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 주요명소
나주호

영산강 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만들어진 저수량 9,100만톤의 인공호수로 주변경치가 뛰어나, 나주호와 인근 사찰들을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댐의 길이 496m, 높이 31m로 1만 1,200ha의 논밭에 물을 대주고 있으며, 또한 호수에는 잉어, 자라, 향어, 붕어 등 민물고기가 풍성하여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일명 다도댐 또는 대초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주호는 다도면 판촌리, 궁원리, 방산리에 걸쳐져 있는 인공 담수호로, 197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76년 9월 준공을 보았는데 댐의 길이는 496m이다. 저수량은 9,100만톤으로서 약11,200ha의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해 주고 있다. 대초 장터가 있던 대초리가 수몰되었다고 해서 대초댐이라고 부르는데, 공사로 인하여 다도면 면적의 30%에 해당하는 859,508m²(260만평)의 면적과 650호의 주택이 수몰되기도 하였다.
나주호 인근에는 불회사, 운흥사, 화순 운주사가 인접해있고 삼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는 등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 휴양지로도 큰 각광을 받고 있으며, 남평읍 우산리 지역에는 골프장이 건립되고 있어 장차 도시 근교 휴식관광지로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061-330-7822
불회사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에 위치 하고 있다. 불회사는 백양사의 말사로, 운흥사터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덕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불회사는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화려함은 없지만, 호젓한 분위기로사람을 붙잡는다.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나한전, 요사채가 동백숲을 뒤에 두르고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웅전에 안치된 삼존불중 석가모니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로 유명하다. 계곡은 많지
않아 산의 참맛은 덜하나 절 주위의 전나무, 삼나무, 비자나무 등의 숲은 아늑한 분위기를
이룬다.
단풍이 가장 늦게드는 지역으로 그 빛깔이 인근에서 가장 아릅답다. 절 입구에는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신상인 석장승 한쌍(중요민속자료 제11호)이 서있어 인상적이다.
할아버지 장승은 툭 튀어 나온 퉁방울 눈을 하고 이맛살을 굵게 찌푸려 남도 특유의 해학적
표정을 짓고 있다.
* 문의 : (061-332-3440)
나주배박물관

나주배는 1430년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편에 토공물로 기록되어 품질의 우수성을 과시하였고, 옛날부터 많은 농가가 배를 재배하여 왔으며 1967년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해오고 있다. 나주배박물관은 나주배를 널리 홍보하고, 재배역사, 민속자료 등을 수집 보존 전시하여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1992.4.20 개 관한 세계유일의 배전문 박물관이다.
나주시 금천면 석전리 384-5
나주배박물관 061-331-5038
태산주말 관광 농원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광리에 위치 하고 있다. 농촌의 전원생활과 자연의 경치가 한데 어우러진 나주의 면산 신걸산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가족단위 휴양장소로
적합하며, 체력단련시설과 다양한 레져시설이 완비되어 각종 수련회 장소로 적당하다.
황토토굴의 한증막에서 자연의 신비한 효과 체험을 할수 있다.
* 문의 : (061-335-8050)
금성산(전남 나주)

나주의 진산(鎭山)인 금성산의 높이는 451m이며,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봉우리는 노적봉(露積峰), 서쪽 봉우리는 오도봉(悟道峰), 남쪽은 다복봉(多福峰), 북쪽은 정녕봉(定寧峰)이라 불리운다. 또한 금성산에는 금성산성이 있어 군사요새 기능도 하였던 곳인데, 지금은 공군 방공대가 있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있다. 매년 1월 1일에는 정상에서 해맞이 행사와 페어데이 행사를 개최하여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금성산은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영산(靈山)으로서 매년 봄 가을이면 나주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해의 풍년과 태평함을 기원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금성산에는 5개의 사당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비록 현재는 없어졌지만 산 정상에는 상실사(上室祠), 중턱에는 중실사(中室祠), 산 기슭에는 하실사(下室祠)와 국제사(國際祠)가 있었으며 성 안에도 이조당(爾朝堂)이 있어 금성산이 신령스러웠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금성산의 산신은 '금성대왕(錦城大王)'이라 불리는데, 현재에도 이 신을 모시는
무당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기도터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나주시 경현동 , 대호동, 노안면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061-330-8114
나주 배마을

배의 고장 나주에는 다양한 품종의 배나무가 자란다. 따라서 배꽃의 개화시기도 조금씩 다른데 신고배나 황금배 같은 조생종은 4월 20일 전후로 만개하고 만삼길, 금촌추 같은 만생종은 4월 25일을 전후 해서 활짝 피어나 나주 땅을 온통 백설처럼 하얗게 뒤덮는다.
