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辛卯春(신묘년 봄에)
淸 明 寒 食 夢 中 過 (청명한식몽중과) 청명과 한식 절기 꿈속처럼 지나가는 듯
屈 指 韶 光 有 幾 多 (굴지소광유기다) 봄빛 찬란한 날들을 손꼽아 헤아려 보네
獨 臥 小 軒 無 客 問 (독와소헌무객문) 작은 집에 홀로 누운 이 몸은 한가로운데
滿 林 煙 雨 濕 梅 花 (만림연우습매화) 숲 속에 내리는 이슬비에 매화꽃이 젖네
<어 휘>
屈 指 : 손가락을 꼽아 세어 봄
韶 光 : 화창한 봄 경치, 春光
幾 多 : 많음, 허다함
煙 雨 : 이슬비
<지은 이>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시호는 문익
(文翼)이다.
공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로 화려한 벼슬 길에 들어서게 된다. 특히, 나이 31세에 대제학을 맡는
사상 초유의 일을 비롯해, 38세에 우의정이 되어 재상의 반렬에 오르고, 42세에 영의정으로 백관의 우두
머리가 되는 등 조선 왕조를 통털어 그 화려한 벼슬길은 가히 독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공의 출세의 배경에는 우선은 스스로가 지닌 재능과 인품과 덕망이 훌륭했던 것이 1차적인 원인
이라 하겠고, 다음은 미증유의 전란을 겪은 시대적인 상황인 국난기의 비상 시국하에서 여러 차례의 발탁
인사에 힘입은 바도 있고,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하여 장인인 李山海 공이 이미 영의정으로 최고의 권좌에
있으면서 직,간접인 후광을 힘입은 바도 있지 않았나 하고 사료된다.
공은 특히 외교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선조께서 의주까지 피란을 가는 동안 평양마저도 버리고 북으로 쫓기는 상황에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청원사(請援使)의 역할을 자청하고, 원병으로 온 명나라의 장수나 관원들을 상대하면서 일본의 사신이나
협상 대표들과의 교섭활동 등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선조 임금의 뒤를 이어 등극한 광해군의 즉위 사실을 인정받는 명나라로 부터의 책봉 확인을 위해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당시에 대명외교의 제1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이항복 선생과는 다섯 살이 적지만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평생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벼슬 길에서도 두 분이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힘을 모아 나라 일에 충성을 다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후에 정국의 뇌관으로 등장한 폐모론에 온 몸으로 맞서서, 그 부당함을 적극 논박하다가 결국
벼슬길에서 물러 난 선생은 5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선생의 한시는 여러 편이 전해 오고 있거니와 그중에 상당수의 분량은 스님들에게 주는 시편(詩篇)들이다.
이는 전란 중에 도처에서 일어난 승병들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고, 이러한 와중에서 알게 된 스님들에게 정
(情)으로 전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소개한 시는 제목이 “신묘년 봄”으로 전해지는 칠언 절구이다. 뒤숭숭한 시국속에서 조정의 중책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시인이 아름다운 봄철의 풍광을 만끽하면서, 그 감회를 읊조린 멋진 내용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