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호-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 1.마음의 정원을 산책하는 날
오늘은 시간을 내어 당신의 마음의 정원을 걸어보십시오. 그동안 당신이 뿌린 씨앗이 어떤 모양으로 자라나 있는가를, 그것이 어떤 꽃과 열매로 자라나 당신의 정원을 채우고 있는가를, 그래서 당신의 정원이 어떤 정원이 되어 있는가를 살피면서...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의 정원 안에 갖가지 씨를 뿌려 놓습니다. 사랑의 씨, 미움의 씨 믿음의 씨, 불신의 씨 찬양의 씨, 비난의 씨 이해의 씨, 질투의 씨 겸손의 씨, 교만의 씨 격려의 씨, 비판의 씨... 모두 다 내가 뿌려놓은 생각의 씨앗들입니다. 좋은 씨는 예수님이, 그리고 나쁜 씨는 사단이 와서 뿌려 놓았다구요? 아니요, 그것들은 내가 뿌려놓은 씨들입니다. 좋은 씨앗은 예수님의 생각과 사랑이 들어오도록 마음 문을 열었기 때문에, 나쁜 씨앗은 사단의 생각과 어두움이 들어오도록 마음 문을 열었기 때문에, 모두가 내 탓으로 뿌려진 내 마음의 씨앗들입니다. 우리들은 생각의 씨를 키워 갖가지 생각의 꽃을 피워 냅니다. 사랑의 꽃, 미움의 꽃 믿음의 꽃, 불신의 꽃 찬양의 꽃, 비난의 꽃 이해의 꽃, 질투의 꽃 겸손의 꽃, 교만의 꽃 격려의 꽃, 비판의 꽃... 모두 다 내가 키워놓은 생각의 꽃들입니다. 좋은 생각의 꽃은 예수님이, 그리고 나쁜 생각의 꽃은 사단이 피워낸 것이라구요? 아니요, 그것들은 내가 나의 생각의 씨를 키워 피워낸 생각의 꽃입니다. 예수님은 향기로운 생각의 꽃을 피우도록 사랑과 성령의 비를 내려주시지만, 계속 엉겅퀴처럼 독한 꽃을 길러내려고 고집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시돋힌 생각의 꽃들을 피워내려고 어두움의 그늘을 덮어올 때, 계속 그 암흑의 구름을 거절하고 의의 태양이신 예수께 마음을 향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 신비한 자유 의지를 겸손히 담아 예수님께 매일 바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의무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의 마음의 정원에 어떤 생각의 씨가 뿌려져 있고, 그것이 어떤 생각의 꽃을 피워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당신만이 당신의 마음의 정원이 어떤가를 압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당신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말해줍니다. 아주 종교적이지만, 전혀 영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아주 종교에 헌신적이지만, 전혀 하나님께 헌신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전혀 하나님과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아주 교회에 충성하지만, 전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겉모양은 아주 그리스도인같지만, 마음이 전혀 그리스도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아주 잘 알지만, 자신만의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회칙을 아주 잘 지키지만,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인 사랑의 정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교 활동은 아주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활동은 전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평판과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것일뿐, 그래서 남들의 칭찬으로 이미 보상을 받기에... 때로 믿는 바가 다른 사람에게 높이 쌓아 올리는 마음의 장벽, 자신이 믿는 교리 때문에 마음 속에 생긴 비판과 판단과 심판의 벽, 그래서 자신의 성 밖에 차겁게 버려지는 영혼들의 아픔... 당신은 그것이 진리를 옹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사랑으로 마음을 열지 않는 까다롭고 편협한 자만심일 뿐, 따뜻함과 겸손으로 적셔지지 않은 당신의 마음과 그 옹색한 교리는 종교를 넘어 다른 사람의 가슴을 울려주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마음의 정원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당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꽃 향기를 맡으러 왔다간, 혹 열매를 따러 왔다간, 독한 냄새에 깜짝 놀라 달아나는 이웃들이 간혹 눈치는 채겠지만... 사람들은 생각의 씨를 길러 갖가지 생각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의 열매, 미움의 열매 믿음의 열매, 불신의 열매 찬양의 열매, 비난의 열매 이해의 열매, 질투의 열매 겸손의 열매, 교만의 열매 희망과 소망의 열매, 낙망과 낙담의 열매... 모두 다 내가 길러놓은 생각의 열매들입니다. 좋은 열매는 예수님과 성령께서 계속 내 마음 정원에 거하셨던 증거이고, 나쁜 열매는 사단이 계속 내 마음의 정원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열매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산 증거이고, 나쁜 열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산 증거입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가 많이 맺힌 정원의 소유자는 매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을 가슴에 두고 산 사람입니다. 좋은 씨가 뿌려진 정원, 나쁜 씨가 뿌려진 정원, 좋은 꽃이 핀 마음의 정원, 나쁜 꽃이 핀 마음의 정원, 향기로운 성령의 열매 가득한 마음의 정원, 육체의 소욕 뭉친 독한 열매 가득한 마음의 정원.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의 정원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정원은 아름다운 꽃들과 향기로운 열매가 가득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쁨과 평화를 주고 달콤한 열매를 공유하며 함께 즐거움을 나누게 하지만, 어떤 정원은 가시가 많은 꽃들과 독성이 강한 열매만 맺혀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슬픔과 불안함을 주고 아무도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의 마음의 정원은 어떠합니까? 오늘 모처럼 그동안 당신이 가꾸어놓은 마음의 정원을 산책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곳에 펼쳐진 당신의 생각의 꽃들과 열매를 구경해 보십시오. 만일 그렇게 부끄럽지 않다면, 시간을 내어 예수님과 함께 걸어보십시오! 오늘은 조용히 내 마음의 정원을 감상하고 조경해 보는 날입니다.
2.권두언
강병국 목사 진리는 찾는 자의 것이며 깨닫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증거들이 온 우주에 널려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몰랐다고 하면, 사실은 알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도 창조의 증거들이 잔뜩 있는데도 아직도 진화론을 굳이 주장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그 고집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큰 우주의 질서와 그 존재하는 시스템들을 살펴 보노라면 정말 하나님의 창조는 신비하면서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논리와 이유들은 공의로우시면서도 자비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작은 소 우주 속에 나타나 있는 그 정교함과 확실함은 하나님의 자상하심과 진실되심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창조의 활동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 죄인들을 씻기시고 마음을 변화시키시어 다시 하늘의 가족들로 회복시키시기 위한 구속의 활동이야말로 창조의 역사 중에서 가장 놀라운 역사라고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도 창조입니다. 그저 적당하게 수리하여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천사들과 함께 다시 살 수 있는 거룩한 존재들로 다시 창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협력과 의지의 굴복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속 사업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창조 사업인 것입니다. 이번 호는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해 주는 기사들로 채워 보았습니다. 곁들여 창조의 오묘함들을 섞어서 진열하여 놓았습니다. 읽으실 때에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3.하루를 경건하게 사는 방법
도시에서 바쁜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흡연, 식사, 스트레스 많은 직업, 복잡한 라이프 스타일 등은 심각한 문제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위험인자들은 경계해야 할 최대의 원수는 아니다. 왜냐하면 최대 원수는 이미 대부분의 도시인들과 싸워 그들을 정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욕망이 이성보다 강하고 식욕이 지성보다 강한 삶을 살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현대인들이 젊은 나이(40~50대)에 죽어가고 있다. 그들의 사망진단서에는 ‘자연사’란 짤막한 사인(死因)이 기록되지만, 그들의 진짜 사인은 “자연사”가 아니라 자신의 고집스런 의지와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가 처음 시골로 이주했을 때, 나 역시 대부분의 도시 현대인들과 같았다. 나의 건강이나 영적 생명은 집중적인 치료를 요할 만큼 위중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골에 살면 나의 건강과 영적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원수들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세속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사악한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을 원수로 생각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짓을 가르치는 목사들과 성경이 말하는 거짓 목사들을 원수로 생각했다. 나는 정신없이 “바쁜 생활”, 눈만 뜨면 달려가야 하는 직장 생활을 원수로 생각했다. 나는 이런것들이 나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 아니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원수이며 참된 그리스도인 신앙을 성장시키고 유지시키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준다. 그런 장애물들은 가능한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런 원수들의 악한 영향력과 싸우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가장 큰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시골에 온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했던 시골에서의 삶이 대도시에서 살던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죄와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으나 알고 보니 내 죄는 내 안에 숨겨진 진짜 문제의 증상에 불과했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진짜 문제, 진짜 원수, 내가 직면한 진짜 위험 요소는 바로 ‘나(self)’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담담하게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 삼키기 어려운 쓴 약과 같았다. 내 자신이 문제였다! 내 모든 죄는 내 삶을 좌우하는 ‘나’ 즉 ‘자아’가 불가불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열매들이었다. 바로 여기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원하면서도 실패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 마음을 소유하셔야 한다. 그것은 나의 모든 선택이 그분에게 바쳐졌음을 의미한다. 그분은 내 선택의 일부 또는 대부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원하신다.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은 우리가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는 데에 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태복음 6:24). 나는 아내와 결혼할 때 전에 알던 모든 여자 친구들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사랑을 그녀에게 바쳤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다 버렸다. 그런데 만일 내가 아내와 결혼해 살면서 옛날 여자 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나와 아내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분명 우리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른 여자와 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는 아내와는 부부지간이다! 그녀는 내 조강지처이다. 나는 그녀와의 결혼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라고 핑계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말이 되겠는가?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런 우스꽝스런 말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에 붙잡고 있던 애정의 대상들을 그대로 붙잡고 있으려고 한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헌신에 대해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면 금새 격분하며 그것을 사랑 없는 비판적 시각이라 반박한다. 성경에 젊은 부자 관원 이야기가 포함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고 또한 지도자였다. 아마 요즘 표준으로 따진다면 그는 거듭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와 혼인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애정과 이기심을 끊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다른 사랑’을 버릴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교훈을 읽으면서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어”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이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 것은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기 생활, 자기 재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자신이 관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할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조건은 매우 분명하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그러나 어느 교회나 교파, 그리고 어느 신자를 막론하고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