배꽃은 매화나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은 대신 은은한 기품을 풍긴다. 나주 배꽃은 광주시와 나주시의 경계를 지나자마자 들어서는 노안면에서부터 그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과수원마다 온통 새하얀 배꽃에 휩싸여 있다. 나주시에서 배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가는 총 3,265호로 면적은 3,000ha에 달한다.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 바로 아래의 금천면, 그리고 영암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세지면, 봉황면 일대에 배밭이 많다. 그저 길을 가다가 배꽃이 눈앞에 보이면 차를 세우거나 발걸음을 멈추고 오직 감탄사를 연발하거나 천천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된다.
배꽃 나들이는 나주와 남평읍을 잇는 1번 국도변에 자리한 나주배박물관(금천면 석전리) (061-331-5038)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실내에 전시된 배꽃사진촬영대회 입상 작품들도 구경하고 과수원 모형, 다양한 배의 품종, 배로 만든 술/음식 등 전시물들을 꼼꼼히 살펴본다.
이 박물관에서 1번 국도를 타고 남평 방면으로 조금 가면 멧돼지가든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곳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소로로 접어들면 석전리에서 금천면사무소 앞에 이르기까지 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빙 돌며 한적하게 배꽃을 감상할 수 있다. 한편 매년 4월 중순부터 하순 사이에 배꽃 사진촬영대회가 열린다. 배꽃 개화시기는 나주 배박물관이나 나주시청 배지원사업소(061-330-8389)에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나주시 금천면 일대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061-330-8450
죽림사

(문화재자료 제92호) 죽림사는 백제 비유왕 24년(440) 경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 실치 않다. 그러나 통일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 16과(顆)와 불두가 발견되어 통일신라 이전이나 같은 시대로 추정된다. 죽림사는 남평 중봉산의 중턱에 위치한 산지 무탑식가람으로 원래의 배치형식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지형의 경사도와 대지의 조건으로 보아서는 선을 중요시하면서 발생한 산지가람 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보통 산지가람의 배치형식인 경외 일주문 누(樓) 중정(中庭) 대웅 전과 요사 부속 당우(堂宇)의 순서로 이루어진 3단(상, 중, 하단)의 단차구성이 아니라 경외에서 바로 요사인 청향각(淸香閣)에 이르게 하였고, 그 다음 공터를 두고 단위에 극락보전과 영산전, 삼성각이 한꺼번에 배치된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전후퇴이며 맞배지붕에 겹처마 를 한 건물이다.
2.2m높이의 막돌쌓기 기단위에 건축하였는데 초석은 덤벙주초로 2고주(高 柱) 5량의 맞배지붕에 풍판(風板)이 설치된 건물이다.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의 주심포 식으로 내부에 출목이 없고 기둥 위의 공포 사이에 소루(小累)로 꾸며진 커다란 화반이 있으며 기둥은 배흘림을 약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부공간은 실내에 기둥이 없이 통칸으로 처리하여 개방감을 준다.
천정은 층단을 둔 우물 천장이며 불단위에 보개를 얹었다. 특이한 것은, 불단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개구부의 문은 모두다 띠살창인데 정면과 우측면에 출입문이 있을 뿐 아니라 배면 에도 문이 있는 것은 독특한 형식이다.
