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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인간도 미의 법칙에 따라 건조한다
- 예술
뉴욕에서 세익스피어의 저명한 극 ≪오셀로≫를 공연할 때 미국의 명배우 월리암 바즈는 뛰어난 연기로 자기가 맡은 역인물 이아고의 지루하고도 무치한 성격을 아주 생동하게 표현하여 관중들로 하여금 이아고를 몹시 증오하게 하였다. 무대에서 오셀로가 이아고의 간계에 넘어가 데즈디모너를 교살할 때 관중석의 한 군관은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바야흐로 등장하고 있는 이아고를 권총으로 쏴죽였다. 극장은 불시에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제야 연극이란 것을 깨달은 그 군관은 몹시 후회하다가 당장에서 자살하였다. 이 사실은 온 뉴욕시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나중에 시민들은 연극예술의 이 두 희생자를 한데 합장하고 무덤 앞에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와 가장 이상적인 관람자≫란 비문을 새긴 묘비를 만들어 세웠다. 이와 비슷한 사실은 우리 나라에도 있었다. 해방구에서 연극 ≪백모녀≫를 공연할 때 관중은 지주 황세인에 대한 분개로 하여 무대에 올라가 황세인을 두들겨 패려 하였으며 ≪지주 황세인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우렁차게 불러대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예술의 감화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동적이고 구체적이고 감동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현실생활을 반영하여 사람들을 감화하고 교양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주요한 특성이며 사회적 기능이다.
예술의 특성
인간이 실천과정에서 주위세계와 발생하는 관계에는 인식적 관계(이것은 진짜와 가짜와의 관계이다) 도덕윤리적 관계(이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과의 관계이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미적 관계(이것은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과의 관계이다)도 있다. 인간은 법칙과 조건에 따라 주위세계를 의식적으로, 합목적적으로 개조할 때에도 자기의 심미적 요구에 따라 이런 개조활동을 진행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어디서나 내적 척도를 대상에 운용한 줄 안다 그러므로 인간도 미의 법칙에 따라 건조한다.≫(≪1844년경제학철학수고≫,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42권, 97쪽)고 말하였다. 원시사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제품을 생산할 때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가급적으로 내적 척도에 따라 미에 대하여도 추구하여 왔다. 예술은 원시적 노동과정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후에 와서 예술은 정신적 활동의 특수형태로 점차 분화되었으며 따라서 예술적 창조는 예술가의 전문사업으로 되었다. 그런데 예술가와 인민대중이 공통적 언어를 가질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이 주위세계에 대하여 이런 보편적인 심미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각이한 형태로 미의 법칙에 따라 생산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하는 사회적 의식의 일종 형태이며 토대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의 한 부분이다. 예술은 구체적이고 생동적이고 감동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현실을 반영하며 현실을 평가하는 특수한 미학형태이다. 예술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기나긴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쳤으며 이 발전과정에서 건축, 회화, 조각, 음악, 무도, 희곡, 문학 등 형태가 이루어졌다.
예술도 기타 사회적 의식형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객관적 세계의 반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반영하는 직접적 대상은 인간의 사회적 생활이다. 예술이 자연현상, 예를 들면 별, 달, 산, 강, 꽃, 풀, 벌레, 물고기, 새, 짐승 같은 자연현상을 반영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되며 인간의 사상감정을 반영한 것으로 된다. 예컨대 정판교가 그린 참대, 제백석이 그린 왕새우, 서비홍이 그린 말은 모두 그 어떤 감정과 심미적 취미를 표현하였다. 이런 작품들은 작자의 감정을 토로하였고 현실생활에 대한 작자의 감수와 견해를 토로한 것이므로 인간의 사회적 생활을 각이한 정도로 반영한 것이다. 제백석이 그린 생동하는 왕새우들을 볼 때나 누런 벼이삭 밑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개구리를 볼 때면 우리는 생활 속에 활력이 충만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요컨대 인간의 사회적 생활, 인간의 투쟁과 사상과 감정을 떠나서는 예술이 있을 수 없다.
≪인민의 생활 가운데는 본래 문학예술의 원료로 되는 자원이 존재하고있다.…그것들은 모든 문학예술의 무궁무진한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 ≪모택동선집≫, 제3권, 1965년판, 1253쪽)
그러므로 생활에 심입하여 생활을 요해하는 것은 예술창작에 종사함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다.
