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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신학적 긴장 속의 재림교회
♦마음 열기
*찬양의 시간: 찬미가 565장 너 시험을 당해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화에 대한 부담감에 칭의를 잊어버리거나, 반대로 칭의를 강조하는데, 내 삶의 열매가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생각 열기
여호수아 1:7-9: “[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1950년대 이후 현재까지 재림교회 내에 존재하는 신학적 긴장상황을 살펴봅시다.>
1. 신학적 긴장: 1950년에 이르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창립 100년을 넘어섰다. 이 한 세기 동안 교회는 정체성에 대한 여러 신학적 도전들에 직면했었다. 그 첫 번 도전은 1844년 10월의 대실망과 더불어 이르러왔다. 그 때의 중추적 질문은 “재림교회 신앙에서 재림교회적인 것은 무엇인가?”와 관련되어 있었다. 두 번째 도전은 1880년대 후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각성과 더불어 이르러왔다. 그 때 물었던 긴급한 질문은 “재림교회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것은 무엇인가? 였다. 세 번째는 1920년대에 직면했던 것으로 ”재림교회 신앙에서 근본주의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이 일련의 질문들과 그것들에 대한 답변들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학 발전을 대체적으로 꼴 지웠다. 1950년대에 시작되는 새 시대에는 하나의 문제가 핵심을 이루는 대신에 세 가지 문제가 재림교회의 여러 계층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 시대와 달랐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194)
2. 몇몇 의미심장한 진전들:
1) 1930년대 초엽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학대학원이 설립된 것이었다. 대학원 연구의 바로 그 성격 자체가 이전 세대들의 재림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철저하게 제기하지 않았던, 성경과 그들의 신조들에 대한 질문들을 이제 다루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2) 1952년 대총회 추계회의는 성경연구사무소와 상설기구인 성경연구위원회를 창설하여 그 협회의 기능을 제도화하기로 결의했다. 이런 변천이 가져온 긍정적인 측면은 이제 교회가 민감한 쟁점들을 전향적으로 살필 수 있는 공식적인 ”싱크 탱크“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상게서, 196)
3) 일곱 권짜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경주석의 발행이었다(1953-1957). 재림교회는 그 역사상 처음으로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강해식으로 다룬 대문헌을 발간해낸 것이다. 그 주석이 변증적 목적과 증명용 성구제시 방식으로 일관되어온 재림교회의 성경연구 전통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방어적 접근 대신에 주석 편집자들은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하도록 노력했다. 그 주석이 사용한 성경에 대한 역사적, 문맥적 그리고 언어학적 접근은 성경을 재림교회의 관심사들에 대한 또 하나의 “답변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말씀으로 교회 앞에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와 같은 주석은 독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구절들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해석을 인정했다. 편집자 중 한 사람이 표현했듯이, “그 주석에 있어서, 성경 연구는 진리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순례여행이 되었다.”(AHer, Summer 1998, 26-34). (상게서,198)
4) 교단의 구성원들 자체의 교육수준도 더욱 더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 같은 전문화가 이루어지자 재림교회와 그 신조체계들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학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나타났다. (상게서, 198)
3. 역사적 재림교회 신앙에 대한 탐구:
1) 1956년 9월에 반하우스가 이터니티지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발행함으로써 재림교회 내에 새로운 위기와 신학적 연대가 발생하였다. 프룸(L.E. Froom)과 앤더슨(R.A. Anderson)같은 대총회 목회부 지도자들의 승인을 받은 것이 분명한 그 기사에서, 반하우스는 M.L. 앤드리어슨(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재림교회의 선도적 신학자)과 그의 신학을 재림교회의 “광신적인 주류일탈파”로 폄하하여 분류하였으며, 앤드리어슨과 그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모든 분야에서 과격하고 무책임한 자들”과 “유사하다”고 암시하였다. 그것과 대조할 셈으로, 반하우스는 교단의
“책임감 있는 지도부”와 다른 견해들을 신봉하려고 애쓰고 여하한 신자들에게도 제동을 걸기로 단호하게 결심한 교단의 “분별 있는 지도자들”을 인정해주었다. “[나는] 중상을 많이받는 한 진지한 신자들의 그룹을 바르게 평가하게 되어 기쁘며, 진심으로 그들을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그리고 크리스챤 사이언스등과 같은 철저한 이단 그룹에서 분리시켜 구속받은 형제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Eternity, 1956년 9월, 6,6,45).