이것은 한 번 죽는 죽음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뜻과 나의 방식에 대해서 날마다 죽어야 하는 죽음이다. 이 죽음은 내 뜻과 소원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즐거이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사람은 자신의 뜻과 주장에 대한 권리를 즐거이 포기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을 때의 그리스도의 경험이 바로 이것이었다(누가복음 22:42). 나를 이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처음부터 세우셨던 계획이고 목표이다. 서방 세계의 관습에서는 여자가 남자 이름의 성을 받기 전까지는 아직 그 남자의 아내가 아니다. 남자의 성을 받는다는 것은 여자가 자신의 소유, 인생의 목표 뿐 아니라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기꺼이 다 바치기로 서약함을 의미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전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렇게 깊고 은밀한 헌신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대 기독교회가 자아가 죽는 과정의 성서적 가르침과 그것의 중요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데이트는 결혼식장에서 시작하는게 아니다. 그보다 먼저 상대방의 애정을 획득하는 일이 선제 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접근하신다. 점차 상대방에 대한 친근감이 자라나야 한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내 마음 한구석을 조금 차지한다. 그래서 자기를 조금 그 사람에게 주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이 특별한 사람이 나에게 점점 더 자라서 온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드디어 두 사람은 결혼하여 한몸이 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다. 둘이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결혼하여 하나가 되는 결합인 것이다. 오늘날 세속화된 기독교회는 이 과정을 너무도 혼동시켰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약간의 관심을 표현하기만 하면 곧바로 그를 침례라는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혼시키려고 애쓴다. 어색하지 않은 음성으로 기도를 하면, 집사와 권사라는 거룩한 직책을 주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은 헌금을 드리면 장로로 세워 교회의 지도자로 추대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아내로 말한다.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인간의 데이트와 결혼의 비유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 즉, 한 사람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자. 제 1 단계 : 결혼 이전의 상태는 독신이다. 이것을 제1단계라고 하자.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이 단계에서는 다음 단계를 고려하고 있음을 어느 정도 내비친다. 이 독신 단계는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사는 인생이다. 이 단계에서 나는 내 자신의 뜻대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의하는 일은 없다. 자기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역할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제 2 단계 : 이 단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내게 관심을 보인다.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내 마음에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나는 그 사람을 사귀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만 마음을 열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시고, 그것을 본 우리는 그분께서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많은 사람은 이 단계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줄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제 3 단계 : 제 2 단계에서 나타낸 관심은 애정을 유발하고 그것이 자라면 구애하는 제 3 단계가 온다. 이 단계에서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자신의 뜻과 크게 위배되지 않으면 상대방의 부탁을 들어 준다. 이러한 관계가 좀더 발전되면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보통은 세번째 단계의 열매로 약혼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아직 독신 단계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아직 자기 생활을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변심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직은 요지부동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경험도 이와 흡사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 이끌기 위해 계속 노력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때 하나님을 평생토록 동반자로 모시고 싶은 소원이 구체화된다. 그러나 아직은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완전한 굴복으로서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제 4 단계 : 마지막으로 제 4 단계는 결혼이다.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이성 친구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상대방의 필요를 자기의 것 이상으로 존중하기를 기뻐할 때 결혼은 이루어진다. 그들은 한 몸이 되기 위해 의지와 뜻을 하나로 결합한다. 이것은 날마다 상대방에게 자기를 바치는 헌신의 약속인 것이다. 인간이 사랑의 하나님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그의 것이 되면, 모든 일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기뻐하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다. 즉 “기혼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맺는 이 결혼은 자아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 이상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이런 완전한 굴복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이름이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헌신을 유지하고 더욱 깊게 하는 것이 새롭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신자들이 당면하게 되는 도전이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는 그대로 남아 있다. 결혼한 사람도 바람을 피우기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단계와 4단계의 차이가 무엇인가? 3단계는 사람이 아직 완전한 헌신을 하지 않은 단계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변심할 권리를 빼앗지 않으신다. 그분은 결코 강제로 우리를 당신께 묶어두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항상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신다. “여보시오, 그렇다면 4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말이요?” 라고 물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습니다!”(yes) 이다. 아무도 신앙고백이나 지식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기독교 교계의 전반적 입장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당신의 말을 신학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도 인정할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당신의 이야기에 모두 동의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매일의 삶을 통하여 이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성경에서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창 1:5. 나의 하루도 전날 저녁 9시에 시작된다. 왜냐하면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아침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일찍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의 아침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내가 이 시간을 열정적으로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간에 열정적으로 만나기 원하신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간을 통해 능력을 얻고 하루를 살아갈 은혜를 듬뿍 받는다. 매일 아침 성경말씀을 조용히 명상하며, 하늘 아버지께 내가 모르는 그 날의 투쟁을 위해 나를 준비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내가 무슨 위기를 당할지 아실 뿐 아니라, 시험을 당한 내가 피할 수 있는 길까지 미리 준비해 놓고 계신다. 수없이 많은 어려움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일종의 계시였다. 나는 하나님과 만나는 아침 시간에 성경의 교리나 지식을 얻으려고 공부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죄와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앉아야 한다. 나보다 말할 수 없이 거룩하고 능력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뵙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한다. 웅장한 산이나 그랜드캐년의 장관을 보면서 경탄하는 것처럼, 극도로 이기적이고 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과 은혜를 모습을 보면서 경탄하게 된다. 마약이나 술로 감각이 무뎌진 사람이 아닌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보잘것없고 무의미하며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깊이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매일 아침마다 보고 싶은 하나님의 비젼이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비젼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필요를 느낀 후에는 그날 그분과 동행하는 일이 의미있고 즐거워진다. 왜냐하면 그분을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새벽 기도 시간은 그저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 이상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는 시간이다. 혹시 당신은 코드를 전원에 연결하지 않은채 토스터에 빵을 집어 넣고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누구나 그런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빵은 구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날마다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의 전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새벽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그렇게 연결되어야 한다. 아침 시간에 그대의 코드를 전원에 연결하라!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른 아침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지라도, 코드 빠진 토스터에 빵을 집어 넣는 것처럼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기도를 드리고 성경이나 기도력을 읽지만 힘의 근원에 연결되는 생생한 경험을 전혀 맛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러 있으라.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원을 찾듯 그분을 찾으라. 종교나 성경에 대한 지식을 사모하지 말고, 친히 하나님 알기를 사모하라.