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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
2002년 7월 한국역사연구회 학술발표회에서 이영훈과 최윤오 사이에 제기된 조선 말 한국 소농의 역사적 위상과 관련한 논쟁이 ‘소농’에 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두 분 다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우선 최윤오는 조선 말에 경영형 부농에 의한 광작(廣作)의 발전을 재확인하면서 내재적 발전 논의의 타당성을 재확인하려고 했다. ‘광작’은 봉건 농촌 내부에 신분제 대신 시장에서의 계약관계가 일정정도 침투하여 고용노동 관계가 발전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구래의 봉건제를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면을 갖는다. 그러나 농촌의 고용노동 시장의 발전 그 자체는 소농 경제의 발전에 의한 신분제의 붕괴를 전제로 하여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런 뜻에서 구래 농촌의 자유로운 고용노동 시장의 발전, 즉 자본주의적 맹아의 발생을 진정한 의미에서 떠받쳐주는 요인은 소농 경제의 발전이지 지주제의 발전이 아니다. 전자가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의 길’이라면 후자는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후자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 진정한 민주적 근대화의 길이다. 한국의 근대사는 이 두 가지의 길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말에 자본주의적 맹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근대화는 외세에 의해 타율적으로 도입되었다고 보는 이영훈의 역사 이론은 조선 말을 소농이 지배적인 사회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소농은 규모가 작다는 의미에서의 소농이다. 자작농, 소작농, 영세농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소농을 한 묶음으로 ‘소농’이라고 본 이영훈은 이들에게서 근대화의 싹을 발견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근대화는 오로지 일제의 시혜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조선 말에 자작농(소농)과 광작의 발전을 볼 수 있었다면 내재적 발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영훈의 역사 이론은 성립하기 어렵다.
더욱이 시장경제의 발전만을 기준으로 역사 발전을 재단하고, 박정희 이래의 군사독재의 공적을 찬양하면서 민족 대결을 부추기는 이영훈의 역사 이론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문제의 소재
한국 경제가 급속한 성장을 보임에 따라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일은 한국 경제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되었기 때문에 한국 근대화 과정에 있어 일본 제국주의가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그 유산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경제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경제 근대화에 관한 발생사적 연구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다.
그 동안 이 중요한 과제에 관하여 학계의 견해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하나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다. 이 견해는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기 이전에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추종했던 견해이다.1)
이 견해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동안 한국을 철저히 착취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근대화를 결정적으로 제약했다고 보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얼마나 혹독하게 한국을 착취했으며, 한국 경제의 근대화에 얼마나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이를 가로막아 왔는가를 입증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리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60년대 이후 군사독재 시기의 한국 경제도 일제하의 좋지 못한 유산을 이어받은 신식민지적(신제국주의적) 지배체제라고 보면서 1997년의 IMF 사태를 잉태했다는 관점에서 매우 비판적 시각으로 평가해 왔다.
위와 같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식민지근대화론’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된다.2)
이 새로운 견해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에 대해 반드시 나쁜 영향만을 끼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한국 근대화의 토양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아주었다는 의미에서 매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이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이런 역사관에 입각하여 일제 지배하에서 한국 경제가 얼마나 수량적으로 괄목하게 성장했는가를 입증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황국사관을 이어 받아 일본 역사교과서에 의한 역사 왜곡을 이끌어 온 일본의 극우세력들의 역사관과 일맥상통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틀이 되어온 것은 일본의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역사 이론이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새로이 세계 경제의 주축으로 등장한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신흥 공업국들(Newly Industrialized Countries : NICs)의 활력의 근원은 종전의 서구 중심주의적 역사관으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 신흥 공업국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역사 이론을 제시할 필요가 있고 전제한다. 그런데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작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그리고 한국과 대만과 중국 본토를 시야에 넣고 놓고 볼 때 이들 나라들에 공통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들의 전근대 사회에 있어 인구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의 절대 다수가 삶을 기탁하고 살아왔던 농촌 내부에 ‘소농’이 지배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 소농의 존재 형태의 특징이 바로 이들 나라들의 근대화 과정의 특징을 규명하는 관건이라고 보는 것이 나카무라 이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나카무라의 역사 이론은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3)와 이영훈의 역사 이론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이론이 전적으로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중국·대만 등 동양의 신흥 공업국들의 공업화 과정이 서유럽 자본주의의 발전 법칙과는 다른 특징을 갖게 된 원인을 소농의 특수성에서 찾아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한 역사 이론적 맥락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필자는 1994년과 199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었다(이 책의 2부 2장과 3장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4)
그 요지는 무엇보다 나카무라의 이론이 ‘소농’에 관한 그릇된 역사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소농을 규모가 작은 영세한 농가라는 뜻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자작농도 있고, 소작농도 있는 것이고 보면 이들을 일괄해서 소농의 범주에 넣어서 파악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그릇된 소농 개념에 입각하여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소농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필자가 제시한 이론적 비판의 골자였다.