예술이 상부구조의 일부분인 이상 계급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계급성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예술의 또 하나의 뚜렷한 특성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예술은 예술가가 소속되어 있는 그 계급의 근본적 이익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이 언제나 일정한 계급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신은 ≪문학도 사람을 쓰지 않고는 성을 표현할 길이 없으며 사람을 그것도 계급사회에서의 사람을 쓰자면 절대 그의 계급적 속성을 버릴수 없게 되는 바 그것은 사실 필연적인 것으므로 속박을 들씌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모택동동지는 인간성론에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구체적인 인간성이 있을 뿐이고 추상적인 인간성은 없다. 계급사회에 있어서는 계급성을 띤 인간성이 있을 뿐이고 초계급적인 인간성은 없다.≫(≪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 ≪모택동선집≫, 제3권, 1965년판, 1268쪽)
초계급적인 인간성이니 초계급적인 예술이니 예술을 위한 예술이니 하는 논조는 계급성을 덮어감추기 위한 착취계급의 기만술에 불과하거나 소자산계급작가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수호전≫과≪탕구지≫는 다 양산박에서 활동한 농민봉기군을 제재로 하여 쓴 소설이지만 농민봉기군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 선명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비극의 어버이인 에스힐로스와 희극의 어버이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단테나 세르반테스와 마찬가지로 모두다 강렬한 경향시인이었고 또 쉴러의 간계와 사랑이 가지는 주요한 가치는 그것이 독일 최초의 정치적 경향 희곡이라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우수한 소설을 쓰고 있는 현대의 러시아 및 노르웨이 작가들도 모두다 경향작가들 입니다. 그러나 경향은 환경과 사건 가운데서 특별한 지적 없이 자연히 흘러나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엥겔스로부터 M. 카우츠키에게≫,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한문판, 제4권, 454쪽)
소설, 영화, 희곡, 회화 등 예술작품은 언제나 예술가의 애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생활재료를 선택함에 있어서 경향성이 결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예술은 정치의 단순한 부속물이 아니며 정치강령의 형상적 도해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 정치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운명을 묘사하여야 한다. 그러면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한번은 나폴레옹이 괴테와 비극에 대한 문제를 담론할 때 고대의 운명이라는 이 개념이 지금에 와서는 정치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뜻인즉 현대에 있어서는 주로 정치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아주 심각한 말이다. 의식형태로서의 예술은 흔히 정치를 매개로 하여 토대에 종속된다. 그것은 정치가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치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종교, 철학, 도덕 등 기타 사회적 의식형태의 영향도 받는다. 각종 상부구조는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준다. 그러나 문학예술의 발전을 추진하는 종국적 동력은 토대이다.
예술의 세번째 특성은 예술도 기타 사회적 의식형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에 대하여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에눌에 관해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것의 일정한 개화기는 사회의 일반적 발전, 따라서 또 말하자면 사회조직의 골격인 물질적 기초의 발전에 결코 대응하지는 않는다.≫(≪정치경제학비판≫ 서론,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제2권, 142∼143쪽)
마르크스는 희랍의 예술,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현대의 예술과 비교하면서 당시의 생산수준이 현대의 생산수준보다 훨씬 낮았지만 희랍의 예술과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현대의 예술보다 그 수준이 훨씬 높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보다시피 예술과 생산은 그 발전수준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술은 토대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하는 것은 예술의 발전방향과 예술이 반영하는 내용이 토대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말이지 예술의 발전수준이 꼭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토대에는 생산력이 포함되지 않는다. 예술은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생산력 발전의 불균형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고의 예술수준이 희랍의 예술수준보다 높으며 현대퇴폐주의자의 예술수준이 문예부흥시기의 예술수준보다 높다고 인정하는 그런 용속적인 그릇된 관점에 빠져들어갈 수도 있다. 토대에 대한 예술의 상대적 독립성은 예술관점 등 관념적 재료의 계승성에서도 표현된다. 일정한 시기의 예술은 전인들의 예술관점과 예술이론을 접수하고 계승하여야 하며 그것들을 가공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관점과 이론은 목전의 토대에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인들의 관점, 이론 등에 대한 취사방향과 가공방향은 또 놘 면으로부터 볼 때 결국 현실의 토대와 예술가의 사회적지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상대적 독립성은 또한 예술과 상부구조의 기타 각 부분이 서로 영향을 주는데서도 표현된다.