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3)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낸 다음에는 항상 사단은 우리의 자아를 통하여 시험을 던진다. 그날 아침에 나는 장작 패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참 장작을 패고 있었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나와 토론을 벌인 친구가 생각났다. 나는 그 친구의 견해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길, “나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어. 문제는 내가 아니라 그 친구야.”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자기 정당화에 빠지지 말고 이번 기회에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해 주는 법을 배우렴.”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 대답하였다. “글쎄요, 하나님도 아시죠? 제가 그 친구와 이야기 할 때 그 친구의 태도와 눈을 보셨잖아요. 내게 잘못이 없답니다.”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머뭇거리게 되었다. 나의 이런 대답에 하나님께서는 잠잠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이렇게 다시 대답하였다. “내가 그 친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네 마음에 상처를 준 그 친구를 위해 무엇인가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렴. 무엇이든 네 시간과 재능과 돈을 들여서 그 친구에게 무엇을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보렴.” 잠시 씨름을 하다가 나는 도끼를 손에 쥔 채 하나님 앞에 굴복했다. 자아를 죽이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로부터 몇 주 후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위해 내 시간과 재능을 들여 무언가 해 줄 기회를 얻었다. 마음은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장소이다. 나는 그날도 몇 가지 전쟁을 더 치러야 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전쟁이 하루 동안에 여러 번 있었다. 그 장면들을 글로 표현하자면 길어지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투쟁이었다. 나는 그 순간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내 생각과 지혜를 다 굴복하기로 선택했음을 기쁘게 말하는 바이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아들의 방을 정리하면서 전쟁을 치루어야 했고, 아내의 설거지와 빨래를 도와 줄 때도 순간적인 전쟁이 있었으며, 아이들이 성가시게 할 때도 매우 짧지만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일을 적당하게 해치워 버리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오셔서 나의 의무를 정확하게 끝마치라는 음성을 들려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문제들까지도 내게 오셔서 나의 굴복과 순종을 독려하셨다. 그 순간 순간마다 내 자존심과 게으름과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굴복했을 때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날마다의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과 만족의 비결이다. 해 질 무렵에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았다.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무엇엔가 깊은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아버지가 제 침대 정돈하는 걸 봤어요”라며 그는 말을 시작했다. “온종일 나는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내게 잔소리를 하실 줄 알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전혀 안 하셨어요. 아버지가 지금 걷고 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에 대해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인 “나”(self)를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싸워야 할 원수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원수인 자아를 어떻게 대해야만 할까? 만일 자아가 그대로 살아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방임한다면, 우리의 삶과 가정은 정말 불행하고 비참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과 생활 속에서 실현되지 않는 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4.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1부-창조
만일 누가 당신에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대어보라고 한다면, 아니,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심이 당신의 머리 속을 갑자기 스치고 지나간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어디에서 찾겠는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자연계도 하나님을 훌륭하게 증거한다. 만일 우리가 조금만 시간을 내어 우주나 천연계에 대해, 아니, 가깝게는 우리 자신의 인체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인체와 또 우리를 두르고 있는 자연과 과학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혹은 작은 가전제품도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과 만든 사람이 있으며, 또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서나 지침서가 있는데, 이 광대하고 놀라운 우주와 정교한 자연계를 설계하고 디자인한 존재가 없단 말인가? 이들이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우연히 생겨난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렇듯 정확하게 톱니바퀴 맞듯이 돌아가고 운행되는 자연의 법칙과 우주와 과학의 법칙이 존재하는데도 이를 유지하고 운행하시는 어떤 존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창조설은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치에 맞는 이론이다. 그런데 창조에 대해 연구해보면, 거기에는 놀라운 복음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자연계와 동물들과 인간의 인체에 대해 연구할 때, 우리는 창조 속에 나타나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누가 창조하셨는가?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우리는 이 간단한 문장 가운데서 요약된 복음 전체의 진리를 얻게 된다. 또한“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6~17)고 쓰여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창조와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게 된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고 하셨다. 그분이 바로 아버지를 대표한 분이셨으며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2). 창조 = 구속 사람들은 질문한다. “구속이 더 위대한 것인가? 아니면 창조가 더 위대한 것인가?”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구속사업은 창조사업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다 동일하다. 구속은 창조이다. 구속의 능력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같은 능력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죄의 저주로부터 땅을 건지기 위하여 역사하는 동일한 능력이다. 시편기자는 기도하기를,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재창조이다. 아무 선한 것이 없는 인간을, 아무 것도 없는 데서 태초에 땅을 창조하신 같은 능력이,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고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엡 1:6)하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3). 무엇으로 창조하셨는가? = 말씀으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 9).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성경은“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고 세상을 창조하신 똑같은 능력으로 우리를 구속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믿음으로 알 수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히 11:3). 4). 말씀은 = 능력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주께서 “어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실 때에 그 말씀 자체가 바로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말씀이고 그것이 표현될 때에 바로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곧, 그분이 어떤 것을 지명하여 부르거나 이룰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 그것은 말씀과 동시에 곧바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명명하신 것이 그 순간 완전한 생명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능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은, 창조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그 똑같은 능력의 말씀이 지금의 우리를 매일 매일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하신다는 사실이다. 5). 말씀은 = 그리스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그리스도는 거룩한 말씀이시다. 그는 그가 발하신 말씀 가운데 계시다. 만물이 그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그의 능력있는 말씀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히 4:12)이다. 말씀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 말씀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바친 영혼들을 그분의 능력으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 ◈ 말씀을 믿는 믿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데, 이것은 말씀이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로 모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는 것이란 그저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이상”을 뜻한다.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우주 안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며, 모든 것들이 그것에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그것을 바라고 온 영혼이 쉼을 얻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란 능력있는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을 믿고 그 안에서 쉼(안식)을 얻는 것이다. ◈ 흥미있는 과학 이야기 흥미있는 과학 이야기가 있는데, 이 실험은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아마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소리 = 음성)이 진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1. 1800년대 과학자이고 음악가인 에른스트 클라드니는 <음향학의 대가>라고 불리는데, 한번은 그의 실험에서 쇳가루를 뿌린 얇은 철판에 G 바이올린 음을 들려주었더니 놀랍고도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음계들에서도 서로 다른 무늬들이 그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 실험은 진동과 음은 모양을 그리거나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실험이다. 2. 초끈 이론 ; 요즈음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흥미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1930년대에 물리학자들이 원자가 더 작은 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이다. 또한 1960년대 물리학자들은 그 보다 더 작은 물질의 단위를 발견했는데, 그것은“쿼크”와“렙톤”으로서 물질의 가장 작은 구성 단위이다. 그런데, 최근 몇몇 물리학자들이 초확대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결과, 너무 작아서 더 이상 분리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쿼크”속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진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을 “진동하는 에너지 끈”이 있다는“초끈이론”으로 부르고 있다. 이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은 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의 존 슈바르츠 교수가 확립한 것으로, 그는 이 이론으로 1984년 런던대의 마이클 그린 박사와 함께 양자역학적 모순을 해결하게 되었다. 