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크리소스톰 https://youtu.be/Cc5bJpN2sps
요한 크리소스톰(347~407)은 '황금의 입'으로 잘 알려진 위대한 설교자입니다. 그의 뛰어난 웅변과 설교에 감탄한 후세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황금의 입' 이란 뜻으로 '크리소스톰' 이라고 칭한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가파도기아 감독들에 이은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와 라틴어 성경번역의 제롬과 함께 동시대를 살며 기독교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암브로스의 신앙은 서방교회에서 큰 열매를 맺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그 유명한 성 어거스틴입니다. 반면에 요한 크리소스톰은 동방교회에서 세례요한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진리를 전파함으로 그 시대를 깨우고 빛을 비췄으나 그 결과 엄청난 핍박으로 결국은 순교 하였습니다. 뛰어난 설교로 인해 그리스어로 크리소스톰, 즉 ‘황금의입’이라는 별명을 얻음으로써, 본명보다 더 유명하게 된 콘스탄티노플 감독 요한은 동방교회의 신학자일뿐더러, 고대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도 중 한 분인 요한 크리소스톰을 소개합니다.
* 위 영상은 『인물중심의 교회사』 (E.S. 모이어, 대한기독교서회) 을 참고하여 제작하였습니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주후 347년에 안디옥의 유복하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세쿤투스는 동로마 제국의 고위 장군이었고 어머니 안투사는 훌륭한 귀족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요한이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으며, 어머니는 20세였습니다. 어머니는 상당한 미모를 지녔고 교양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구혼자들로부터 재혼해 줄 것을 부탁받았습니다. 그 당시 황제도 안투사가 자신의 고관과 결혼해 주기를 기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투사는 모든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오로지 어린 요한을 키우는 데 헌신하여 아들에게 최상의 훈련을 받게 하였습니다.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가장 훌륭한 교사 문하에 들어가도록 주선했습니다. 법률가로서 입신양명의 꿈을 가진 유아는 어머니 권유에 의해 당시 이교도의 대변자요 동방의 가장 뛰어난 문필가요 웅변과 수사학의 대가인 리바니우스 수하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헬라 문학과 수사학을 배웠는데 요한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으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라면서 통탄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바로 요한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를 훔쳐갔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요한은 법률을 공부하여 젊은 나이에 변호사가 되었고 뛰어난 웅변술로 그의 법정 변론은 널리 칭송받았고 큰 명성을 얻었으나 정작 자신은 법률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변호사로 일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를 그만두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기간 기독교 신앙과 경건한 삶에 대한 동경 속에서 내적 고뇌와 깊은 갈등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명예와 쾌락은 자신을 행복하게도 못하고 영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진 세속적 욕망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수도사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있는 한 함께 살자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집에서 지내면서 수도적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허상처럼 여겨 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숨만 부지될 정도로 음식을 먹고 맨 바닥에서 잤으며 삶의 대부분을 명상과 기도로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소천하자 곧장 안디옥 남부 산악지대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고 영적 스승 안디옥 학파 지도자이며 후에 다수의 감독이 되었던 디오도레를 만납니다. 스승은 성경을 알레고리화 시키는 대중적인 방법 대신 성경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면밀히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크리소스톰이 당시에 유행하던 심각한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들지 않고 본문 해석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6년간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2년 동안은 홀로 동굴에서 지내면서 날마다 성서를 되새김질하며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신구약 성서를 통째로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위장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신장도 추위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고행으로 건강을 해친 요한은 자기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안디옥교회로 돌아오자마자 안디옥 교회의 부제가 되어 5년간 일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교회의 실상도 익히게 되었습니다. AD 381년에 안수를 받고 가난한 대중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39세가 되었을 때 안디옥 교회의 장로 겸 수석 설교사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설교로 인해 명성을 얻기 시작하다가 394년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요충지이면서 상업 도시의 중심지인 안디옥은 예루살렘 멸망 후 기독교의 중요한 유충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요한 당시인 4세기 말에는 약 20만의 인구 중 반수가 기독교도인 성시(聖市)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많은 회중들에게 하늘나라를 향한 신앙의 삶을 권고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명성을 높여준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것은 과다한 세금 문제로 안디옥 시내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흥분한 안디옥 시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동상을 부수면서 격렬한 항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황제 데오도시우스의 분노가 두려운 나머지 안디옥 감독 플라비아는 진상조사단을 꾸려 콘스탄티 노플로 떠났습니다. 