그런 관점에서 나카무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강조하여 마지않는 전근대 사회에서의 소농의 실제 모습을 검토해 보면 전근대 사회 말기에 존재했던 한국의 소농이 과연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이 지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해 결정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필자는 강조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위와 같은 지적이 있은 후에도 나카무라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나카무라의 그릇된 소농 개념을 시정하려 하지 않고, 그의 오류를 답습하는 가운데 그릇된 역사 이론을 전개하고 있음을 본다.
이 글은 위와 같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한국 경제사학계의 오류를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다는 심정에서 노파심 어린 의문을 다시금 제시함으로써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하고 허구적인가를 보여줄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한 이론적 정리 작업은 ‘식민지근대화론’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와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독재 지배가 경제성장에 기여한 점을 지나치게 미화 찬양하고 있는 우리 학계 일각의 역사 이론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민족사학의 정통을 구출해내는 학문적 작업의 일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서양의 근대화 과정에서 얻어지는 교훈
동양의 근대화 과정은 서양의 그것과는 몹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근대화 = 자본주의화가 세계사에서 처음 시작된 곳이 서유럽인 이상 서유럽, 특히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화가 가장 먼저 시작된 영국, 프랑스, 독일의 자본주의화 과정이 근대화의 선구적 형태이며, 그 속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우리의 당면한 관심사인 소농이 그들 유럽 나라들의 근대화 과정에서 어떠한 역사적 역할을 담당했는가를 살펴본다는 것은 한국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하는 우리로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의 그릇된 역사인식의 근원은 유럽 여러 나라들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소농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그 역사 과정을 잘못 파악한데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여 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독립자영농민’, 즉 ‘소농’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에 관해서는 일본의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를 위시한 이른바 오오츠카 학파에 의해 상세히 밝혀진 바 있다. 따라서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만을 간략히 제시하면서 거기에서 얻어질 수 있는 교훈을 몇 가지 도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5)
영국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뚜렷이 파악되는 것은 봉건 시대부터 내려온 도시의 상공업자들의 특권에 대항하여 이것을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농촌의 신흥 상공업자들의 아래로부터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이들 농촌의 상공업자들은 ‘독립자영농민’, 즉 ‘소농’ 가운데 부를 축적하여 자본가로 성장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랜 봉건적 지배 질서의 붕괴 과정에서 봉건 영주들의 토지에 대한 갖가지 봉건적 권리, 즉 ‘상급(上級) 소유권’을 매수하거나 배제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하급(下級) 소유권’, 즉 경작권을 사실상의 소유권으로 바꾸어 가거나 상급 소유권을 그대로 놓아둔 채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지대(地代) 수취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하급 소유권 = 경작권을 사실상의 소유권으로 격상시켜간 농민이었다.
이 과정에서 봉건 영주와 특권 상인들의 연합 세력에 의한 ‘봉건적 반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반격을 물리치면서 서서히 직접 경작에 종사하는 독립자영농민=소농이 농촌의 지배적인 존재로 자리잡아 갔다. 이로써 봉건적 특권에 기생하는 도시의 상공업 시장의 상대적 쇠퇴와는 대조적으로 자유로운 농촌 시장이 생산재 시장과 소비재 시장 양면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대하여 농촌 지방에 가족노동의 반은 농업에 투입하고, 그 반은 공업에 투입하는 반농반공(半農半工)의 부유한 ‘중산적(中産的) 생산자층’으로서 독립자영농민=소농이 농촌 경제의 지배적인 존재로 부상하여 농촌 지방의 상권을 장악한다. 이들의 경영의 특징은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타인노동을 고용하지 않고 주로 가족노동에 의해 주로 자기 지방의 농촌시장의 수요를 상대로 반농반공 형태의 독립적 경영을 한다는 데 있었다.
도시에 근거를 두고 도시의 봉건적 상공업 특권에 기생하면서 기득권을 수호하려고 한 도시 상공업자들은 도시 주변에 걸친 금제권(禁制權) 등을 발동하여 농촌에 새로이 일어난 신흥 상공업을 억압하려고 계속 시도했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광범한 농촌 상공업의 발전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자본주의 경제의 지배를 가져오게 된 영국 산업혁명에 있어 그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구래의 봉건적 특권에 매달리려고 한 도시의 상공업자가 아니라 농촌에서 독립자영농민으로부터 성장해 간 신흥의 농촌 자본가들이었다. 여기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위로부터의 근대화 시도를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세력이 배제하는 치열한 대립 항쟁의 과정에서 근대화가 이룩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독립자영농민의 경영은 자영 자작을 원칙으로 하였다. 봉건 영주에 의한 지배는 배제되어 있거나 지배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경우에도 극히 명목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점에서 지주에게 수확물의 반 이상을 소작료로 바치는 반봉건적 지주제하의 동양의 ‘소작인’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소농’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애써 이들과 맞먹는 존재 형태를 한국 농촌에서 찾아본다면 조선 말의 자작농 또는 해방 후 농지개혁 이후 자기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가족노작적(家族勞作的) 자작농’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런 점에서 요사이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근대화의 징표로 흔히 제시하는 조선 말의 이른바 ‘소농’과 영국의 ‘독립자영농’을 비교해 본다면 이 둘의 차이는 명백하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강조해 마지않는 조선 말의 이른바 ‘소농’은 규모가 작다는 점에서 ‘소농’일 뿐 아직도 봉건적 지주들의 지배를 배제하지 못하고 있는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자작농이 새로이 성장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봉건 질서를 배제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점을 이 기회에 제일 먼저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이 논문의 주된 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에 후에 좀 더 자세히 고찰될 것이다.