* 규모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산 1번지 죽림사 061-337-3620

일제강점기 영산강의 가항종점인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등대이다. 1915년 설치된 시설로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내륙하천 가에 있는 유일한 것으로 1989년까지 수위 관측시설로 사용되었다. 영산포 선창은 1960년대까지 각종 선박이 왕래하면서 많은 수산물들이 유통 되었다. 특히 산 홍어와 추자 멸치젓배가 왕래해 지금도 선창가에는 어물전들이 남아서 그 옛날의 정취 를 느끼게 한다.
바다 아닌 강을 밝히는 유일무이한 영산포등대 운하가 발달한 외국에서는 강가에서 등대를 발견하는 일이 특이한 것만은 아니다. 바닷가 에 면한 해항(海港)이 있다면 강가에 면한 강항(江港)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륙운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내륙의 항구들이 많다. 운하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에도 강가 등대 가 있는 곳이 있으니 전라남도 나주의 영산포가 그 곳이다. 아마 강가 등대로는 유일무이 한 곳이니, 지금은 비록 영산강 뱃길이 끊겨서 제 구실은 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의연하게 남아있어 그 옛날 고깃배들이 드나들며 흥청거렸던 시절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 영산포등대는 홍어와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다. 봄바다에 진달래 꽃빛이 드리울 무렵이면 홍어의 북상이 시작된다. 한류성 어족인 홍어가 남쪽 바다에서 자취를 감추면 봄이 완연하다는 증거다. 《자산어보》에도 “동지 후에 비 로소 잡히나 입춘 전후라야 살이 두껍고 제 맛이 난다. 2~4월이면 몸이 쇠약해져 맛이 떨 어진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홍어주산지는 흑산도 근해였다. 요즘 사람들도‘흑산도 홍어’를 입에 달고 산다. 당연히 흑산도를 홍어 문화의 본산지로 안다. 그렇지만 홍어 식도락 문화의 본향은 흑산도가 아니라 영산포다. 흑산도가 원생산지라면 영산포는 최종 가공처라고나 할까. 잡 힌 홍어들이 배에 실려 굽이굽이 영산강 뱃길을 따라 일주일여를 올라와 옛 남도의 물류 거점이었던 영산포에 닻을 내리면 어느새 홍어는‘푸욱’ 발효되어 예의 ‘썩은 홍어’가 되고 만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먼 뱃길을 따라 영산포까지 올라오는 사이에 자연 발 효돼 독특하고 절묘한 맛을 연출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마디. 흑산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본디 먹지 도 않았다. 흑산도 예리포구에서 만난 뱃사람들은, ‘흑산도에서는 삭힌 홍어 안먹지라. 당신이라면 금새 잡은 싱싱헌 놈 놔두고 그걸 먹겠소?’라고 한다. 싱싱한 것을 먹지 못 하는 먼데 사람들이나 먹던 것이 그만 별미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흑산도에 가 면 싱싱한 홍어를 생물로 맛볼 수 있다.‘흑산도홍어’의 진실을 확실히 알아야 할것이다.
영산포는 흑산도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고려말 왜구들이 노략질을 할 때마다 도서 지방의 피난민들이 영산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 머무르곤하다가 아예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흑산도 앞 영산도 사람들이 몰려와 살면서 ‘영산포’라는 지명이 붙었다. 섬과 강변, 바 다와 강은 이렇게 하나로 연계되었다. 정작 흑산도 사람들은‘싸하게 썩힌’ 홍어보다 생 물(生物)을 좋아한다니 역시 홍어문화의 원조는 영산포임에 틀림없다. 영산강을 이용한 수운의 발달은 영산포라는 새로운 도시의 발달과 지역경제의 발달을 가져 왔다.