예술은 전치의 영향을 받는 외 기타 사회적 의식형태의 영향도 받는다. 정치는 예술에 작용을 하며 예술도 정치에 반작용을 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상부구조와 토대간의 그리고 상부구조의 각종 요소들간의 극히 복잡다단한 본래의 변증법적 관계를 너무 단순화하는것은 역사적 유물론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용속화하는 것이다.
예술의 네번째 특성은, 비록 예술과 과학은 다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사회적 의식형태의 하나라는 이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그 방법에 있어서는 예술은 과학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과학은 개념과 논리의 형식으로 현실을 반영하지만 예술은 생동적이고 구체적인 에술적 형상으로서 현실을 반영한다. 예술은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사람들의 일정한 지위, 관점, 경향, 이상, 염원을 반영한다. 러시아의 문예평론가이며 철학7~l인 벨린스키(1811∼1848년)는 ≪철학자는 3단논법으로써, 시인은 형상이나 화폭으로써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 사실은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예술이 사회적 생활을 대상으로 할 때 그것이 직접 묘사하는 것은 일반성인 것이 아니라 일반성을 내포한 개별성인 것이다. 예컨대 예술의 직접적 대상으로 되는 지주는 결코 일반적인 지주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 지주거나 저 지주여야 한다. 가극 ≪백모녀≫에 나오는 황세인, 영화 ≪홍색낭자군≫에 나오는 남패천, 소설 ≪홍기보≫에 나오는 풍란지는 개별성이 각기 다른 지주형상이다. 전형적 환경 속의 전형적 성격을 진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기본특성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인물마다 전형입니다만 동시에 또 특정한 개개인이기도 하여 로헤겔의 말을 빌면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엥겔스로부터 M. 카우츠키에게≫,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한문판, 제4권, 453쪽)
예술이 묘사하는 개별성은 또 반드시 사물의 일반성을 반영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될 수 없다.
예술적 전형은 일반성과 개별성의 변증법적인 통일이다. 일반성이란 예술적 형상이 일정한 사회적 생활을 본질과 법칙을 표현하는것을 말한다. 개별성이란 예술적 형상의 선명한 개별성 특징을 말한다. 일반성은 개별성 속에 들어있으며 개별성을 통하여 표현된다. 예술실천이 증명하다시피 성공적인 예술적 전형은 그 어느 것이나 다 일반성과 개별성의 완미한 통일인 것이다.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인은 특수한 것을 포착하여야 한다. 만일 그 속에 건전한 요소들이 있다면 시인은 그 특수한 것을 통하여 일반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다.≫
현실생활 중의 우연한 개별적 현상을 포착하고 묘사하는 것은 예술창작에서 공식화와 개념화를 피면하는 방도의 하나이다. 그러나 예술이 묘사하는 우연적 현상은 결코 순수한 우연인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내포한 우연, 즉 본질적인 현상이며 필연적인 우연이다. 예술적 전형은 비록 생활에서 오지만 현실생활보다 그것은 더욱 집중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 ≪눈물자국≫에 나오는 현위서기 주극실이라는 이 예술적 전형근 당의 수많은 영도간부들의 우수한 품성을 개괄하여 형상화한 것이다. 예술가는 생활소재를 기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해서는 안되며 소위 생활의 진실성을 기계적으로 추구해서는 안된다. 작가는 예술적 전형을 창조할 때 현실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현상을 선택하고 개괄할 뿐만 아니라 생동적이고 구체적이고 감동적인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현실생활의 합법칙성을 반영하여야 하며 일정한 사회적 본질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사진식으로 생활을 기록하여 본질을 홀시하는 현상을 나열하게 되며 개별성을 일반성으로부터 갈라냄으로써 개별성을 과대하고 일반성을 포기하게 된다. 만일 예술적 전형의 창조가 없다면 그것은 극상하여 표면적 진실에는 도달할 수 있어도 예술적 진실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의 기능
예술의 주요한 기능은 아름다운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생활을 반영하며 생활에 영향을 주며 토대에 반작용을 하는 것이다. 계급사회에 있어서는 각이한 계급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각이한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이한 계급의 예술작품이 노는 사회적 역할의 방향도 각이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현단계에 있어서 예술은 사회주의적인 새 사람을 양성하며 미에 대한 사람들의 감수력을 증진하며 심미관념을 양성하며 사람의 정조를 도야하며 사람들의 이상을 수립하며 인민의 정신경계를 제고하며 인민의 날로 장성되는 문화적 수요를 충족시키며 사회주의사회의 발전을 추진시켜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예술은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하며 사회주의적 정신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복무해야 하며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러면 예술은 어떻게 사회적 생활을 위해 복무하며 어떻게 사회적 생활에 영향을 주는가? 사회주의적 예술은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하는가?