초끈이론은 우주의 구성요소가 고유의 진동 패턴을 갖는 ‘끈’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보면, 물질의 보이지 않는 가장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서 보면“진동패턴”이라는 것이 있어, 음악에서처럼 기본적으로 공명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포생물학자 제임스 오쉬만과 에너지 의학전문가들은 인체, 그리고 모든 굴곡이나 회전, 화학결합들은 악기처럼 특정 공명 주파수를 가지고 있으며, 에너지를 얻으면 특정한 “음”을 소리낸다고 발표하였다. 말씀은 진동이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 오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변화시키며,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실 것이다. 위에 언급한 과학의 이야기들은 주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태초에 땅과 하늘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예는 아니며, 우리로서는 그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우리가 실체를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위의 이야기들로 보아 하나님의 말씀 (진동) 에는 생명이 있고, 또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는 생명의 원천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2부-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1). 빛 첫째 날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기 전까지는 어두움이 심연(깊음) 위에 있었다. 그 때까지 빛이 창조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빛을 발하라고 하셨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어두운데서 빛을 비추라고 명하”였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창조의 놀라움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것처럼 일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무엇을 만들 때, 그의 손에 무엇이든지 재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무엇이든지 그분이 목적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명하신다. 우리는 창조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리스도가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능력이시다. 그분이 빛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빛을 지으셨으며 그로 인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 오직 영적인 의미에서만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류의 눈을 기쁘게 하는 그 빛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내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배운다. 세상을 비치는 육신적인 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고안되었고, 그에게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인 빛은 값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2). 생명의 빛 죄는 어두움이다. 그것은 흑암의 왕자로부터 오는 것이며 어두움을 가져 온다. 죄는 어두움이므로 곧 사망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와 사망은 사단에게서 온다. 왜냐하면 그는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덮힌 어두움은 죄의 어두움이며, 사망의 그늘의 어두움이다. 인간의 생명은 사망과 싸워서 승리를 얻을 수 없는데 이는 그 자체가 사망이기 때문이다. 죄가 사망이라고 할 때 모든 종류의 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생명의 근원으로 가서 사망의 해독을 끼친다. 인간의 생명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타고난 죄의 악함에 대하여 슬퍼하며 외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하였다. 죄가 사망인 것과 같이 의는 생명이다. “영의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마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의 생명과 의를 갖는 것이다. 어두움을 쫓아버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의이며,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생명이다. 인간은 타락한 유전자를 타고났으므로 본성적으로 마음 가운데 악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 도 없음이라”(롬 8:7). 이런 것을 알게 된 영혼은 그 자신이 선을 행하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느끼게 된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다. 우리는 이 “의”를 어디서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위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를 살리는“의” 곧,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으며 자신과 세상을 화목하게 하셨다. 이 생명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유지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지속적으로 그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생명이야말로 인간의 빛인 것이다. 이 “의”의 생명은 낮의 빛과 같이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이것은 빛과 같이 풍성한 것이며 모두를 위해 풍성하게 예비되어 있다. 빛의 특성은 계속 번져나가는 것이며 계속 비추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에게는 생명의 원천이 있으며, 그것은 그치지 않고 그에게로부터 풍성하게 흘러나온다. 만일 얻으려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라도 그는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시며, 그렇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생명이 풍성히 남아 있다. ◈ 흥미있는 과학 이야기 가시 광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빛 1. 광선(Ray)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빛을 크게 나누면, 눈에 보이는 빛(가시광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빛으로 나눌 수 있다. 가시광선이란 전자기파 중에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범위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 광선을 말하며, 자외선이나 적외선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이다. 사람이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는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80∼770㎚이다. 2. 빛은 색깔을 가지고 있다; 빛은 언뜻 보면 하얀 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흰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보면 일곱가지 무지개 색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곱 가지 색으로 나타나는 빛을 모두 합치면 다시 흰색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태양이 희게 보이는 것이다. 이 분산에 의해 나뉘어진 색의 띠를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뉴턴은 빛이 프리즘을 통해 분산되는 것을 굴절률로 설명하고, 물체가 색깔을 띠게 되는 것을 빛의 반사와 흡수로 설명했다. 3. 빛이 있어야 본다; 사과나 여러 색깔의 야채들은 광원에 따라 보이는 느낌이 아주 다르다. 이것은 광원에서 방출되는 빛의 종류가 무엇이고, 이들을 물체 표면에서 어느 정도 반사하고 흡수하는지에 달렸다. 빨간 사과, 노란 은행잎, 푸른 하늘... 이처럼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빛’이 필요하다. 깜깜한 밤에는 물체의 모양과 색을 쉽게 구별할 수 없다. 빛이 전혀 없는 완벽한 암실 안에서는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또 아무리 최첨단의 장비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물체를 볼 수 없다. 즉 빛이 없으면 ‘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빛이 비칠 때, 빛을 내지 않는 다른 물체들이 빛을 반사하고, 그 반사된 빛의 일부가 눈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물체의 모양과 색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4. 신비한 빛; 빛은 경이롭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만큼 빠르며, 우주의 한계 속도인 초속 30만 Km로 수조 Km가 넘는 광활한 우주 공간을 달리지만, 우리가 손을 뻗어 가로막기만 하면 정지시킬 수 있는 신비한 것이다. 그렇게 빠르고 힘있는 빛이지만 우리가 손바닥에 대면 아프지 않고 아무 감촉도 느낄 수 없는데, 그것은 빛을 이루는 입자인 광자의 질량이 “0”이기 때문이다. 빛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빛은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빛을 오염시킬 수 없다. 과학자는 그의 실험에서,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켰더니 일곱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두 번째 프리즘에 일곱가지 색을 통과시켜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색들은 백색의 한 줄기 빛으로 합쳐져 프리즘의 반대쪽으로 나왔다. 하나님은 태초의 빛이시다. 여러가지 색깔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흰빛으로 나오듯이, 여러가지 색깔로 뒤섞인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빛 성령의 프리즘을 통하면, 하나님의 본래의 빛의 색인 흰 빛, 순결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빛에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광선들이 있듯이, 하나님은 아직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는 신비한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빛을 향해 마음을 열면, 신비한 빛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실 것이다!
3부-둘째 날, 궁창을 만드심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 1:6~8).
1). 궁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는데, 이 궁창(하늘)을 만드셔서 물 가운데 두시므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셨다. “궁창”이라는 단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여서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궁창은 대기권의 하늘을 말하는데, 대기층에는 우리가 숨을 쉬는데 필요한 공기가 존재하고 있다. 궁창 아래의 물은 일종의 저수지 역할이고 궁창 위의 물은 기체 상태의 수포로서 일종의 보호막(canopy)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많은 학자들은 궁창 위의 물을 대기권에 의해 떠받쳐 있는 수증기 형태의 물로 생각한다. 즉 지구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요와 같은 수증기막 형태로 ‘수증기 덮개’(water vapor canopy)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2). 성경에 나타난 궁창의 언급 욥기서는 ‘궁창”을 창조하신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렇게 장엄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욥 26:7~8). 또한 지혜자는 잠언서에 “궁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잠 30:4). 이렇게 그 옛날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믿은 사람들은 “궁창”을 구름, 즉 “물을 싸는 보자기”로 보았으며, 이것은 현대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수증기막”과 같은 개념으로서 현대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올바른 것이다. 노아 홍수 기록을 보면, 하늘의 창들이 열리면서 비가 쏟아졌다는 묘사가 있다(창세기 7장 11절). 학자들은 이것을 궁창 위의 물이 쏟아진 것으로 본다. 즉 궁창 위에 수증기 층이 있다가 홍수 때에 쏟아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수증기 층은 온실의 유리 같은 역할을 해서 홍수 전에는 지구 전체가 아열대 지방과 같이 골고루 따뜻했던 것으로 본다. 3). 둘째 날에 나타난 복음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상징이다. 짙은 구름에 물이 싸여있는 것은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을 상기시켜 주고 또 비가 내리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나게 한다. 복음은 죄로부터의 구원의 좋은 소식이며, 이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이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8). 