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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목상회
강원도 평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횡성군 안흥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난 도로를 10분가량
가게 되면 해발 150m 정도로 낮은 산이 길게 뻗어 보이는데 산봉우리 세 개가 연이어져
있어 이 고장사람들은 이 바위를 삼형제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처음으로 이 고장을 지나다가 이 산을 보게 되면 세 봉우리의 산이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볼수록 어떤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것 같이 느껴진다.
멀리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안흥을 거쳐서 삼형제 바위 아래를 훑고 내려가고 개울
둔덕에는 밤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오른 쪽 논 밭 사이로는 길게 마을이 뻗어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을 가천리라 하는데 마을이 제법 포실하고 예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농사이
외에 누에를 많이 쳤다고 한다.
얼마 전에 이 마을로 이사를 온 조 덕재는 이곳 출신이 아니고 원래 횡성사람으로 그는 시
장 한 모퉁이에서 읍내에서는 가장 큰 포목상을 하였다.
포목상은 조 덕재의 부인이 하였는데 남편은 물건을 도매로 떼어 오기 위해서 매주일 마다
서울을 오르내리고 물품이 잘 나가는 봄가을이 되면 이틀에 한번 꼴로 첫새벽에 서울로 향
하였다.
그만큼 봄가을이 되면 결혼식도 많았지만 환갑잔치까지 겹쳐서 물품은 떼어 오는 대로 잘
팔리다 보니 그만큼 조 덕재네 금고는 연일 차고 넘칠 정도로 돈이 쌓였다.
사실 조 덕재가 장가를 들기 전만 해도 아버지가 하시는 장사가 잘 되지를 않아서 파리만
날렸는데 아들 결혼을 시킨 뒤에 부인의 수완이 남달라서 그런지 친구들을 가까이 하고 계
주까지 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니 어느새 자기네 가게가 읍에서 제일 잘 나가는 포목상이
되어 잔치집이 생겼다 하면 모두 이집에 와서 혼수를 해가니 이 포목상 앞은 만날 부자 집
의 환갑잔치 집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되자 읍내의 유지 급들은 무슨 행사가 있으면 초대를 하여 그를 상좌에
모시게 되니 돈이 양반이고 돈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올렸다.
때는 가을바람이 설렁설렁 불어오던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때. 그날도 조 덕재는 새벽 일
찍 조반을 먹고 원주로 나가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가다가 들판을 내다보니 철수가 일러서
그런지 올벼이삭은 벌써 누런빛이 돌기 시작을 하였다.
이날 늘 다니던 도매상으로 가니 벌써 거기에는 지방에서 올라 온 장사꾼들이 장사진을 이
루고 있어 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조 덕재의 차례가 된 것은 늦은 오후 시간으로 물품을 고르고 싸서 짐을 꾸리고 나니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날이 저물자 도매상 주인은 기왕에 늦었으니 자고 내일이나 내려가라면서 저녁을 사겠다고
하여 그를 따라나서니 으리으리한 요릿집으로 들어서는데 조 덕재로서는 처음으로 대하는
떡 벌어진 상차림이었다.
진수성찬을 대한 조 덕재는 너무 관분하다고 하자 도매상주인은 몇 년간을 꾸준히 거래를
해주셨지만 이렇다 할 대접도 하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라면서 마음 놓고 싫건 자시라
고 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자 오늘같이 좋은날은 2차로 술을 마셔야 된다고 하여 찾은 곳은 종로의 피
막골이라는 곳의 선술집이었다.
선술집이라고 하였지만 술꾼들은 거의 없어 막걸리 한주전자를 마시고 나자 도매상은 특별
히 부탁할 말이 있다면서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가끔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차용할 때가
있는데 근래에는 연대 보증인을 세우라고 하니 보증을 서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조 덕재가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그 집으로 해서 좋은 물품을 사서 팔기도 하였지만 어떤
때는 외상으로 거래를 해주기도 하여 그것이 늘 고마웠는데 보증을 서달라고 하니 어려울
때에 서로 돕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 다음날 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런데 다음 해 가을 한창 바쁜 시기에 세무서에서 문서 하나가 와서 열어보니 재산을 차압
할 것이라는 증서가 날아와 조 덕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경위를 알아보니 도매상에서 몇 년간을 착실하게 일을 하던 고용인이 재산을
교묘하게 빼돌린 것을 모르고 사업을 확장하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상회는 경매로 넘어갔
으며 연대보증인의 재산까지도 모두 차압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토록 호황을 누리던 포목상회가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자 조 덕재 또한 모든 재산을 다 잃
고 거리로 나앉고 말았다.
