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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담담하고 맑은 소녀의 얼굴이 어느 순간 악마 그 자체로 보였다. 작은 새 같은 몸 안에 놀라운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배우 박소담은 이제 연극 <렛미인>의 뱀파이어 소녀가 된다. 끝나지 않는 시간을 사는 뱀파이어처럼 연기라는 무한의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박소담과 보낸 시간.
2015.12.29
지난 대종상 시상식에 참석했다가 많은 카메라에 포착됐잖아요. 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시상식을 구경하는 모습에 이런 시적인 댓글도 달렸어요. ‘인간계에 놀러 온 사막여우 같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상식에 참석한 건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그냥 즐기러 간 거였어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것들을 눈앞에서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그 안에 있으면서도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2015년은 어떤 해였어요? 영화 <경성학교> <베테랑> <사도> <검은 사제들> 등 많은 사랑을 받은 좋은 작품들 안에 박소담이 있었어요. 박소담이라는 배우가 누구인지, 존재만을 알아주셔도 뜻깊을 것 같았는데 많은 사랑을 받게 돼서 아직 얼떨떨해요.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촬영한 작품들이 모두 개봉해서 결과물들을 한꺼번에 보게 됐어요. 제일 먼저 촬영한 것은 <베테랑>이에요. 김신정 감독의 단편영화 <수지>를 본 류승완 감독님께서 오디션 제안을 해주셨거든요. 대사도 없고 배역 이름도 없지만 인상적인 역할이니 꼭 했으면 좋겠다고 해주셔서 저로서는 영광이었죠. 대선배님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작품이라 대사가 없다고 해서 부담감이 덜하진 않았어요. 그 다음에 <사도>와 <경성학교>를 동시에 촬영했고, <검은 사제들> 촬영으로 이어졌어요. 좋은 작품들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은 한예종을 졸업하기 전에 네 편의 연극과 열여섯 편의 단편영화를 연이어 찍으면서 작은 현장들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검은 사제들>과 같은 영화는 배우에게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작품일 듯해요. <검은 사제들>은 저에게는 지니고 있으면 계속해서 빛을 발하는 탄생석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그 안에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줬어요. 특히 톤이랑 발성이 전혀 다른 악령들의 목소리 연기를 준비한 과정이 궁금했어요. 대역 없이 연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요. 영화를 준비하면서 2차 오디션 때 이미 구마의식 장면의 대본을 받았어요. 사자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라고 적힌 알 수 없는 문장들이 있어서 ‘이 영화는 도대체 뭐지?’ 싶었어요. 역할을 맡게 되면 삭발을 해야 한다는 공지도 ‘10대의 어린 여자아이가 도대체 어떤 일들을 겪는 걸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요. 매력적인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했죠. 외국어 선생님과 함께 중국어, 독일어, 라틴어 연습을 했어요. 익숙지 않은 언어로 익숙지 않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연습을 반복해서 하다 보니까 그 언어에 딱 맞아떨어지는 목소리 톤이 있더라고요. 중국어 같은 경우는 하이 톤의 할머니의 목소리를 매치해보니 귀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독일어는 날카로운 젊은 남성의 목소리, 라틴어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위엄 있고 근엄한 목소리가 어울렸어요. 배우에게는 보여지는 것만큼이나 목소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도 계속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했던 모든 연습이 이번 영신 캐릭터에 다 사용된 것 같아요. 학교에서 호흡과 발성, 동물을 몸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한 것도 도움이 많이 됐고요. 이런 연기를 내가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복 받았다 싶었죠. 물론 삭발을 하는 게 너무 두렵긴 했지만요.
