저지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볼테르, 에서, 다윗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이 시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들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번 듣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냥 한 번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대체로 중요한 내용을 가르치실 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설교 본문으로 대한 것만 해도 아마 수 차례일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의 내용과 줄거리는 거의 쭉~ 꿰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할지도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 이 둘 중에서 누가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인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관심은 나사로보다는 부자에게 가 있습니다. 말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게 말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말만 요란했지 순종이 없습니다.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연수만 늘어가지 신앙의 깊이는 그대로입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삶의 기초가 심하게 흔들립니다. 약간의 위기만 닥쳐도 믿음이 심하게 요동합니다. 여러분, 아는 말씀이라고 건성으로 듣지 마세요. 몇 번 들어본 말씀이라고 흘려듣지 마세요. 오늘 처음으로 듣는 말씀처럼 말씀에 대한 기대를 갖고 들으세요. 19-2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본문엔 먼저 한 부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면 그는 부자이긴 한데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한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이기는 하나 부(富)라고 하는 물질 속에 그 이름이 파묻혀 버렸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떵떵거리며 사는 부자였지만 그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부자라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유명인사가 될 수는 없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자의 이름을 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부자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빠져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는 겉으로 많이 가졌으나 속으로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화려한 부자였으나 하늘에서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거지의 이름은 성경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가 비록 가난한 거지였지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사로”란 말은 ‘엘리에셀(Eleazaros)’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하나님은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비록 그가 거지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게 다 풍요해도 하나님이 없으면 가장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부족해도 하나님이 있으면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와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아/ 참된 부요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유혹하려고 세상 바람 휘몰아쳐와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어 자비로운 주의 음성을” 그렇습니다. 그 안에 주님이 있는 사람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부자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부자가 아닐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히 부자입니다. 한 번 따라하세요. “나는 부자다.” “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부자다!” 아니, 우리는 정말 부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상대적 빈곤에 빠져서 그렇지, 이 지구상에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 억 명입니다. 하루에 한 끼밖에 못먹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니 굶어죽는 사람들이 애들만 1초에 서른네 명인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딤전 6:8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히 13:5절상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스스로를 부자처럼 생각하며 살라는 겁니다. 더 버는데 관심을 갖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나누는데 관심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나누는데 무관심했습니다. 버는 데 관심이 있었고, 쌓는 데 신경을 썼으며, 쾌락을 따르는데 마음이 빠졌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성경에 죄명이 없는 또 하나의 무서운 죄가 있는데, 그게 곧 무관심의 죄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부자는 무관심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자색 옷은 겉옷을 말하고 고운 베옷은 속옷을 말합니다. 자색 옷은 당시 희귀한 조개의 피로 염색하거나 아라비아산 염료로 염색한 것입니다. 베옷은 애굽산 세마포로 귀족들이 입는 속옷입니다. 이런 옷들은 당시 귀족들과 왕족들이 입는 옷으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비싼 고급 의상이어서 서민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옷입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자기 몸을 치장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날마다 주흥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술이 있는 곳엔 반드시 방탕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흥을 즐기며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인생의 본질인 영혼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무가치한 일에 돈을 쓰고, 별로 가치없는 일에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을 겁니다. 그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기에 틀림없이 행복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부자 스스로도 행복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 행복의 기준이었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물질을 통해서 잠시 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머지않아 그 물질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이 이 땅의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가치의 척도를 세상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행복의 기준이 불신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가치 척도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지 않고 가치 척도를 말씀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확연히 다른 것이라고는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나는 그 점에 있어서 그들과 확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졌다면 최초의 변화가 오는 곳이 속입니다. 속사람에게 변화가 옵니다. 영혼에 변화가 오고, 사고에 변화가 옵니다. 가치 판단 기준이 달라집니다. 투자 기준이 달라집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이런 변화가 전혀 없다면 잘못 믿는 것입니다. 