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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정명공주.
화정(華政)은 징비록에 비해서 확실히 몰입감을 준다.
징비록은 징비록의 정당성을 억지로 마춰 가려다 보니 실제 역사와 잘 맞지 않는 것이 많다.
화정은 광해군이 주도하여 가면서도 아직까지는 심한 역사왜곡 현상은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몰입감을 준다.
선조, 광해군 시기의 시대적 상황.
광해군은 선조가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
동인의 북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양광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의 주리학파가 세력이 약해지자, 영남 낙동강 서안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 세력이 광해군을 지지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동인에서 분열되는 이산해가 물러났다가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북인 영수로 올랐다.
이때부터 대북(낙동강 서안)의 정인홍은 광해군을 지지하고,
소북(낙동강 동안) 영수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지지한다.
정인홍은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며 역모로 몰아 계축옥사를 일으키고
사사시키면서 분열한다.
북인이 분열하면서 대북으로 분열하는 정인홍과 뜻이 맞지 않아 이산해는 골북으로 분열한다.
이황의 주리학파였던 이산해는 정인홍의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사상과 철학이 맞지 않아
골북으로 밀려난다.
[분열 초기에는 양광도 서북부에서 경북 북부, 영덕, 영해를 포함하는 지역].
합천의 정인홍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의 부패로 골북, 중북, 육북으로 분열되고
소북은 청소북, 탁소북으로 분열한다.
이산해를 중심으로하는 육북(영덕, 영해 중심)은 이황의 주리학파.
유몽인, 허균 등을 중심으로하는 중북(대구)은 합천/산청의 조식학파.
홍여순,이이첨을 중심으로 하는 골북(경북 서부지방~충북 음성군)은 조식학파로 분열한다.
홍여순은 류성룡을 몰아냈다가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에 의해
진도로 유배가서 죽었다.
홍여순이 자객을 진도로 보내 임해군을 죽이려 했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대북의 이이첨이 진도로 유배가 있는 임해군에게 자객을 보내 암살하며 보복전을 펼친다.
소북은 청소북, 탁소북, 청남(남인), 탁남(남인) 등으로 분열한다.
소북 영수 유영경은 원래 정여립에 속해 있었다.
정여립이 죽고 이발, 백유양, 최영경, 유영경 등이 잡혔으나 유영경은 고초를 겪고 살아 남는다.
정여립은 서인 이이, 성혼, 박순 등을 비판하고 이황을 비호하여 주리학파에 가까웠다.
그러나 대동계를 조직하면서 결국 이이, 이항의 현실주의를 택하였다.
소북 영수 유영경은 선조(영창대군 옹립)를 지지하여 선조가 죽자
바로 탄핵되어 계축옥사로 사사되고 만다.
유영경이 죽자 청소북, 탁소북으로 분열하다 청남, 탁남 등으로 계속 분열한다.
남이공을 중심으로하는 청소북(청도~청송), 김신국(청풍).
유영경, 유희분을 중심으로 하는 탁소북(진주, 마산, 창원, 진해, 거제).
박승종을 중심으로 하는 소북 (밀양, 창녕) 등으로 분열한다.
청소북은 다시 청남으로 이어진다.
청남은 윤휴, 허목 등으로 이어가는 남인 윤휴학파이다.[청도청송 ~ 청풍]
탁남은 허적, 유명천 등으로 이어지는 남인으로 이황의 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다.
[진주, 마산, 창원, 진해, 거제]
허목은 예송논쟁에서 이겨 영의정이 되면서 집권한지 하루만에 효종을 독살한다.
윤휴학파가 왜 주리철학적 변종 개혁 주자학파인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황의 주리학을 개혁시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변종 개혁 주자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황의 주리학은 주자가 완성한 주리철학의 연속이며 완성된 학문이라 손대면 안되는 학문이었다.
성리학은 공자 사상부터 인정이되고 주자학은 맹자 사상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주자학과 도학이 융합하면 학문이 아닌 변종 학문이 되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공자가 노자로부터 "예"를 배워 주자학에서 도교적인 색체가 너무 강했던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을
파내려는 주기학파와 고수하려는 동인 주리학파 사이에서 오랜 주자학 논쟁을 펼쳐 오고 있었다.
소북의 윤휴학파는 이황의 주리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주리학을 개혁한 학파였다.
이황의 주리학은 결코 개혁시켜서는 안되는 학문이었다.
도학에 약간 치우쳐 있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주리학을 개혁하면 변종이 되는 학문이었다.
윤휴가 노론 송시열로부터 예송논쟁을 겪으며 사문난적으로 매도당하고 윤휴가 사사되고 만다.
합천의 남명 조식학파는 노자의 도교철학, 장자철학, 제자백가(백이숙제) 철학 신봉자였기 때문에
성리학의 이단파 철학 집단이었다.
선조 당시 서인과 동인 이황학파로 부터도 이단파로 매도되어 문묘종사에 조식이 오르지 못하고
조식의 정신적 계승자인 정인홍이 청금록(유적)에서 삭제당하는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정인홍은 조식철학을 성리학의 틀안에 넣어 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한 앙갚음을
광해군이 집권하자 엄청난 정치보복으로 맞서는 인물이다.