조 덕재야말로 자라온 과거를 생각을 해도 남에게 해로운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을 만치
법이 없어도 살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난감한 지경을 당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사람이 재수가 없으면 산 밑으로 가다가도 구르는 바위에 얻어맞는다고 하더니 자기가 찰떡
같이 믿고 거래하던 도매상의 주인 또한 착한 인물인데 그 돈이 새어 나가는 것도 모르고
태평치고 앉아 있다가 사업을 망쳤다는 것이다.
조 덕재는 그동안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도 자기의 부를 자랑하지도 않았으려니와 주위에 어
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남모르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관공서에서 무슨 행사를 하게
되면 후원을 하는 등 지방에서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대우를 받고 있던 처지였는데 뜻밖에
도 알거지가 된 것이니 창피해서 문밖에 나가서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동정하는 사람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조 덕재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 까
지도 비웃음을 사기가 일수였다.
“ 언제는 떵떵거리고 시내를 갈지자로 활보를 하더니 꼴좋게 되었어.”
“누가 아니래. 군청에서 무슨 행사를 할 때면 아무개 하고 큰 소리로 소개를 하더니 이제
는 그런 자리에 나가지도 못할게 아니여. “
“ 그래도 그런 소리 하덜 말아. 그 양반이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데 그
래. 더구나 그 부인은 매달 고아원을 찾아서 엄마 없는 아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하던데 안되
었어. 사업이 망할래 서 망한 게 아니라 보증을 잘 못 서서 그랬다지 않아. 옛말에 보증을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고 했다는데 그 양반이 그리 되다니 참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
이라니깐 그래. “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 양반 마음씨로 보아서는 얼마 안 있
으면 복구를 할 수 있을 거야. “
“ 말도 말게. 이렇게 험한 세상에 누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 일어나지 어떻게 일어
선다는 겐가. “
조 덕재의 포목상이 보증을 잘못 섰다가 다 망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온 동네는 물론 군청
내에 까지도 돌아 그를 아는 사람들은 묵묵히 그가 안 되었다는 생각들을 한 사람도 있으나
그 중에서도 제일 그것을 반긴 사람은 상리에서 작은 포목상을 하는 윤 강호였다.
윤 강호는 나이는 40대로 겉으로 보게 되면 키도 훤칠하고 누가 보아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외모와는 다르게 얼마나 자따른지 돈 한 푼도 섣불리 쓰려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술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길을 가다가도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오래간만에 만났
으니 술 한 잔 하자면서 술집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자기가 사는 척 이것저것 고가의 술안주
를 시키고 나서 술을 싫건 먹다가 중간에 슬며시 사라지는 바람에 친구들 간에는 그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지독하게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포목상을 하긴 하지만 물건을 제대로 갖추
어 놓지를 않아서 손님도 별반 찾지 않는데다가 외상이라는 것은 전혀 놓지를 않으니 시골
사람들이라는 게 언제 갑자기 일이 생기게 되면 우선은 외상으로 물건을 사게 마련인데 윤
강호네는 그렇지를 않았으니 손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술집엘 자주 드나들다 보니 장사로 벌어서 버는 돈의 반은 마누라 몰래 술 값
으로 들어가니 집의 마누라는 늘 돈을 꾸러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윤 강호네가 주로 돈을 꾸러간 집은 조 덕재의 집으로 윤 강호의 처는 조 덕재 부인을 평소
에 언니라고 부르고 다니자 조 덕재는 처음에는 무슨 언니냐고 핀잔까지 주었으나 하도 집
엘 자주 쫓아다니게 되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처제로 대해 주었다.
조 덕재의 포목상이 망했다는 소문을 들은 첫날 윤 강호는 일찌감치 술집도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 여보 여보. 우리 포목상이 이제 잘만하면 돈을 가마니로 벌게 생겼어.”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래요. 돈을 가마니로 벌다니 누가 그 많은 돈을 갔다 준다는거예
요.”