첫째로, 예술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의 하나이다. 예술은 생동적이고 구체적이고 감동적인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현실생활을 재현할 수 있으며 생활의 이러저러한 본질적인 면을 반영할수 있으므로 생활을 심각히 인식하고 이해하도록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우수한 문학작품을 읽어보면 우리는 매개 시대의 사회적 생활의 진실한 면모를 요해할 수 있으며 사회역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생활을 심각히 인식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활관찰능력과 생활인식능력을 높일 수 있다. 봉건사회의 암흑상을 폭로한 ≪수호전≫과 ≪홍루몽≫,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의 암흑상을 폭로한 ≪아Q정전≫과 ≪밤중≫, ≪소나기≫ 그리고 새로운 인물, 새로운 사상을 묘사하고 낡은 사물과의 투쟁을 묘사한 새 중국의 문예는 우리들에게 사회적 생활에 대한 풍부하고도 구체적인 인식을 준다.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은 놀라운 예술적 필치와 훌륭한 문학적 언어로써 수많은 인물형상을 부각하였으며 봉건사회 몰락기의 착잡한 사회관계, 사상관계, 정치관계, 경제관계, 계급모순, 생활양식을 심각하게 해부하였다. ≪홍루몽≫은 형상적인 중국봉건사화몰락사이며 중국봉건사회에 관한 백과전서이기도 하다. ≪홍루몽≫은 역사과학서적으로서는 할 수 없는 감화적 역할을 한다. 엥겔스는 프랑스작가 발자끄의 ≪인간희극≫이 가지는 인식적 의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발자끄는 ≪인간희극≫에서 우리들에게 프랑스 사회의, 특히는 빠리의 상층사회의 탁월한 사실주의적인 역사를 제공해 주었읍니다…나는 여기에서 경제적인 세부(예컨대 혁명 후의 동산과 부동산의 재분배)에 있어서 조차, 당시와 모든 직업적 역사가, 경제학자, 통계학자들의 전체 저서에서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아내었읍니다.≫(≪엥겔스로부터 M. 하코네스에게≫, ≪마르크스 엥겔스선집≫,한문판, 제4권,462-463쪽)
둘째로, 예술은 중대한 교양적 역할을 한다. 예술은 사람들의 세계관, 도덕품성, 정신면모에 강유력한 영향을 준다. 우수한 예술작품은 사회적 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세계관, 인생관, 도덕관, 정조, 이상 및 기타 측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참다운 예술가는 생활을 애써 재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상과 생황양식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것, 생활 가운데서 어떤 것을 반대하고 수립하고 따라 배워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제시한다. 예술작품은 과학이론보다 구체적이고도 생동적이어서 광범한 대중에게 접수되기 쉬우며 따라서 그 역할도 더욱 광범위하다. 오늘 우리의 예술은 새로운 사상, 새로운 도덕을 형성하며 공산주의적 교양을 주며 인민을 단합시키며 적을 타격하며 중화를 진흥시키며 ≪4개 현대화≫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강유력한 도구로 된다. 예술가는 시대가 부여한 중임을 걸머지고 있다. 바로 스탈린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술가는 인간정신의 기사이다.
예술가는 전형적 형상을 부각할 때 언제나 우리들에게 인간의 내면세계를 제시하며 인간의 성격과 행위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을 보여준다. 영화 ≪온집안에 웃음꽃 피 어난다≫는 생동적이고 구체적인 예술적 형상으로써 수련이라는 이 농촌여성의 고상한 정조와 선량한 품성을 노래하였으며 강영의 낙후한 사상행위와 낡은 전통관념을 폭로하고 풍자하고 편달하였다. 이기심이 많은 강영은 처처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어떻게든 이득을 보려고 한다.
그는 시부모를 괄시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세간을 나겠다고 야단을 친다. 이러한 강영과는 달리 새로 시집온 둘째며느리 수련은 마음이 너그럽고 시부모를 공경하며 온순하고 양해성이 많으며 개인의 이속을 따지지 않는다. 수련의 이러한 미덕은 바로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 하의 가정윤리도덕을 반영한다. 그러나 수련이 강영의 눈에는 앞뒤로 남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강영의 이기적인 영혼과 수련의 선량한 성격은 그야말로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술의 교양적 역할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줄 수 있다.