이 기회에 두 번째로 확인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지배적 존재로 나타나게 된 ‘독립자영농민’은 영국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하게 된 이후에 나타난 농민의 존재 형태로서 농촌 근대화의 하나의 과정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한 인식 부족이 한국 근대화과정 연구에 있어 김용섭이 제기한 ‘경영형 부농’6)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의 근원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서 특별히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사실 영국의 자본주의화 = 근대화 과정에서 보면 상기한 ‘독립자영농민’ 가운데 부를 축적한 사람은 자본가로 상승하고,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은 노동자로 전락하여 자본과 노동의 분리·분화의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농민층 양극분해’의 과정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 토지로부터 분리된 ‘자유로운’ 임금노동자가 자본주의적 이윤을 목적으로 자본가들에 의해 ‘자유시장’을 통해 고용되어 농촌 내부에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이 지배하는 농업 자본주의화가 급격하게 진전되었다. 이런 영국의 사례를 염두에 둔 나머지 일부의 연구자들은 농업의 근대화는 곧 ‘농업의 자본주의화’, 즉 노동과 자본의 분리, 그리고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의 고용을 전제로 한 전형적인 영국식 농업자본주의와 같은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유럽 각국의 농촌 실상을 보면 영국의 자본주의적 농업은 산업혁명에 앞선 시기의 영국에서만 특수하게 볼 수 있는 형태였음이 점차 확실해졌다. 그리고 영국의 자본주의적 농업마저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영국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듦에 따라 대규모의 가족농업 형태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고용노동을 최대한 배제한 가운데 자기 자신과 가족의 노동에 주로 의존하는 가족노작적 농업경영 형태가 모든 서유럽 나라들의 지배적인 농업경영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역사 과정에 비추어 보면 농민층 양극분해 이전의 자작농 형태는 자본주의적 형태와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보아온 이제까지의 통념은 잘못된 견해이며, 독립자영농가 = 소농의 형태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농업 분야에서 떠받쳐주는 유력한 받침목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농업의 하나의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동안 한국 경제사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경영형 부농’을 둘러싼 문제도 위와 같은 점에 착안한다면 쉽사리 풀릴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즉 김용섭은 조선 후기에 주로 고용노동을 사용하는 대규모의 ‘광작(廣作)’과 같은 것을 자본주의적 경영이라고 규정하고, 그러한 농업경영 형태가 광범하게 보급되어 있었다는 점을 논거로 하여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당시의 한국 농업 내부에 자본주의가 광범하게 성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그 싹을 잘라냈다고 봄으로써 이른바 ‘민족사관’의 체계를 정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굳이 조선 말 농촌에서 자본과 노동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적 농업을 검출하지 않더라도 지주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작농’의 광범위한 성장을 논증하기만 하면 근대화된 농업의 성장을 논증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광작’과 같은 것을 검출하는 작업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안병직은 ‘자본주의적 맹아론’이란 거대 담론은 이제 물러날 때라고 단정하고 있다.7)
이 말은 조선 말에 지배적이었던 것은 김용섭 등이 말하는 ‘경영형 부농’과 같은 것이 아니라 ‘소농’이었다고 보는 이영훈 등의 견해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영훈 등이 조선 말의 농촌에서 검출해낸 소농의 존재 형태는 유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가족 노작적 독립자영농민’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조선 말에 ‘소농’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내재적 근대화가 불가능했고,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이었다고 해석하려고 한다. 예컨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에게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온 나카무라 사토루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에 관하여 그것은 조선 말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소농’에게 근대적 소유권법에 의거하여 제도면에서 토지소유권을 추인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적합한 제도로 개혁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한 견해에 입각하여 나카무라는 조선 말의 자작농에 대한 토지소유권의 법적 인정을 ‘제1차 농지개혁’이라고 부르고,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을 ‘제2차 농지개혁’, 해방 후의 ‘농지개혁’을 ‘제3차 농지개혁’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부인하는 역사 해석을 보였다. 이런 견해에 따른다면 근대 한국에서 실시된 모든 개혁 조치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양적 성장을 위한 제도 개혁의 과정이며, 경제성장의 연장선상에서 실시된 제도개혁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견해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에게는 경제구조의 혁명적 변화, 즉 ‘질적 변화’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올 여지가 없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은 일직선적인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성장뿐이다. 그들의 역사관으로 보면 위로부터의 근대화 욕구와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욕구가 맞부딪쳐 한반도 전체를 혁명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도 한낮 농민반란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으며, 해방 후 한국에서 실시된 ‘농지개혁’의 혁명적 의미도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실시된 경제개혁 조치에 불과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가 이미 비판적으로 분석한 바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8)