“ 하! 세상 소식을 그렇게도 못 듣고 있으니 우리 상점이 어떻게 잘 되기를 비라겠어. 사
실은 말이야 평소 당신이 언니라고 하는 조 덕재인가 뭐 거시기 대가린가 네가 쫄딱 망했
다는 소문이야. 뭐 보증을 잘 못 섰대나 어쨌대나 해서 알거지가 되어 지금 군청의 창고를
얻어서 그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살림을 한다는 게야. “
“ 아이구 머니나. 세상에 그 언니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는 건데.”
“안되긴 뭐가 안 돼. 그 대신 우리가 이제는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단 말이야. 하하."
“하하 라니요. 남은 망했는데 그렇게 좋아하지 말아요. 벌 받으면 어떻게 해요.”
“내가 왜 무엇을 잘못 했다고 벌을 받아. 음 술을 잘 먹어서. 그렇지만 남자가 술 한잔 제
대로 먹지도 못하고 산대서야 어디 남자라고 하겠어. 거시기를 떼어 버려야지. “
윤 강호는 그렇게 좋아했지만 막상 상점을 크게 벌리자니 돈이 필요한데 어느 누가 돈 한
푼을 꾸어 주지를 않으니 가게를 넓히려 해도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를 않자 “화난 김에
서방질한다는 격”으로 술집으로 가서 외상술만 퍼마시었다.
한편 군청의 창고로 겨우 살림을 옮긴 조 덕재는 한때는 세상이 창피하기도 하고 구질구질
하게 사느니 생을 포기하려고도 하였으나 가만히 생각을 하니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과 같이 어떤 방법을 강구하더라도 다시 재기를 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면서 포목상
을 살려 볼 생각으로 평상시에 친하게 지나던 친구 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돈을 변통하려
고 하였으나 친구는 자기에게 돈에 대한 말을 꺼내려거든 다시는 만나지도 말자는 것이니
그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먼촌 동기간 중에 동생이 형님의 딱한 소식을 듣고는 찾아와서 보니 형님의 가
족이 군청의 창고 안 한쪽에다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기름 냄새까지 나는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형님 안 되겠어요. 지금은 날이 아직은 춥지를 않지만 앞으로 날이라도 춥게 되면 식구들
이 기를 펴지도 못 할 테니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사는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지읍시다. “
동생이 단호하게 얘기를 하자 조 덕재는 한참동안이나 생각을 하더니 말을 하였다.
“ 내가 생전 농사를 해보았어야 농사를 짓지 .”
“형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도 못 들었어요. 주저할 것 없이. 내일 모래 이사
오시도록 하세요. “
이렇게 해서 조 덕재는 낯선 안흥 땅 가천 리의 동생네 사랑채에서 겨울을 나게 되었는데
이듬해 봄에 마침 동생네 이웃에 살던 쇠경 점쟁이가 원주로 이사를 간다면서 일 곱간 들이
집과 논 열 마지기를 싼 값에 판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조 덕재로서는 생각도 하지를 못하였는데 동생이 자기가 변통을 해 줄테
니 사라고 권고를 하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자신이 없어서 사양을 하자 동생은 빚을 내서라도 형님명의
이름으로 사두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할 수없이 동생의 의견에 따랐다.
졸지에 자기의 명의로 집과 논밭을 사게 된 조 덕재는 동생의 성의가 고마워서 어떻게 하던
지 농사를 배워보겠다는 결심을 하였으나 시장에서 장사만 할 줄 알았지 농사에 대해서는
농자도 모르던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농토를 사고 보니 농사지을 걱정이 태산 같았다.
동생은 3년 동안만 농사를 잘만 지으면 본전은 뺄 수 있다고 하여 덕재는 한편으로는 동생
에게 농사하는 법을 배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곳곳에 암초가 걸린다는 말과 같이 조 덕재가 이사를 하면
서 울타리를 사이에 둔 앞집과 자주 부딪치는 일이 생겼으니 그것은 봄이 되어 울타리 사이
에다 호박을 심었는데 호박덩굴이 그 집의 울타리가지에 걸리게 되자 앞집의 주인이 느닷없
이 울안으로 들어서더니 호박덩굴을 모조리 낫으로 자르고는 나갔다.