수증기막이었던 궁창이 온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감싸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구름에 비가 가득 차 땅에 비를 내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축복의 단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준다. ◈ 흥미있는 과학 이야기 - 공기와 물의 비밀 균형을 유지하는 공기 공기 속의 원소; 공기 속에는 다양한 원소들이 있는데, 질소, 산소, 탄소, 아르곤, 네온, 헬륨 크세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이 많은 순서대로 보면, 질소(78%) 산소(21%), 일단 이 두 원소가 거의 99%를 차지하고, 아르곤(0.3%) 이산화탄소(0.2%) 그리고 나머지원소들 일산화탄소, 헬륨, 수소 등등 0.5%를 차지하는 극소량의 원소들이 있다. 그런데 공기 속에 들어있는 가장 작은 원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지장을 받게 되어있다. 섬세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공기 중에 있는 모든 원소들의 농도를 균형있게 조절해 놓으셔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도록 설계하셨다. 산소(oxygen)를 만들어 내는 농장을 아시나요? 만약 대기 중에 산소의 농도가 너무 낮다면, 거의 모든 생물체들은 질식되어질 것이다. 우리는 산소 농도에 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무와 다른 식물들이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생명 유지에 필요한 산소를 지속적으로 엄청난 양으로 퍼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동물과 사람들이 산소를 써버리는 것을 보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기로부터 산소를 빼앗아가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 예를 들면, 전 세계 암석들의 화학적 풍화작용은 많은 양의 산소를 제거한다. 그런데 또한, 만약 전 세계 식물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산소의 전체 양이 계속 증가해서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간다면,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산소는 물체들과 결합하여 그것들을 태우는 공기의 부분이기 때문에, 전 세계는 화염 폭풍으로 참화를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생명체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지구를 창조하셔서, 이것은 대기 중 산소량의 유입과 유출 변동에도 불구하고, 산소 농도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확실하게 설치해두셨다. 현실 세계에서, 산소 농도는 너무 높게도 낮게도 되지 않는 정말로 탁월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두 명의 미국 연구자 (조지아 기술연구소와 텍사스 대학의 Philippe Van Cappellen과 Ellery Ingall)가 매우 신기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다에 떠다니는 산소를 만들어 내는 농장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 산소의 대부분은 바다의 표면 근처에서 떠다니며 살아가는 조류생물(algae)들이 햇빛을 이용하여 만들어낸다. 이 단세포 생물들 각각은 매우 작지만, 1 km3당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로 존재한다. 만약 훨씬 강력한 암석의 풍화작용이 일어나 대기 중에 있는 산소를 많이 소모해버리는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풍화작용은 산소를 소모하지만, 동시에 훨씬 많은 양의 인(phosphorus)들을 유출한다. 인은 바다 조류들에게는 필수적인 영양소이다. 그 결과 조류들은 빠르게 번성하게 되고, 산소들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 만일 산소가 너무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 대기에 산소가 풍부해지면 바닷물 표면에도 산소가 풍부해진다. 이 표면의 바닷물이 바닥에 있는 바닷물과 순환이 되어지면서, 그것은 해양저 침전물 속에 살고 있는 산소소모 박테리아(oxygen-consuming bacteria)의 활동을 자극한다. 이들 박테리아들은 바닷물에 있는 인과 결합하여, 인들을 침전물 속에 가둔다. 따라서 바닷물 표면의 조류들은 인이 부족하게 된다. 그래서 조류들은 감소하게 되고, 산소 생산도 줄어드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로 모든 것을 창조하셔서 우리 인간들이 생명을 잘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공기의 농도를 균형지게 유지되도록 하신 창조주의 지혜에 감사하자!
4부-셋째 날, 초목에서 배우는 교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창 1:11~13).
셋째 날 하나님께서는 풀과 채소와 나무들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렇게 되라” 하시니 되었다. 이 말씀은 결코 생명이나 영향력을 잃지 않으며, 시간이 경과해도 그 능력이 결코 감소되지 않는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말씀이 만물을 유지시키신다. “땅은 채소를 내라”하신 하나님의 명령의 결과로서 땅은 아직도 풀과 채소와 나무들을 낸다. 만일 창조하셨던 그 당시 그 말씀의 효력이 그쳤다고 하면, 지금은 어떤 풀도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1). 자상하신 하나님 이 땅에 초목을 창조하셨던 그 말씀은 아직도 살아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풀과 식물과 나무의 열매들이 충분하게 있는 것이다. 평범한 풀의 자람은 우리의 관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 풀의 자라는 것과 같은 사소한 것들은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너무나 적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셔야 할 일이 너무 많으므로 그런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기에는 시간이 없으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피조물을 지키고 돌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업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2). 천연계를 통해 말씀하심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꽃들을 가리키시며,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셨다. 초목과 꽃의 아름다운 모양과 우아한 빛깔은 사람의 기술로 모사(模寫)될 수 있지만, 어느 붓이 꽃 한 송이, 풀잎 하나에까지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단 말인가? 길가에 있는 꽃 하나 하나도 하늘의 별 세계를 움직이는 바로 그 능력 덕택에 존재한다.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심장의 맥박이 고동 한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신 분은 꽃을 지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백합화의 꽃잎 위에 그대를 위한 기별을 불신과 이기심과 해로운 근심을 버릴 때만 읽을 수 있는 말로 기록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에 흘러 넘치는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분께서 생애의 여정을 밝고 즐겁게 해주는 노래하는 새들과 피어나는 꽃들을 주시겠는가? 생존에 필요한 것만 생각하면 꽃들과 새들이 없어도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지 생존에 필요한 것만 공급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애틋한 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땅과 공중과 하늘을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셨다. 그분께서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여 천연계 위에다 이처럼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신 것을 안다면, 그분께서 온갖 필요와 축복을 우리게게 주실 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다시 말해 그 식물이 어떻게 차갑고 어두운 땅이나 강 바닥의 진흙에서 피어 올라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향기를 풍기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 백합의 거친 갈색 구근(球根)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생명이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비와 햇빛 속에서 피어날 때, 사람들은 그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한다. 3). 그리스도인의 성장 세째 날의 창조는 우리에게 많은 영적 교훈을 가르쳐 준다. 식물의 자라남은 그리스도인의 자라남의 예증으로 성경에 여러번 기록되어 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8). 씨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천연계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씨는 그 자체 안에 발아소(發芽素)를 갖고 있다. 이 요소는 하나님께서 친히 넣어 주신 것이다. 씨에는 생명이 있고 땅에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하늘의 무한하신 능력이 밤낮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씨는 아무 수확도 내지 못한다. 바싹 마른 밭에 수분을 주기 위하여 비가 내려야 하고, 태양이 온기를 보내 주어야 하고, 땅에 묻힌 씨에는 전기가 전달되어야 한다. 창조주께서 넣어 주신 생명은 오직 창조주만이 불러낼 수 있다. 모든 씨가 싹이 트고 모든 식물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씨가 발아하는 것은 영적 생활의 시작을 나타내고 곡식이 자라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한 아름다운 표상이다.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자라남이 없이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식물은 자라나지 않으면 죽는다. 식물이 자라는 소리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나 끊임없이 계속하여 자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생애의 발전도 그와 같다. 매 발전의 단계마다 우리의 생애가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영적으로 자라나야 하며, 거룩하게 성화되어야 한다. 성화는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 할 사업이다. 식물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련하신 것들을 섭취함으로 자라난다. 식물은 그 뿌리를 땅속에 뻗고 위로는 햇빛과 이슬과 비를 흡수하며 공기 속에서는 생명소를 흡수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능력과 협력함으로 자라난다. 우리가 마음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치면 그는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호 6:3)실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끊임없이 의뢰함으로써 범사에 우리의 머리가 되신 그분에게까지 자라나게 될 것이다. 밀은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난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곡식을 뿌리는 목적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이와같이 하늘의 농부께서도 당신의 수고와 희생에 대한 보수로써 수확할 곡식을 찾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당신 자신을 재현시키고자 하신다.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은 열매 맺는 일이다. 곧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시키고 또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 품성이 재현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당신의 품성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 흥미있는 과학 이야기 상상을 초월하는 식물 종자들의 여행 인간이 자식을 낳아 번성하듯 식물 또한 자식을 낳아 번식한다. 그러나 식물은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식을 인간이나 동물처럼 하나 둘 낳는 것이 아니라, 매해 수백, 수천, 심지어는 수백만 개의 종자를 생산하며, 이들은 여행을 한다. 바로 생명의 여행인 것이다. 과실이나 종자의 산포는 특별한 매개물 없이 환경에 의해서 스스로 산포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의 식물들은 그들 스스로 종자를 산포하는 대신 바람, 물, 동물, 심지어 인간까지도 매개물로 이용한다. 난과(蘭科)와 석남과(石南科)의 식물은 먼지 무게 정도로 가볍고 미세한 종자를 생산하여 바람에 의해서 널리 이동되어진다. 단풍나무과의 열매들은 구부러진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나무에서 떨어질 때 돌면서 떨어진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는 이들은 10킬로미터 정도까지 날아간다. 또 우리가 흔히 아는 민들레의 경우도 자세히 조사하면, 그 꽃의 깃털이 낙하산같이 이동된다. 만약 공중 수분도가 높거나 비가 많이 오면 그것은 이동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깃털을 접어둔다. 그 후 날씨가 맑아 건조해지면 과실은 다시 깃털을 활짝 펴서 미풍에도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잡초의 일종인 텀블워드는 가을철에 일정하게 자라 종자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밑둥지가 바람에 의해 부러지고, 그 때부터 바람에 의해 구르며 긴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다 여행 중 어떤 물체에 부딪힐 때마다 종자를 흩뿌리는 것이다. 수매(水媒, 물에 의한 여행)하는 식물종자나 과실의 경우는 조직의 일부분에 공기를 포획하거나 조직 자체가 공기를 넣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예를 들어 골풀의 경우는 공기가 들어가 부풀려진 주머니로 둘러싸인 종자를 갖고 있는데, 이 주머니는 종자가 뜨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물에 떠 있는 동안 흡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표면에 왁스물질을 지니는 것도 있다. 