소북 영수 유영경을 계축옥사로 사사시키는 일부터 시작하여 임해군 암살, 진릉군, 영창대군, 능창군,
김제남과 세아들 및 부관참시 사건, 정명공주와 함께 인목대비 유폐사건 등을 일으킨다.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분열한다.
광해군 때 대북 영수 정인홍 등의 무자비한 정치보복을 두려워한 서인 기대승, 이이, 이항, 박순,
김인후의 주기학파 제자 40여 명이 현실론을 내세워 대북 정권에 일시 협력하였다가 동반 몰락한다.
이틈에 서인 주자학 중도파, 경기, 강릉, 호남의 서인 주기학파가 몰락하는 틈을 타서
정묘, 병자호란을 거치며 충북 옥천의 송시열 등이 서인정권을 장악한다.
송시열은 노론으로 분열하고 충남 논산 노성의 윤증은 소론으로 분열한다.
윤증은 이이의 주기학파 광주의 성혼을 이어 양명학으로 대체하지만 송시열은 주자학 원리주의를 고수한다.
서인은 송익필, 정철, 윤두수를기반으로 하는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와 성혼, 조헌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학 중도파, 개성의 서경덕, 광주의 기대승, 강릉의 이이, 정읍 태인의 이항, 장성의 김인후 등 40여 명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학 개혁, 혁신주의 학파인 주기학파로 나뉘어진다.
주자학 개혁, 혁신주의 학파인 주기학파는 경기 개성의 서경덕, 광주의 기대승, 강릉 출신의 서인 이이(파주)를
중심으로 전북 정읍 태인의 이항, 전남 장성의 김인후, 광주의 성혼, 박순(영의정) 등으로
이어지는 주기학파를 말한다.
[조헌은 주자학 중도파, 김장생은 송익필을 잇는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이었지만 같은 기호학파로서
학풍은 전혀 달랐지만 친분 관계는 두터웠기 때문에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였던 윤선거를 통해
소론학파 윤증에게 양명학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게 된다].
畿湖地方 (기호지방)은 서경덕이 황진이와 함께 살았던 경기 개성에서 부터
호남의 광주 지방까지를 말한다.
湖南地方 (호남지방) 중에서 전주 ,정읍, 광주지방까지를 말한다.
호서지방(湖西地方)이라 함은 전북 중서부 지역과 충남지방을 말한다.
글자를 보면 알겠지만 기호지방은 경기도가 앞에 붙고 호서지방은 호남이 앞에 붙는다.
어느 쪽이 주도했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서경덕에서 시작하여 사상적 기반은 광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성혼, 박순(영의정) 때
권력을 장악하고 동인과의 협상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주기 성리학이다.
기호학파의 중심은 서경덕, 이이 때부터 광주가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원래 이이는 선조 당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서인 정권에 들어와 후학을가르쳤다.
정철 역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 광주의 성혼, 박순 정권에 협력하면서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타정당이나 타지역 출신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기호지방 주기학파의 정신적 사상적 기반은 이이를 중심으로 광주의 성혼, 박순이
권력을 장악하자 동인과의 협상을 통해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마무리를 하자마자 고니시가 십자가를 걸고 침공해 들어오는 것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전남 광주지방만 유일하게 무사한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 시절 주기학파의 정신적 계승자 중의 한 명인 정읍 태인에 이항의 주기학파
사상철학의 영향을 받는다. (전주 부윤 남언경, 김천일이 이항의 제자)
서경덕은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후학 양성에만 전념한다.
이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대승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언론 삼사의 요직인 대사간직을 받는 과정에서
대기실에서 오랜동안 기다리며 차를마시다가 반대파 동인 주리학파로부터 정치적 보복을 당해
선조를 만난지 사흘후 병을 얻어 사임하고 광주로 내려가다가 주기학파 이항을 만나는 중에
정읍 고부군에서 독이퍼져 최후를 맞이한다.
정철은 1593년 강화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강화도에서 병사처리 된다.(동인 이산해, 류성룡)
백과사전에
교묘하게 기호학파에서 호남을 빼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참으로 졸렬한 발상이다.
마치 기호학파가 경기도와 충청도까지만 인듯이 말한다.
기호지방은 경기개성, 인천, 충남, 호남의 전주, 광주지방까지 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기호학파 주도 세력이 경기, 호남 세력이 주축이었고, 사상적 기반은 광주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전주는 전라 감영이있고 왕조 중심지였기 때문에 권력 독점에 소극적이었고 왕들도 중앙에 참여할 문관 요직을 주지않았다.
충남과 충북은 소외되어 있다가 인조반정 이후 노론, 소론 때 권력을 장악한다.
주기학파는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소나기는 피해보자는 심정으로
일시 협력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주기학파 40여 명이 유배를 가는 바람에 유배지에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맞이하며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였다.