악령이 들린 소녀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삭발이었어요? 물론 배우로서는 멋진 역할이었지만, 여자 박소담으로 생각해봤을 땐 영화 촬영이 끝나고 나서 혼자 거울을 보면서 ‘언제 머리를 기르지?’ 할 날에 대해 미리 걱정을 했거든요. 자존감과 자존심, 여자로서의 매력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데 그걸 잘 딛고 일어날 수 있을까? 머리는 금방 또 자라니까 밀어보라는 엄마의 말이 힘이 됐어요. 쇼트커트는 원래 해보고 싶은 스타일이긴 했는데, 친구들이 너 같은 얼굴에 쇼트커트를 하면 큰일난다고 말렸거든요. 눈 크고 서구적으로 생긴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제가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니면 연애도 못 할 거라고요.(웃음)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바로 그 얼굴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담백하고 깨끗한 데다가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좋은 배우의 얼굴이에요. 사실 영화보다는 무대에 어울리는 외모라고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많은 감독님들이 영화에서도 제가 가진 분위기를 활용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을 테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해주셨어요. (쇼트커트가 잘 어울리는데 이제는 머리를 기를 생각이에요?) 어쩌다 보니 일 년 사이에 긴 머리와 단발과 삭발, 쇼트커트까지 다 거쳤어요. 머리를 길러야 좀 더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머리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해보고 싶기도 하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님도 짧은 머리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그 사실을 발견하게 해주었으니 본인에게 고마워해야 되는 게 아니냐고 장난스레 말씀하셨는데, 한편으로는 좀 미안해하신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삭발을 하고 난 후에 감독님도 머리를 밀고 오셨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메이킹 필름 찍으시는 분도 머리를 밀고 오셨어요.(웃음) 원래 가끔 삭발을 한다고 말씀은 하시는데, 아무래도 저를 좀 신경 쓰신 게 아닐까요? 현장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힘을 얻으며 영신을 연기했어요.
쿨하게 삭발을 권유한 부모님은 영화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김윤석 선배님께서 절대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말라고, 내 딸도 아닌데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부모님 마음은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집에도 잘 못 가고 밤을 새면서 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나중에 받으실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촬영 현장에서 틈틈이 저의 사진과 영상들을 보내드렸어요. 그래도 완성된 영화를 보면 괜히 속상해하실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극장을 나와서 그러시더라고요. “영화, 참 재미있다. 멋지게 해낸 것 같다.” 우리 딸 힘들었지, 가 아니라 쿨하게 영화가 재밌다고 해주셔서 좋았어요.
지금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녀도 박소담이었냐”는 거예요. <사도>에서 회초리를 맞는 후궁, <베테랑> 얼음 신에 등장했던 배우와 <검은 사제들>의 악령 연기를 하는 박소담과 드라마 <처음이라서>의 풋풋한 스무 살 대학생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얘가 걔였어?” 이 말은 저에게 최고의 칭찬 같아요.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떤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기에 이것도 저것도 해보고 싶어요. <처음이라서>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스무 살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하게 된 작품이에요. 영화에서는 사연 많고 무겁고 어려운 역할을 많이 했지만, 밝은 캐릭터도 하고 싶었거든요. 치유를 하고 싶어서 <처음이라서>를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너무나 많은 치유가 되었어요. 드라마에서 함께 한 또래 친구들끼리 실제로도 ‘절친’이 돼서, 지금도 자주 만나거든요.
드라마에서는 정말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희망 같은 게 있냐고 따져 묻는 스무 살을 연기 했는데 본인의 스무 살은 어땠어요? 사실 스무 살 때는 너무 행복해서 인생이 아름다웠어요. 부모님이 연기하는 걸 오래 반대하셨는데 제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우겨서 이를 악물고 준비해 대학 생활을 시작했거든요. 꿈꿨던 것들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고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집에도 안 가고 학교에서 살았어요. 스무 살부터 올해까지 쉰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달려온 것 같아요. 주위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독한 년”이라고 하기도 했지만(웃음), 저는 그냥 즐거워서 계속 달린 거였거든요. 연극 연습을 해서 관객을 만나는 순간, 단편영화의 현장에서 진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연기적인 소통을 하는 순간, 학교에서 과제를 할 때 아이디어가 안 나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밤을 새고 퀭한 상태로 다 같이 수업에 들어간 순간, 모든 순간이 다 아름다웠어요.