어떤 과실은 특히 대양해류에 의한 여행에 적합한데,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코코넛이다. 이 코코넛은 수년에 걸려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기도 한다. 열대 바다에 새로 생긴 환초에서 어김없이 코코넛이 자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새의 소화기관 거쳐야만 발아(發芽) 되는 씨앗 어떤 과일과 종자는 동물 산포를 통해 그들의 종자를 산포한다. 그것들은 조류, 포유류, 개미류 심지어 인간까지도 모두 여행 매체로 작용한다. 해변에 서식하는 조류는 발밑의 진흙에 부착된 종자를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운반하며, 다른 새들과 포유류는 과일을 먹는데 그 과일의 종자는 상처가 나지 않은 채 그 동물들의 소화관을 통과해 지나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처리를 받지 않으면 아예 발아하지 않는 것도 있다. 청어치와 딱따구리 그리고 그 밖의 새들은 견과류와 과일을 운반하고, 날아가는 도중에 그것들을 떨어뜨린다. 많은 종자들은 동물과 조류의 털이나 깃털 속에 붙는다. 갈퀴덩굴 속의 식물과 개자리, 그리고 도꼬마리는 털 또는 등산객의 양말 속에 걸리기 수운 작은 고리들로 뒤덮여 있다. 유니콘 식물(북미산의 초본)의 커다란 씨 꼬투리에는 약 15센티미터 길이의 두 개의 크고 구부러진 고리가 있다. 이것들은 우연히 과일을 밟는 사슴이나 그 밖의 동물들의 털에 걸리게 되며, 동물이 움직임에 따라서 흩어진다. 금낭화, 연령초와 그 밖의 몇몇 식물들은 종자에 개미를 유인하는 오일이 함유된 돌출물을 가지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일련의 단일 개미 집단에 의해서 3만6천개 이상의 종자들이 개미집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개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서 그 돌출물을 벗겨내지만 종자 자체는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듯 전 세계에 걸친 생명의 전파와 여행은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과실과 종자의 놀라운 생명여행은 자신의 종족번식을 위하여 서서히 진화되어 온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풍성하게 하고 모든 생물에게 식물을 주기 위한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 인간도 “말씀의 씨앗”으로 신비한 생명여행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5부-넷째 날, 해, 달, 별이 세상을 비추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창 1:14~19). 창조의 네째 날,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가운데, 네째 날 하늘에 창조하신 것들에서 무엇보다도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할 수 있다. 하늘이 어떤 특정한 음을 내지 못한다 해도 하늘 전체는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1). 하늘이 하나님을 순종한다 하늘에는 법칙이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만들어 놓으신 법칙이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칙을 따른다. 만일 그것들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궤도를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돌거나 움직이거나 한다면 이 우주에는 굉장한 충돌과 폭발들이 생길 것이다. 놀라우신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중력들을 사용하셔서 큰 행성들을 천체에 붙들어 매셨으며, 그것들은 궤도를 벗어남 없이 자기 자리에서 변함없이 돌게 하셨다. 해와 달과 별들이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늘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지정하신 일을 행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분의 뜻에 복종한다면, 우리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지정하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2).“세상의 빛”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이라”(마 5:14) 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창공으로 점점 높이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은 산골짝과 산의 협곡들 사이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몰아내며 그 찬란한 광채를 대지 위에 쏟아 놓고 있었다. 태양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을 일깨워 줌으로 사랑의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아가 오류와 죄의 암흑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빛을 널리 비추어 주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빛에 대해 말씀하시며,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이와 똑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 외에는 그 어떤 빛도 일찌기 타락한 인류에게 비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구주 예수님만이 죄로 죽어 가는 세상의 암흑을 비춰 줄 수 있는 유일한 빛이시다. 인간 자체에는 아무런 빛도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우리는 불붙지 않은 심지와 같고 태양을 등진 달과 같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흑암을 비출 수 있는 빛이 한 줄기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의 태양을 향하고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될 때, 온 심령은 하나님의 임재의 빛으로 작열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단순한 빛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통로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광명의 대근원 이시지만 인간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빛을 비추기 위하여 분투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단지 “빛이 비취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면 그분의 임재의 빛을 감출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능력이 그들에게서 떠나갔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비출 빛이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빛의 근원 되는 분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태양 광선이 지구의 가장 먼 구석까지 비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도록 계획하신다. 만일, 주님의 영광이 그대의 심령에 비치고 그대의 마음이 그분의 영광의 임재 안에서 빛나기만 하면, 주께로부터 오는 이 말씀은 그대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를 명상할 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 때 우리들은 이 땅을 밝히는 산 대리자로서 세상을 향해 광선을 내뿜을 것이다. 3). 별들 성경에서는, 별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보석으로서, 하나님의 귀한 소유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여진 곳들이 나온다. 다니엘서에는 마지막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쓰여져 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또 말라기서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말 3:17)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특별한 소유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보석과 같이 귀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별과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세상에 가장 밝은 빛을 비춘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그분의 숨겨진 사람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존재들로서, 마치 하나님의 보석 상자 안에 있는 보석처럼, 별처럼 반짝 반짝 빛나 그 광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광을 돌릴 것이다. ◈ 흥미있는 과학 이야기 태양 태양을 연구해보면 얼마나 놀라운지 새삼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양의 지름은 약 140만 km로, 지구 지름의 약 109배나 된다. 태양의 표면적은 지구의 약 1만 2천 배이며, 부피는 약 130만배이다. 태양은 주요 에너지 공급원이다. 창조된지 그렇게 오래되었지만 태양이 아직도 식지 않고 계속 열과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는 이유는, 태양에 가장 많이 있는 수소의 원자핵(양성자)이 계속 충돌을 해서 열핵융합반응(熱核融合反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체 내에서 스스로 계속적으로 폭발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기전은, 양성자 4개가 헬륨의 원자핵(α입자)으로 뭉치고, 이 때 질량의 0.7 %가 소실하여 에너지로 바뀌는 원리이며, 이러한 폭발로 인해 태양은 매초 방대한 열과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은하계 은하는 별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해 있는 별들의 도시가 은하계이다. 우주에는 우리 은하계외에도 수 많은 은하들이 존재한다. 이런 외부 은하들은 우리로부터 아주 먼 거리에 있다. 이런 은하들 중 가장 가까운 은하는 남반구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대마젤란은하이며 16만 광년 거리에 있다. 은하들은 그 모양에 따라 크게 타원은하(E), 나선은하(S), 막대나선은하(SB), 렌즈형은하(S0), 불규칙은하(Irr)로 구분된다. 각각의 은하들에는 수십억개에 달하는 태양계가 들어 있다고 한다. 우주에는 이같은 크고 작은 은하가 1천억개도 넘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도 남는다. 진화론자들을 당황시킨 이상한 별, 천왕성 지구 크기의 64 배나 되는 천왕성은 태양계의 9 개의 행성 중에 7번째 행성이다. 천왕성과 그의 위성들은 독특한 특성 때문에 행성 형성에 대한 진화론적 이론들에 커다란 문제점들을 던지고 있으며, 창조주가 계시다는 놀라운 증거를 안겨주고 있다.?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19 배 멀리 떨어져 있는 천왕성은 태양을 한번 공전하는 데 지구의 년 수로 84 년이 걸린다. 우주선 보이저(Voyager) 2호가 1986년 1월 천왕성과 그의 위성들 옆을 지나가면서 얻게 된 정보에 의하면, 위성들의 궤도는 전혀 기대해왔던 것과 달랐다. 위성의 궤도가 황도면(행성들이 태양을 공전하는 공전면)에 수직인 것이 발견되어졌다. 이것은 천왕성의 회전축이 다른 행성들에 비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천왕성의 적도는 황도면에 98도이며, 이것은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을 공전할 때 회전축이 위 아래로 있는 대신에, 천왕성은 옆으로 있어서 굴러가는 형태라는 것이다. 태양계 형성에 대한 진화론적인 이론에 의하면, 행성들은 회전하는 성운(nebula)으로부터 응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데, 천왕성은 이러한 이론에 위배된다. 천왕성은 네 개의‘거대 가스’행성중의 하나로서, 천왕성이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자연주의적 개념에 또 다른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 다른 세 거대 가스 행성들은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천왕성은 다르다. 만약 창조주 없이 자연적인 과정으로 태양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면, 이들 과정의 결과물들은 매우 비슷하여야만 한다. 특히 천왕성과 해왕성은 크기, 대기 조성, 회전율, 태양계에서의 위치 등에서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해왕성은 해왕성이 받는 에너지의 두 배 이상을 우주로 방사하고 있는 반면에 천왕성은 어떠한 초과 에너지도 전혀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 1986년, 보이저 2호에 의한 천왕성 보고는 과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그것은 천왕성의 자기축이 회전축에 대략 60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장(magnetic field)의 힘은 또 한번 진화론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지구의 역사가 수억 수천만년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은 지구의 자기장이 점차적으로 감소되어 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계산에 의하면, 지구가 수천년보다 더 오래 되었다면, 자기장은 지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다이나모(dynamo)”모델, 즉 행성은 행성의 운동에 의해 스스로가 자기장을 유지한다는 모델을 만들었으나, 천왕성의 자기장의 힘과, 자기축과 회전축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진화론적 다이나모 모델이라는 가정을 완전히 거부해 버린다. 위의 사실들은 천왕성을 창조된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진화론자들을 만들고 당황시키고 있다
6부-다섯째 날, 하늘과 바다를 채운 소리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창 1:20~23).