보수적인 복음주의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한 지도자에 의해, 전례 없이 이루어진 재림교회의 정통성 선언은 프룸, 앤더슨 그리고 W.E. 리드(성경연구소장), 반하우스와 월터마틴(재림교회에 관한 책을 쓰도록 존더반 출판사의 위촉을 받은 미국의 사교전문가) 등과 같은 지도자들이 1955년 봄과 1956년 여름 사이에 약 18회에 걸쳐 이루어진 일련의 회합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2) 마틴은 재림교회 출판물들을 광범위하게 읽고 교단의 신조들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을 준비하여 회합에 나왔었다. 이 질문들은 재림교회 신학 전반을 포괄하였지만, 마틴이 가장 궁금하게 여긴 것은 다음의 네 가지 주장이었다.
“① 그리스도의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지 않았음,
② 구원은 율법의 행위에 은혜를 더한 결과임,
③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계신 존재가 아니라 피조된 존재임,
④ 그리고 그분이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 인간의 죄된 본성을 취하셨음.”(Our Hope, 1956년 11월 호, 275).
3) 1957년 가을,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마틴과 반하우스가 제기한 문제들에 관한 준공식적 답변으로서 교리에 관한 질문들(Questions on Doctrine)을 발행했다. 몇몇 예외들을 제외하고 교리에 관한 질문들은 교단이 1950년대 이전에 표현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방식으로 그 신학을 제시했지만, 이 예외들이 교리에 관한 질문들을 매우 논쟁을 유발하는 책으로 만들었다. 그것에 대한 반작용은 결국 재림교회 내의 한 분리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4) 마틴은 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그의 반응을 1960년에 존더반 출판사를 통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관한 진실이란 책으로 출판했다. 그는 재림교회 신학을 큰 존중심을 가지고 다루었으며, 재림교인들은 사교적인 집단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으로 그는 재림교회 신학에서 오류와 약점들로 생각되는 사항들을 지적했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201)
5) 재림교회 목회부는 미니스트리지에 16개의 기사들을 게재하여 마틴의 책에 대응했으며, 교회는 후일 이 문건들을 교리적 논의들이란 책으로 엮었다.
6) 한편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 진영 전체가 교리에 관한 질문들이나 마틴의 책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관한 또 다른 시각(1962)이란 책을 쓴 노르만 두티같은 저술가들은 마틴과 반하우스가 너무 관대했으며, 재림교회는 역사적 기독교가 견지했던 성경의 가르침에서 떠났다고 주장했다.
7) 반하우스는 마틴의 책에 서문을 기고했다. 교리에 관한 질문들을 놓고 재림교인들 가운데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그들의 교회의 교리적 입장을 해석해준 그들의 지도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좇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만]이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일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7쪽)고 힘주어 기록했다. 이 진술은 다소의 재림교인들이 여전히 사이비적 범주에 들어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8) 그들이 지칭한 저 그룹의 지도자는 다름 아닌 M.L. 앤드리어슨이었다. 그는 1940년대에 재림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지만 1955년과 1956년에 이루어진 복음주의자들과의 대화에서 “광신적 주류일탈파”로 제외되었던 사람이다. 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앤드리어슨의 반발과 1956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니스트리 지에 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기술된 몇몇 “신”신학의 이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게재된 기사들은 그로 하여금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쓰도록 만들었다.
앤드리어슨이 볼 때 교리에 관한 질문들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주의자들에게 매수당하여 역사적 재림교회 신앙을 배반한 행위의 결정체였다.