이 기간 동안 크리소스톰은 동상에 대한 21편의 유명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시의에 적절하고 진실했는지 지대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도 그가 천재적인 설교자로서의 모범으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플라비안 감독의 부재로 크리소스톰은 설교자요 목회자이자 한 시민으로서의 모든 재능들을 발휘하여 안디옥 시민들의 두려움을 안심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영혼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습니다. 눈앞에 닥친 세상 일에서 떠나 성경을 바라보라 이것이 그의 표어였습니다. 그가 강단에서 쏟아내는 황금줄기 같은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관중이 모였지만 마치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처럼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였습니다. 안디옥에서 12년 동안 요한은 깊은 성서 묵상으로 얻은 하늘나라의 보화들을 설교 때마다 신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고 삶에 적용시켰습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온갖 영적 체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묘사할 때는 마음이 녹아내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격려의 자극을 받았습니다. 특히 황제의 너그러움을 상기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플라비안 감독이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평안을 가지라는 그의 말씀에 영혼의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이처럼 이 시기에 크리소스톰은 가장 인기 있고 탁월한 설교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강의 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이것을 싫어했습니다. 설교자가 박수 갈채에 대한 생각으로 압도된다면 자신뿐 아니라 회중에게 해가 미칠 것이다. 왜냐하면 칭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보다 그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설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스톰의 명성과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드높였으며 많은 설교와 주석을 기록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에이디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넥타리우스가 죽자 후임으로 크리소스톰이 선임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없이 그곳에 대주교로 선출된 것을 통보받은 크리소스톰은 멀리 도주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지도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글을 콘스탄티 노플로 납치하듯 데려왔습니다. 안디옥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했었지만 전격적인 조치로 동방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첫 시작은 만사가 순탄하였습니다. 그는 웅변적인 설교로 인해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회 영역을 고트족에게까지 확대시켰습니다. 또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고 통역자를 대동해서라도 설교하는 열정을 나타내었습니다. 다뉴브강에 살고 있는 고트족과 스킨디안 족에게 선교사들을 보냈으며 심지어 추방을 당한 가운데서도 선교의 일에 깊은 관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사치와 향락에 젖은 도시로서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부유한 시민들이 복음과 아울러 향락을 동시에 섬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와 성직자들을 개혁시키는 일이 시급함을 깨달았습니다. 우선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고자 사제의 엄격하고 청빈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날카롭게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엉망인 교회의 재정 상태에 대해 물 샐 틈 없는 감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크리스토스톰은 이 모든 문제들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독신이던 일부 사제들이 자기들의 자택에 소위 영적 자매들을 두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갖가지 추문들이 난무하고 있었기에 영적 자매들을 내보냈으며 401년 1월 에베소에서 성직자들과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 매매를 일삼는 6명의 감독들을 파직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잣집만 골라 다니며 호사를 누리던 떠돌이 수도승들을 소속 수도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또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던 감독 관절의 사치를 철저하게 제거하였습니다.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에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썼습니다. 그는 설교 때마다 황실의 허레허식과 사치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특히 황후의 허영심과 탐욕을 모질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황후는 증오심에 가득 차서 요한을 내쫓을 기회만 엿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어떠한 정치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성직자뿐 아니라 평신도들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득권층의 고삐 풀린 사치와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는 말씀으로 고발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각론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연대가 가득 배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재단을 장식하십시오! 그러므로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초상입니다 가망 없어 보이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초상이 새겨진 도는 하나님처럼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초상이 새겨진 형제들을 멸시하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인일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누리는 세상 온갖 부귀영화는 언젠가는 허망하게 쓰러져 버리고 맙니다. 그따위 황제의 것일랑 황제에게 몽땅 되돌려주고 하나님의 것만 찾으십시오! 내가 지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가난한 이웃과 힘닿는 대로 나누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오, 생명의 길입니다.”