사실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미 고려시대에 조운제도에 의하 여 영산포에 진이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 다시 조창제도가 부활하면서 세곡을 거두어 저 장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국영창고인 영산창이 지금의 영산포 택촌마을에 설치되었다. 이 영산창은 전남 17개 고을의 세곡을 모아서 저장하던 곳으로 5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산창은 수로가 길고 험난해서 해상사고가 많이 났기에 1512년에 영광의 법성창으로 옮겨진다.
다시금 영산창이 주목받은 것은 한말부터이다. 조운선이 진을 치고, 남도의 숱한 어선들이 모여들어 도회를 이뤘던 영산포에는 홍어 뿐 아니라 흑산도·낙월도 등지에서 올라온 소금 과 온갖 해산물이 철철이 산을 이뤘고, 이 ‘갯것’들은 ‘염질’을 거쳐 광주 등 내륙의 대처로 팔려나갔다.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제포(薺浦)라는 포구가 보이고 포촌(浦村)이 라는 포구명칭이 적혀 있다. 수심이 3발(三丈)인데 조류가 올라오면 4발(水深三丈潮入則四 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서해의 조류가 강을 따라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정확한 증거이다.
상선(商船)이란 설명이 붙은 배들이 여러척 그려져있고, 강가에 마을이 형성된 것 으로 미루어보아 강상루트의 통행량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영산포의 새 주인은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사람들은 북쪽 포구에 집단촌을 형성하였던 반면에 일본인들은 남쪽에 새로운 포구를 만들었다. 1904년 평남환(平南丸)이 라는 10톤급 발동선이 목포와 영산포 간을 운행하면서 종전의 18시간 거리가 5-6시간으로 단축된다.
강을 따라 배들이 모여들고 영산포에는 예전에 없던 5일장도 들어선다. 일본인 들이 정착한 것도 이같은 유리한 조건을 십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오일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거리가 들어서고 일본식 명칭인 은좌(銀座) 거리도 생겨난다. 영산강 일대의 최대의 쌀 집결지인 영산포의 쌀값 동향을 재빨리 목포의 상인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에서 우체국도 들어선다.
1906년에는 오늘날의 영산포여자중학교 자리에 일본인 소학교가 들어서고, 전남 내륙에서는 최초로 영산포 일본인회도 창설된다. 1907년에는 영산포 헌병분대, 1908년에는 광주 농 공(農工)은행 영산포지점, 1910년에는 일본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 포교소와 일련종 사(日蓮宗寺) 등이 들어선다. 한일합병 이후, 1914년에 영산목교(榮山木橋)가 건설되고 1915년에 호남선철도가 개통되면서 영산포역이 생겨난다. 그때쯤 등대가 들어서는 것이다. 일제는 너르디 너른 나주평야의 쌀들을 영산포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 보냈고, 지금도 남아있는 정미소 건물은 이런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호남, 특히 나주 일대의 기 름진 곡창에서 거두어들인 쌀이 산처럼 쌓였다. 영산강 하구의 목포와 쌍벽을 겨루던 침략 의 대상이기도 해 당시 동양척식회사의 문서고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온갖 상품을 파는 상가들이 즐비하고 게다신은 일본인들이 거리를 오갔다. 영산강을 따라서 배에 실려온 홍 어들은 포구에 내려지고, 다시 광주로, 나주로, 담양으로 팔려나갔다. 홍어의 전파과정에 서 영산강의 위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등대까지 생겨났다. 등대는 바다의 상징이다. 누구나 그렇게 아는 바다의 등대 가 이곳 영산포에는 바다가 아닌 강에 서 있다. 유일의 강변 등대다. 이미 1915년에 설치 됐는데, 그 시절 얼마나 많은 배들이 몰려 들었으면 여기에 등대를 세웠겠는가. 그 관록의 강변에는 지금도 홍어집들이 즐비해 옛날의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산강은 이름만 옛 강이로되 사람도, 풍광도 옛 것이 없다. 하구언이 막 히면서 물길이 끊겨 ‘끝발 날리던 포구’의 영화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육로와 철로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유발하였고,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에 의한 영산강 하구언 건설은 영산포의 완벽한 몰락을 가져왔다.