9) 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강조된 두 요점은 십자가상에서 속죄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1844년 속죄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재림교회가 1845년 이래 주장해 온 재림교회의 중요한 신조와 일견 모순되게 만든 신학적 쟁점)과 그리스도가 죄 없는 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것인데 특별히 두 번째 주장이 앤드리어슨을 격노케 했다. 이 두 가지 개념으로 대표되는 “신신학”은 그의 마지막 세대신학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많은 면에서 완전한 속죄의 문제는 반하우스와 마틴과 더불어 대화하고 있던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족성에 대한 그들의 신조를 전달할 수 있게끔 행해진 일종이 어의적 조정이었다. 교리에 관한 질문들의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봉사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희생적 속죄의 혜택을 “베풀고”계시는 하늘성소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재림교회의 이해를 끝까지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적 속죄를 “준비”하셨다고 복음주의자들과 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참조 QOD 341-355).
10) 교리에 관한 질문들의 필자들은 그 책의 부록에 제공된 바 그 주제를 뒷받침하는 엘렌 화잇의 저술들의 인용구들을 나열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입장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했었다. 그 적절한 예는 엘렌 화잇의 인용구들을 도입하는 표제들이 그녀의 펜에서 나온 자료들을 항상 충실하게 대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650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는 진술을 발견한다. 엘렌 화잇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자신에게 취하셨다.”(Review and Herald, 1896년 12월 15일자, 789)고 기록했다.
11) 앤드리어슨이 제기한 문제:
①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이루어진 변화를 지적할 때 타당한 우려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발생했다는 그의 지적은 옳았지만, 한편 그 주제에 관한 그의 주장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의 죄된 본성에 관한 엘렌 화잇의 견해가 앤드리어슨이 견지한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어린 아이로서 예수님이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죄된 경향들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바른 것으로 향하는 경향을 갖고 계셨다고 명백하게 말했다.
② 그가 그것을 재림교회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기둥”으로 내세워 그 주제의 핵심성을 명확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의 주장이 자신의 신학의 핵심적 사항이었던 것은 사실인 반면에, 재림교회 기별의 창설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기둥 같은 신앙신념으로 보지않은 것이 확실하다.
③ 세 번째 중요한 문제는, 교리에 관한 질문들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엘렌 화잇을 받아들이든지 해야 할 것이라고 논했을 때, 그의 논증을 엘렌 화잇의 저술들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206)
12) 교회의 공식적 입장에 맞서 앤드리어슨이 공격적 자세를 보이자 지도자들은 그의 목회 신임서를 회수하고 그가 저술한 책들을 재림교회 출판소들에서 철수시켰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런 조치는 단지 순교자 신드롬을 유발시켰을 뿐이었다. 더 나아가 여기에다가 대총회가 복음주의에 매수되었다는 것을 포함한 음모이론들까지 곁들여지자, 재림교회 불만분자들이 결집하고 결국 그것을 중심으로 조직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앤드리어슨은 죽기 전에 교회 지도자들과 화해했고, 교단은 그의 신임서 회수를 철회했지만 교회는 이미 상처를 입고 있었다. 앤드리어슨의 신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결집할 수 있는 논점을 마련해 주었다. 그의 마지막 세대 신학에 내재해 있는 완전주의는 결코 죽지 않았다.
13)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항한 헤펜스톨: 헤펜스톨은 교단의 신조 체계에서 “재림교회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것은 무엇인가?”하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재림교회 개척자들이 내세운 “기둥”같은 교리들을 신봉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인성과 속죄 같은 문제들에서는 앤드리어슨 방식의 역사적 재림교회 신앙을 대적했다. 그는 교리에 관한 질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하늘의 원형적 대속죄일에 계속되고 있는 속죄봉사와 아울러 십자가상에서 치러진 속죄를 강조했다. 그 외에도 그는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속절없음, 구원의 전체적 계획과 관련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인간이 죄 없는 완전을 달성하는 것의 불가능성, 예수님이 타락한 아담의 다른 자녀들과 꼭 같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새언약 경험 같은 가르침들을 강조했다. 헤펜스톨의 신학은 분명히 앤드리어슨과 그의 동료들의 것보다 더욱 십자가 중심적이었고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으며 복음주의 형태의 신학이었다. 그리고 품성의 완전에 대한 헤펜스톨의 이해에서처럼 그의 신학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헤펜스톨의 신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없이 설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인 죄 없음과 완전주의 및 그밖에 앤드리어슨이 제시한 사상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헤펜스톨은 “그 어느 곳에서도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에 대하여 말하면서 완전을 죄 없음과 동등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은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죄 없는 완전에 도달해야 한다는 신조와 아울러 [구원의 계획에] 중심에 우리의 자아를 굳게 삼는 어리석음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완전, 63,82)고 주장하였다. 죄는 행동보다 더 깊다는 것과, 그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서, 헤펜스톨은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죄는 왕 노릇하지 않지만,” 타고난 제한성을 지닌 인간 본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결점 없이 식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남아있다.”고 지적하였다(완전, 69,73). 헤펜스톨은 완전을 죄 없음과 동일시하기 보다는, 본질적으로 그것은 영적 성숙이며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성경을 통해서 입증했다. 그는 엘렌 화잇을 인용하면서 완전은 상대적이라고 지적하였다(완전, 65,88,77).