서양의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 과정 속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세 번째의 점은 그것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요구하는 세력과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를 요구하는 세력’과의 대립 항쟁의 과정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경제성장의 방법을 둘러싼 단순한 경제적 이해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계급 계층 간 대립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의 시민혁명과 프랑스혁명이 그러하였고, 독일에서 벌어진 일련의 혁명이 좋은 예이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을 근대화의 결정적인 분수령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 전후의 역사 과정이 중요한 연구 대상을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가 왜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느냐 하면 경제사 연구가 현상과 현상 사이의 연관 관계의 규명에 주로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현상 뒤에 흐르는 본질적 변화의 흐름을 파악함으로써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근대화 과정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경제 침탈이란 어두운 면을 외면하고 이것을 단순히 경제성장의 양적 과정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한 그것은 장미빛으로 보일 뿐이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독재 시기의 높은 경제성장을 단순히 양적 성장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한 안병직과 같이 그들의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에 대한 시야를 잃어버리고, 독재와 ‘국가보안법’하의 민족 대결과 종속적 경제성장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견해9)를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조선 말의 근대화 과정에 관한 연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선 말에 지배적인 농업경영의 형태가 ‘경영형 부농’이냐 ‘소농’이냐, 또는 ‘지주제하의 반봉건적 소작제’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된 조선 말의 농촌의 실상을 파악하여 이 혁명의 사회경제적 원인을 심층 분석하고, 한국의 근대화를 둘러싼 계급과 계층 간의 대립 항쟁의 양상을 파악하여 그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실증 분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실증 분석을 이끌어 갈 역사관 또한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다. 민족과 민주의 관점을 상실하고 역사를 단순히 양적 성장의 과정이라고 보는 일부의 견해는 그런 의미에서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릇된 ‘소농’ 개념에 의한 한국 근대화 연구
최근 이영훈은 현대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의 근원을 조선의 18세기 이래의 소농 사회의 성격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우골탑(농민의 교육열)에서 배출된 인적 자본이 외래 자본주의를 이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킴에 이바지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로 그 점에서 18세기 이래의 소농 사회가 현대 한국의 자본주의와 관계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를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다.10)
그럼 여기서 말하는 ‘소농’은 어떤 개념의 것인가. 이영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 한국인의 대다수는 소규모 가족단위의 영농체로서 소농(peasant)으로 존재하였다. 소농 사회(peasant society)는 이러한 소농을 지배적 구성원으로 하는 농촌 사회를 말한다.” 이러한 그의 ‘소농’에 관한 개념 규정 속에 실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근대화 문제에 관한 모든 혼선의 근원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소농’은 일반적으로 가족의 생계유지 목적의 영세한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농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소농에는 여러 가지 존재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주요한 존재형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자기의 소유로 되어 있는 농지에서 농업노동자를 일부 고용하고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자작 농가(자작 대농).
2) 고용노동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주로 자기 소유의 농지에서 자가 노동만으로 농사를 하는 자작 농가(자작 중농).
3) 규모가 작아 일부 고용노동소득으로 보충하거나 소작료 또는 지대를 지불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타인 소유의 토지를 임차하는 농가(자소작농 또는 소자작농).
4) 전적으로 타인 소유의 토지를 임차하여 경작하는 농가(소작농).
5) 타인의 토지를 임차할 능력조차 없어 주로 고용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농가(머슴 또는 농업노동자).
그러므로 ‘소농’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영훈을 포함하여 그동안 논의되어 온 소농에 관한 학계의 논의들을 보면 이런 기본적인 인식을 제쳐둔 채 매우 자의적으로 ‘소농’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혼선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조선조의 18~19세기에 한국의 소농 사회가 크게 분화되기 시작한다고 할 때 그 실체를 밝히려고 한다면 그 사회 안에 소농이 위와 같은 각 계층별로 어떠한 분화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분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분화 과정이 한국 근대화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밝혀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화의 분수령이었기 때문이다.
안병직과 이영훈 등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조선 말 전통 소농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는 점을 유별나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혼란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불가피한 진통의 과정이라고 보면서 그 속에서 한국 민중의 근대화 욕구의 혁명적 분출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한 봉건지배 권력에 의해 무참히 탄압 학살당함으로써 한국의 자생적 근대화의 길이 봉쇄당했다는 점을 분석하는 것이 한국 근대화 과정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취해야 할 당연한 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의 농촌 사회의 지배적인 농민의 존재 형태를 일괄해서 ‘소농’이란 범주로 취급하게 되면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동학농민전쟁의 진상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게 되고, 안병직, 이영훈 등의 제시하는 바와 같은 일종의 인류학적 분석으로 흘러버릴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조선 말에 농촌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소농’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로의 지향성이 없었으며,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체된 사회였음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지주적 농민적 상품경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거나11)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으로 설명하는 방식12), 또는 한국의 중세는 1, 2, 3차가 아니라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으로 설명해야한다는 논의13)까지 나타나게 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14)
그리하여 조선 말의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로의 발전의 씨앗을 결여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결국 외부로부터, 즉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밖으로부터 이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유도된다.