1975년 영산포에 배가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이후 영산 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 흑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홍어는 거의 없다. 그나마 가끔가다 예기치 못한 풍 어로 뜻밖에 홍어 맛을 보는 해도 있지만 값이 비싸 범접하기 쉽지 않다. 1997년 부터 흑 산 앞바다에서 홍어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는데 근래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갑자기 홍어가 많아졌다. 수년 전에 비하여 제법 홍어가 든다고는 해도 그 정도 물량으로는 전라도 자체 의 수요를 충당하기에도 터무니 없다. 더군다나 홍어는 이제 전국적인 수산물이 되었으니 홍어값이 천정으로 치달은지 오래다.
토종 홍어의 빈자리를 칠레산 등 수입산이 채운다. 칠레 홍어를 처음으로 들여다 판 사람 은 ‘영산강 지킴이’로 불리는 양치권(영산강 홍어 대표)씨. 부산으로 유학을 떠나 수산 대학을 졸업한 양씨는 20여 년 전인 1983년에 원양어선을 타고 칠레까지 진출해 그곳 홍어 를 알게 됐다. 주변에서 그를 “홍어잡이와 보급, 홍어 식도락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라 고 평하거니와 남도문화의 중심 먹을거리에서 전국구 음식으로 퍼져 나가는 홍어 붐의 배 경에 양씨의 숨은 노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냄새도 못 맡던 사람들이 홍어의 진미를 알고 찾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며 넉넉하게 웃는다. 홍어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수급이 뒤따르지 못하니 눈길은 자연히 칠레 등 외 국으로 돌릴 수밖에. 말이 칠레산이지 전문가들이 우리 홍어와 맛이 가장 닮은 것을 용케 골라 수입하기 때문에 때깔도 그렇거니와 삭혀놓으면 맛까지 흡사하다. 워낙 나라가 길기 때문에 우리와 비슷한 환경조건이 형성된 곳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살 씹히는 맛이야 우 리 것을 따를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불이 꺼진 영산포 등대에도 서광이 비추이고 있다. 조심스럽게 영산강하구언을 철거 시키거나 재조정하여 다시금 영산강의 젖줄에서 수운을 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기 때 문이다. 나주시에서는 영산포의 선창을 다시 복원하는 ‘근대거리 조성계획’을 수립중이며 당당한 문화유산으로서 뒤늦게나마 재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등대도 영산포의 명물로 거듭 나고 있다. 한쪽에서 일고 있는 ‘하구언 없애기’야말로 영산강에 대한 축복이며, 생태환경에 대한 각성이 없었던 지난 시절에 대한 통렬한 반성의 증표가 아닐까. 남도 사람들의 온갖 애환 을 실어 나른 영산강 뱃길문화의 복구야말로 바다와 강이 만나는 문화다양성의 값진 복원 아니겠는가. 영산포의 등대에 다시금 불이 켜지는 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나주시 영산동 영산강변(옛선창) 나주시청 문화공보실 063-330-8542
나주 천연염색 문화관

고대문화 중심지인 나주는 영산강유역을 배경으로 일찍이 염색문화와 실크생산의 큰 역할을 하여 왔다. 영산강과 바닷물이 합류했던 지리적 환경은 쪽재배와 뽕나무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여 이곳은 천연염색의 최적지이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중요 무형문화제 염색장 기능 보유자도 활동하고 있는 곳이다.
천연염색 전통 계승 발전과 천연염색산업 진흥계기를 마련하고 천연 염색상품을 개발하여 관광자원화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특별교부세를 지원받아 천연염색문화관을 건립하였다. 나주시천연염색문화관은 한국 천연염색 문화를 대표하고 향후 천연염색 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천연염색의 요람이 될 것이다.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163번지 061-335-0091

미륵사는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산 124번지 덕룡산(德龍山)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의 말사이다.미륵사(彌勒寺)는 호남의 중원(中原)인 나주에서 빛고을인 광주를 바라보는 덕룡산(德龍山) 아늑한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다.