그런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는 그 주제에 관한 엘렌 화잇의 이해의 심장부에 서 있는 개념, 즉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랑으로서의 완전 개념, 곧 기본적으로 웨슬리적인 완전 개념으로 돌아갔던 것이다(실물교훈, 67-69).
에드워드 헤펜스톨은 195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재림교회 내에서 으뜸가는 신학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208)
14) 데스몬드 포드: 헤펜스톨은 1950년대에 데스몬드 포드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헤펜스톨과 호주 출신의 젊은 신학도 사이에 오간 편지들은 초기 시절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포드는 몇몇 신학 분야에서 그의 스승이 동의할 수 없는 주장으로 결국 헤펜스톨의 지평을 벗어났다. 1970년대에는 구원의 계획의 정확한 본질을 놓고 재림교회 안에서 긴장이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조되기까지 했다. 한쪽은 그리스도의 죄된 본성, 성화 그리고 완전을 강조하고, 다른 쪽은 십자가와 칭의를 내세웠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보통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대총회장이 부흥과 개혁을 촉구한 1973년과 1974년의 연례회의에서, 그리고 여러 시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주제가 논의되었던 1976년 팜데일 총회에서 의미심장한 토론들이 이루어졌다.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나 그 논쟁은 계속되었다. 예컨대 왜 예수님이 기다리시는가?(1976)라는 책에서 하버트 더글라스같은 사람은 그 스펙트럼의 끝인 최후 세대의 성화와 완전을 강조한 반면, 포드는 칭의(즉, 의롭다고 선언되고 있는 것)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부라고 주장하였고,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1979년 퍼시픽유니온 대학에서 자신의 입장을 왕성하게 제시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포드가 구원에 대한 개념들에 관하여 다소의 재림교인들과 의견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재림교회 신학과 재림교회의 자기이해의 기초를 형성하는 기둥들 중 하나를 배척했음(신약의 복음과 조사십판 이론은 양립할 수 없다며 그리스도의 두 단계 속죄봉사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를 배척)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 결과 교단은 그에게 자신의 결론들을 설명할 해명서를 준비하도록 6개월간의 연구 휴가를 주었다. 1980년 8월에 콜로라도 주 글래시어 뷰에서 개최된 교회 행정자들과 학자들의 특별한 회집에서 포드는 다니엘8:14, 대속죄일, 그리고 조사심판이란 광범위한 책자를 제출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과, 1844년의 의미는 그 해에 하나님이 세상에 대한 그분의 마지막 기별을 위탁하신 한 백성을 일으키셨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글래시어 뷰 모임에 이어서, 교회 지도부는 포드의 목사 신임서를 회수했으며, 그는 자급사역에 들어갔다. (상게서, 211)
15) 포드에 대한 반작용들은 아주 많았다. 헤펜스톨은 그래시어 뷰에서 포드에게 그의 입장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일에 실패하자 실망했다. 따라서 그는 그 후에 포드에게 그가 “얼마나 멀리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왼쪽으로 선회했는지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편지를 썼다(헤펜스톨이 포드 박사 부부에게 보낸 1982년 10월 15일자 편지).