주기학파의 개혁이 성공하였더라면 중세의 관습, 악습, 폐습, 허례허식, 관의복 복식, 신분차별,
정치, 군사, 사회, 문화제도 등이 혁파되어 근대화를 앞당길 수가 있었다.
주기학파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일과 관복 등을 입는 것을 창피해 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의식이
깨어있었던 학파였고 주자학 안에 있는 노자의 도교적인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을 혁신하여
퇴출시키려던 학파였고 주자가례 역시 혁신적으로 개량하여 근대화시키려 하였다.
대북정권은 노자의 도교철학, 장자철학, 제자백가철학 신봉학파였으니 정치적 보복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일시 협력하였다가 몰락하는 바람에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 왕조가 전주 왕조이고 서인 정권은 전주(무인 중심), 여주, 이서군(이천/문관 중심)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훈구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발전이 더디다보니 김종직 때부터 영남 사림파를 등용시켜 처음으로 동인과 남인이 출사하게 된다.
호남 동부지방도 가야인 취급을 받다가 중종 때 조선 왕조실록 사대사고 필사본을 집필하게 되면서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대첩을 치루고 돌아가며 마이산에 가서 조선 왕조 창업의 꿈을 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등용되는 계기가 된다.
연산군 때 발생하는 무오, 갑자사화는 사림파를 등용시켰더니 동인끼리의 음모를 일삼다가
서인 영광유씨 유자광[남원]을 끌어들여 일으키는 참화이다.
양광도를 중심으로하는 주리학파 동인과 영남 사림파를 중심으로하는 동인과의 권력 투쟁에서
서인을 이용하여 정적 영남사림파와 기호사림파를 제거하고 동인 권력을 양광도 동인과
그 후신 주리학파가 독차지하기 위해 4대사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치를 잘해서 국가발전을 빨리 시켜보려고 동인, 남인을 등용시켰는데,
정치술수, 중상모략, 권모술수, 교언영색, 감언이설만 판치는 조선 후기사회로 변모해 간다.
조선이 외침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형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인조반정으로 주기학파가 유배로 배제되고 주자학 원리주의자들이 권력을 독점하였으나,
정치보복이 없어지지만 단지 서인 편중 인사로 남인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 토벌에 실패하고 만다.
이괄의 난으로 순변사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달아나 누르하치에게 고자질하고
후금을 끌어들여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이는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나라는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
주리철학적 변종 개혁학파인 남인정권 허목 등의 집권으로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이 독살당하고
더욱더 침체기로 빠져 들게 된다.
주기학파의 쇠퇴 이후로 발전, 진보를 하는 게 아니라 더욱 더 퇴보를 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역사를 들여다보면 큰 전쟁이 터지기 전에 천재들이 등장하여 혁신적인 개혁을 한다.
그러나 사이비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이 실패하고 마는 역사가 되풀이 된다.
광해군은 대북의 도움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정권을 장악한 북인의 권력농단으로 인조반정을 맞아 비운의 왕으로 남게 되었다.
인조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물어본다.
중상모략과 정치보복이 판치는 도가쟁이 정권 치하에서 살 것인가?
주자학 원리주의 정권에서 살 것인가?
적어도 서인정권에서는 권모술수를 써서 중상모략을 하여 먼저 정치보복을 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주자학 안에서는 중상모략이나 정치적 보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주자학에 충실한 성리학자들은 쉽게 음모술수를 꾸미지 않는다.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청의 볼모로 가게 된 근본 원인은
남인 이괄의난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화마를 피하기 위해 대전 등 서인지역으로 도망가서 숨고 도가쟁이들도 전주 등
호남 동부지방으로 달아나서 살아 남는다.
인조의 실정이라고 한다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전에 대북, 소북학파 200여명을 유배보낼때
근대 이성철학파인 주기학파 40여명을 동반 유배보내 두 호란을 겪게하고
근대식개혁에 실패한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국민을 계몽하고 이성적인 삶을 살게하며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체험, 경험하고
합리주의적인 사고체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인간의 이성을 제대로 정립시켜 주려 하였던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은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성혼, 박순, 김인후 등의 제자 40여 명의
주기학파에, 윤증으로 이어지는 양명학파였다.
[조헌, 김장생은 단지 훗날 소론으로 이어지는 학파에게 윤선거 등을 통해 양명학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만 주는 것이지 주기학파의 정통적 계승자가 아님].
(華政/화정)은
단순한 "화려한 정도의 길" 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군주가 빛나는 정치를 하여 후세에 빛날만한 업적을 남기려면
어떤 정도의 길을 가야 하는 지를 알려 주기 위한 뜻으로 사용되어지는 말이다.
인목대비 유폐 사건으로 인목대비가 정명 공주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때
어린 정명 공주가 화정(華政)이라는 서예 글씨를 써서 광해군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화정(華政)이라는 붓글씨에 어린 정명공주의 맑고 옳곧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政자를 쓰면서 마지막 부수 夂를 완성하며 /을 그으면서 순간적으로 서러운 감정이 올라
붓글씨가 마지막에 약간 약해졌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완전히 추스리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마지막을 굵게 마무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