푸르른 소나무 향을 맡으며 마을 뒷산을 오르면, 정돈된 축대 사이로 아담한 가람이 보인다. 사찰의 터는 봉황이 알을 품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에 위치하고 있어, 새로운 세계를 여는 미륵의 화신으로서 용과 봉황 같은 영웅이 출현할 길지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인지 가람의 뒤편 언덕에는 우리나라에서 그 예를 보기 힘든 희귀한 칠불석상(七佛石像)과 거대한 석불입상(石佛立像)이 미륵사의 미륵부처님으로 칭해지며 나주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용의 가피를 입은 덕룡산 아래 자리하며 천년을 되새긴 미륵불상은, 빛고을인 광주를 한없이 바라보며 옛 나주인들의 끝없는 기원을 읊조리고 있는 듯하다.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는 옛부터 서남해안의 해산물과 호남의 곡물이 유통되는 곳으로 해안과 내륙을 잇는 중요한 지점이었고, 미륵사가 자리한 철천리(鐵川里)는 이름 그대로 쇠가 많이 나는 마을이었다.
따라서 미륵사는 평화로운 시절에는 지역민의 종교행사와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상인들에게는 뱃길의 무사함을 비는 기도처로서 이곳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고, 전쟁시에는 야철산지를 중심으로 군부대의 거주처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124 061-331-3436
나대용장군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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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 깊숙이 나대용장군의 생가가 초가로 복원되어 있다. 그 초가에서 대 대로 후손들이 살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로 단장했다. 나대용 장군은 임진왜란때 이 충 무공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전력을 기울인 실질적인 공로자로 평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 이순신 장군을 훈련원주부의 신분으로 찾아 가 그 제작을 협의 하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았고 그 후 임난이 일어나자 거북선 3척을 처 음으로 진수했다 한다. 나대용장군은 충무공과 함께 사천승첩을 비롯하여 당포전,당항포전,견내량전,안골포전,노량 대첩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전 서>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등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묘소는 생가에서 약 2km 떨어진 마전산에 있으며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시험했다는 방죽이 마을앞에 있는데, 지금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고 마을 이름도 방죽골이다. 나대용장군은 조선시대 최고의 조선 기술자였다. 이순신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최고의 걸작인 거북선을 만들었고, 이후에도 임진년과 같은 국난에 대비하기 위해 창선, 해추선등을 만들어 내는 과학자였다. 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가 1975년 건립한 소충사에서는 장군의 과학적 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22일 '과학의날'에 제사를 모신다.
* 양식 - 목조초가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나주시청 문화공보실 061-330-8542
미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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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서원은 17세기 조선이 거유(거유)인 미수 허목(1595∼1682)의 도학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숙종16년(1690)에 호남유림의 연명상소로 나주 금강 미천(眉泉) 위에 사우가 건 립되었고 1693년 사액되었다.정조 23년(1799)에 채재공을 추배하였다. 숙종 37년(1711) 과 숙종 41년(1715)에 걸쳐 두차례 중수되었다. 그러나 경종 4년(1724) 조령중에 갑오 이후(1714)에 창건한 사우를 훼철하라는 칙령을 빌미로 갑오이전에 창건된 서원 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유학 김상택이 남설서원으로 보고하여 1차 훼철을 당한다. 이후 1771 년 원이(院貳)채홍원이 사우를 중수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우가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정조18년(1794)에는 미수의 진상(眞像)을 그리라는 왕명에 따라 영정3매가 완성되 어 1804년 미천서원에도 봉안되게 된다.1799년에 미천서원의 13대 원장을 지낸 번암 채 재공을 추배하였다. 이는 미수의 학문을 따르고 구체화하는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미천 서원 운영에 많은 공을 세운 까닭에 사림들이 추배한 것이다.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2차훼철을 당하자 영당과 장판각은 삼영동 선산 아래로 옮겨 유 지되다가 1893년 옛터에 영당과 강당을 중건하고, 1937년 허영규의 추진으로 대대적인 서원 중수를 거쳐 최근에도 장판각 신축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미수 선생의 기언목판 (861매)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주시 안창동 383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061-330-8227
문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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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현몽한 나주 문성암(文聖庵) 문성암이라는 이름대로 글을 매우 잘 하는 사람이 출현할 것이라는 꿈을 꾸고 사찰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 운흥사(雲興寺)의 암자인 문수암(文殊巖)이 있었던 곳으로 문수는 문수대성(文殊大成)이며 여기에서 문성(文成)을 따서 암자의 이름을 지었고, 문수가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선원 터로 적합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문수보살이 화현한 터라고도 한다.