16) 더욱 더 반발적인 성격을 띤 것은 호프 인터내셔널(우리의 견고한 토대로 알려진 정기간행물을 발행함)로 발전된 콜린,러셀 스탠디쉬와 그 그룹들의 반응이었다. 교회내의 이 부류에 속한 재림교인들은 자신들을 “역사적 재림교회 신앙”을 믿는 사람들로 간주하게 되었다. 구원론적인 면에 있어서, 그들은 1888년 이전의 스미드/버틀러 진영과 매우 흡사한 견해를 견지하는 한편, 동시에 M.L. 앤드리어슨의 마지막 세대 신념과 1888년 이후의 존스와 와그너의 그리스도의 인성론 신학과 노선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7) 대총회는 예언과 성소에 대한 재림교회의 인식을 성경과 재림교회 역사의 기초 위에 확고히 세우고 재림교회 역사보다 성경에 더 비중을 두는 방식의 대규모 연구로써 포드에 대응하는 작업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1981년부터 십년 동안 포드가 제기한 문제들뿐만 아니라 이전에 발렌저와 플레처와 콘라디를 곤혹스럽게 했던 그런 문제들까지 잠잠케 해주리라고 교단이 희망한 여덟 권의 견실하고 풍부한 내용의 책들을 출간하였다.
성소와 속죄(1981), 예언해석에 관한 선별된 연구들(1982), 다니엘서에 관한 심포지엄(1986), 70주, 레위기서, 그리고 예언의 본질(1986), 히브리서의 쟁점들(1989), 성소교리: 역사적 고찰, 1989), 계시록에 관한 심포지엄, 제1권, 1992), 그리고 계시록에 관한 심포지엄, 제2권, 1992).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212)
<정리>: 재림교회 신학적 문맥의 뿌리들과 성경 전체의 견해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재림교인들이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교단 안에서 일어난 구원에 관련된 몇몇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1)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신약의 가장 기본적 진술은 칭의도 성화도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의롭다고 선언되다) 또한 성화된다(거룩한 용도를 위하여 구별되다). 실제적 경험에서는 추상적 논증과는 달리 사람은 그 어느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를 가질 수 없다. 성경적 묘사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바로 그 동일한 시간에 사람은 또한 다시 태어나고 변화된다는 것이다.
2) 죄 없음이나 결코 변치 않는 어떤 것으로서의 헬라/중세/수도원적 완전 개념들을 넘어서 성숙한 사랑이라는 역동적인 히브리/성경적 완전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마 5:43-48; 실물교훈 67-69).
3) 성경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엄밀하고 세세한 사항들의 신비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 빌 2:7)이 되셨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용어가 “정확하게 같은”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의미가 “유사한”을 뜻한다고 말한다. 결국, 천국은 겨자 씨(마 13:31)와 “같지”만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천국이 겨자씨는 아니지 않는가. (상게서, 213)
4. 엘렌 화잇의 역할과 권위에 대한 탐구: 1) 1915년에 화잇 여사가 서거한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녀의 저술들을 재림교회 신학의 중심에 놓으려는 지속적이며 점진적인 경향과, 그녀의 생활과 사역을 둘러싼 신화를 확장하려는 경향이 이어졌다. 따라서 그녀의 모든 사상들과 사실들이 하늘의 계시를 통해서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이르러왔다는 신념이 널리 퍼졌던 것처럼, 그녀가 당대보다 100년 앞섰다거나, 그녀의 권면들이 유일무이하고, 무류하고, 그리고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그러한 사상들이 널리 퍼졌다. 20세기의 첫 2/3 기간에 엘렌 화잇이 성경에 대한 신적인 주석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교회 일반에 널리 수용되었다. 엘렌 화잇에 대한 그들의 사용 방법에 있어서 많은 재림교인들은 그녀 자신이 “작은 빛”으로 칭했던 것을 오히려 “큰 빛”으로 만들고 있었다. (상게서, 222)
2) 그 때 즈음에 이르러, 교회는 1920년대 이래로 계속하여 거듭 역설되어온 여러 입장들의 진실성을 평가하는데 필요한 지성적인 기술들을 습득한 고도로 교육받은 신세대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 최종 결과는 엘렌 화잇의 사역에 대한 교단의 이해를 좀 더 확고한 토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교회와 다수의 교인들이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3) 대총회는 본문 분석 전문가인 신약학자 프레드 벨트맨에게 시대이 소망의 저술에 있어서 엘렌 화잇의 자료 사용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연구하도록 위촉했다(Adventist Review, 1981년 7월 9일 자, 4-7). 시대의 소망을 기록한 것과 같은 기간인, 5년간의 풀타임 연구 끝에, 벨트맨은 엘렌 화잇이 광범위하게 차용했지만, 그것이 맹목적인 차용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는 “다른 이들의 저술들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를 갖고 사용했다.” 이런 차용은 그녀가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그녀가 자료들에 노예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엘렌 화잇의 “자립성은 ... 그녀의 선별성에서 엿보인다. 그녀의 자료들은 그녀의 노예였지, 그녀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그녀가 이해시키려고 애썼던 기별에 적합하게 되도록 그녀의 완성된 작품을 정교하게 다듬었다(Ministry, 1990년 10월 호, 4-7; 1990년 12월, 11-15).