다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공중과 물과 땅 위에 거하는 생물들을 창조하셨다. 이 모든 생물들이 온 세상을 채우자 비로소 땅과 바다는 움직이는 생물들의 소리들로 가득차게 되었고, 활기차고 기쁘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들로 세상이 덮이게 되었다. 바다는 큰 고래로부터 작은 미생물인 플랑크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공중은 큰 독수리부터 작은 벌새에 이르기까지 출렁이며 펄떡이며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기에 바빴고, 성경에는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짧은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 보라! 이제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와졌으며, 얼마나 더 하나님의 기묘하신 창조의 솜씨를 나타내는지를... 큰 생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물들을 창조하신 주님은 그 똑같은 능력으로 이 큰 우주와, 또 우주에 비하면 보이지도 않는 우리 인간 각 개인들을 사랑으로 손수 돌보신다. 얼마나 큰 사랑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무생물계와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에게서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사랑에 관해서 교훈을 배우도록 계획하셨다. 이것에 대해 욥기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줄을 알지 못하랴?”(욥 12:7~9). 우리가 네째 날의 창조사업을 연구하면서 배우게 되는 것은, 보잘 것 없고 미천한 생물들까지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시며, 그가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시는 이상,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분의 손으로 지으신 인간들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이다. 1). 참새를 돌보시는 사랑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매우 격려가 되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2:29~31). 또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근심이 없이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새들을 가리키시며, 그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지라도 크신 아버지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께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신다.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크신 공급자께서는 매일 그 손을 펴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유지하시는 능력을 공급하여 주신다. 공중의 나는 작은 참새도 그분의 돌보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분께서는 식물을 새의 주둥이에 떨어뜨리지는 않으시나 저희의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주신다. 새들은 그가 저희를 위하여 흩어 놓은 곡식을 주워 먹어야 한다. 또 새들은 저희의 새둥우리를 지을 재료를 마련하여야 하고 자기 새끼를 먹여야 한다. 그러나 새들은 매일 아침 노래를 부르면서 일하러 나가는데, 이 이유는 “천부께서 기르”(마 6:26)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그리스도인이여!,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얼마나 새보다 귀한 존재인가를... 작은 새들도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신령으로 그분께 예배드릴 수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은 공중의 새보다 얼마나 더 사랑하시고 가치있게 생각하시겠는가를...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보존하시는 이시며,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할 때에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지 않으실까? 2).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돌보신다는 사실과 그의 펴신 손으로부터 공급을 받는다는 의미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양식이 입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새들이 날아가서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주신 것을 거두는 것처럼, 우리도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힘써 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배워야할 더 깊은 영적인 교훈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안에서 영적으로 풍성하게 되기 위해 매일 주님 안에서 먹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더욱 더 풍성한 축복들을 준비해 놓고 계시다. 그러나 이 영적 양식은 “보화”를 찾듯이 부지런히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이런 상징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거기서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양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영향을 끼치셔야만 한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또는 그것이 우리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의 사랑과 그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소화되어야 한다. ◈ 흥미있는 자연과학 이야기 놀라운 벌의 시각과 뇌 초파리 다음으로 창조과학자들에게 인기있는 곤충(절지동물)은 아마도 흔히 볼 수 있는 꿀벌(honey bee)일 것이다. 이제 21 세기 연구는 벌의 시각(vision)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벌의 뇌(brain)는 단지 100만 개의 뉴런(neurons, nerve cells)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량은 1.3 kg의 인간 뇌가 가지고 있는 뉴런의 0.01% 이다. 이 작은 뇌와 연관된 시각을 사용하여, 벌은 복잡한 색깔의 퍼즐도 풀 수 있고, 심지어 사람의 얼굴도 인식할 수 있다. 벌들은 눈을 구성하고 있는 6,300여 개의 개안(ommatidia)들을 사용하여 이 일을 수행한다. 또한 벌들은 초당 300여 개의 분리된 빛의 섬광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창조되어졌다. 그리고 이 능력을 사용하여 변화되어지는 풍경 위로 빠르게 날아간다.?다음에 당신의 주변을 한 바쁜 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갈 때에, 그 벌은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와 컴퓨터들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도록 설계되어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놀라운 부리, 혀, 발톱의 조화 - ‘딱따구리 산 속을 걷다보면 간혹 쉴 새 없이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로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뚫는 소리다. 딱따구리는 매우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돌에 구멍을 뚫는 작은 석쇄드릴과 비슷하다. 돌에 구멍을 뚫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딱따구리는 어떻게 그 부리로 1분에 수천 번이나 나무를 쪼아대면서도 부리가 부러지거나 뇌가 부서지지 않을까? 첫째로 딱따구리는 아주 특수한 부리를 가져야만 한다. 나무에 구멍을 뚫을 때 아코디언처럼 주름져 쭈그러지지 않기 위해서 그 부리는 강하고 날카로워야 한다. 딱따구리는 또한 구멍을 뚫고 있는 나무에 자기 몸을 견고하게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 딱따구리는 나무에 앉아서 구멍을 뚫지 않는다. 딱따구리는 나무에 붙어 자기 몸을 지탱하는 데 사용하는 딱딱한 꼬리깃털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네 발가락으로 된 다리를 가지고 있다. 두 발가락은 위로 향해 있고 나머지 두 발가락은 아래로 향하고 있어 견고하게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구멍을 뚫기 위해 매우 빠르게 머리를 나무에 부딪칠 때 두개골 안의 뇌가 파열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머리 속에 충격흡수장치가 있어서 충격을 흡수, 두개골과 뇌의 손상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딱따구리의 특징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혀다. 딱따구리는 혀를 사용하여 나무 속 깊은 곳에 있는 곤충이나 애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에 혀가 매우 길어야 한다. 또한 곤충이나 애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도록 딱따구리의 혀에는 끈적끈적한 물질을 분비하는 분비선들이 있다. 딱따구리는 그렇게 긴 혀를 어떻게 다루는가? 창조주께서는 이 문제를 매우 특이하게 해결하셨다. 대부분 새들의 혀는 부리 뒤에 박혀 있으나 딱따구리의 혀는 오른쪽 코에 박혀 있다. 오른쪽 코로부터 혀가 나와 두 가닥으로 갈라지며 두개골의 양옆을 돌아서 부리 밑의 구멍을 통과해 부리로 들어온다. 여기에서 두 가닥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딱따구리는 그 긴 혀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 때 그것을 말아서 오른쪽 코에 넣어 두는 것이다. 오른쪽 코에서 나오는 긴 혀를 가졌다 치더라도 강하고 날카로운 부리나 강한 목근육, 충격흡수장치 그리고 특별한 발가락과 발톱들을 갖지 못한 새를 상상해 보라. 그와 같은 새가 딱따구리에 의해 이용되는 여러 기관들 없이 그 혀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한편으로 딱따구리와 같이 구멍을 뚫는 데 사용하는 모든 기관들을 갖고 있으면서 긴 혀를 갖고 있지 못한 새를 상상해 보라. 그는 먹이를 기대하면서 종일 나무에 구멍을 뚫을 것이나, 그 고된 작업 후에 그는 곤충이나 벌레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구비되기 전까지는 어떤 기능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딱따구리는 진화된 것이 아니며 진화할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딱따구리를 창조하실 수 있다.