그러나 조선 말의 농촌 사회에 관하여 안병직·이영훈 등이 제시한 사료적 분석15)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당시의 농민층이 지주 자작경영은 물론 자소작농과 소자작농, 그리고 소작농과 머슴(전근대적 예속적 농촌노동자) 등으로 광범하게 계층 분화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과 관련하여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최윤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즉 “소농은 자영농 또는 무전농으로 이루어졌으며, 부농이나 지주층으로 상승하기도 하며 몰락할 때는 반대로 임금노동자로까지 전락하기도 한다. 소농층의 존재는 중세 체제 전시기에 걸쳐 그러했던 것처럼 항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중세의 지주제 연구 없이 소농 경제만 검토한다는 것은 중세 사회의 기본 성격을 밝히는 데 있어 부차적 형태만 주목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16)
다만 최윤오에 있어 문제로 되는 것은 지주 자작경영 또는 지주 자소작경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경영형 부농’ 내지 ‘광작’에 종사하는 농민을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이라고 규정하고, 조선 말에 그것이 광범하게 존재했다는 점을 부정하면 그것이 곧 ‘자본주의적 맹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17)
앞서 말한 바 있지만 근세로부터 오늘날까지의 유럽 농업구조의 분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농업구조의 분화 과정에서도 뚜렷이 파악되는 일관된 경향은 농민층이 자본가와 농업노동자로 분화되어 순수한 자본주의적 농업으로 분화·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 갈수록 소농 경제는 꾸준히 그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자본주의를 주변부에서 지탱해주는 사회적 안전판으로 이용당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다는 사실이다. 즉 소농 경제가 곧 근대 농업의 대표적 존재 형태로 자리를 잡아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설사 조선 말에 자본주의적 농업의 발생이 광범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부정된다 하더라도 신분제의 붕괴에 따라 소규모의 자작농, 또는 자소작농 경영이 광범하게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만 해도 그것으로서 농업의 근대화 과정의 맹아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당면한 ‘광작’에 관해서 말한다면 ‘광작’의 광범한 발생이 설사 사료적으로 부인된다 해도 자작경영의 발전만 입증된다면 자본주의적 맹아를 입증하는 데 하등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광작’은 ‘지주 자작경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광작’의 발전은 자본주의적 농업의 발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광작’ 경영이 이용하는 직접노동자가 구래의 신분제의 제약을 강하게 받는 머슴, 또는 예속민, 또는 주변의 예속적 소작인들이라면 그 경영을 자본주의적이라 보기 어려우며, 기껏해야 전근대적 반봉건적 지주제의 일종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18)
이 점은 일제시기의 한국의 지주제마저도 반봉건적 지주제로 규정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도 여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19)
뿐만 아니라 ‘광작’, 즉 지주 자작경영은 시장경제의 발전과 신분제의 붕괴에 따라 필연적으로 해체의 운명을 걷는다는 법칙성을 보여준다. 직접노동자의 낮은 생활수준 때문에 낮게 유지되어 왔던 노임 수준이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자기 노동의 대가를 의식하게 되면서 농업노동자들은 더 이상 낮은 노임수준에 만족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생계비를 지불하고 난 다음 그 잉여로써 이윤을 챙겨야 하는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에게 이윤으로 남는 것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시장경제의 이윤율평균화의 법칙이 그것을 강제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자본주의적 지주 자작경영의 확대에 의한 ‘광작’, 즉 자본주의적 지주경영이 시도되었음에도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자작경영 또는 지주제 소작으로 분해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은 농업의 그러한 시장경제적 특수법칙 때문이었다. 이것은 농업이라는 산업이 토지의 소유와 점유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성격을 숙명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공업에서는 노임이 상승하면 생산수단을 개혁하여 비교적 쉽게 노임을 낮출 수 있지만 농업에서는 토지와 결부된 생산의 특성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으며, 토지의 점유가 전제로 되기 때문에 지대의 압력이 작용하여 자본투자를 제한(capital rationing)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농산물 수입이 확대되면 외국의 값싼 농산물로 말미암아 더욱 이윤의 제약을 받는다. 이 때문에 대개 어느 나라이든 농업은 자작경영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자기 가족의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농업은 농민의 생계만 보전되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고용노동자에게 생계비를 보장해 주고 그 잉여로써 이윤을 챙겨야 하는 자본주의적 농업은 시장경제 법칙에 따라 도태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광작’의 존재가 자본주의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자작농’의 성장과 발전을 자본주의화의 징표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자본주의적 맹아를 입증하기 위해 ‘광작’의 광범한 보급을 입증하고자 한 최윤오의 견해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논리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이영훈 등이 조선 말에 소농 경제의 빈곤 때문에 농촌 공업의 수준이 지극히 낮았다는 점을 들어 자본주의적 맹아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본 점에 있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한 사료로서 이영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제가 이 땅을 식민지로 접수한 초기, 1908년의 사회적 분업 관계를 보면 전국 289만호 가운데 광공업에 종사한 호는 2만4천호로서 0.9%에 불과하다. 19세기를 위한 조종이 울려 퍼질 때 조선 왕조는 이토록 더없이 순수한 형태의 농본주의 사회를 20세기 역사의 출발점으로 남겼다.”20)
따라서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생적으로 발전할 여지가 없었으며, 외부 즉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이다.21)
그러나 이영훈의 위와 같은 주장 그 자체가 자기 주장에 대한 부정으로 된다. 왜냐하면 인구의 0.9%라는 극히 낮은 비율만이 농업 이외의 분야에 종사하고, 압도적 다수인 인구의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통적 농업 사회에서 이영훈의 주장대로 자본주의 발전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소농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본주의 발전의 맹아를 논증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은 그 이전에 착취당하고 있었던 농업 잉여를 농민의 손에 틀어쥐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의 요구였고,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비로소 햇빛을 본 농지개혁의 역사적 목적을 이미 1세기 전에 앞서 달성해보려는 시도로서 평가될만한 일대 사변이었다.