처음엔 변화가 희미하게 감지되고, 그 속도도 무척 느리겠지만, 차츰 가속도가 붙게 되고, 변화가 눈에 띨 정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사로는 거지입니다. 몸이 불편하여서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악성 피부병으로 온 몸이 헐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의 개들이 진물 냄새를 맡고 와서 그 상처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나사로에게는 개를 쫓을 힘도 없었나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가는 한 가엾은 인생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천막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채 누워 지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노숙자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그나마 개에게 빼앗길 때도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보다 더 불행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건 지옥 생활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나사로처럼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나사로처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나사로의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번 따라하세요. “내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자의 행복으로, 나사로의 불행으로 부자의 넉넉함으로, 나사로의 쪼들림으로 막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시 힘든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인생의 결말은 근본적으로 happy ending입니다. 과정엔 십자가가 있고 좁은 길이 있지만, 결과는 부활의 영광과 천국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크고 작음의 차이는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그 차이가 많이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나라와 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거지와 부자가 둘 다 죽었습니다. “거지가 죽어” “부자도 죽어” 우리가 다시 한번 새겨들어야 할 진리는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건 한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건 죽음입니다. 죽음은 부한 사람에게도 찾아오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평소 건강한 사람에게도 찾아오고 병약한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대장부에게도 찾아오고 졸장부에게도 찾아옵니다. 다복한 사람에게도 찾아오고 박복한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이라는 같은 운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왕기상 2:2절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진리이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또 하나의 진리가 있는데 그건 죽음의 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죽음의 때를 모르게 하셨습니다. 그걸 알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의 때를 알면 인생을 사는 재미가 없을 겁니다. 삶의 기대도 없고 스릴도 없어 삶이 따분해질 겁니다. 성경을 보면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거지가 죽어”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나사로에 대해서는 죽은 것으로 모든 게 끝났습니다. 부자에 대해서는 죽어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나사로는 누가 묻어주기라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맘 좋은 사람이 적당히 거적에 둘둘 말아서 대충 묻어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자는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화려하게 장례식을 거행했을 겁니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각계에서 보낸 조화들이 줄지어 서 있었을 거고, 붐비는 조객들로 발붙일 틈이 없었을 겁니다. 나사로의 죽음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초라하여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에 비교해 보면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살아서 차별대우 받은 것도 억울한데, 죽은 후에까지도 차별받았으니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것에 대해 별 관심 없어 합니다. 가만 보면 우리는 장례식에 관심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거냐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유교적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엄밀하게 말하면 장례식은 고인과는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습니다. 화려하게 장례를 치른다고 화려한 죽음이 되고, 수수하게 치른다고 초라한 죽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체를 명당자리에 모신다고 효도하는 것이 아니고, 화장을 한다고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살아서 효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일 뿐입니다. 자기 위안을 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과, 살아있는 형제들 사랑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더 중요하고 그게 보다 우선적인 것입니다. 또한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그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관심입니다. 죽음 앞에 서야 할 자신을 미리 바라보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와 불신자가 가장 극명하게 다른 점은 죽음에 대한 태도입니다. 불신자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대로 그날 끌려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항상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맞기에 아직은 부족하다고 여길 뿐이지 실제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전 15:55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어차피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겠습니까?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겠습니까? 적극적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기 앞에 닥친 죽음을 예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 죽을 것처럼 살면 안됩니다. 언젠가는 죽어 주님 앞에 서야 됨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거지는 장사되지는 못했지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장사되었던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아브라함의 품이냐 음부냐가 결정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서 지극히 당연히 낙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거지로 살았다고 해도, 죽어서 천국 갔다면 그는 실패한 인생을 산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부유하고 건강하고 권세있게 살았다고 해도, 죽어서 지옥에 갔다면 그는 실패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성경은 지상의 행복이 곧 영원한 행복은 아니며, 지상의 불행이 곧 영원한 불행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富) 자체는 죄가 아니고, 소유자체가 악(惡)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또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물질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 맘대로 썼습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노는 데는 아까운 줄 모르고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서 인색했습니다. 