7부-여섯째 날, 육축과 사람을 창조하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창 1:24).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26,27,28,31). 1). 사람을 지으시고 여섯째 날의 창조사업은 가장 오묘하고 가장 위대하고 놀랍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창조사업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을 탄생시키셨다. 그것은 바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특별히 사람은 창조주의 손으로 지으심을 받았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대로 각종 동물들을 만드셨을 때, 땅은 온갖 기는 것들과 뛰고 움직이는 것들로 활기를 띠며 아름다운 소리와 생기로 넘쳐났다. 그러나 짐승들을 만드신 후, 제일 마지막으로 창조의 결정판인 인간이 지음을 받았을 때, 그 오묘와 지혜는 가히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은 영감의 기록에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4)고 감탄하였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흠없고 완전한 아름다운 인간! 인간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 지금까지 당신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즐기고 다스리고 누리며 살수 있는, 또한 이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에 대한 경이와 감탄과 사랑으로 그분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숭배하는 영혼의 반려자가 필요하셨다. 그 하나님의 반려자가 바로 인간이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지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그분과 함께 교류하고 사랑을 나누며 사귈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셨던 것이었다. 2).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교제의 상대로서의 필요성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다음의 말씀에 잘 표현 되어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또 에베소서 1장 6절에 보면 우리 인간은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간보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우주에 잘 드러낼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서로 사랑하며 아름답게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타락했던 인간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복음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고 순결한 사람이 되어, 다시 하나님과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되는 오묘야말로 “천사들에게조차 구경거리가 될”만큼 흥미로운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그런 복음의 비밀을 터득하고 생애에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시다. 이 땅이 다시 아름답게 회복되어 새 땅이 되는 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창조에 나타났던 복음이 완성될 것이다! 3). 생령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지만, 사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생령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흙으로 지어진 바 되었다. 짐승들과 같이 인간도 땅에서 취한 바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 흙에서 왔다가 생명이 끊기면 다만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헛된 존재일 뿐...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그러나 인간에게 동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므로 지성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흙에서 왔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위대한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면 어떤 생명도 없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 생명은 “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들만이 내세의 생명을 바랄 수 있다.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4).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복음 창조 받을 당시에 부여받았던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불멸의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성육신하신 하나님 고귀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간들은 불멸의 생명을 다시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보혈은 그 피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들에게만 제공된다. 곧 자신을“티끌”처럼 낮추고, 자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리는 겸손한 사람들, 자신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여호와 나의 의”를 열렬히 간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매일 죄를 승리하고 이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 저들의 성품과 행실이 “흰 세마포”옷과 같이 순결하게 변화된 사람들만이 다시 주시는 불멸의 생명을 누리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우리는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풀 가운데, 아니 모든 만물 가운데 놀랍게 드러났는지를 연구하였다. “땅은 풀을 내라”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전하여졌다.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무겁게 누르고 있는 흙덩어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풀잎을 자라게 하며, 땅표면으로 그들을 밀어내어 빛을 보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하셨던 능력의 말씀은 진정으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똑같이 역사한다. 자기 자신을 풀과 같이 연약하고 무력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자신을 무한한 생명의 근원에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무한하신 하늘의 능력과 연결되어 풍만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똑같은 말씀의 능력으로 매일 재창조받는 경험,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을 매일 함으로 죄를 극복하고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구속이다. 그러한 재창조의 역사가 생애에 이루어진 사람들은 자연히 불멸의 삶, 우리가 그렇게 그리는 하늘 본향에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창조의 능력이 독자의 생애에 매일 경험되기를 바란다. ◈ 동물의 신비 사막의 놀라운 피조물「낙타」 낙타는 종종 「사막의 배」로 불리울 정도로 아직도 사막지역의 중요한 운송 및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많은 동물들이 살기 조차도 힘든 사막에서 낙타는 어떻게 무거운 짐을 운반하며 생존할 수가 있을까? 낙타는 우선 신체적 구조가 사막의 거친 기후에 잘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다.심한 모래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눈썹과 눈두덩은 길고 두꺼우며 허파를 보호하기 위해 코에는 예민한 근육이 있어 모래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 한다.두꺼운 가죽과 털은 뜨거운 낮의 태양과 추운 밤으로부터 보호해주며 넓은 말굽은 뜨거운 모래위를 걷기에 적합하게 창조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낙타의 특징은 상당기간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데 있다.많은 사람들은 낙타가 등에 있는 큰 혹과 같은 육봉에 물을 저장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 육봉에는 물이 저장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지방이 저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한 마리의 낙타는 육봉에 평균 45kg의 지방을 저장하고 다니면서 오랫동안 음식을 섭취하지못할 때 분해해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된다.그러면 낙타는 물없이 어떻게 오랜 기간을 견딜 수 있을까? 낙타에게는 소변의 요소의 농도를 높여 밖으로 배출하는 물의 양을 줄이는 기전이 있다. 또 낙타는 다른 동물에 비해 체온의 범위가 넓다.그래서 땀으로 식혀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른 동물에 비해 물의 소모가 훨씬 적다. 그리고 낙타는 특수한 순환계를 가지고 있어서 수분이 부족해 혈액이 진해지면 주위에 있는 조직으로 부터 물을 흡수해 보충하게 된다.심한 경우에는 전 체중의 25%까지 물을 혈액에 빼앗기고도 살 수가 있다.이처럼 건조하면서 일교차가 심한 사막기후에 적합하도록 창조된 낙타가 우연히 진화될 수 있겠는가? 성경에 약대로 기록되어 있고 성경이 기록된 팔레스타인 지역에 없어서는 않될 낙타는 인간의 죄로 파괴된 후의 사막지역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놀라운 피조물인 것이다. 정교하고, 방대한 설계도인 사람의 유전 정보 사람의 몸은 약 60조개에 달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세포 속에는 핵이 있고, 세포 핵에는 23쌍의 염색체가 실모양으로 된 2중의 나선 구조로 들어있다. 염색체에는 DNA(핵산), 즉 A,G,C,T로 불리는 염기가 쌍으로 존재하는데, 사람의 전체 DNA의 염기쌍은 약 30억쌍이다. (23개의 염색체, 2쌍으로 되어있는 것을?감안하면 약 60억개의 염기쌍임) 유전자란 DNA로 구성된 유전 정보단위로서 사람의 외모와 성격, 질병, 성향 등 한 개인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인간 설계도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한개의 세포 속에 들어있는 23쌍의 염색체를 모두 풀어서 연결하면 그 길이가 1.5m나 된다. 사람의 세포 개수를 약 60-100조개라고 할 때, 이 DNA의 길이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인, 1억 5천만km를 50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이다. 사람의 세포 한 개 속에 있는 DNA의 정보량을 A4 용지에 10폰트로 썼을 때 1,000쪽 짜리 1,350권에 해당한다. 놀라우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세포 하나 속에도 그렇게 방대한 유전정보를 기록해 놓으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