크리소스톰은 편협한 독단설과 격분한 논쟁을 피하고 실상이 없는 정통설보다 실제로 경건한 생활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단순하게 입고 단순하게 살라 그리고 나누어 주라 소유한 것이 적을 때 마음은 평안하고 그 마음에서 사랑이 나온다 라고 외치며 청빈의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크리소스톰의 절제 생활은 갈수록 깊어졌고 더욱더 철저히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좋은 음식이나 화려한 옷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저 맨 몸에 걸친 간단한 옷 한 벌 뿐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요, 활락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도 마음은 도시 밖에 있었습니다. 스스로는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았지만 타인에게는 항상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 어떤 잔치나 만찬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늘 자신이 기거하던 독방에서 기도하며 철저히 복음적인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치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거리에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기를 선호했습니다. 몸은 야위여서 뼈만 남았지만 온 도시는 그의 말에 떨었고 황제도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존경을 받았지만 그런 것들을 오히려 초개처럼 여겼고 물질의 축으로 인하여 영혼의 눈이 진리를 떠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영혼의 부유함이었고 참 행복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는지 다음에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빛입니다. 기도는 파손당한 자에게 항구이며,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에게 생명줄이며 넘어지는 자에게 지팡이가 되고, 가난한 자에게 보석 광이 되며, 병든 자에게 의사이며, 우리에게 계속 축복하는 자에게 환란의 구름을 헤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밀접히 결합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이 빛을 봄으로써 조명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도 그분의 기묘한 빛으로 조명됩니다.”
물론 여기서 뜻하는 기도는 습관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 즉 일정한 시간에 메여드리는 그런 기도가 아니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향해야 하는 것은 기도 시간 중 묵상할 때만이 아닙니다. 다른 일에 대해 마음을 쓸 때 즉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이나 여러 가지 의무 활동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생각과 열망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소금으로 조미되어 주님께 맛있는 음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낌없이 시간을 바쳐야만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풍요함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기도로서 영혼은 천국에 오르고 또 애정 넘치는 포옹으로 주님을 포옹하며 어린 아이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젖을 달라고 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영적 양식을 간청합니다. 이렇게 영혼은 자신의 간청을 아뢰므로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좋은 선물을 받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귀중한 통로이기에 영혼을 기쁘게 하고 영혼의 갈망을 채워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이고 말을 되풀이하는 것만의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열망이고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이며 인간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도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길이 탄식하시며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주님께로부터 이와 같은 기도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비교할 수 없이 큰 보화를 받고 영혼을 흡족히 채워주는 천상적 양식을 얻게 됩니다. 이 양식을 일단 맛보면 영혼을 태우는 강렬한 불이 그 영혼에 들어가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낳게 합니다. 여러분은 올바로 기도를 드리며 여러분의 영혼의 거처를 정숙한 겸손으로 단장하고 정의의 빛으로 빛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정제된 황금과 같은 선행으로 장식하고 그것을 벽과 석축으로서가 아니고 신앙과 아량으로 지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기도로서 지붕을 만들어 주님께 바칠 완전한 집을 지으십시오. 이렇게 하여 그분을 이 찬란한 왕궁에 영접하고 그분의 은총으로 영원히 성전에는 주님의 모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는 제국의 교회의 만연한 부패와 사치를 개혁하는 한편 기독교 이상을 구현하려는 소명에 충실하고자 애썼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 당국과 제국의 권력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도시의 유력자들은 당시 기독교권에서 가장 컸던 성 소피아 교회당의 강단에서 쏟아지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지만 일부 부패한 성직자와 알렉산더의 데오빌로 감독과 황후 유독 시아의 미움과 분노를 얻어 그를 모함하여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를 잃은 백성들은 울분을 갖고 궁전을 습격하면서 그의 귀환을 요구했습니다. 안디옥 시민들은 운집하여 “우리의 감독을 돌려달라. 우리는 우리의 감독을 모시겠습니다. 황금의 입이 닫히는 것보다 태양의 빛이 가려지기를” 하고 외쳤습니다. 때마침 거센 지진이 일어나 왕궁을 강타하자 이를 하나님의 분노라고 해석한 황후는 당황하여 크리소스톰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복귀 후 처음에는 황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황후 유독시아가 자신의 권위를 위해 세운 동상 제막식에서 청중들이 성점 근처에서 열광을 하자 크리소스톰은 강력한 질타의 설교를 했습니다. 요한의 대적들은 이 설교가 유독시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의 재추방을 결의했습니다. 404년 부활절의 세례 예식 중에 황제의 군대들이 들이닥쳐 물을 피로 오염시켰습니다. 피하라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자기 때문에 소요가 발생하여 시민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조용히 병사들의 손에 체포당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폭동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군중들은 성소피아 교회를 습격하여 그 일대를 점령하였습니다.
