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만에 찾아온 책
제8회 대상
이재인
85년 4월 나는 청주농업고등학교에서 문교부(당시 직제) 공보관실로 옮겨오는 기회가 있었다. 책이 대접받던 시대였지만 개인주택에서 서울 근교 전세방으로 가는 신세다. 아내와 남매, 나는 고민이 생겼다. 소장된 책 3천 권의 장서를 추려내었다. 일부는 제자에게 그리고 희귀본은 더러 문우들한테 시집을 보냈다. 아쉽지만 필통처럼 좁은 전세방에 책을 끼고 산다는 현실은 도시에서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책을 들었다, 다시 내려 놓았다. 아까운 생각에서였다. 월부로 사들인 책과 아내의 결혼반지 팔아서 장만한 것은 보자기에 싸서 따로 챙겨 넣었다. 맨 먼저 라면박스에 넣은 것들은 저자로부터 서명하여 내게 기증된 책이 100여 권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도시로 와서 이삿짐을 풀어 책을 다시 정리했다. 무사히 도 착한 줄 알고 안도했다.
이런 가운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권의 행방이 묘연했다. 책 이름은 『그늘진 꽃밭』 박영준 교수님께서 내게 주신 창작집이었다. 나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리러 북아현동 1의 153번지 정숙용 조산원 간판이 붙은 선생님 자택에서였다. 손수 친필 사인으로 <이재인 군에게>라고 남색 만년필의 잉크로 한 글자씩 정자로 써 주신 책이었다. 1954년 판 정한문화사 발행이었다. 그 책이 제1회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작이었다.
나는 이 책이 정리하는데 잘못 끼워져 엿장수한테 폐지로 섞여졌는지, 아니면 제자들이 빌려 간 후 되돌려 받지 않았는지 가늠이 전혀 되지 않 았다.
‘이상하네, 거참 이상하네. 그보다 값이 나갈 책이 100여 권이나 있었 는데두…….’
나는 답답하고 서운했다. 보석을 잃은 것처럼 금년까지 53년 세월을 보냈다. 1969년 4월 21일 11시에 나는 박영준 소설가의 주례로 혼인식 을 치렀다. 그 후 53년 동안 나는 인천의 부평, 부천의 소사, 주안에서 다시 구월동으로 전전했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작은 테마문학관을 짓고 고향으로 귀촌했다. 정식으로 정부에 등록을 했다.
그런데 지난 겨울 마늘밭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던 날이었다. 친구가 전해주었다.
서울의 어느 수집가가 박영준 교수께서 내게 사인해 주신 『그늘진 꽃밭』을 경매장에 내놓았다고 전해왔다. 경매가격은 시작가 20만원이었지만 경쟁자가 많아 50만원에 낙찰되었다. 그 지인을 친구가 알고 있는데 그 책을 내가 50만원에 인수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책을 지난 4월 21일 날 헐한 값 50만원에 인수했다. 53 년 만에 집으로 찾아온 저자 서명본이다. 기적 같은 책의 귀환이었다.
내게는 두 번째 서명본이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갯마을」, 「요람 55 기」를 쓰신 오영수 선생의 갯마을 창작집이다. 75년 전집 중 1권에다 한 자漢字로 李在仁 君이라 쓰시고 달필로 <난계>라고 쓰셨다. 저자 서명본 제2호가 바로 『갯마을』이다. 제3권은 윤재천 수필가의 『다리가 예쁜 女 人』이다. 제4권은 수필가 박연구의 『바보네 가게』 이후 지금까지 저자 사 인 본이 500권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책, 나와 나의 선배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책 그것이 양식이 되 어 주었고, 때로는 힘이었고 시시로 흥분과 위안이 되기도 했다. 책을 ‘不賤子’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책보다 스마트폰을 중시한다. 그것은 단지 정보만 제공할 뿐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영혼이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을까…….
돌아보면 내가 책으로 인하여 작가가 되었고, 교수가 된 것도 책의 영양가 때문이었다. 유명하신 작가와 시인과 언어학자들을 공경하고 거기에서 배우고 익힌 게 오늘의 나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저자 서명본이 500권이면 나의 손자에게는 그것을 시가로 계산하면 엄청난 유산이 될 것 같다.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 만해의 『님의 침묵』, 안회남 의 『맥』, 오장환의 『성벽』, 이태준의 『복덕방』은 지금 부르는 게 값이라 전하니 나는 부자인 셈이다.
밖에다 내어 놓으면 요즘 염소는 사람보다 먼저 책을 씹어 삼킨다니 고 놈이 사람보다 낫겠구나 싶다. 책자란, 그것은 언제 들이어도 싫지가 않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