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까리 등불
원준연
일주일 중에서 월요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오죽하면 월요병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나도 월요일이 부담스런 요일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은근히 기대되는 요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요무대가 생기면서 거의 줄곧 보아온 것 같다. 흥이 나면 따라 부르기도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해져서 즐겨보고 있다.
팝송을 한창 좋아하던 대학시절에, 한 살 많았던 동료 K군이 어떤 모임에서 '꿈꾸는 백마강'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을 듣고, 그만 트로트의 매력에 빠져 버렸다. 곧 미진한 가사를 보완하여 몇 번인가 따라 불렀었다. 또 학군 전우 L군은 고된 군사훈련 사이에'우중의 여인'을 곧잘 불러주었다. 한여름의 뙤약볕에서 흐르던 땀을 씻어주는 달콤하고 시원한 바람과 같은 노래였다. 전우들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았던 L군이 혹시 가요계로 진출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었는데, 그런 소식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트로트에 빠져든 데에는 어머니의 유전자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빼어난 명창은 아니셨지만 일을 하시면서 곧잘 트로트를 흥얼거리셨다. 그래야 일의 능률이 오르셨나 보다. 때로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도 노래를 부르셨다. 어린 나로서는 노래의 수준을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이미자에 버금가는 꾀꼬리에 다름없었다. 애창곡도 '동백 아가씨'를 비롯하여 이미자의 레퍼토리가 많았는데, 크지 않으신 외모와 미성의음색이 서로 잘 맞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노년에 이르러서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기신 어머니는, 어머니합창단원으로도 활동을 하셨고, 노래교실에도 나가셔서 노래의 장르와 고금의 트로트를 가리지 않고 즐기셨다. 즐거워하시던 그 모습이 파노라마 되어 가슴 속을 뜨겁게 흐르고 있다.
가요무대는 나도 좋아하지만 어머니께서 평소 좋아하셨던 옛 트로트가 많이 방송되어서 더욱 좋다. 가끔은 함께 따라 부르기도 하였었는데 모자지간의 도타였던 정이 흐르던 행복한 시간을 이제는 더 이상 가질 수가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3남매가 각자 분가하기 전의 우리 가족은 아버지께서 노래 부르시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하였다. 물론 분가한 후로도 마찬가지이었지만, 조부모님 회갑 때도 덩실덩실 춤은 추셨지만, 노래는 하지 않으신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전혀 노래를 못 부르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들의 요청에 의해서 한두 번은 부르셨는데, 노래를 즐겨하시지 않으셔서 그렇지 음치는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때 부르셨던 곡이 가끔씩 가요무대에도 나오는 ‘아주까리 등불’이다. 특히 송해가 부르는 ‘아주까리 등불’은 작으신 체구와 음색이 비슷하여 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나는 아버지의 또 다른 노래도 알고 있다. 아버지를 모시고 명절 때 시골에 다녀오는데 그만 교통이 체증되었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짜증을 내는 손녀에게 할아버지는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어릴 적 배우셨던 동요 '아까돔보(赤崎玲:고추잠자리)'였다. 일제치하였으므로 일본 동요이었지만, 내가 초등학교 때의 동요를 잘 기억하고 있듯이 아버지께서도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지금 지나고 있는 태풍이 소멸되면 빠알간 고추잠자리의 군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날갯짓에 실려 오는 아직도 또렷한 아버지의 모습과 음성을 어찌 감당 할 수 있을지….
잠시 이야기가 빗나갔는데, 이처럼 가요무대는 노래를 즐기셨던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생각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청자의 애절한 사연이 신청한 곡과 함께 소개될 때가 있다. 대개는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신청한 노래를 부모님 영전에 바친다는 것이다. 신청자들은 본인을 불효자라고 소개를 하고 있지만, 그들은 효자였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타계하신 후,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부모님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부모님과의 정이 깊었다는 반증은 아닐까?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달랠 길 없는 정을 그렇게 해서나마 위로를 받고 싶은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부모님께는 아무리 잘해 드려도 불효한 것 같고, 자식에게는 많은 사량을 쏟았음에도 부족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 같다.
용기가 없어서인지 나는 아직까지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 '동백 아가씨'나, 아주까리 등불'을 신청할 수 있을는지.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수필선집 제22집,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