셋째로, 예술은 또한 인간의 예술적 취미를 높일 수 있으며 건전한 심미관념을 양성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예술의 대상은… 예술을 이해하며 감상능력이 있는 공중을 창조한다.≫(≪정치경제학비판≫서문,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제2권, 120쪽)고 말하였다. 우리가 훌륭한 예술적 취미를 양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예술미를 보다 심각히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적 수양이 없는 사람은 훌륭한 예술작품을 보고나서는 흔히 훌륭하다!고만 말할 줄 알지 어디에 훌륭한 점이 있다는 것은 모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정한 예술적 수양을 쌓아야 한다. 예술적 작품과 그 미의 섬세한 차이를 보다 심각하게 이해하여야만 그것을 보다 심각하게 감수할 수 있다. 우수한 예술작품을 땁이 보면 예술적 취미를 높이며 건전한 심미관념을 양성하는데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예술적 수양이 있는 감상가로 되자면 일정한 예술지식과 기타의 지식을 구비하여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더러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며 괴상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면서음탕한 음악이나 건전하지 못한 예술작품들에 미련을 가지는데 이것은 자산계급의 부패한 사상의 영향을 받은데 그 원인이 있는 외예술적 수양이 없는 것과도 흔히 관련된다. 이런 사람은 예술에 대하여 저급적 취미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실제생활에서도 더없이 용속적 인 생활정취를 나타낸다.
러시아의 미학가 체르늬쉐프스키는, 예술의 심미기능은 그것이 생활의 교과서라는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심미는 현실생활의 각 측면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관련된다. 예술의 심미기능은 인간의 다종다양한 심미흥취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통하여 사회주의의 새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타 모든 기능은 모두 이 주요한 기능에 복종하며 이 주요한 기능의 도움에 의하여 표현된다.
예술에서의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인간의 미감을 통하여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이 인간에 대한 아무런 미적 감화력도 없어 관중으로 하여금 아무런 예술적 향수도 느낄 수 없게 한다면 예술의 인식적 역할과 교양적 역할이 엄중하게 약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의 미감적 역할은 예술작품의 기타 역할의 기초로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가는 언제나 미의 법칙에 따라 아름다운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예술적 형상은 심미적 인식의 집중적 표현이며 선진적 사상과 완미한 예술적 형식의 통일이다.
현실생활 가운데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더러운 것도 있다.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합법칙적으로 발생, 발전하는 새로운 사물, 창조적이고 생기발랄한 것과 생활 같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더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은 대립물의 통일이다. 아름다운 것이 없으면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없으며 더러운 것이 없으면 아름다운 것도 있을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은 더러운 것과의 비교 속에서, 더러운 것과의 투쟁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예술적 형상의 아름다움은 현실생활 가운데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것이다. 현실의 아름다움은 일차적인 것이고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차적인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예술가가 현실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가공, 제련하여 낸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이 현실의 아름다움에서 온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유물론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이 현실의 아름다움보다 고상하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변증법이다. 모택동동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 양자가 다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문예작품에 반영된 생활이 일반 실제생활에 비하여 더욱 고상하며 더욱 강렬하며 더욱 집중적이며 더욱 전형적이며 더욱 이상적일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며 따라서 더욱 보편성을 띠고 있다.≫(≪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 ≪모택동선집≫, 제3권, 1965년판, 1254쪽)
예술의 아름다움은 현실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것이지만 그것은 기계적으로, 사진식으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창조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런 창조적인 예술실천에서는 작자의 심미적 이상이 가득 차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여간만 감동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의 도리가 예술창작에서 심각하게 구현된 것이다. 여산 수봉사의 황암폭포는 그 기세가 장엄하고 그 기상이 천변만화하여 여간만 장관이 아니다. 이백은 ≪여산폭포를 바라보며≫라는 시를 썼다.