그러한 자본주의화 = 근대화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요구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조 봉건관료 국가와 결탁하여 잘라 없애버렸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안병직과 이영훈 등은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이식이 없었던들 근대적 공업 국가로 발돋움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역사관이 극우적 일본 역사교과서에 의한 황국사관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은 대목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경제성장이 얼마나 눈부시게 달성되었는가를 논증하는데 정력을 쏟고 있다. 경제성장에 관한 한 그것을 논증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아니 논증을 기다리지 않아도 한국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을 논증하는 작업은 일제 침략의 죄과를 부정하고 일제의 공적을 내세움으로써 다시금 아시아의 지배자로서의 자기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합리적 근거를 역사 속에서 구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일본의 우익 역사교과서 저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굳이 한국인이 거기에 끼어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역사과학자로서의 학문적 의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학문에도 국경과 민족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영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도적 이노베이션의 주체는 총독부 권력이었다. 총독부의 일련의 지배정책이 오로지 수탈을 지향할 뿐이라는 거칠은 주장에 대해선 굳이 논박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첫째 그것이 조선인의 재산과 소득을 폭력적으로 탈취한 행위라면 그러한 야만적 행위는 없었다. 둘째 그것이 자산계급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증명될 수 없는 영역이고,
셋째 그것이 잉여의 역외유출을 이야기한다면 조선 반도의 무역수지가 적자이고 자본수지가 흑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대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소농 사회에 전달된 근대화의 조건은 정신 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인적 자본이 외래 자본주의를 이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킴에 이바지했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소농 사회가 현대 한국의 자본주의와 관계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를 확인하고 싶다.”22)
이런 논술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맞서고 싶다.
첫째로 총독부는 조선인의 재산과 소득을 빼앗기 위해 총독부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법적 제도적인 장치를 법적으로 마련했다. 토지에 대한 근대적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종래 봉건 법률에 의해 전통적으로 보호받고 있었던 농민의 경작권 = 하급 소유권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토지에서 얻어지는 지대 취득권 = 상급 소유권을 절대적 배타적 성격의 토지소유권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 소농의 대다수는 토지에 대한 권리, 즉 ‘하급 소유권’마저 전적으로 상실한 무권리의 소작인으로 전락하였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수확량의 최고 90%에 달하는 살인적인 소작료를 지주에게 헌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량의 ‘절량농가’, ‘춘궁농가’가 넘쳐흘렀다. 쌀 생산 농가의 자가 소비를 최대한으로 줄여야만 일본이 필요로 하는 쌀을 최대한으로 착취하여 일본으로 반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적 병합 당시 한국 인구의 90%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농민 대다수의 빈곤은 곧 조선인 전체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자산자 계급에 의한 노동잉여의 착취를 이영훈은 증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제하의 지주 - 소작 관계를 지주에 의한 착취가 아니고 단순한 자유계약관계라고 본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시장경제의 법칙에 순응하여 지주와 소작인이 자유로이 맺은 자유계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절량농가’에게 있어 소작권의 확보 여부는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사가 달려있는 일이었다. 이것을 자유계약이라고 우긴다면 상식을 의심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지주 - 소작인간의 혹독한 착취 관계를 자유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근대법적 외피로 은폐하고, 그러한 불평등한 착취 관계를 총독부 권력이 총칼과 법률이라는 수단으로 농민을 강제함으로써 비로소 유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경제외적 강제’라고 할 수 있었다. 시장경제 법칙의 외피를 둘러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봉건 시대와 다름없는, 아니 그보다 더 혹독한 착취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봉건적 지주 - 소작 관계’에 의한 착취라고 불러야만 할 성질의 것이었다.