자기 영혼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 점이 걸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지옥 갔다고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부자가 누구를 지칭하는가를 보면 그게 풀릴 수 있습니다.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부자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잘 섬기고 물질의 축복도 받은 사람들입니다. 회당에서도 인정받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예수도 잘 믿고 부자로도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인정받아 직분자로 살고 사회에서도 출세하여 존경받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서, 교회와 사회에서 동시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대해 인색하고 자기 영혼에 대해 무관심하고, 이웃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 기준으로는 분명히 장학생인데, 하나님의 평가 기준으로는 구원의 커트라인에 낙제생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23-26절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음부”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성경 원어적으로는 ‘하데스’인데요. 성경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어둠의 세상, 징벌의 세상, 고통의 세상이 바로 이 음부(하데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음부에서의 징벌과 고통이 어느 정도일까요? 24절에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옥의 끔찍한 고통을 설명하는 성경은 종종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하는 고통 상태’로, 그리고 그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타지 않으면서 고통은 점점 가중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점점 더해가는 고통이 멈추지 않는 곳임은 분명합니다. 이상과 같이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고통당하던 부자에게 아주 환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23)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나사로가 믿음의 조상이자, 또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듯 보일 수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있다는 말이고, 지옥에 있던 부자가 그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밝은 데서는 어두운 데가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데서는 밝은 데가 잘 보이지 않습니까? 부자는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천국에서 평안하고 행복해 하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부자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 부자는 아직도 자신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있으면서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며, 또 나사로를 아직도 자기 집 문간의 거지로 여겨 그에게 심부름을 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받았다”는 말이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좋은 것과 자신이 일체가 되었다.’ 또는 ‘좋은 것, 곧 이 세상의 것에 자신을 붙들어 매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이 없습니다. 곧 이 부자가 나사로든 누구에게든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자가 음부에 떨어진 것은, 이생에서 하나님도 말씀도 이웃도 모른 채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지옥의 실재에 대해서 누가 말씀하고 있습니까? 구약 성경입니까? 율법입니까? 선지자입니까? 아닙니다. 지옥에 대해서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부자는 자신이 음부에 떨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더구나 나사로가 천국에 갈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뒤바뀐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깊은 후회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때가 늦었습니다. 부자는 알았습니다. 그때는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물 한 방울의 긍휼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나마 거절당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몇 가지 간청을 더해 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거절을 당합니다. 27-28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런데 부자의 간청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소원이 있습니다. 정말 기막힌 소원입니다. 지옥 불꽃 가운데서 절규하는 소원입니다. 왜 이런 간청을 합니까? 자신이 지옥에 와 보니 괴로움도 이만한 괴로움이 없고, 고통도 이만한 고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비록 지옥에 떨어졌어도, 세상에 남아있는 자신의 가족들은 ‘절대로 음부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기 형제들도 자기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지옥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아브라함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죠.
29-31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아브라함의 대답은 세상에는 성경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의 말이나 선지자의 말로는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 그들을 찾아가서 말하면 비로소 회개하고 인생을 제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서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믿겠다.’ ‘내가 주님을 한 번 보기라도 한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는 기적을 매일같이 체험했지만 끊임없이 불평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기적도 일상화되면 기적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세와 선지자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결단하고 순종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물론 기적이 있으면 우리는 더 쉽게, 그리고 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남겨진 다섯 형제입니다. 지금 우리 앞서 먼저 죽음을 맞았던 우리 형제와 가족들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도 깨닫고 결단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당할 이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우리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분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시고, 참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충분히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 그 분 안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은혜에 힘입어 인생의 마지막 때를 슬기롭게 대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을 기회를 주신 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중에 하나임을 믿게 하옵소서. 그 소중한 기회를 낭비하며 살지 않게 하옵소서. 기회를 꼭 붙잡고 잘 활용하므로 영원한 나라에서 활짝 웃으며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