4) 다른 측면에서 탐구를 해왔던 조지 라이스는 1983년에 누가, 표절자인가? 란 책을 출판했다. 그의 출발점은 재림교회는 영감에 대한 매우 부적절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취약하며, 그 이유는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직접적으로 내려온 계시에 의해 그들의 정보를 얻는 영감 모델에 거의 전적으로 그[영감] 이해의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약점을 지적하기 위해, 라이스는 어떻게 성경 저자들이 그들의 영감 받은 책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탐구와 기존 문서들을 사용했는지를 누가복음을 통해서 증명했다. 영감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 견해는 엘렌 화잇의 영감과 자료 사용에 관한 논의에도 적용되는 것이 분명했다. 라이스의 발견들은 또한 벨트맨의 그것들과 이론적으로 꼭 들어맞았다. 이 둘이 결합되어 재림교회에게 계시와 영감에 관한 더욱 정교한 이해를 발전시킬 기초를 제공해 주기 시작했다.
5) 많은 재림교인들은 그 쟁점들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모르고 있었으며 전체 주제에 대하여 다소 순진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 주제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1920년대로부터 196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재림교회 내에서 크게 유행했던 ‘대중의 지혜’를 통해 물려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의 영감, 성경과 그녀의 저술들과의 관계, 그리고 20세기 환경에서 그녀의 책들에 제시된 원칙들을 적용하는 방법 같은 분야에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엘렌 화잇 유산관리위원회의 세기 변환기적인 시도로 하버트 E. 더글라스의 주님의 사자가 출판되었다.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어서, 227)
5. 영감론에 관한 탐구:
1)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몇몇 사건들이 재림교회의 영감 이해에 영향을 끼쳤다. 그중 하나가 1958년에 그 주제에 관한 엘렌 화잇의 주요 진술들을 가려뽑은 기별 1권에 담아 발행한 것이었다. 재림교회 대중은 이제 영감의 주제에 대한 그녀의 중용적 입장과 사상영감 개념을 처음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상게서, 227)
2)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여러 경우들에서 교단은 영감의 주제와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방법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예를들어, 1984년에 북미지회와 대총회 성경연구소는 그 주제들에 관한 일련의 성경대회를 개최했다. 성경연구소는 이 대회들을 뒷받침하는 문서들로서 일련의 학술적 논문들을 발행하였는데 그 논문들은 성경해석학에 관한 심포지엄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텁게 편집된 책으로 출판되었다.
