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동숭로의 찻집에 앉아 가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색으로 물든 거리에 마지막 가을 햇살이 부서지며 마로니에 낙엽이 우수수 뒹굴었다.
그때 절절하게 애끓는 음색의 절창이 스산한 찻집을 가득 메웠다. 저무는 계절 탓일까. 공연히 쓸쓸했던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날 찻집을 나서는 스무 살 청년의 가슴에 그 뜨거운 노래는 화인火印처럼 흔적을 남겼다.
그 누가 이토록 애절할 수 있으며, 그 누가 이토록 명주를 찢는 듯 절절히 토해 낼 수 있을까.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음색이 상처 받은 숱한 아픈 가슴마다 위로가 되고 위안을 주었던 그 노래는 '73년 한국 가요계 최대의 희트곡으로 떠올랐던 임희숙의 <진정 난 몰랐네>였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 잃어버리고/ 타오르는 내 마음만 흐느껴 우네/ 그토록 믿어왔던 그 사람 돌아설 줄이야/ 예전에는 몰랐었네 진정난 몰랐네/ 누구인가 불러주는 휘바람소리/ 행여나 찾아줄까 그 님이 아니올까/ 기다리는 마음 허무해라. <김중순 작사. 김희갑 작곡>
이 가사의 본질은 ‘사랑의 무상(無常)’에 있다. 남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서로 사랑을 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켜가는 운명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 했던가. 떠나버린 사랑은 늘 그립고 뼈에 맺히는 고통과 눈물이다. 특히 이 노래처럼 진정한 사랑이 배신을 때렸을 때, 그 상실감과 절망감은 두고두고 가슴에 사무친다. 그리고 한(限)이 된다.
내가 그녀와의 첫 대면은 86년 늦가을이었다.
회사 동료들과 저녁회식 후,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꿈틀거리는 여의도 맨허탄빌딩 밤무대에 들어섰을 때다.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떨어지더니, 무대 윤각이 희미한 그 중앙에 남색 투피스 차림의 한 마리 새가 화려한 비상을 꿈꾸듯 고혹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내게 깊이 각인되었던 ‘임희숙’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한국 솔(soul) 음악의 대모(代母)’답게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인 창법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우레같은 박수와 환호가 끊이질 않았던 그때 한 청년이 무대 중앙으로 뚜벅뚜벅 다가가 그녀와 가벼운 포옹을 건너 악수가 이어졌다. 그 청년이 바로 동숭로 찻집에 혼자 앉아 가을 창밖을 바라보던 그 젊은이였다.
지금 돌아봐도 그때 그 짧은 순간 스쳐갔던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깊은 눈빛은 아련하다.
1950.6월 출생인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전쟁 통에 부夫는 북으로 납치되고 헤어진 언니는 굶어 죽었다, 술회한다. 그 후 두 번의 이혼과 대마초 파동으로 6년간 가수 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피폐해진 그녀는 노숙자 생활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어느 날 종로의 한 여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숫제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번한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84'년 그녀에게 한줄기 광명이 찾아든다. 인간 삶의 애환을 담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가 발표되면서 서민들 삶의 애환과 맞물린 그 불씨가 들불처럼 전국에 번지며 끝없이 활활 타올랐다.
이제 가버린 세월은 희미한 사진처럼 멀어져버렸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그녀의 가슴 저미는 아득한 음색은 대중의 아픈 가슴마다 그리움이 되고, 간절함이 되고, 때론 절절함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삶의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뒷심이 된다.
우리 가요사에 길이 빛날 ‘한국 솔(soul) 음악의 대모(代母)’ 임희숙. 스물의 청년 가슴에 화인처럼 각인된 채 한 시대를 풍미한 가인歌人에게 진심어린 축원을 띄운다.
글쓴이, 영상 석등. 2023.01 제천 작은동산 겨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