≪해비치는 향로봉엔 자욱한 보리안개, 저 멀리 앞강 위엔 폭포수 걸렸도다. 곧추 날아떨어지는 그 높이 삼천척, 구천에서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가!≫
이 시의 경계와 정조가 보여주는 예술의 아름다움은 현실의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답다. 이것은 위대한 시인의 예술창조성을 과시하였으며 위대한 시인의 심미적 평가를 표현하였다. 인도시인 타고르는 한송이의 장미꽃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한송이의 장미꽃이 민감한 사람에게 작용한 다음 그 사람이 자기가 장악한 표현기술과 표현형식으로 자기 몸에서 논 그 작용을 표현해야만 시적인 창조라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은 현실의 아름다움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더러움도 반영한다. 예술은 진정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사물을 반영할 뿐만아니라 허위적이고 악하고 더러운 사물도 반영해야 한다. 그래 야만사람들이 후자를 증오하면서 전자를 더욱 동경할 수 있다. 예술가가 선진적인 심미이상으로 현실의 더러움을 비판하고 폭로하기만 한다면 그 예술적 형상도 역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프랑스의 저명한 조각가 로댕(1840∼1917)은 본 장의 벽두에서 말한 세익스피어에 의하여 창조된 이아고의 형상 등을 예로 들어 ≪이처럼 명석하고 투철한 두뇌에 의하여 표현된 정신상의 더러움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제재로 된다≫고 말하였다. 이것도 예술에 있어서의 변증법이다. 현대경극 ≪갈밭의 불씨≫에 나오는 인물 조덕일의 형상도 아름다운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이 반영한 현실의 더러움이 어째서 예술의 아름다움으로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술가가 현실생활을 전형화하고 심미화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는 미의 법칙에 따라 창조하기 때문에 예술이 반영하는 대상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건 더러운 것이건 막론하고 형체면에서나 정신면에서 흡사하게 형상화하고 표현하기만 한다면 모두 예술의 아름다움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 희곡에서 더러운 역의 형상을 표현하는 예술적 수단-소리, 색, 춤은 다 질서가 있고 비례가 있고 균형되고 대칭되며 절주가 있고 선율이 있으며 심지어 얼굴화장법에도 예술성이 풍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예술의 아름다움은 바로 예술의 창조성이다. 창조성은 예술의 아름다움의 영혼이다.
각이 한 시대, 각이 한 사회, 각이 한 민족, 각이 한 계급의 사람들은 그 심미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 미감도 다르며 심지어는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과의 관계가 전도될 수도 있다. 인간의 심미관은 계급성, 역사성, 민족성을 띠고 있다.
계급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심미관은 선명한 계급성을 띠고 있다. 체르늬쉐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농민은 부지런히 일하고 몸이 튼튼하고 정력이 왕성한 것을 미인의 필요조건으로 본다. 몸이 허약한 미인은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농민을 두고 말할 때 노동할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몰락되어가는 봉건지주계급은 흔히 창백한 얼굴, 섬세한 손발, 병태적인 갈람한 몸매 같은 것을 미인의 조건으로 본다. 그들의 미인은 노동하지 않는 표징으로 된다. 무산계급에게 있어서는 생활이란 바로 노동이며 바로 전인류의 해방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자연물이건 사회의 사물이건을 막론하고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은 다 아름다운 것이다. 마르크스는 일찌기 노동하는 가운데서 거무틱틱 하여진 얼굴들에서 전체 인류의 미를 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거무틱틱한 얼굴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인류의 간고한 노동을 표징한다. 노동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감도 노동과정에서 생겨나며 노동과정에서 제고되는 것이다. 엥겔스는 노동에 의하여 ≪인간의 손은 말하자면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라파엘의 그림과 토르발드센의 조각, 피가니니의 음악을 낳게 할 수 있었던 그러한 높은 완성에 도달하였다.≫(≪자연변증법 ≫,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3권, 510쪽)고 지적하였다. 인간의 시각, 청각, 사유와 언어는 노동과정에서 끊임없이 완성되고 발전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객관적인 현실세계와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예술의 아름다움을 창조하였다.