문성암을 세운 다정스님은 죽림사와 운흥사를 오가며 수행할 때 문성암 앞의 커다란 소나무를 보고 사찰이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또 운흥사 초가에서 기거할 때 스님이 문성암 쪽에서 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꿈을 꾸고 절을 짓고자 결심하였다. 처음 터를 닦을 때 같이 일을 하던 보살이 꿈을 꾸었는데 불이 나서 그 불길이 하늘을 태웠다고 하는 길몽을 꾸었다고도 한다.
본래의 암자가 폐허가 된 후에는 해발 200m정도의 산 속인데도 물이 넉넉하여 논으로 경작되어 왔는데 지금도 특히 물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찰은 여느 곳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나지막한 차(茶)나무가 나란히 도열해 우리를 맞이하며, 그 앞에는 곧 앞마당 같은 잔디마당이 아담하게 다듬어져 있고, 한자로 쓰인 글귀가 많이 눈에 띠고, 전각의 현판도 “참회전(懺悔殿)”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하는 등 이곳은 공부하며 참회하기에 좋은 곳으로 생각하게 한다.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 899-2 061-337-0711
불회사석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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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회사 석장생은 사찰 입구 300m지점 오솔길 좌우에 2기가 있다. 우측이 남장생이고 좌측이 여장생인데 여장생은 하반신이 지면에 매몰되어 있다. 남장생(하원당장)은 어굴 조각 선이
깊고 인상적이며 입 좌우에 치아가 각 1본씩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수염을 상징한 굵은 양
각선이 턱아래에서 좌측으로 40cm쯤 내려와 있다. 얼굴이 남자상으로 선이 뚜렷하고 머리에 서 중앙을 솟아 오르게 하여 옛날 상투를 뜻한 것으로 보인다.
각자는 원래 「하」인데 후세 에 누구인지 장난삼아 「정」자로 판것같다. 좌측 여장생(주장군)은 남장생에 비해 얼굴이 여성적으로 온화하며 웃는 인상이고 부드럽고 평면적이다. 장생은 마을수호신으로서의 장생 과 이정표로서의 장생,경계를 표시하는 장생이 있는데, 세워진 장소는 주로 사찰입구,마을,성 문밖,경계 길가 등이다.
「장생」이란 문자가 문헌상으로 나타난 가장 오래인 것은 신라 경덕왕 18년(759년)으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에 「이때가 건원 2년인데 특별히 교지를 내려 장생표주를 세 우게 했는데 지금도 볼수있다.(是以乾元二年 特敎植 長生標柱 至今存焉)」이란 기록이 보인 다. 이 석장생은 불회사의 인근에 있는 운흥사 석장생(하원당장군)의 조각형태와 그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운흥사 석장생이 만들어진 강희 58년(1719년)을 전후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장승의 앞면에 새겨진 당(唐)자 주(周)자 글씨는 길(道)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자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가는길,주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212 불회사 061-337-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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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몽촬영지 세트장(삼한지 테마파크)도 구경 할만하 곳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