셋째로 이영훈은 무역수지나 자본수지가 일본에 대해 흑자였으니 수탈이 아니라 한국이 덕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역수지나 자본수지로써 수탈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것은 국제적 거래의 결과를 나타내는 통계숫자 이상의 것이 아니다. 실물 면에서 일본이 가져간 쌀만 보아도 1930~33년 평균치로 737만석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33년엔 절정에 달하여 9백만 석을 넘어섰다. 일본인 학자마저도 이를 가리켜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수출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말한 바 있다.23)
이 때문에 일제하의 쌀의 1인당 소비량은 일제 초기인 1914~1919년 평균 0.7071석에 비해 1930~33년 평균은 그 63%에 불과한 0.4486석으로 감소했다.24)
그 대신 한국민의 대다수는 중국의 동북 지방에서 수입한 잡곡, 그리고 심지어 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수입하여 허기를 모면해야만 했다. 이것은 정상적인 무역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일본인 자본이 들어옴으로써 한국의 공업화가 급진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해, 그리고 일본인들에 의한 기술상의 독점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고, 한국인의 기술 접근은 교묘히 봉쇄되었다. 8·15해방 후 일본인 기술자들이 물러난 이후 한국에 남겨진 거의 대부분의 공장들이 공장을 움직이는 데 필수적인 기술을 몰라 거의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일본에 의한 기술 독점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넷째로 이영훈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학교 취학률이 현저히 증가했다든가, 철도와 도로망이 대폭 확대되었다든가, 공장이 많이 건설되었다든가 하는 사실들을 실증적 자료에 의해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제가 이 땅에서 펼친 식민지 지배정책을 두고서도 그 때문에 우리의 정상적인 역사 발전이 왜곡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다.”25)
그러나 일본의 한국 근대화 정책들은 모두 일차적으로 일본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한국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어도 세계의 추세에 따라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일제의 침략과 착취가 없는 상태에서 한국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더라면 일제에 의한 것보다 훨씬 바른 발전을 이룩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다섯째로 이영훈은 “18-19세기 조선 농촌사회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선대제나 그와 유사한 공업 형태가 상인들에 의해 조직된 적이 없었다. 이처럼 맹아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핵이 실증되지 않은 채 널리 주장되었던 셈이다”라고 말한다.26)
그러나 유기 공업이나 철물 공업에서 자본주의적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권병탁의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오오츠카 히사오 등이 영국에 관하여 밝힌 바에 의하면 근대 공업은 자유로운 농촌에서 자유로운 ‘독립자유농민’들에 의해서 시동이 걸린 것이었고, 이영훈이 말한 재래 상인들에 의한 ‘선대제적 수공업’은 오히려 자유로운 농촌 공업을 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는 ‘선대제 수공업’이 자본주의적 맹아를 키운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아무튼 선대제 공업의 발전이 없다는 것을 맹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더욱이 인구의 90% 이상이 농촌에 살고 있던 상황에서는 자본주의적 맹아를 농업의 존재 형태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이 순리다. 더욱이 조선 말에 이영훈의 주장대로 “보다 적은 경지 면적에 면밀하고 반복적인 제초 노동을 행하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첩경”이었고, 이런 경작의 집약화에 의해 소농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맹아’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섯째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본이 한국을 공업화한 유산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 공업화의 토대가 이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8·15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려준 공장들은 거의 문을 닫았으며, 그것마저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공업화는 대부분 일본이 물려준 공장들을 이어받은 것은 아니다. 물론 일제하에서 한국인들이 갖추게 된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이 크게 이바지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한 교육이었고, 한국인 자체의 필요를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째로 이영훈은 역사학이 “민족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추구해야 할 기본 과제는 이 땅에 사는 주민들 상호간의 자유롭고 공정한 시민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다. 민족통일을 현대 역사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민족통일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북한의 마성적 수령 체제가 해체된 다음 이 땅의 주민들이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의 하나일 뿐이다.”27)
이영훈은 북한 체제의 붕괴를 전제로 한 통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한국 극우파의 논리야말로 현대 역사학의 과제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6·15공동선언의 충실한 이행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다. 이런 주장은 안병직에 의해서 더욱 강하게 표명되고 있다.28)
그런 견해는 한국과 일본의 극우파의 견해일 뿐만 아니라 한·미·일 공조 체제에 의해 북한을 말살하는 것만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보면서, 과거 클린턴 행정부의 국제적 약속을 전적으로 휴지화시키는 가운데 북한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강경 일변도의 호전적 정책만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보는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유일한 합리적 선택지는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바탕으로 한 평화적 남북 교류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 공조이지 무조건적인 사대주의적 대미추종이 아니다. 그런 대외 추종적 대북 대결정책은 6·15공동선언에서 확인된 민족자주 정신을 내팽개치는 반민족적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학문은 평화적 남북 교류와 협력, 그리고 자주적 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의 소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여덟째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현상주의, 수량 지상주의, 경제성장 제일주의, 시장경제 제일주의 역사관은 박정희 이래의 군사독재 정권의 치적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그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로서 중국 동북부의 한국 독립군 토벌에 앞장 선 반민족적 친일 행위자였던 사실은 1960년대 이래의 그의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에 대한 과대한 평가로써 은폐된다. 그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혹독한 독재 행위도 경제성장에 대한 그의 ‘공로’에 의해 합리화된다. 민족통일에 대한 전 민족의 소망을 담은 7·4남북공동성명을 독재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바꾸어 놓고,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애국애족 인사들을 처형한 박정희의 반민족적 야만 행위도 경제성장이란 미명아래 합리화된다. “박정희식의 강권 정치 아니고서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다른 선택지가 있었느냐”라는 것이 그들의 물음이다.