3) 권위와 해석학의 쟁점들은 모든 교회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결국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과 그런 입장들을 뒷받침하는 전제들이 그들의 다른 모든 결론들을 결정지을 것이다. 권위의 문제는 그 모든 발전 시기들을 통하여 재림교회에 중추적이었으며, 세상의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일 마귀가 권위의 문제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그는 전체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처럼 권위와 성경해석 원칙에 대한 재림교회의 입장은 교회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4) 재림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중 하나는 성경 내부로부터 연역적으로 전개시키는 성경적 영감의 주제에 관한 일단의 문헌이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그것이 자신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는지, 그것이 진술하는 어떤 형태의 자료들이 그 책을 만들어내는 데 투입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양한 범주의 정보들을 다루고 있는지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너무도 자주 많은 저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조직적인 방법으로 성경에 대한 주장을 내세운 다음, 그들의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간다. 그런 방법을 따를 때 그들은 성경적 권위의 강령에서 발걸음을 옮겨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강령에 올라탄 것이다. 근본주의의 큰 실수는 성경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허락하는 대신 그 자신의 무기로 합리주의와 싸우려한 것이었다. 이런 접근은 어떤 재림교인들에게는 시험거리가 됨이 드러났다. (상게서, 232)
6. 전망:
1) 현 시기는 재림교회의 모든 해묵은 문제들(즉, 무엇이 재림교회적인가? 기독교적인가? 그리고 근본주의적인가?)이 동시에 여기저기 퍼지고 있는 그런 시기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재림교회적인 재림교회를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한편,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인적 재림교회가 그 해답이라고 간주한다. 또 한편, 다른 사람들은 재림교회의 희망을 신실하게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정체성에 관한 이 같은 투쟁에서 재림교회를 계속 괴롭히는 신학적 양극화들이 발전되어 왔다.
2)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재림교회는 신학적 정밀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떤 개념을 표현하는 방식들의 변화이거나 아니면 신념의 변천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조사심판 혹은 재림 전 심판과 관계된 것이었다. 초기의 재림교회 사상은 심판을 하나님께서 신실하지 않았던 자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함께 한층 더 엄격한 어조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서는 하나님이 백성을 위하시며, 그분이 그들 편에 계시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왕국에 들여보내기를 원하신다는 개념에서 그 신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근간에 이르러서는 그 용어의 성경적 의미로서 재판관을 죄인들의 편에 서신 분으로, 그리고 심판은 그들이 구원하기에 안전하며, 하늘에서 행복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옹호로 묘사하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많은 재림교인들이 심판에 관하여 생각할 때 불확실성보다는 확신 혹은 보증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3 재림교회 신앙에서 계속 되고 있는 신학적 대화의 마지막 측면은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마지막 때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 논쟁점은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간직해야 한다고 재림교회가 주장해왔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 소망을 유지하느냐는 질문은 교회가 피할 수 없는 당면과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문제를 교회 전체의 탓으로 비난해왔다.
예컨대, 재림교회가 존스와 와그너의 기별을 받아들이기만 했더라면, 또는 교인들이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유의 완전을 나타낼 수 있었다면 그 끝은 이르러왔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재림교인들은 “시대의 징조들”에 의거하여 그 다음의 흥분거리를 찾는 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 반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종말론적 아드레날린을 가득 쌓아놓았다가 다시 떨어뜨리는 일을 반복했다. 대체적으로 좀 더 학자적 소질을 지닌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께서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질문함으로써 그 문제를 다루려고 애쓴다. 마태복음 25:31-46(마지막 심판의 이유)을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문맥 내에서 읽으면서 그들은 사회적 윤리와 기다리는 동안 가난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손을 뻗칠 교회의 책임에 점차로 더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회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모든 재림교인들에게 있어서 해결책은 서로 다르지만 문제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 교단의 창설자들도 동일한 문제, 즉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로서 우리는 신조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재림교인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상게서, 236).
♦ 적용하기
1. 나는 구원의 확신이 없
음을 한탄하고, 칭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화를 잊어버리고 조사심판을 부인하거나 혹은 성화와 완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칭의만이 우리의 의가 됨을 잊어버리지는 않습니까? 최근에 한국 재림교회에서 일어난 일의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논쟁이 되었던 이슈가 반복되어져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나는 주님의 입혀주시는 칭의 안에서 내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그분의 품성으로 변화되어져가는 과정, 즉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 나는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습니까? 엘렌 화잇의 글을 그 당시 상황과 문맥에 따라 살펴보고, 적절하게 원칙과 적용을 하고 있습니까?
3.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서 조사심판을 통해 온 우주 앞에서 내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그분의 은혜를 통해 용서받은 사람임을 드러내시는 복된 소식임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있습니까?
4.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재의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기도시간
1.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닫고 경험하도록
2. 성경을 보다 더 깊게 연구하고, 성경으로 성경을 증거하도록
3. 오늘 깨달은 내용과 함께 개인기도