조 덕재 네가 이사를 오고 나서 안사람이 떡까지 해서 둘리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까지
하였는데 몰상식하게도 호박덩굴에 손을 대니 조 덕재는 집안이 떠나가라 화를 내었다.
“ 아니 당신 왜 남의 호박덩굴을 짜르는거요.”
그러자 앞집의 주인은 덕재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갑자기 낫을 들어서 얼굴가까이 대더니
내리긋는 시늉까지 하는 바람에 조 덕재야말로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서자 그는 히히 웃더
니 울 넘어로 낫을 휙 던져버렸다.
“ 앞으로 우리 집을 괴롭히지 말아. 그땐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그는 그 말 한마디를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 덕재는 한참동안이나 가슴이 떨려서 진정할 수가 없었는데 가만히 생각을 하니 앞서 이
사를 간 집이 다 이유가 있어서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매일이다 싶이 그 집주인이 아침만 되면 조 덕재네 대문 앞에서 낫
을 들고서 한두 시간씩은 서 있어 날마다 일어나면 그 집에 대한 신경을 쓰게 되었다.
저녁에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동생이 하는 말이 그는 홀아비로 살고 있으며 반은 실성
한 사람처럼 행동을 해서 동네 사람들은 다 그를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린다고 하였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집에서 적어도 몇 년간을 살 생각을 하니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어느 정도 돈이 모이게 되면 이 집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런데 더욱 그 집과 자주 다투어야 할 일이 생겼으니 그것은 앞집의 논과 조 덕재가 산 논
이 아래윗 배미로 위에서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앞집을 거쳐서 논물을 대게 되어 있었다,
조덕재는 봄이 되자 동생과 같이 먼저 못자리를 만들고 물을 댔는데 워낙 날이 가물다 보니
도랑물이 사내아이 오줌 줄기만도 못하게 흘러내려 그래도 겨우 씨는 뿌렸는데 그것을 안
앞집의 홀아비는 그 다음 날 흘러내리는 물을 한 방울도 아래로 내려 보내지를 않으니 조
덕재네 못자리는 그 다음날부터 바짝 말라 모가 싹도 트기 전에 말라죽게 생겼다.
이날 밤 조 덕재는 집으로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밤중에는 이 사람이 논엘 나가지 않겠지 하
고는 오밤중에 삽을 들고는 논으로 나가니 물꼬 앞에 검은 물체가 앉았는데 앞집 홀아비였
다.
조 덕재는 기왕에 그를 만나게 되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였지만 점잖게 말을 건넸다.
“ 언제 나왔어요. 이젠 우리 논에 물을 대야 하겠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돌려다 보지도 않은 채 물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다.
조 덕재가 생각하기를 물꼬에 앉아서 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그를 슬쩍 건드리자 그는
바로 일어서면서 삽자루를 휘두르는 바람에 조 덕재는 허리를 바로 맞아 그대로 나무토막처
럼 쓰러지면서도 자기도 삽을 휘두르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날 밤 조 덕재의 부인은 남편이 논물을 대러 간다고 하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
자 이웃에 사는 동생네 집에 가서 문을 두들겨 사정을 이야기를 하자 동생은 “아거 큰일났
네.” 하더니 맨몸으로 논으로 달려가니 앞집의 홀아비는 물고 앞에 누워 있고 피투성이가
된 형님은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다 죽은듯한 형님을 들쳐 업고는 밤중에 동네 청년에게 연락을 해서 횡성읍의 응급실로 모
시고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인데다가 워낙 많이 삽으로 찔려서 그런지 숨도 겨우 쉴 정도였
다. 이튿날 이 사고가 지서에 알려져 앞집의 홀아비는 살인미수로 체포가 되어 갔는데 그는
자기의 잘못이 없는데 왜 붙들어 가느냐면서 항의를 하였다.
조 덕재의 상태는 너무도 위중하였지만 심장과 내장만은 그다지 상해를 입지 않아서 생명에
는 지장이 없다고 하였으나 완치되기까지에는 무려 5개월이나 걸렸다.
시골에서 논물싸움은 사촌 간에도 빚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옛날 수리시설이 제대로 되
지 않을 때는 자주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오랜 기간 병원생활을 하던 조 덕재가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그때는 벌써 가을바람이 선선
하게 불 때였다.