<검은 사제들>의 영신 같은 역할을 하고 나면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요? 젊은 배우가 감당하기엔 결코 쉬운 역할이 아니니까요. 장재현 감독과 배우 김윤석 등 주위에서 많은 걱정을 했다고 들었는데, 정작 본인은 마냥 씩씩했던 것 같아요. 다들 이상하게 들으시지만 저에게는 너무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웃음) 그래서 작품이 끝나고 따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어요. 물론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역할이긴 했어요. 김윤석 선배님이 엄청난 에너지로 누를 때 저도 그에 지지 않는 에너지로 대응해야 하니까요. 계속 누워 있는 역할이라 많이 먹을 수 없는데도 아침, 점심, 저녁, 야식까지 챙겨 먹었어요. 선배님들께서 항상 먹어야 한다고 챙겨주셨거든요. 김윤석 선배님을 ‘촬영 현장의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강동원 선배님도 멋진 배우인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멋진 분이었고요.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이 웃을 수 있던 현장이었던 것 같아요. 컷이 끝날 때마다 다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눠서 영신에게만 갇혀 있지 않을 수 있었어요. 악몽 한번 안 꿨어요. 영화를 본 어떤 분들은 제 모습이 생각나서 잠을 못 잤다고 하시던데, 정작 저는 너무 잘 잤어요.
차기작도 쉬지 않고 곧바로 선택했어요. 1월 21일부터 2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될 연극 <렛미인>의 연출자 존 티파니는 박소담의 연기를 보고 “한 마리의 새처럼 작고 신비스러운 배우”라고 극찬했던데, 한 마리 새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느껴졌어요. 오묘한 매력을 가진 뱀파이어 소녀 역할이 잘 어울려요. ‘피에 목말라 있는 뱀파이어가 피를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가는 중에 햇빛을 봐서 엄청 고통스러워 하는 상황이다. 고통과 갈망을 움직임으로 표현해볼 것.’ 이것이 오디션의 과제였어요. 스무 명 넘는 남녀 배우들이 넓은 공간에서 땀 흘리고 뛰어다니면서 움직임의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뮤지컬 <그리스>를 보고 처음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때를 떠올렸어요. 이대로 오디션에 떨어져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즐거웠어요. (영화 <렛미인>을 보고 어떤 감정이 들던가요?) 무섭기만 한 뱀파이어가 아닌,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 담긴 뱀파이어라는 점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오디션을 본 후에야 영화를 챙겨 봤거든요. 몇 백 년에 걸쳐서 살고 있는 뱀파이어니만큼 어리지만은 않지만, 어찌 됐든 어린 소녀가 참 치열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간절히 피를 갈망하는 뱀파이어에게든 인간에게든 살아가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힘든 삶 속에서도 사랑과 교감을 나누는 모습이 따뜻했어요.
어쩌다 보니 뱀파이어, 악령, 귀신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 요즘이네요. 실제로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는 편이에요? 원래 무서운 것을 잘 못 보고, 가위에 눌려본 적도 없고, 코피를 흘려본 적 없을 정도로 피랑 거리가 먼 사람인데(웃음), 자꾸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되니까 내가 그런 이미지인가 싶기도 해요.
최근에 일어난 일 중에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있다면 뭔가요? <검은 사제들>에서 예쁘게 나오지도 않는 저의 모습을 예쁘게 봐주신 것. 이에 대해 감독님이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언뜻 보면 평범한 얼굴인데 그 안에 ‘어마무시한’ 것들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얼굴이라고요. 실제로 제 안에 어마무시한 것이 있다면, 그걸 어떻게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스타일리스트/ 최경원 헤어/ 한지선 메이크업/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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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숏컷머리 완전잘어울려요!!
저는 긴머리보다 숏컷이더 잘어울린다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