인간의 심미관은 역사성도 띠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심미관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인정한다. 사회적 존재의 역사적인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심미관도 역사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아프리카에 있는 허다한 종족들의 여성은 손목과 발목에다 쇠고리를 달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는데 부유한 집의 여성들이 달고 다니는 쇠고리는 그 무게가 무려 30여근이나 되었다. 그 당시에 있어서 철은 귀금속으로서 철의 다소는 사람들의 부유정도를 표징하였다. 이러한 관습은 또 의식형태면에서 아름다운 관념으로 반영되었다. 오늘에 있어서는 이것이 우습기 짝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국봉건사회에서 여성의 세치전족을 아름다운 것으로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변하였다. 5·4시대에 전족을 좋다고 칭찬하던 북경대학 교수 고홍명같은 인간을 지금은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미와 미감은 다 역사적 범주로서 역사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미관은 민족성도 띠고 있다. 각이한 민족은 각이한 생활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이한 역사전통,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미관면에서도 각이하다. 세계 여러 나라 인민들의 복장은 천차만별하고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음악과 무용도 각기 다르다. 이러한 것은 다 각이한 민족의 심미관을 반영한다. 세계 여러 민족간의 문화교류가 끊임없이 발전함에 따라 한민족에게만 특유하던 미가 다른 민족들도 다같이 향수하는 미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각 민족은 다 자기의 특성에 근거하여 다른 민족의 아름다운 것을 학습, 섭취하여 자기의 민족성을 띤 새로운 미를 형성하게 된다. 예컨대 중국과 외국의 건축예술이 결합된 범례라고 할 수 있는 인민대회당과 민족문화궁 같은 건물은 외국건축의 이러저러한 특성도 섭취하였고 자기의 민족형식도 보존하였다. 예술면에서 우리는 국수주의도 반대해야 하거니와 민족허무주의도 반대해야 한다.
예술적 형상의 미는 내적 미와 외적 미의 통일이어야 한다. 이른바 내적 미란 인간의 내적인 심령, 사상, 성격, 도덕창조, 문화수양 등을 가리킨다. 내적 미란 바로 정신미와 심령미이다. 이른바 외적미란 인간의 용모, 풍채, 자태, 행동거지, 풍도, 언어 등을 가리킨다.
내적미는 외적 미를 규정하며 외적 미는 내적 미의 발현이다.
예술가는 미의 법칙에 따라 내적 미와 외적 미가 통일된 예술적형상을 창조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작가 위고의 소설 ≪빠리의 노틀담사원≫에 나오는, 예술을 팔아 먹고 사는 집시소녀 애스메랄다는 외모도 아름답고 마음도 선량하고 순결한 소녀이다. 이 예술적 형상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미감을 준다. 양말의 소설 ≪청춘의 노래≫에 나오는 임도정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량하고 순결한 마음도 가지고 있는 예술적 형상이다. 그러나 현실생활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내심은 아름다우나 외모는 미울 수 있다. 예술은 내심과 외모 간의 이런 모순도 반영하여야 한다. 단순히 외적 미에서 출발하여 인물의 아름다움과 미움을 평가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빠리의 노틀담사원≫에 나오는 종치는 사람 까지모더의 외모는 여간만 밉지 않지만 그의 마음은 매우 순결하고 선량하다. 의로운 일에 조금도 서슴지않는 그는 자기의 티없는 순정을 애스메랄다에게 바침으로써 관중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이 예술적 형상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미적 향수를 준다. 이와 동시에 예술가들은 겉은 반반하나 속은 개통인 인물을 훈계하기 위하여 외모는 아름답지만 마음은 더러운 예술적 형상도 많이 창조하였다. 오스트롭스키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 나오는 또냐가 바로 이러한 인물이다.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외모가 아무리 아름다와도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사람의 육체와 외모의 미는 그의 내적 정신의 미에 안받침될 때에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발자끄는 미인을 부각함에 있어서 내적 성격이 결여된다면 송장을 연상케 할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지당한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외적 미는 내적 미의 발현으로 될 때에만 비로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단순히 외적 미로부터 출발해서 예술의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평가한다면 예술상의 형식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적 미와 서로 적응되는 외적 미가 없다면 감동적인 미적 매력이 생길 수 없기 때문에 외적 미를 홀시하고 내적 미만 강조해도 안된다. 모택동동지는, 예술에 대하여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정치와 예술의 통일, 내용과 형식의 통일, 혁명적인 정치적 내용과 가능한 한도로 완미한 예술적 형식과의 통일이다.≫(≪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 ≪모택동선집≫, 제3권, 1965년판, 1267쪽)라고 말하였다. 이는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규준이며 예술창작에 대한 기본요구이기도 하다. 예술의 아름다움에서 이래야 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아름다움에서는 더구나 이래야 하다. 지금 우리 청소년들 가운데서 전개하고 있는 문예예절 활동은 마음의 아름다움과 행위의 아름다움, 언어의 아름다운, 환경의 아름다움을 통일시켰으므로 미의 내용과 미의 형식을 통일시켰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사회에서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응당 있어야 할 새로운 풍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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