논물싸움으로 번진 사건은 홀아비가 살인미수로 10년 징역을 언도 받고 안동교도소로 간
것으로 일단락은 되었지만 조 덕재가 당한 피해는 우선은 그렇게도 건강하던 사람이 체중이
10키로나 줄었는가 하면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한 사람이 반공기도 먹지 못할 정도
로 회복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은 삽으로 찔리면서도 죽지 않은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도왔다면서 만
나는 사람마다 위로를 해주는 덕분에 1 년 만에 몸이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다.
몸이 회복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어 대 가을에는 기대한 이상으로 풍작을 이루고
농산물을 처분하여 일부의 빚을 갚게 되니 새로운 삶을 되찾은 듯 정신이 나고 있었다.
사실 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 만해도 남들이 술집엘 가게 되면 자기는 술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옆을 두지 않을 때가 많아 한편으로는 너무 그렇게 살아서
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침 읍내에서 그 전에 알던 사람이 잔치를 한다고 초청을 하여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는 횡성읍내에서는 그래도 잘 사는 축에 들어서 그런지 집도 좋은 기와집에 사랑채도 너
덧간이 있을 정도로 넓고 그날 잔치손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잔칫상에서는 뜻하지 않게 옛날에 교유하던 친구들도 많이 만나게 되고 특히 그 중에는 사
업상 한 달에 두세 번쯤은 만나던 배 종호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어서 더욱 반가웠다.
배 종호는 당시에 시장에서 양복점을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중개업도 하였는데 그때만 해
도 공직자들이 2.3년에 걸쳐서 양복을 맞추어 입던 시대라 그는 돈도 많이 벌었지만 번영회
의회장직 까지 맡고 있었다.
그를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자 결혼식이 끝난 후에 옛날을 생각해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하여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술집엘 들어서자 어디서 본 듯싶은 아가씨가 반기면서 방으로 인도를 하는데 조 덕
재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가 문득 생각이 났으니 그는 한 때 사랑하던 여인을 쏙 빼
닮았기 때문이다.
조 덕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자리를 알아보는 중에 친구들과 자주 서울엘 올라가
서 놀 때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문경의 한 처녀를 사귀게 되어 뜨겁게 연애를 하였다.
그날도 그는 처녀와 함께 한강의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아이스케이크를 사서먹고 있는데 난
데없이 고교 졸업생인 듯 한 아이들 몇 명이 다가오더니 아이스크림 좀 사먹게 돈을 요구하
기에 자존심이 상해서 돈을 줄 수 없다고 하자 이들은 돈이 없으면 매타작이나 받으라면서
으슥한 버드나무 밑으로 끌고 가더니 앞뒤 가릴 것 없이 주먹으로 치고 발길질을 가하는 바
람에 그는 그대로 뻗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 사귀던 처녀는 일언반구도 없이 만나주지를 않았는데 나중에 안 사실은
남에게 얻어터지기나 하는 약자와는 더 이상 애정을 나눌 수 없다고 하여 다시는 만나지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는 여자에게 배신을 당한 분풀이로 바로 해병대에 지원 입대를 하였으며 3년간이나 집에
는 아무 연락도 없이 진해 해군기지에서 군 생활을 하다가 제대를 하고 나서 집엘 와서 보
니 아버지는 그동안 사업을 하시다가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자 산지사방으로 찾아다니시던
끝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아버지의 사업을 겨우 이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열심히 일을 배워서 사업을 일으켰지만 이따금씩 그 아가씨가 생각이 날 때
가 있었다.
배 종호가 그날 조 덕재를 데리고 간 곳은 풍향이라는 술집으로 배 종호는 그 집을 다니면
서 알게 된 월현이라는 아가씨를 좋아하다가 한때는 방을 하나 얻어서 딴 살림까지 하였다
고 자백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조 덕재는 속으로 조강지처 몰래 여자를 사귀고 딴 살림까지 차렸다니 그것은
안될 일인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날 배 종호는 조 덕재가 장사에 힘을 쓰느라 우정 술을 멀리한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모처
럼 오래간만에 술을 먹기로 하였고 조 덕재는 그것이 고마워서 술을 많이 마셨다.