이에 대해 최윤오는 경제성장보다는 분배를 중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장과 분배가 이율배반성을 갖는다고 보고 있다.29)그러나 성장과 분배는 반드시 이율배반적인 것은 아니다.30) 분배를 중시함으로써 성장을 동시에 달성한 역사상의 두드러진 사례를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한국, 일본, 대만, 중국의 토지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전후 일본의 ‘재벌 해체’도 좋은 사례이다. 사회의 구조개혁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사례는 그밖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경제성장만을 절대적 가치로 내세우지만 그런 역사관은 현상 유지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역사관에 의해 기득권세력의 유지·강화에 이바지하고,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역할로 귀결될 위험성이 있다.
시장경제 제일주의적 역사관은 세계 유일 강대국의 전일적 경제 지배에 대한 순종만이 한국민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이어지고, 민족 자주성의 소중함을 망각하게 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학문의 가치는 우리 민족을 포함한 전체 인류 사회의 역사적 진보에 이바지하고 그 방향을 밝혀내는 데 있다는 것, 거기에 역행하는 학문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끝으로 강조하고 싶다.(2003년 경제학 공동학술대회 경제사학회 발표 논문)
●각주
1) 김준보의 견해는 ‘식민지 지주독점자본 연합지배론’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김준보, 『농업경제학서설』, 고려대학교 출판부, 1967, 『한국자본주의사연구(I) : 3·1운동과 경제사적 단계규정』, 일조각, 1970. 『한국자본주의사연구(II) : 봉건지대의 근대화구조분석』, 일조각, 1974.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주종환, 『한국자본주의사론』제3장, 도서출판 한울, 1988 참조.
2)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근대 세계사 상의 재구성(近代世界史像の再構成)』, 동경 : 아오키쇼텐(靑木書店), 1991. 안병직 외편, 『근대 조선의 경제구조』, 비봉출판사, 1989.
3)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형성(東アジア小農社會の形成)」, 『장기사회변동(長期社會變動)』, 동경대출판회(東京大出版會), 1994.
4) 주종환, 「중진자본주의론의 ‘근대’ 개념과 신식민지사관」, 1994 겨울호. 『일제 조선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식민지근대화론’비판』, 『역사비평』, 1999 여름호.
5) 주종환, 앞의 책 참조.
6) 김용섭, 『조선후기 농업사연구』, 일조각, 1970, 1971 등.
7) 안병직, 「총론」, 안병직·이영훈 편저, 『맛질의 농민들 : 한국근세촌락생활사』, 일조각, 2001, p. 5.
8) 주종환, 앞의 논문, 『역사비평』, 1999 여름호 참조.
9) 안병직, 「대담」, 『역사비평』, 2002 여름호.
10) 이영훈, 「근세 소농사회의 전개와 의의」, 한국역사연구회 연구발표, 2002. 7. 20. (www.koreanhistory.org), p. 20.
11) 안병태, 『조선근대경제사연구』, 일본평론사, 1975.
12) 이영훈·미야지마 히로시, 「조선사연구와 소유론」, 『인문학보』167, 1984.
13) 이영훈,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21, 1996.
14) 최윤오, 앞의 글.
15) 안병직·이영훈 편저, 『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001.
16) 최윤오, 앞의 글, p. 9.
17) 위의 글.
18) 주종환, 『한국자본주의사연구』, 앞의 책, 제3장, pp. 156~64.
19) 이점에 관해서는 이 논문의 앞의 각주 7) 참조.
20) 이영훈, 앞의 글, p. 18.
21) 이영훈,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1996.
22) 이영훈, 「근세 소농사회의 전개와 의의」, 앞의 글, p. 19~20.
23) 야기 요시노스케(八木芳之助), 『미곡통제론』, p. 81.
24) 주종환, 「한국자본주의사론」, 제10장, 「일제하의 농업경제 : 식량증식계획의 고찰」, 도서출판 한울, 1988 참조.
25) 같은 책, p. 25.
26) 「인터뷰 ― 안병직 교수의 직격토로」, 『월간조선』, 2002년 5월호. 「안병직 좌담」, 『역사비평』 2002년 가을호.
27)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주종환, 「민족운동, 사회개혁운동, 그리고 평화운동」, 참여사회연구소 편, 『시민과 세계』 ; 도서출판 당대, 2002년 하반기 ; 민족화합운동연합(민화련) 강령, 대표의장 취임사 등 홈페이지 www.hwahap.org에 실린 자료들.
28) 안병직, 앞의 좌담.
29) 최윤오, 앞의 글, p. 20.
30) 생산구조와 분배구조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킨 이론은 영국의 David Ricardo와 J. S. Mill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생산구조가 분배구조를 규정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이론은 옳지 않다. (주종환, 『경제학개론』, 일조각, 1977, p. 179 참조). 생산의 구조 그 자체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