군대는 이들을 진압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발생한 난리 속에서 교회당 및 인근에 있던 몇몇 공공건물들이 불타고 파괴되었습니다. 화재 원인은 그 후에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의 수사 과정 속에서 크리소스톰의 많은 지지자들이 고문을 당했고, 저명한 친구들도 귀향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도 조그마한 촌락 쿠쿠수스로 추방을 당하였지만 진리 앞에 너무나 담대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오.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아 같이 될 것이오,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아 같이 될 것이오, 바다에 던지면 유나 같이 될 것이오, 메로 때리면 사도 바울 같이 되리라.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과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오, 나는 그 환란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사도 바울의 말대로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나는 참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비록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서슴없이 선포한 것이 죄가 되어 유배의 길을 떠났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제시했습니다. 바르지 못한 교권주의자들과 시기심으로 불타는 동료 설교자들은 그들의 권위와 안위를 위하여 요한을 영원히 추방시켜버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마치 2천 년 전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권위와 시기로 영문 밖으로 쫓겨난 예수님처럼 크리소스톰은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력과 뛰어난 지식은 회중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자유로운 언어 구사력과 신학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은 이것들을 실생활에 연관시키는 능력을 가져왔습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던 크리스스톰!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04년 오순절 후 아르메니아 조그마한 촌락 쿠쿠스스 지방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3년을 지냈습니다. 거기 거하는 동안 수많은 성도들의 순례 여행과 수많은 지역에서 지지자들이 속속히 나타났습니다. 서방 교회가 불의한 크리스토스톤 파면 사건에 대해 항의를 시작하자 로마 감독 이노센트가 지지를 확고히 했으며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방방곡곡에서 황제의 처사를 비판하였고 논쟁이 점차 확산됨에 따라 조그마한 촌락 쿠쿠스스가 마치 세상의 중심지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영향력을 여전히 두려워한 반대자들은 황제를 부추겨 쿠쿠스스에서 흑해의 피티우스라는 새로운 유배지로 크리소스톰을 이송시켰습니다. 그 길은 매우 험하였고 궂은 날씨에 맨발로 걸어서 가게 하였습니다. 오랜 수도생활과 금육생활을 통하여 건강을 상실한 크리소스톰은 기후가 나쁜 흑해 지방의 뜨거운 햇빛으로 열병이 나서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송했던 병사들은 그의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채찍을 가하면서 함부로 다루었습니다. 몸은 햇빛에 익어 갈라 터졌고 결국 새로운 귀양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자기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인근 교회당으로 옮겨줄 것을 병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곳에서 성찬을 받고 주위를 둘러싼 이들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뛰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라는 설교를 하고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407년 9월 14일 향년 60세였습니다. 요한 크리스토스톰이 죽은 지 100년이 지난 후 너무나도 뛰어난 언변을 지녔던 설교 자유 당대를 움직인 사회적 인물이기에 후세 사람들이 “황금의 입”이란 뜻으로 크리스토스톰이란 별명을 붙였고 이후 크리소스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과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강단은 단지 뛰어난 웅변을 토하는 자리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의 언어적 표현이었으며 악의 세력에 대항한 그의 전장이었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이때 하나님의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선포하던 크리소스톰과 같은 설교가가 정말 그리워집니다.
======================
출전: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그리스어: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이오아니스 오 흐리소스토모스[*], 349년경 – 407년) 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누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이자 주해가였던 그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는 동방 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등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 가던 중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에게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모스(그리스어: Χρυσόστομος)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축일은 각각 9월 13일과 11월 13일이다.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성공회 기도서》의 저녁기도(만도)에도 성 크리소스톰의 기도[1]가 포함되어 있다.
요한네스는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군단의 장교였고, 그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 안투사(Anthusa) 밑에서 양육되었다. 유명한 이교도 수사학자 리바니우스에게 법학과 수사학 등을 공부하였고, 요한네스는 교육을 마친 뒤에 수사학자가 되었다. 리바리니우스는 요한네스를 자신이 길러낸 최고의 학자로 평했는데, 소조멘에 따르면 훗날 리바니우스가 임종 직전 누가 리바니우스를 계승할지 질문했을 때 리바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에게서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요한네스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한네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타르수스의 디오도로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결국 기독교에 헌신하기로 하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은둔 수사가 되어 성서를 고행을 하였다.