이날 배 종호는 조 덕재가 일시적으로 사업에 실패를 하였으나 최근에는 회복이 되어 가
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진작 술친구들을 두었다면 보증을 서는 것을 막았을 것이라는 말
까지 하였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가 조 덕재가 아직 아들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배종호는 사업도 좋지
만 집안의 대를 이으려면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조 덕재의 귀를 잡아 다니고
는 무슨 말을 한마디 하고 나서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배 종호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갑사치마에 연분홍 저고리를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로 그의 이름은 강명이라고 하였다.
그날 이후 배 종호는 시간만 나면 조 덕재를 불러 댔는데 그토록 성실하던 조 덕재도 배종
호의 술수에 넘어갔는지 몇 번 풀 향에 나가더니 강명을 죽기 살기로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사실 조 덕재는 그 나이에 아가씨를 가까이 한다는 것이 부인에게 죄가 되는 줄 알았지만
생전 처음으로 아리따운 아가씨를 대하고 난 후에는 시간만 나게 되면 풀향을 향해서 가곤
하였다.
한 집안이 잘 되려면 그 집으로 들어오는 여자가 바로 들어와야 하고 혹여 가장이 여자를
사귀게 되면 어느 한도에서 더 이상은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서
는 담을 쌓고 지나던 사람이 배 종호라는 친구로 인해서 여자를 알게 된 이후 조 덕재는 늦
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풀 향집 강명의 치마폭에 싸여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끝내는 강명의 몸에서 아들 하나를 얻으니 그로서는 그것이 꿈만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태산 같은 걱정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니 그것은 만일 이 사실을 집 사
람이 알게 된다면 당장 이혼을 하자고 덤빌 것은 뻔하여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만 하였다. 조 덕재는 딸만 내리 다섯을 두게 된 이후 자기의 뒤를 이을 후손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하였지만 뜻밖에 강명이 아들 하나를 낳아주었으니 큰 마누라에게는 미안한 일이
지만 마음만은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이 아이를 입적을 시키고 싶었으나 마나님이 무서워서 정식으로 입적도 시키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을 때에 그것을 해결해 준다면서 나선 사람이 역시 배 종호였다.
" 여보게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가. 아주머니를 잘 삶으면 금방 해결될 일을 가
지고 말이야. 좀 기다려봐 좋은 수가 있을 테니까. “
조 덕재는 그 내용을 마나님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면서 당분간은 아무 소리도 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배 종호는 그러마. 하고는 다음날 저녁에 조용히 조 덕재의 마나님을 찾아가서는
덕재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격으로 이 말을 듣고 난 마나님은 너무도 깜짝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남편을 지금까지 믿어왔는데 그럴 리가 하며 반신반의 하다가 한참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지금까지 자기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면서 기왕에 말이 나
왔으니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날 저녁에 배 종호는 아주머니를 만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강명을 집으로 들어오라고 까
지 하였다는 말을 하자 조 덕재는 긴가민가하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지금까지의 재산 형성은 전적으로 마나님으로 인해서 형성이 되
었기에 앞으로도 재산관리만은 큰 이가 하도록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배 종호가 그 말을 하고 돌아간 다음날 아침에 조 덕재는 아침을 일찍 먹고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가려고 하였는데 마나님이 아침 먹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조 덕재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부엌문을 열어 보았으나 새벽에 아침을 하러 나간 마
나님은 통 보이지를 않았다.
대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기도 하고 안방이며 윗방 할 것 없이 사방을 찾아보았으나 마나
님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자 그제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각하면 배 종호가 한 말이 본인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큼의 치명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 이 사람이 어디를 갔단 말이야.”
혼이 빠진 사람처럼 대문간 기둥에 기대선 조 덕재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
지고 있었다.
金 斗 洙
‣ 시세계 수필(94)‣ 시조문학 (96) ‣농민문학 소설(10)
‣ 한국문협. 국제펜 회원
‣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 월간 문학세계 편집위원
‣ 계간 상록수문학 심사위원
‣ 계간 화백문학 강원회장
‣ 계간 농민문학 강원회장
‣ 한국공무원문학협회 고문
‣ 소설집
1. 크리스마스이브의 사랑 (15)
2. 첫사랑의 바람 ( 18)
3. 아버지의 발자국 ( 장편소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