극단적인 고행으로 건강이 나빠지자,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그는 381년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오스 주교에 의해 부제서품을 받았고 곧이어 386년 멜레티우스 주교를 계승한 플라비아누스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았다.[2] 이후 12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사제직》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2] 안티오키아에서 12년 동안 요한네스는 안티오키아 대성당인 황금 교회에서 연설한 웅변, 특히 성경 강해와 도덕적 가르침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설로 인기를 얻었다.
387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즉위 10주년을 맞아 안티오키아에 특별세가 부과되자, 당시 요한네스의 조각상에 관한 설교를 들은 몹시 격양된 시민들이 납세거부 투쟁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와 죽은 황후 플라킬라, 아르카디오스, 호노리우스 석상을 시내에 질질 끌고 다니며, 공중목욕탕을 파괴하였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안티오키아시를 말살해버리겠다고 위협했으나, 플라비아누스 주교의 중재로 안티오키아 시는 말살을 면할 수 있게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편집]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넥타리오스가 죽자, 요한네스는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게 지명되어, 황제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37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도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다운 특유의 명쾌한 설교와 강의로 그 곳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인색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수많은 적들도 많이 만들었다.
에우독시아 황후와 논쟁을 벌이는 요한네스. 19세기 프랑스 그림.
그 중 가장 강력한 대적은 바로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행실로 콘스탄티누폴리스 대주교인 요한네스에게 공공연하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요한네스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요한네스는 청빈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사제, 수녀, 수사들은 모두 독신생활을 해야 하였다.
이러한 강직하고 까다로운 성격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테오필로스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403년 오크 교회회의에서 그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요한네스 대주교를 기소하였는데, 정작 요한네스가 출두하지 않자 그를 단죄한 뒤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켜 버렸다. 이를 기회로 에우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를 부추겨 그를 비티니아로 유배시켰다.[3]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요한네스 대주교가 유배되자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로스 대주교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으로 충돌했다. 그 날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황후 에우독시아가 유산을 하자, 황후의 촉구로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으며[4], 오크 종교회의는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이후 에우독시아가 대성당 바깥에 아우구스테움 광장에 세울려는 에우독시아의 은상(銀像)을 둘러싸고 다시 황후와 요한네스 대주교는 대립했고 결국 다음 해에 벌어진 종교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와의 불화와 그의 설교에서의 에우독시아에 대한 비판[5]으로 요한네스 대주교는 퇴임 명령에 불복했다. 404년 부활절 세례의식 중에 황제의 군대가 들이닥쳐 무참히 신자들을 살해했고, 요한네스의 지지자들은 희생당했다.[6] 요한네스 그 자신도 다시 해임 및 유배당하였다. 그가 수도에서 유배되자 폭동으로 대성당과 원로원 건물이 잿더미로 변했다.[4]
요한네스 대주교는 유배를 떠나기 직전,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교황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이 사태에 개입을 시도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를 압박하여 요한네스 대주교를 돕고자 하였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응하지 않았다.[3] 406년 서방 황제와 교황은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을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감금한 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려보냈다.
407년 가을, 요한네스는 소아시아 폰투스의 새롭게 변경된 유배지인 피티우스에 가던 중에 코마나에서 사망하였다.[6] 그의 마지막 말은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이였다고 한다.[4] 그의 죽음으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교회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가 죽은 뒤 약 31년 후인 438년 총대주교 프로클로스의 노력으로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 회복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황후 에우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엄숙히 장례를 치러주었다.[7]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제4차 십자군 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약탈을 벌일 때 그의 유해는 십자군에 의해 파헤쳐져 로마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800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요한네스의 유해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이장되었다.[8][9]
설교[편집]
현재 전승되는 크리소스토모스 대주교의 설교를 보면,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거나,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는 설교처럼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대한 설교에서 3절에 나오는 '예수를 저주하는 자'는 그가 악령에 씌어서 눈에 보이도록 또한 난폭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0]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 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
전임 넥타리우스 |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398년 - 404년 | 후임 타르수스의 아르사키우스 |
펼치기
펼치기
펼치기전거 통제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